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영 TV 다큐 <아포칼립스>의 거짓말

2020-05-29     피에르 그로세 | 파리 시앙스포 교수

프랑스 국영 텔레비전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한 6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 <아포칼립스>. 냉전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프리카 대륙은 완전히 배제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쿠바만 다뤘다. 특히 억압에 맞선 민중의 투쟁을 ‘자유로운 (서방)세계’에 대한 공격이자,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공산주의 세력의 작전으로 둔갑시킨 것은 압권이었다. 

 

지난 가을, <아포칼립스: 세계대전, 1945~1991>이 대대적인 선전과 함께 프랑스 국영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다. 잡지 <히스토리아>는 11월호에 이 6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특집으로 다뤘다. 시리즈 내 여러 주요 순간을 재조명하는 역사가들의 글과 감독 인터뷰를 함께 실었다.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다니엘 코스텔은 “1956년 부다페스트 봉기 때 소련을 지지했었다”고 한다. 1968년, 모스크바에서 정보부 산하 팀이 그에게 “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5월 혁명 진압을 위해 탱크를 쓰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하자 그는 “전기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충격이 매우 컸던 코스텔에게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은 ‘절대 악’이 됐다. 

그가 공동연출한 6부작 시리즈는 문제가 많다. 연대순 및 주제 선정, 정치색도 문제가 있고, 냉전의 중요한 순간들을 분석함에 있어 오류를 범했다. 우선 연대순 선정에 문제가 있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세계대전’은 1945년 7월에서 8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 시작됐다고 한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파시스트 위협에 오랜 시간 대응을 원하지 않았던 무책임한 이들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등장한 태평한 사람들(이 시리즈의 반복되는 주제)이 공산주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아포칼립스>는 1945년 7월을 선택함으로써 핵 문제를 이야기 중심에 놓았다. 미국의 첫 번째 핵실험이 포츠담 회담 기간 실시됐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 작가들의 말에 의하면 “어떻게 스탈린을 막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이 시대부터 제기됐다는 것이다. 오히려 역사가들이 냉전의 시작이라고 보는 1947~1948년의 복잡한 정황은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많은 영역에서 협력을 계속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의 과도한 집착

다큐멘터리를 보면 1970년대의 낡은 냉전 연대기를 보는 듯하다. 냉전의 정점은 1950~1953년 한국전쟁이고, 냉전의 마무리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라고 강조한다. 한국전쟁이 주요 전환점임은 분명하다. 한국전쟁 때문에 미국 안보시스템이 유럽과 아시아에 설치됐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1) 쿠바 위기가 눈길을 끄는 주제임도 사실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침공(불과 1분 다뤘다), 1980년대 대립구도의 급작스러운 종결만으로 이후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1960년대가 서방진영에 우려스러운 시기였던 것은 핵 위협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부지역, 특히 중국, 쿠바, 알제리에서 야기된 혁명물결의 영향도 있었다. 1970년대도 서방의 위기시대였는데 이는 경제위기와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은 해군, 군사기지, 전 세계에 있는 동맹국들로 인해 강대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시리즈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1980년대 초(특히 1983년)가 냉전 긴장도가 최고조인 때였다. 

그 다음으로 이 영화의 주제 선정을 보자. 냉전세계의 긴장도를 측정하는 지구종말 시계가 주요 흐름을 좌우한다. 그러나 평화 요소(공포의 균형) 및 핵무기 사용의 지속적인 ‘금기(혹은 긴장 요소)’, 불균형에 대한 강박관념, 핵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시나리오,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핵무기의 위험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핵무기를 제한 및 감소시키자는 미국과 소련의 협상, 핵확산방지에 관한 내용도 아예 없거나 거의 없다.

대개 그렇듯 감독은 극적인 연출을 위해 ‘대결’을 영화의 중심에 놓았다. ‘철의 장막’을 넘어선 협력형태, 특히 국제기구 내 협력의 형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진영 사이에 공동 근대화 계획이 있었음을 보여줄 수는 있었다. 대규모 전염병 퇴치를 위한 연구교류가 있었고, 문맹퇴치, 산업화, 발전 등 유사한 기준을 우선시해 후진국 및 후진국 발전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일반적으로 이 두 ‘강대국’은 식민지 해방 측면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아포칼립스>는 분량 면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에 과도하게 집착했으며, 호치민에게 환상을 품는 미국에 태클을 건다. 물론 현재 사료편찬은 분리 독립 지도자가 가졌던 공산주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초반에는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그러나 <아포칼립스>는 향수를 자극하는 몇몇 표현들(“개척자들이 도로와 마을, 학교, 교회를 세웠다” 등)과 함께 인도차이나 내 국가주의와 반제국주의의 다양성, 프랑스와 호치민 사이의 회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쟁 이야기를 제외시켰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민통제 기술(유일정당 체제, 비밀경찰 등)을 전파할 방법으로 종종 해방운동의 틈을 파고들었다. 특히 남아프리카에서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항쟁을 지원한 바 있다. 

