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의료시스템, 시험대에 오르다

2020-05-29     에스텔 레브레스 | 기자

러시아는 전염병을 퇴치했던 경험과 높은 병원 수용력으로 코로나 확산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감춰진 뿌리 깊은 의료불평등 문제는 5월 초 코로나 감염 폭증으로 드러났다. 결국 그 대가는 러시아 국민이 치르게 됐다.

 

아름다운 로제스트벤스키 가로수길이 텅 비었다. 접근을 막는 울타리 뒤편으로 모스크바 시 직원이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들고 자갈돌이 깔린 거리의 쓰레기를 줍는다. 몇 미터 떨어진 벤치에는 동료 한 명이 앉아서 쉬고 있다. 올해는 봄을 알리는 수천 송이의 튤립 화단을 볼 수 있는 이들은 형광빛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모스크바 시 청소팀원들 뿐이다. 활기가 넘쳐흐르던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가 2020년 4월에 잠든 도시로 변했다. 상점, 레스토랑, 카페는 문을 닫고 공공장소와 공원도 빗장을 굳게 걸었다. 장을 보거나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행인만 가끔 보일 뿐, 3월 30일부터 격리조치가 시작된 인구 120만 명의 대도시는 놀랄 만큼 고요하다. 

특히 거리에 노인과 아동이 없다는 사실이 낯설다. 이들은 ‘다차(러시아의 여름별장)’에 들리는 경우 외에는 외출이 금지됐다.(1) 러시아는 코로나바이러스 위협을 막고자 초기부터 보호조치를 단행했다. 1월 30일, 중국과 접한 국경을 봉쇄한 데 이어 중국인 입국을 금지시키고, 위험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격리시켰다. 학교에는 매일 학생들의 체온을 측정하도록 지시했으며, 공공장소도 열심히 방역했다. 그 결과 바이러스 상륙을 몇 주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는 결국 러시아 전역에 퍼지고 말았다. 5월 초에는 노동절을 포함한 연휴기간 약 3만 1,000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폭발적인 확산세를 보였다. 노동절 전날에는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가 감염돼 입원했고, 연달아 건설부 장관과 차관도 감염된 사실이 알려졌다. 5월 4일에는 감염자 14만 5,000명, 사망자 1,356명에 이르렀다.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은 자국보다 감염자 수가 적게 나온 러시아 통계발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러시아의 코로나 진단검사는 위음성률(실제 양성인데 음성으로 오판되는 비율)이 20~30%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신뢰도가 낮은 편은 아니다. 게다가 4월 초 보건부 장관이 예방 프로토콜을 변경해, 폐렴 증세가 있는 모든 환자를 코로나 진단검사에서 음성이 나와도 예방차원에서 감염자 명단에 포함시켜 추적 조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진료 시에 폐의 방사선 사진을 찍도록 권고하고 있다. 

 

러시아의 전염병 퇴치 역사

하지만 코로나 감염이 폭증했을 때, 러시아 의료시설이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러시아의 전염병 퇴치 역사를 보면 지금과 같은 발 빠른 대처를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은 1918년 보건인민위원회(Narkomzdrav) 창설과 함께 시작됐다. 니콜라이 세마쉬코 의사의 진두지휘 아래 보건인민위원회는 전 세계 최초로 국가차원의 보편적 무상 의료시스템을 발전시켰다.(2) 

시스템의 첫 단추였던 지역종합병원은 통상질환을 앓는 환자를 대상으로 외래진료를 제공하고, 다른 의료기관들과의 연계를 공고히 했다. 일종의 진료소 역할을 수행하며 일반의와 전문의(이비인후과, 비뇨기과, 치과)가 진료했다. “지역 중심 의료시스템 덕분에 의료서비스 제공자는 환자의 노동환경 및 생활 환경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지역병원 의사는 ‘동네’ 의사이자 가족주치의다”라고 세마쉬코는 서술했다.(3) 세마쉬코는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의료시스템의 기반으로 삼는 가정의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전염병 예방에 대해서도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다. 1922년, SANEPID(보건 및 유행병 감시기구)가 창설되고, 작은 마을부터 기업까지 전국적으로 관리하는 대책본부가 꾸려졌다.(4) 소련은 SANEPID를 통해 집단예방접종을 한 덕분에 결핵, 말라리아 등의 질병을 퇴치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 31세였던 러시아의 평균수명은 1960년대 69세로 연장되는 등 서구를 따라잡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좋은 성적에 기여한 요소들

