붉은 광장을 배회하는 유령들
서구 언론들은 앞다퉈 스탈린의 컴백(Staline is back)을 선언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소비에트연방과 스탈린 숭배의 부활을 꾀한다는 것이다. 푸틴은 ‘인터넷 시대의 스탈린’으로 정의된다.(1) 그러나 크렘린에서 나오는 말들은 뉘앙스가 좀 다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푸틴 총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스탈린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언급한다(<이즈베스티야>, 2010년 5월 7일). 대통령 직속 인권위원회 위원장 미하일 페도토프는 비밀문서 공개를 결정함으로써 “전체주의에 작별을 고했다”(<인테르팍스>, 2011년 2월 1일). 사실상 1980년대 후반부터 심포지엄, 언론, TV 시리즈 등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연일 ‘폭로’돼왔다. 최근 크렘린은 1940년 스탈린의 카틴 대학살 책임을 인정했다. 자국 역사의 숨겨진 사실을 폭로하는 데 이토록 적극적인 예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과연 러시아인에게는 이 역사가 ‘자국’의 역사일까?
자국 역사 ‘폭로’에 열뜬 러시아
현재 러시아에서는 과거의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과거 지도자들의 공과를 둘러싸고 말과 상징의 싸움을 하고 있다. 붉은 광장에서 레닌의 주검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들린다. 자유주의 반대파들은 거리나 광장 이름에서 공산주의 ‘가해자들’의 이름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에 따르면, 그녀는 독일 내전의 책임자이자 테러리스트다.(2)
로자 룩셈부르크도 테러리스트
‘소비에트 시대’가 스탈린이라는 한 인물로 요약될 수는 없다. 73년간의 소비에트 역사에서 스탈린이 ‘군림한’ 기간은 25년에 불과하다. 스탈린이 사망하고 3년 후, 1953년 3월 5일 개최된 제20회 소비에트연방 공산당대회에서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는 공식적으로 스탈린의 범죄를 인정한다. 1961년 열린 제22회 당대회에서는 레닌 옆에 나란히 보존돼 있던 스탈린의 주검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1960년대 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한다. 스탈린 격하 움직임이 다시 활발해진 것은 1985년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에 오르면서부터다. 고르바초프는 볼셰비즘 및 10월 혁명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때부터 새로운 ‘애국주의’가 소비에트 전통을 대신하게 됐다.(3)
1961년 이후 스탈린의 고향 조지아의 고리시를 제외하고 스탈린 동상을 모두 철거했다. 지난해 6월, 조지아의 최고지도자 미하일 사카슈빌리는 아직 남아 있던 거대한 스탈린 동상과 독일 나치에 맞서 싸운 소비에트 영웅들(이 중에는 ‘비러시아인’들도 있다)을 기리는 쿠타이시 기념관의 철거도 지시한다(건물 폭파 과정에서 한 조지아 여성과 딸이 함께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우크라이나 자포르지아에서는 지난해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동상이 같은 해 12월 말 ‘반데라주의자들’(4)에 의해 폭파됐다. 그 밖에 기념물, 흉상, 박물관 등을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러시아 언론들은 공공장소에 스탈린 초상화와 소비에트 깃발이 재등장한다고 비판했다. 사실상 이 상징들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당원과 퇴역군인이었다. 지난해 5월, 전 모스크바 시장 유리 루슈코프는 제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행사를 위해 모스크바 시내에 ‘지도자’ 스탈린의 초상화를 내걸려고 했지만 정부 반대에 부딪혀 단념해야 했다. 그러나 루슈코프는 스탈린주의자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회고할 때 처칠 없는 영국, 드골 없는 파리 해방을 생각할 수 없듯이 스탈린 없는 소비에트연방의 승리는 모순이라는 일반적 상식을 따른 것일 뿐이다. 2007년 러시아 의회(두마)는 5월 9일 ‘승리의 날’ 기념 퍼레이드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비에트’ 깃발- 1945년 독일 제국의회 꼭대기에서 휘날리던 붉은 깃발- 에서 낫과 망치를 빼고 대신 흰색 별을 사용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당시 푸틴 대통령은 서명을 거절했다.
1990년대는 공산주의 비판 서적 출판의 전성시대였다. 스탈린뿐 아니라 레닌과 트로츠키도 ‘히틀러보다 더 나쁜’ 지도자로 언급될 정도였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교과서에 소개됐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스탈린을 옹호하는 흐름이 생겨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 교과서 안에 ‘굴락’에 대한 비판과 스탈린의 경영 능력과 국가 현대화 노력에 관한 내용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개최된 대규모 학회 겸 토론회에서는 교사들에게 여전히 개념조차 분명치 않은 ‘애국주의’를 권장했다.
