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글리에타 “국가의 진정한 부는 공적자본이다”

2020-05-29     미셸 아글리에타 | 파리-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조절학파의 창시자이자 가장 저명한 주류이론 비판자로 통하는 경제학자 미셸 아글리에타가 ‘계몽된 파국론’(Catastrophisme éclairé, 철학자 장피에르 뒤피가 사용한 표현으로 파국적 재앙의 발생을 확신하고 예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역주)에 기초한 위기탈출 해법을 제시한다. 그 해법이란 금융자본주의의 파멸적 힘에서 해방된 공공재 관리를 경제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셸 아글리에타는 프랑스 총리 산하 독립연구기관인 국제정보전망연구소(CEPII)에서 기술자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리 이공과대학(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이자, 파리-낭테르 대학 경제학과 명예교수이며, 학문적 업적이 탁월한 교수들을 지원하는 프랑스교수협회(IUF)의 회원인 그는 조절학파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장경제 운영에서 사회적 관계나 제도의 역할을 강조하며 주류경제이론인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이론에 대안이 될 만한 이론을 제시해왔다(『Régulation et crises du capitalisme자본주의의 조절과 위기』, Odile Jacob, 1997). 

1938년 출생한 미셸 아글리에타는 그동안 미국 자본주의의 조절방식(1974년 논문주제)과 금융위기(『Crise et rénovation de la finance 위기와 금융혁신』, 상드라 리고 공저, Odile Jacob, 2009), 중국식 모델(『La Voie chinoise. Capitalisme et empire 중국의 길. 자본주의와 제국』, 궈바이 Guo Bai 공저, Odile Jacob, 2012)에 대해 연구해왔으며 마지막으로 유럽통합의 변천과정(『Europe. Sortir de la crise et inventer l'avenir유럽. 위기 탈출과 미래 창조』, Michalon, 2014)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앙드레 오를레앙과 함께 화폐이론(『La Monnaie : entre violence et confiance 화폐 : 폭력과 신뢰 사이』, Odile Jacob, 2002)에 관한 책도 다수 저술했다. 

최근 기획한 저서 『Capitalisme. Le temps des Ruptures 자본주의. 단절의 시대』(Odile Jacob, 2019)에서, 미셸 아글리에타와 공저자들은 지속가능하고 민주적인 공공재 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오늘날 금융, 양극화, 환경파괴 등으로 망가진 자본주의를 조절할 새로운 방법을 마련하기 위한 각종 개념과 길을 제시했다.

 

-선진국의 정부와 중앙은행은 현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긴급히 기업, 가계, 금융부문에 대해 모든 종류의 예산 및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대부분의 지원책은 지난 위기 때의 해법을 재활용한 것인데, 과연 현 위기의 특수성을 잘 반영할 수 있겠는가?

 

“현 상황의 특수성을 꼽으라면 각국 정부가 보건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경제가동을 멈추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향후 경제 재가동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40년간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교리와 달리 예산정책과 통화정책의 완벽한 공조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신속하게 의료자원의 부족난을 해소하고, 최소한의 경제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는 곧바로 두 가지 결과로 귀결된다. 첫째, 국가채무의 급증을 피할 수 없다. 둘째, 국채발행 비용을 최대한 경감하고, 경기침체로 인한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 금리 인하를 단행해야 한다.

각국이 현재 과잉대응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팬데믹 위기에 대한 예방책이 그동안 전무했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2013년 에볼라 등 수차례 경고음이 울렸다. 그럼에도 선진국들은 우리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방관했다. 사실 선진국이 이런 극단적 위기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놓인 데는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주류이론인 신자유주의 이론에 포섭돼 공공재에 개념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념은 이른바 자율규제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간주되는 시장경제를 전제로 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국가는 걸림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국가는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선에서만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흔히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가치사슬 안에서 모든 수단을 강구해 어떻게든 경쟁력을 높이라고 요구한다. 오로지 금리소득에 기초한 자본의 집중을 통해 금융 수익성을 강화하는 것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단체교섭권 약화, 노동자 근로조건 악화 등 노동자의 권익이 침해당하며, 사회적 불평등 또한 심화된다.