오늘날 로스포트레브나드조르(Rospotrebnadzor, 소비자권리 보호 및 인간복지 관리청)이 SANEPID의 뒤를 잇고 있다. 보건부와 매일 연락을 취하되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기관으로, 코로나바이러스 퇴치 전략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러시아 피로고프 의과대학 소아감염내과 연구원인 이반 코노발로프는 로스포트레브나드조르가 병원의 부담을 덜어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격감시와 연령차별이 광범위하게 자행된 것도 사실이다.(5) 

3월 23일 모스크바 시장은 만성질환을 앓는 65세 이상 고령자에게 자가격리를 의무화하는 명령을 발동했다. 그 결과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의 85%가 65세 미만이었고, 그만큼 중증환자 발생률도 줄었다. 4월 24일 러시아는 코로나 치사율이 세계 최하위인 0.9%라고 자축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평균수명이 짧다는(따라서 고령자 수가 적다는) 사실을 감안 할 필요가 있다. 평균수명이 72세, 남성의 평균수명은 67.6세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대규모 진단검사 전략 또한 좋은 성적을 내는데 일조했다. 4월 24일 로스포트레브나드조르가 실시한 코로나 검사건수가 250만 건이 넘으면서 세계 2위로 올라섰다. 이 정책 덕분에 환자를 격리 및 치료하기가 수월했으며, 경증환자 비율도 높아져서 바이러스 사망률을 낮출 수 있었다. 

병원 수용력은 소련 시절에도 높았다. GDP대비 보건지출 비중이 OECD 평균 6.5%, 러시아는 3.5%에 불과함에도 이런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배경으로 1960년대에 대폭 늘린 병상 수를 들 수 있다. 그 시절 소련의 보건시스템은 1차 의료를 무시하고 병원만 우선시하기 시작했다. 심혈관 질환과 암 환자가 급증했지만, 값비싼 기술에 대한 투자 미비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65~1974년 평균수명이 3년 감소했다. 러시아 의료시스템 전문가인 미국인 주디스 트위그는 “목표량을 채우겠다는 일념 하에 병상 수를 최대한 늘리고 환자를 가능한 오래 입원시키는 분위기였다. 혁신과 질은 무시하고, 오직 양을 늘리는 데만 몰두했다”라고 말했다. 세마쉬코 시스템의 저력인 ‘예방’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의료기관이 급격히 감소했음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세계적으로 병상 수가 많은 나라에 속한다. 2000~2015년 병원 수는 반토막났고, 인구 1만 명당 병상 수는 1/4로 줄었다.(6) 그런데 OECD에 의하면 인구 1,000명당 병상 수가 프랑스는 6개, 미국은 2.8개인데 반해 러시아는 8.1개에 육박한다. 이런 병원 수용력은 팬데믹 상황에 기회로 작용한다. 게다가 다행히도 인공호흡기는 많은 편이다. 러시아 보건당국은 약 4만 개로 추산하고 있다.(7)

 

57%가 자가치료, 부자들은 민간병원으로

하지만 서류상 수치 이면에는 완전히 다른 현실이 감춰져 있다. 의료시스템은 1990년대에 붕괴된 이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다. 경제, 사회상황이 심하게 악화되면서 결핵 등 사라진 줄 알았던 전염병이 재발하기 시작했다. 1993년 노동계약에 의료보험가입(2020년 기준 임금의 5.1%)을 의무화하면서 의료시스템이 차츰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신 의료불평등이 심화됐다. 일반진료와 입원은 여전히 무료지만, 약값은 유료다. 