소비에트 깃발에서 빠진 낫과 망치
이런 모순된 상황에서 2가지 경향이 충돌한다. 우선,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겐나디 주가노프가 이끄는 러시아 공산당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사회주의 건설과 1930년대의 산업화가 없었더라면 히틀러에 대항해 승리를 쟁취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교육, 문화, 보건 혁명, 평균수명 연장도 빠질 수 없는 주제다. 스탈린이 자행한 탄압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또한 부분적으로 정당화한다.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는 ‘제국주의’, 미국 정보부, ‘국제 시오니즘’, 고르바초프, 야코블레프, 옐친 등 ‘배신자들’ 때문이라는 음모론적 시각을 기꺼이 채택한다.(5)
다른 한쪽에는 이런 비판에 대항해, 보리스 옐친과 예고르 가이다르(급격한 사회주의 경제 해체를 위한 ‘충격요법’ 추진)를 ‘소련을 굶주림과 내전에서 구해낸 인물’로 치켜세우는 이들이 있다. 자유민주주의 성향으로 친정부 세력과 반정부 세력에 골고루 분포해 있다. 이들은 스탈린의 공포정치, 1932~33년의 기아(이를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식적으로 학살로 명명했다), 굴락,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솔제니친의 폭로 이후 드러난 희생자 수 등을 강조한다. 이들에 따르면, 독일에 대한 승리는 스탈린 덕분이 아니라 그가 잔인하고 무능했음에도 처음부터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게끔 부추겨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스탈린에게 있다고 말한다.(6) 독일군이 끌고 간 500만 명의 소련인 포로들은 어떨까? 그것도 물론 스탈린의 책임이다.
크렘린의 레닌 주검을 치워라
이 양극단 사이에는 몇 가지 모호한 경향이 존재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과거 역사에 대한 모순된 시각이 공존함을 보여준다. 소련을 건설하고 방어하기 위해 싸운 이들의 희생을 기리면서도 스탈린 탄압에는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각각의 시기에 어떤 구체적 경험을 했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기억이 엇갈린다. 서구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지역·건설현장·공장의 역사, 농부·노동자·군인·집단수용소 죄수들(Zeks)의 증언, 일기, 일상생활과 주민의식에 대한 연구 등이 그것이다. 이 증언들은 각각 다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때로는 뒤섞여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번영과 안정을 추구하던 1953~85년에 비해 과거 대변혁기에 대한 증언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처럼 ‘소비에트 시대’는 시기와 세대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고 있다.
또 다른 접근법도 존재한다. 과거를 힘의 손익이라는 관점으로만 평가하는 이른바 ‘지정학적’ 관점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스탈린은 범죄자이면서 동시에 천재적 정치가다. 1939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스탈린의 역할은 찬양과 비판이 배제된 관점에서 평가된다. 이런 냉정한 시각은 러시아의 현 정세와 영토, 국경, 역사적 위상, 사회 해체의 위험에 대해 고민하는 길을 열어주고, 정치적 쟁점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비밀문서 공개는 다양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가령 때맞춰 불거진 ‘스탈린 문제’는 반푸틴 전선을 분열시키는 데 이용되고 있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비싼 학비”
과거에 대한 논쟁 속에는 ‘러시아의 현대화’라는 화두가 자리잡고 있다. 친서방적, 유럽적, 자유주의적 관점-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발언에서 자주 등장한다- 은 중국이나 ‘유라시아적’ 방식, 즉 국가적 차원의 동원 경제에 반대한다. 어쨌든 글로벌 시장에서 러시아의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사회정책의 도입이 불가피하다. 이 정책들은 자유주의 지식인이 러시아인의 사고의 진전을 막는 ‘사회주의적 장벽’이라고 비판하는 기존 방식과 양립 할 수 없다.
크렘린에 전시된 레닌의 주검과 함께 소비에트 묘지를 없애자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러시아 자유민주당 당수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한 TV 토론회(<REN TV>, 2010년 5월 5일)에서 레닌을 절대 악의 화신으로 묘사했다. 이미 죽은 그의 주검을 여전히 붉은 광장에 모셔놓는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16살의 한 학생은 “‘옛 지도자’(레닌)에 대한 논쟁은 아무 의미 없으며,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이 훨씬 중요하다”고 일침을 놓았다. 사회자는 레닌의 주검을 옮기면 무엇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학생은 무상교육을 꿈꾸고 있는 걸까? 토론회에서 그런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글 · 장마리 쇼비에 Jean-Marie Chauvier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Libération>, 파리, 2010년 3월 3일자. <Le Figaro>, 파리, 2010년 4월 7일자. <Le Point>, 파리, 2007년 10월 11일자. <Time>, 뉴욕, 2009년 12월 22일자. <Forbes.com>, 2010년 3월 16일자. <Rossiaprofile.org>, 2010년 5월 14일.
(2) <Novaïa Gazeta>, 모스크바, 2011년 1월 24일.
(3) ‘소비에트에 대한 향수와 새로운 애국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3월호. ‘블라디미르 푸틴의 새로운 러시아’, 2007년 2월호 참조.
(4)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OUN)를 이끌던 스테탄 반데라의 추종자들.
(5) 친스탈린주의 사이트, http://stalinism.narod.ru 등에서 이런 주장을 펴고 있다.
(6) <Novaïa Gazeta>, 2010년 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