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손아귀에 예속된 미주기구

미 ‘식민 지부’의 귀환

2020-05-29     기욤 롱 | 전 에콰도르 외무장관

지난 3월 20일, 루이스 알마그로가 미주기구(OAS) 사무총장 연임에 성공했다. 이로써 수년간 이어진 라틴아메리카 내 냉전 기류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루과이 외무장관 출신인 알마그로는 2015년 미주기구 사령탑에 오른 이후, 미국이 역내 헤게모니를 회복하는 일에 물심양면으로 앞장서고 있다.

 

미주기구(OAS)는 미소 간 냉전이 극에 달한 1948년 창설됐다. 미국은 이 기구를 역내 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널리 활용했다. 미주기구에는 라틴아메리카뿐 아니라, 1960~1980년대에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카리브해 국가들이 속속 합류했다. 캐나다는 1991년에 이르러서야 회원국 명단에 올랐는데, 대개는 백악관보다 한층 온건한 노선을 표방하곤 했다.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좌파세력은 미주기구를 ‘미국의 식민 지부’(1)로 간주했다. 반면, 기득권층은 신줏단지 모시듯 미주기구를 떠받들었다.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들은 대개 자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 인사를 미주기구 주재 대사로 파견했다. 미주기구 사무총장의 정치적 비중 또한 크게 뒀다. 반면, 미국에서는 정치 기득권층도 미주기구나 미주기구 사무총장을 낮춰보는 경향이 강했다.

미주기구 상임이사회 건물은 백악관에서 불과 몇백 미터 거리에 위치한다. 철강왕 카네기가 미주기구의 전신인 범미연맹에 기증한 대리석 건물이다. 1940년대 말, 미국은 글로벌 다자주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나섰다. 국제연합(UN)은 뉴욕에, 미주기구(OAS)는 워싱턴에 소재지를 마련했다. 미국은 헤게모니의 분산을 널리 표방하면서도, 정작 국제기구의 소재지를 변두리 국가에 내어주는 아량을 보이지는 못했다.

 

공산주의는 축출, 독재정권은 좌시

미주기구는 1942년 설립된 미주국방위원회(IADB)나 1947년 체결된 미주상호방위조약(일명 리우조약) 등 전적인 안보기구와는 별개로 부차적 역할만 담당했다. 참고로 당시 미주상호방위조약은 어떤 역내 국가에 대한 공격도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는 소련을 향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그러다가 미주기구의 선결과제는 점차 ‘미주지역 내 다자주의 체제’ 구축으로 옮겨갔다. 

미주기구가 가장 중요시한 시대적 과제는 미 정부와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기득권층이 한마음 한뜻으로 반공주의 노선을 표방한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었다. 1962년 미주기구는 “회원국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는 것은 미주기구 체제에 부합하지 않는다”(2)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쿠바의 회원국 자격을 박탈했다. 반면, 라틴아메리카 내 어떤 독재정권도 미주기구에서 축출당하지 않았다. 미주인권위원회(IACHR)가 탄탄한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1970년대 여러 독재정권이 자행한 잔혹 행위를 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들은 때로는 상임이사회에서 과반여론을 형성하여 미국을 규탄하는 공동 행보에 나서기도 했다. 가령 1960년대 말 미국과 페루, 에콰도르 간 해상영유권 분쟁이나 1982년 포클랜드(말비나스) 전쟁, 1989~1990년 미국의 파나마 침공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미국은 회원국들이 통과시킨 결의안을 무시하며 서슴없이 독자적 행동에 나섰다.

냉전 종식은 미주기구를 실존적 위기에 빠뜨렸다. 1980년대 민주화 물결은 미국이 미주기구에 물려놓은 재갈을 벗겼다. 미국의 강압 아래 독재정권의 만행을 묵인해왔던 미주기구는 소련 붕괴 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규범 수호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역내 국가들이 공정한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선거 감시 역할을 하는 새로운 기구로 거듭났다. 1962년 코스타리카를 대상으로 처음 시작한 선거 감시는 새롭게 변모한 미주기구의 주요 역할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로드맵만으로 미주기구가 무대 중심에 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국은 워싱턴 컨센서스와 거기서 실시하는 각종 구조조정프로그램을 회원국들에 강제하는 일에 혈안이 돼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라틴아메리카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쪽은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IDB)이었다.