경제·금융·정보의 세계화는 전 세계를 연결하는 수많은 네트워크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연결의 증가는 취약성을 부른다. 바이러스는 생태계 악화가 만들어낸 병원체에 속한다. 가령 초단타 매매에 동원되는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인터넷 바이러스나, 유동성 도매시장을 마비시키는 모방심리라는 심리적 차원의 바이러스가 그와 유사하다. 한편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변이를 거듭하기에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철학자 장피에르 뒤퓌가 ‘계몽된 파국론’(catastrophisme éclairé) (『Pour un catastrophisme éclairé. Quand l'impossible est certain. 계몽된 파국론을 위해. 불가능이 확실해질 때』, Seuil, 2004)이란 표현을 빌려 주장한 것과 같이 우리 모두가 파국적 재앙을 확실히 직시하고 이를 막기 위해 대응책을 모색할 때, 비로소 신속한 공조를 통한 문제해결이 가능해진다. 에너지, 보건, 기후, 교통인프라 등 어떤 분야에서든 합리적인 예방원칙에 따라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충분하게 마련해놓아야 위기 상황이 발생해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보건 등 여러 분야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투자 비율은 꾸준히 감소해왔다(이탈리아의 교량들이 붕괴된 사건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는 2015년 9월, 당시 영란은행 총재였던 캐나다 출신의 경제학자 마크 카니가 ‘지평선의 비극’(tragedy of the horizon, 기후변화 문제가 금융안전 문제로 이어지는 시점에는 대응하기에 너무 늦었다는 관점을 설명하는 용어-역주)을 들어 비판했던 문제를 상기시킨다.”

 

팬데믹 위기 장기화와 제2의 사태 가능성

-앞으로 위기는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하는가? 예측가능한 경제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국제통화기금(IMF)은 2020년 하반기 팬데믹 위기가 종결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기본 시나리오를 마련했다.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약 -3%의 경기후퇴가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된다. 선진국은 -6.1%로 경기후퇴가 더욱 심각할 것으로 본다. 특히 유럽이 직격탄을 맞을 것인데, 가령 독일은 -7%, 프랑스는 -7.2%, 스페인은 -8%, 이탈리아는 -9.1%의 경제후퇴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2021년의 상황은 상당히 불투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 시나리오의 가설은 너무 낙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비교적 조기에 팬데믹 위기가 종결될 것으로 보는 한편, 2차 재발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따라서 기존의 시나리오 보다 조금 더 비관적인 상황을 가정한 세 가지 대안 시나리오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첫째, 모든 나라에서 팬데믹 위기가 장기화되고 제한조치도 지속되는 경우다. 둘째, 비록 정도는 덜하지만 2021년 제2의 팬데믹 사태가 재발하는 경우다. 마지막으로 2020년 내내 팬데믹 위기가 지속된 뒤 이어 2021년 또 다시 제2의 사태가 재발해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경우다. 이에 의하면 2020~2021년 시기 동안, 위기를 완전히 해소하기는 힘들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2019~2021년 전 세계 모든 선진국에서 국내총생산(GDP) 수치가 위기 전 기본 시나리오의 전망치보다 2% 가량 더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최악의 경우, 10%나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적절한 위기 해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현재 발생한 보건·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기적’ 전략과 특히 기후위기 등 향후 발생할 각종 위기에 대한 대응력을 더욱 높이기 위한 ‘장기적’ 전략에 대해 조언해 달라.

 

“국민들은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잘 준수했다. 앞으로도 정부는 있는 그대로 현실을 정직하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금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명확한 전략적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정부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현 팬데믹 사태가 기후변화로 인한 생물다양성 파괴에서 비롯된 생태적 위기이며, 파리기후협약에 규정된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를 계속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시민들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국가 기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나라에서는 국가가 앞장서서 현 팬데믹 위기로 사회적 양극화가 한층 더 심화돼 언제든 사회적 결속이 와해될 위험이 상존한다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정치 지도자들은 파리기후협약의 규정을 잠시 유예하자는 기업 및 금융계 로비세력의 요구를 물리쳐야 할 윤리적 책무가 있다. 사실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현재로서는 기후협약을 조속히 이행하고 더욱 강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직원 500명 이상 규모의 기업이 저탄소 투자를 약속하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로도 국가지원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계몽된 파국론’에 의거해 생각한다면 이제 위급한 환경문제를 정치공론화해야 한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기후고등위원회가 위기해법을 위한 권고안을 발표하는 등 환경문제를 정치공론화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재정건전성은 부채 비용과 관련

-국가채무 증가를 우려해야 할까? 재정건전성은 유지될 수 있을까?