 

소련은 강제수용소, 서방의 문화전쟁

<아포칼립스>의 이런 관점은 1950년대 서방진영의 전통적 관점과 일치한다. 1970~1980년대 전환기에 프랑스에서 새로운 전향자들이 열정적으로 지지하기도 한 이 관점은 소련 이미지를 강제노동수용소, 세계를 지배하려는 자로 제한하며, 반공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정당화했다. 미국은 세계를 수호하는 위대한 십자군이며, 미국을 비판하는 이들은 배반자, 소련의 공범자가 된다. 제국주의, 인종차별, 재계와 군산복합체에 의지하는 점 등을 들어 미국을 비판한 1960~1970년대 미국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그런 경우다.

서방진영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한 ‘문화전쟁’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2000년대에도 ‘괴물’ 및 ‘깡패’에게 영원히 대항하는 미국 제국에 찬사가 쏟아졌다. 이 역시 역사적 지식의 일부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선전 이후, 아카이브가 열렸고, 1970년대 논의는 과거의 것이 됐다. 

코스텔 감독이 냉정을 잃어버린 프랑스 퀼투르(France Culture) 방송(2)처럼 <아포칼립스>에서 말하는 역사는 간단하다. 전체주의 체제인 소비에트 연방은 본래 확장주의 성향을 지녔다. 이들의 목적은 전 세계를 공산주의화하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의 자랑 중 하나는 로널드 레이건 재임 당시 이런 소비에트 연방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시리즈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스탈린은 세계를 정복할 것인가?”, “공산주의 진영이 확대됐다.”, 혹은 “크렘린 궁의 주인이 곧 세상의 주인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러시아 확장주의 충동’은 비난받는다. 감독들은 소비에트 연방(혹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가)이 단순히 기회주의자였거나,(그들을 향하는 위협은 과장하면서까지) 방어적으로 행동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듯하다. 

그러나 최근 대부분의 연구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포함한 소련 지도자들이 상대적으로 신중했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은 1950~1960년대 이전에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정책(제3세계에서 이득을 취하거나 해군을 건설하는 정책)이 없었다. 또한 동유럽을 소비에트화하기 위해 구상한 정책도 없는 상황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1945년 이후 유럽(핀란드, 그리스(3)), 아시아(일본 공격 당시 남한을 점령하지 않았다)에서 신중함을 보였다. 쿠바 위기와 같은 몇몇 위기 때도 뒤로 물러섰다. 

소비에트 연방의 의도대로 인민 민주주의 외교는 점차 독립적이 됐다. 소련은 지역 공산주의 정당(특히 근동에서)을 포기하면서까지 남쪽의 ‘부르주아’ 국가들과 친목을 도모했다. 또한 중국 내전 당시 마오쩌둥, 인도차이나의 베트민,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트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망설임 끝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유는 영역확장을 위함이라기보다 1978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4)

결국 <아포칼립스>가 역사적 오류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냉전이 종결된 것은 레이건의 공격적인 정책보다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선택 때문이었다(그 후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를 뒤로 하고 레이건이 손을 내민 것이다). 국제정치의 다양성, 변동, 구속력, 연대기, 분위기와 국제정치를 무시한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지식은 초라한 나머지 우리를 아연실색케 한다. 

이 모든 선입견과 역사적 사실 및 국제관계 현실에 무지한 태도 때문에 이 6부작 다큐멘터리에는 오류가 난무한다. 첫째,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한국 전쟁을 일으키게끔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오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실 (테렌티) 치트코프 장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치트코프 장군은 소비에트 연방이 양성한 한국인 공산주의자, 말 잘 듣는 김일성을 권좌에 앉혔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꼭두각시가 아니었고 통일을 위해 스탈린을 귀찮게 한 인물이었다. 남한에서는 이승만 대통령(한 번도 ‘항일운동 지도자’였던 적이 없다)이 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 군대를 진격시켰다. (1946~1950년 희생자가 약 20만 명에 달한다.) 