한편, 미주기구는 식민지 독립 이후 설정된 국경선을 둘러싼 회원국 간 분쟁 등 역내 분쟁의 중재자 역할 수행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84년 비글해협을 둘러싼 칠레와 아르헨티나 간 분쟁, 1998년 에콰도르와 페루의 협정체결에서도 미주기구는 전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200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세력이 줄줄이 집권하면서 미주체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도 다소 줄어들었다. 2005년 미주기구 역사상 최초로 워싱턴의 지지를 얻지 못한 인사가 사무총장에 임명됐고, 이어 2005년 연임에도 성공했다. 2009년 미주기구 외무장관총회는 쿠바 배제 정책을 철회하는 결의안을 발표했지만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쿠바 정부는 결의안 내용에 감사를 표했지만 정작 미주기구로 복귀하기를 거부했다. 

같은 해, 온두라스에서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에 미주기구는 온두라스의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2011년 온두라스가 셀라야 전 대통령을 권좌에 복귀시키기로 합의한 후에야 미주기구는 온두라스의 재가입을 허용했다. 라틴아메리카 내 진보정권들은 단합하여 미주체제에서 일부 벗어나고자 했다. 2001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2012~2014년 니카라과,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이 줄줄이 리우협정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역내 좌파세력은 미주기구가 반제국주의 정권 타도를 위한 미국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자, 카리브해 국가들과 손을 잡았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유가폭등 때 카리브해의 이 작은 나라들에 저가로 원유를 공급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주기구 안에서 카리브공동체(CARICOM) 국가는 14표라는 다수표를 손에 쥐고서, 미국이 베네수엘라나 라틴아메리카 좌파정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일에 힘을 보탰다.

 

“어리석은 짓 마시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주의 세력들은 미주기구를 향한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들은 상임이사회 내 세력균형 관계가 바뀐다 해도 미국에 예속된 미주기구의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특히 연간예산의 무려 60%(일부 기구의 경우 총예산)를 미국의 지원에 의지하는 미주기구는 대다수가 라틴아메리카 출신임에도 워싱턴에 거주하며 조직에 각별한 충성심을 보이는 관료들로 구성돼 있다. 미주기구는 각종 직업적인 특전을 제공하며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결국, 라틴아메리카 내 좌파정권은 새로운 역내 기구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었다. 2008년 남미국가연합(UNASUR)의 탄생 배경이다. 남미국가연합체는 매우 야심 찬 기획이었다. 역내 경제 발전 측면에서 기존의 모든 남미통합체제를 능가하는, 특히 미주기구의 역할을 뛰어넘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차원의 포괄적 통합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미국가연합은 2008년 볼리비아, 2010년 에콰도르, 2012년 파라과이 등 회원국들의 국내 정치 위기뿐만 아니라, 2010년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간 분쟁 등 국제 분쟁에도 널리 개입했다. 이 모든 중재와 개입 과정에서 미주기구는 철저히 배제됐다.

이어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국가공동체(CELAC), 쿠바는 포함하나 미국과 캐나다는 배제한 서반구 국가공동체가 탄생했다. CELAC은 역내 국가들의 정치적 협의나 국제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협의의 장을 제공하면서도, 헌법 조약의 효력은 지니지 않는 남미국가연합처럼 비교적 제도적 성격이 느슨한 협의체를 조성하고자 결성됐다. 한편, CELAC는 유럽연합, 중국, 러시아, 인도 등 다양한 국가와의 정상회의를 정례화했다.

2015년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기수로 통하는 호세 ‘페페’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루이스 알마그로가 미주기구의 사무총장직에 임명됐다. 무히카로부터 후보로 지명받고, 역내 좌파정권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 전직 우루과이 외무장관 출신의 인사는 전임 사무총장인 호세 미구엘 인술자가 추구하던 독립 노선을 계속 이어나가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진보주의 바람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알마그로는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순식간에 우파 세력 복귀의 조력자가 돼, 조만간 도널드 트럼프란 인물이 이끌게 될 미국의 손아귀에 미주기구를 돌려주는 일에 앞장섰다. 