 

“재정건전성은 부채 규모와는 무관하며 부채 비용과 관련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재정건전성은 국채의 할인율(돈의 가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플레이션 등에 의해 변화되는데, 할인율이란 미래의 가치를 현재의 가치와 같게 하는 비율-역주)에 의해 좌우된다. 다시 말해 실질 국채금리와 경제성장률의 차이가 재정건전성을 좌우한다. 

가령 일본의 경우를 보자. 일본은 국채 규모가 세계 최고인데도 불구하고(2019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238%), 재정건전성이 매우 우수하다. 국채금리가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상 일본의 중앙은행은 국채금리 변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장기금리에 집중하는 전략을 편다. (인플레이션이 반영된) 명목성장률(명목, 즉 시가로 계측한 국민경제의 성장률-역주)이 국채금리 보다 더 높다면, 재정건전성이 유지된다. 그러면 기초재정수지(국채 원금지급과 이자비용을 제외한 재정수지)의 관리도 가능해지기 때문에 공공부문에 재정을 투입함으로써 경제성장을 떠받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말 중요한 문제는 누가 국채를 보유하는가다. 국채는 무엇보다 자국의 통화로 발행돼, 자국에 소재하는 금융기관이 보유할 필요가 있다. 가령 일본에서는 우체국, 국부펀드, 대형투자기관 등이 자국의 국채를 보유한다. 더욱이 중앙은행이 자국 통화표시 국채를 보유한다면 국채에 대한 이자소득이 다시 국고로 귀속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정 주권국이 동일 주권에 속하는 통화로 채권을 발행한다면, 이 국채는 그 어떤 민간채권 보다 우량하다고 간주될 수 있다. 반면 국채를 외국통화로 발행하거나 혹은 국채발행 국가의 기능이 마비돼버리는 경우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이 경우 해당 국가의 거주자들이 통화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재가동하기 위해 실시하는 재정지원프로그램은 결국 필연적으로 국채발행을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 이렇게 늘어난 국채는 중앙은행이 대대적으로 매입해야 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이미 무제한 국채매입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국채의 화폐화(중앙은행이 화폐발행을 통해 정부의 부채나 재정적자를 해소해주는 것을 의미-역주)는 통화정책의 정상적인 운용방식에 해당한다. 문제는 화폐화 자체가 아니라 화폐화 정책을 실행하는 동안 나타나는 특수한 상황이다.