지역 간 의료불평등도 심화됐다. 2000년대에 지출을 최적화할 목적으로 시행된 재건축 사업은 지방병원의 문을 닫고 대도시에 최첨단 시설을 세우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의료설비와 약품 부족, 낙후된 의료장비, 최저임금에 관한 간호사들의 증언이 SNS에 넘쳐난다. 2019년 의사 노조연합의 지지를 받아 여러 도시에서 파업과 집단 사직이 발생했다. 8월 말 조지아 국경 부근의 퍄티고르스크에 있는 한 병원에서는 외상외과 의사 전원이 집단 사직하는 일도 있었다. 

분노는 지방에서만 분출된 것이 아니다. 수도로부터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인구 수만 명의 도시 타루사에서는 간호사들이 일회용 수술복, 소독약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부족하다. 주디스 트위그는 “인공호흡기를 환자에게 장착하려면 실력 있는 의사뿐 아니라 마취과 의사, 임상병리사 특히 응급전문간호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러시아가 그런 재원을 갖췄는지는 미지수다”라고 지적했다. 

러시아 의료시스템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충격을 견뎌낸다 해도 구조적 문제들은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1차 의료서비스를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지역병원 의사 수는 2005년 7만 3,200명에서 2016년 6만 900명으로 줄었다.(8) 전체 의사 중 일반의 비중은 2017년에 OECD 평균이 33%인데 반해 러시아는 13%에 불과했다.(9) 러시아 국민은 공공병원 치료를 포기했다. 2019년 8월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인구의 절반 이상(57%)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자가치료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10)

부자들은 한창 성장세인 민간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형 의료기업인 MD메디컬 그룹은 2006년에 모스크바에 첫 번째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하는 등 대도시 중산층을 겨냥한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의무적 의료보험 부문에서도 민간병원 비중이 2013년 16%에서 2016년 29%로 늘어났다. 메드시 그룹의 연간 진료 건수는 800만 건을 넘어섰으며, 2020년에는 수도에 연면적 3만 4,000제곱미터의 다기능 센터를 오픈할 예정이다.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HSE) 연구원인 이고르 쉐이먼은 몇 년 전부터 의료접근성과 종합병원 중심의 ‘세마쉬코식’ 시스템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해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책의 방향은 그와 다르다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눈에는 2019~2024년 국가핵심사업 13부문 중 하나인 보건사업에서 1차 의료 현대화에 배정된 5,500억 루블(약 9조 4,270억 원)의 예산금도 부족해 보이는데 설상가상 국가사업 자금마저 삭감될 위기에 놓여있다. 

루블 안정화에 집착하는 러시아는 재정적자를 늘리지 않기 위해 국부펀드를 조금씩 조달해서 비상조치자금으로 쓰고 있다. 국가발전은? 일단 미루고 보자는 듯하다.  

 

 

글·에스텔 레브레스 Estelle Levresse
기자 

번역·이보미 lee_bomi@hotmail.com
번역위원


(1) Christophe Trontin, ‘Une histoire de la datcha 러시아 다차의 역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8월호, 한국어판 2019년 10월호. 
(2),(3) Vladimir A. Reshetnikov, Natalia V. Ekkert, Lorenzo Capasso, et al., ‘The history of public healthcare in Russia’, <Medicina historica>, vol. 3, n°1, 2019년.
(4) Roger I. Glass, ‘The Sanepid service in the USSR’, <Public Health Reports>, vol. 91, n°2, 1976년.
(5) Félix Tréguer, ‘Urgence sanitaire, réponse sécuritaire(한국어판 제목: 기술만능주의는 만병통치약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0년 5월호.
(6) ‘L’optimisation du système de santé russe en action’, <Centre des réformes économiques et politiques>, 2017년 5월 17일 온라인에 공개된 러시아어 보고서. 
(7) <Ria Novosti>, 2020년 3월 17일.
(8) Igor Sheiman, ‘Priorité aux soins médicaux et sanitaires primaires : déclaration de principe ou réalité(러시아어)’, <Aspects sociaux de la santé de la population> (온라인 잡지, http://vestnik.mednet.ru/content/view/1043/30/lang,ru/), vol. 65, n°1, 2019년. 
(9) ‘Health at a Glance’, OECD Indicators, 2019년. 
(10) <Tass통신>, 2019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