둘째, 수에즈 위기 때 프랑스와 영국 파견군이 철수한 것은 소련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때늦고 애매하고 비현실적인) 위협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아포칼립스>는 이 설명을 통해, 미국이 이슬람을 활용해 소련에 대항하고자 사우디아라비아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지 않고 “미국이 아랍국가 편에 섰다”라고 말한다. 셋째, 소련 지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함으로써 터키에 있는 미국 미사일 주피터가 발사되기를 원했다는 오류다.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한 목적은 필시 쿠바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당시 1961년 4월 피그만 침공 때 실패한 반카스트로 전투원 상륙 작전보다 더 큰 작전인 몽구스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아포칼립스> 자문위원인 알렉산드르 아들러 영향 때문일 것이다. 

알렉산드르는 1953년 소비에트 연방의 내무부 장관인 라브렌티 베리야를 ‘냉전을 종결시킬 수 있는 호감형 자유주의자’로 소개한다. “그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수감자 절반을 풀어줬으며, 고문을 금지했다”, “소비재를 받아들였고, 국방비를 절감했으며, 삶의 질을 높였고, 전 세계 긴장을 완화시켰다”라는 식이다. 마지막 오류는 호치민에 대한 집착으로, 공산주의 지도자 레주언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명이다.(5) 중국과 소련의 관계, 특히 베트남 전쟁 당시 이들 관계와 관련한 두 국가의 아카이브 자료 내용은 알 수 없다. 

 

역사연구에 쏟은 세금은 어디로?

<아포칼립스>는 서방진영의 영토확장주의 이야기는 당연히 제외했다(1946년 이란 위기 사태는 소비에트 연방만 강조했고 영국의 존재는 빼버렸다). 1940년대 말 알바니아에서 인도와 연합해 중국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티베트에서 전개됐던 비밀작전 이야기도 제외했다. 1980년대 중앙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도, 남한 혹은 인도네시아와 같은 아시아 내 독재체제를 서방이 지원했다는 사실도 뺐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최소한 50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학살을 당했다.) 또 미국, 영국, 프랑스가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후 크메르루주에게 자행한 학살 역시 다루지 않았다. 

프랑스가 혁명 위협 때문에 자신들이 주둔해야 한다고 정당화했던 아프리카 이야기는 잊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간의 대결 결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역 정치역학도 다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세상은 지정학적 전쟁으로만 돌아가지 않기에, 정작 많은 이들이 납득하고 있는 냉전이 끝난 이유인 사회 및 경제 변화는 다루지 않았다. 

결국 과장과 치우침, 오류가 가득한 설명을 피하려면 다큐멘터리를 끊는 것을 추천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군 영웅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장군이나, 주미대사 앙리 보네가 프랑스식으로 발음하는 영어를 들을 때만 빼고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다. 제대로 대중화된 프로그램을 기대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가? 역사를 왜곡한 이들에게 비싼 세금을 지불해야 하는가? 그동안 연구와 출판물에 쏟은 예산은 대체 어디에 쓰인 것인가?  

 

 

글·피에르 그로세 Pierre Grosser 
시앙스포 파리 역사센터 교수. 『1989』 작가. 저서로 『L’année où le monde a basculé (2e édition) 세계가 뒤집힌 해 (제2판)』(Perrin, Paris, 2019)가 있다. 

번역·이정민 minuit15@naver.com
번역위원


(1) Pierre Grosser, 『L’histoire du monde se fait en Asie. Une autre vision du XXe siècle(2e édition) 아시아에서 이뤄진 세계 역사. 20세기 다른 시각(제2판)』, Odile Jacob, coll. <Histoire>, Paris, 2019년. 
(2) Pierre Rimbert, ‘L’histoire en roue libre 관성의 역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12월호. 
(3) Norman Naimark, 『Stalin and the Fate of Europe : The Postwar Struggle for Sovereignty』, Harvard University Press, 2019년.
(4) Christian Parenti, « Retour sur l’expérience communiste en Afghanistan 아프간 공산주의의 쓰라린 추억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2년 8월호. 
(5) Pierre Asselin, 『Vietnam’s American War : A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