일본의 경우처럼 만일 국채금리가 제로에 가깝다면 이는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유동성과 동일해진다. 위기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는 완벽하게 국채를 대체한다. 문제는 이후의 상황이다. 중앙은행이 거시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금리인상을 단행해야 하는 경우 문제는 복잡해진다. 재정건전성을 위해 국채를 화폐화하는 정책이 통화정책의 거시경제적 목표와 상반되는 순간 어찌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령 인플레이션이 국채의 실질 가치를 낮춰주고 있는 상황인데 거시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을 단행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그런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전망된다. 사실 인플레이션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해왔다. 또한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통합재정(Consolidation)을 실시해 단기부채를 장기부채로 전환할 수도 있다. 즉, 정부와 중앙은행이 공조해 생태적 시급성에 기반한 신(新)성장시스템을 추진해나간다면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성이 부여되는 공공재 개발전략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달리, 시민들이 통화에 대한 신뢰를 잃는 것이 유로존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사실 유로존에서는 각 회원국과는 독립된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고 있으며, 회원국 중 일부만 파산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유로존의 경우 각 회원국이 개별적으로 국가채무를 지기 때문에 재정적자는 나라별로 다르다. 2020년 이탈리아의 재정적자는 8.3%를 기록한 반면, 독일은 5.5%에 그쳤다. 두 나라의 국가채무 비율도 각기 국내총생산(GDP) 대비 155.5%와 68.7%를 기록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나 일본은행의 경우와 동일한 화폐화 정책을 따르기 위해서는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전체 회원국의 중앙은행으로서 운영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전략에 족쇄로 작용했던 것이 ‘유럽안정성장협약’(유럽의 역내 경제안정을 위해 재정수지를 GDP의 3%로 제한하도록 명시한 협정-역주)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 족쇄가 제거됐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정책적 유연성을 허용하는 7,500억 유로 규모의 팬데믹 긴급매입프로그램(PEPP)이 도입된 것이다. 더욱이 유럽중앙은행(ECB)이 매입 규모를 늘리지 못할 이유도 전혀 없다. 유럽연합법에 의하면 개별 회원국은 유럽중앙은행에 대해 어떤 권한도 없다. 독일의 헌법재판소가 내세운 ‘국가부채는 해로운 것이며, 중앙은행이 통화규범을 결정해야 한다’는 식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 원칙은, 정치적 차원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채무의 건전성을 결정하는 것은 부채 규모가 아니라 부채 비용이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만일 이탈리아가 2010년 그리스의 경우와 비슷한 재정위기에 처한다면, 아마도 국채 매입 규모는 필요한 경우 2조 유로에까지 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럽중앙은행(ECB)은 두 번 다시, 심각한 경기침체 상황에서 재정조건을 까다롭게 규정하는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국간 통합재정 조건이 현실화된다면, 그리고 파리기후협약 실행을 신성장시스템의 동력으로 삼게 된다면, 이 신성장시스템의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유로본드 도입을 추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통합재정의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국내총생산(GDP) 대비 채무비율은 무엇보다도 재량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최적의 국가채무 수준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공부문, 다시 말해 한 나라의 모든 공공기관도 다른 모든 경제주체와 마찬가지로 연결재무상태표(연결대차대조표라고도 하며, 모회사의 자산·부채·자본에 모회사가 지배하는 자회사의 자산·부채·자본을 종합해 작성한 대차대조표를 의미한다-역주)란 것을 지니기 마련이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GDP 대비 채무비율이 아니다. 해당국의 연결재무상태표의 차변에 공공부문의 순가치가 얼마인가의 문제다. 이는 민간주체로 따지자면 자기자본에 해당하는 수치다. 공공부문의 순가치가 플러스인 경우, 국가채무가 건전하다고 볼 수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최선의 재정통합 방법은 지속가능한 성장에 유익한 공공인프라에 재정을 투자하는 것이다. 즉,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는 저탄소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면 조세수입을 창출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국가채무를 줄여나갈 수 있다.

국가의 진정한 부는 공적자본, 다시 말해 한 나라가 갖추고 있는 공유재산시스템이다. 그것만이 한 사회를 구성하는 성인들이 일평생 세금으로 사회부채를 갚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다. 바로 공공재 개발전략이야말로 재정건전성과 더불어 공공부문을 양의 순가치(Positive net value)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장기적으로는 경기주기에 따라 재정시스템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크레마티스티케’는 국가 멸망의 위기

-현재 전 세계 정부와 중앙은행들은 ‘비용이 얼마가 됐든’ 수조 유로 혹은 수조 달러까지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 말에 시민들이 기대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 마법의 돈’의 출처에 대해 의혹을 품거나, 돈의 본질에 대해 회의를 품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찌감치 돈이 공동체에 대한 소속관계를 상징한다고 봤다. 화폐는 일종의 시스템, 다시 말해 지불시스템으로, 사회적 관계를 구축한다. 이 지불시스템은 모두 세 가지 규율에 따라 기능한다. 첫째, 모든 교환물(재화나 서비스)에 대해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계산단위를 구성한다. 둘째, 청산 가능한 채무, 즉 제3자도 수용할 수 있는 채무를 발행한다. 셋째, 지불이 지닌 목적, 다시 말해 가치의 실현을 보장하는 채무의 보상 및 결제기능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화폐는 재화가 아닌 일종의 규율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유용성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며, 추상적인 균형상태가 아닌, 명백한 교환제도에 의해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크레마티스티케(Chrematistike, 가정이나 국가를 경영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의미하는 ‘에코노미아’와 달리 자신의 이익만을 획득하는 기술을 뜻하는 용어-역주), 즉 재물을 획득하는 기술이 돈을 획득하는 기술 즉 ‘돈으로 돈을 만드는 기술’로 전락하는 순간, 곧 국가는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통화질서와 정치질서는 한쌍을 이룬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주권원칙 하에 동일한 사회적 결속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권이라는 헌법질서는 국가에는 공권력을, 중앙은행에는 만인이 인정하는 ‘유동성 발행주체’라는 권한을 부여한다. 추상적인 차원에서 화폐는 일종의 언어다. 타인을 위해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공동체는 개인을 존재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둘의 기본적인 소속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화폐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가치’라고 불리는 ‘숫자언어(Langage du nombre)’이며, 이 숫자언어의 문법이 바로 회계다. 따라서 화폐는 상업사회의 사회적 관계를 관장하는 기본제도다. 즉, 사회가 각자의 활동이 사회에 공헌했다고 인정하는 만큼 그 몫을 되돌려주는 데 사용되는 수단이 바로 화폐인 것이다.”  