알마그로의 관심은 금세 베네수엘라로 집중됐다. 그는 베네수엘라 야권세력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모든 협상 시도에 반기를 들었다.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전 스페인 총리가 협상을 통해 베네수엘라 사태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했을 때도, 알마그로는 이렇게 반박했다. “어리석은 짓 마시오.”(3) 이 우루과이인은 (미국 정부처럼) 정권교체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고집했다. 그는 미국의 대 베네수엘라 경제제재 조처에 박수를 보냈다. 트럼프 행정부가 “모든 가능성이 테이블 위에 있다”라며 군사 옵션을 거론할 때 알마그로는 이에 동조했다. ‘인도적 개입’을 근거로 내세우며 미국과 함께 협박 카드를 흔들었다. 심지어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고립시키고자 결성된 리마그룹에 속한 일부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조차 심각한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 

그러나 ‘민주주의’ 수호를 향한 사무총장의 열의는 끝내 브라질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탄핵, 2018년 증거 불충분에도 불구하고 징역형을 선고받아 대선후보 자격을 상실한 룰라 전 대통령의 투옥사태에 대해서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2018~2019년 반정부 시위에서 조베넬 모이즈 아이티 정권이 자행한 인권유린 행태도 묵인했다. 

 

먼로주의의 부활, 50년대로의 회귀

2019년 10월 말, 얼마 전 사상 최대의 시위 물결과 과잉진압 사태로 몸살을 앓은 에콰도르를 방문했을 때도 알마그로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과잉진압 사태를 문제 삼기는커녕 오히려 레닌 모레노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에 경의를 표했다. 또한, 자국의 사회운동을 유혈진압한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도 “인권 보호를 위해 특수한 조처를 실시하면서도 공공질서를 효과적으로 수호해낸”(4) 훌륭한 인물이라 평했다. 콜롬비아 노동조합원들의 일상적인 실종사태나 정권의 평화 프로세스 포기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일절 함구했다. 반면 이반 두케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규탄하는 시위대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알마그로가 가장 거장다운 위용을 뽐낸 무대는, 단연코 볼리비아였다. 2019년 10월 볼리비아에서 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대통령 임기 종료를 앞둔 에보 모랄레스 후보는 대선 1차 투표에서 무려 10% 이상 득표 차로 최대 라이벌인 카를로스 메사를 따돌리고 27.08%의 득표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볼리비아 헌법에 따르면 1차 투표에서 상대 후보와 최소 10%의 격차로 40% 이상의 표를 득표한 후보는 1차 투표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1차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미주기구가 파견한 ‘선거감시단’은 개표과정에 ‘설명하기 힘든 경향 변화’(2019년 10월 21일 보도자료)가 일어났다며 바람을 잡았다. 하지만 이미 여러 통계자료를 통해 입증된 바와 같이 그들이 말하는 ‘경향 변화’란 실상 에보 모랄레스 후보에 우호적인 지역에서 개표가 지연된 결과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력 언론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였고, 야권세력도 이에 과격하게 반응했다. 결국, 모랄레스는 군부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망명길에 오르는 신세가 됐다. 

미주기구는 끝내 선거부정의 진실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워싱턴 소재 경제정책센터(CEPR)가 발표한 장문의 보고서에 여실히 드러난다.(5) 볼리비아 사태가 끝나고 몇 주가 흐른 뒤, 실질적인 정부로 행세하는 자니네 아녜스 정권이 알마그로의 재선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카렌 롱가릭 신임 외무장관에 의하면, 알마그로야말로 “역내 민주주의 수호에 중대한 역할을 한”(6) 인사임이 분명했다.

사실상 알마그로의 재선은 누가 봐도 친미 성향이 짙은 미주기구의 귀환을 의미했다. 미주기구가 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조직의 정당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기를 꿈꾸었다면 그 계획은 실패했다. 알마그로가 사령탑을 맡은 미주기구는 ‘먼로주의’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는다. 먼로주의란 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의 ‘뒷마당’으로 간주하며, “이 지역에 대한 어떤 외세의 개입도 용인하지 않겠다”라던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말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먼로주의는 한편 2020년 1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1950~1960년대 미주기구 정신을 되살리자”(7)라며 치하했던, 그 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글·기욤 롱 Guillaume Long
전 에콰도르 외무장관. 워싱턴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선임정책애널리스트.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1) 1962년 2월 4일 피델 카스트로의 연설
(2) 1962년 1월 22~31일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에서 개최된 미주기구 제8차 외무장관협의 채택 결의안 6호.
(3) EFE, 워싱턴, 2018년 9월 21일.
(4) EFE, 칠레 산티아고, 2020년 1월 9일.
(5) Jake Johnston, ‘David Rosnick, Observing the Observers : The OAS in the 2019 Bolivian Elections’, 경제정책연구센터, 워싱턴, 2020년 3월 10일.
(6) Alejandra Arredondon, ‘Boliva apoya reelección de Almagro en la OEA’, 2020년 1월 23일, voanoticias.com.
(7) 2020년 1월 17일 미주기구 상임이사회 연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