 

 

글·미셸 아글리에타 Michel Aglietta
파리-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정리·앙투안 르베르숑  
*이 글은 <르몽드> 2020년 5월18일자에 게재된 것임.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아글리에타의 화폐 및 주권이론

 

‘부의 원천으로서의 공공재’를 강조하는 아글리에타의 관점은, 화폐를 ‘사회적 관계’로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에게 화폐란 금융을 글로벌 위기로 이끌었던 동시에, 자본주의 이전 교환의 질서를 재확립하는 ‘양면성(Ambivalence)’을 지닌 핵심개념이다. 아글리에타가 화폐를 ‘사회 구성원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숫자언어’나, ‘법적 원리에 기반한 사회적 계약’으로 정의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 바탕을 둔다.

그가 생각하는 금융자본주의의 모순은 공공재임에도 사적 전유가 가능한 화폐 내부의 모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코노미아’와 ‘크레마티스티케’간의 모순이 현대적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당연히, 아글리에타는 화폐중립성이나 금융효율성 가설에 입각해 현대의 위기를 설명하려다가 끝내 파산한 주류경제학적 사고를 단호히 거부한다. 

금융위기는 금융자산의 구조와 그에 상응하는 부채를 신뢰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왜곡된 교환관계를 회복하려면 화폐는 공공재가 돼야 하며, 그 메커니즘이 바로 ‘국채의 화폐화’다. 그러나 재정운용 권한이 부르주아 국가에 위임된 자본주의 하에서 국채의 화폐화가 가능할 것인가? 여기서 아글리에타는 형식적 국가와 구별되는 ‘주권’ 개념을 호명한다. 화폐는 주권의 영역 내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때 비로소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직조된, 그리고 금융화 과정에서 상실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1. 윤리적 신뢰(ethical confidence) : 시민의 권리와 의무 집합으로서의 화폐 질서

2. 위계적 신뢰(hierarchical confidence) : 지불시스템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공적 제도

3. 체계적 신뢰(methodical confidence) : 개인이 선택하는 일상성에 기초한 신뢰 

 

결국 화폐란 주권에 기반한 사회체계다. 따라서 국가별로 다른 신뢰 체계를 파악하려면 부채(Debt)가 주권과 맺는 특유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화폐에 대한 신뢰는 그에 내재된 양면성 중 위기의 요인(부정적 측면)을 제거하는 암묵적 제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주체들에게 그들이 지불시스템의 규칙과 그 장점을 인식할 수 있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이는 ‘공공재로서의 화폐’를 사회에 각인하는 과정이며, 사회 구성원들에게 최종 대부자로서 유동성을 발행 및 규제하는 중앙은행의 적법성을 인식시키는 사회적 규범의 작동 문제다. 

민간부채와 다른 공공부채(사상 초유의 규모로 누적 중인)의 해결이 거의 모든 국가의 사활과 직결되는 현재 국면에서 공공재정의 향방은 결정적으로 중요해졌다. 최종 대부자인 중앙은행이 과연 아글리에타가 조언한 바대로 운용의 묘(妙)를 살릴 수 있을지, 나아가 시장 인센티브에 의해 생산된 자본 형태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보건 및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글· 배인철 

독립연구자, 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