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족이 꿈꾼 세상

톨킨이 끼친 영향, 가톨릭주의에서 윌리엄 모리스까지

2020-05-29     에블린 피에예 | 작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자

1억 5,00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한 『반지의 제왕』은 유행을 타지 않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강렬한 찬사를 받는 작품이다. 창의적 공동체의 교류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다시금 다양한 공동체적 상상력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목가적 사회가 지니는 가치체계와 개념은 정치 윤리를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20세기 문학에서 가장 다채롭고 심오한 작품을 낸 작가는 존 로널드 루엘 톨킨(1892~1973)이라고 스스럼없이 평했던, 한 잡지 기사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1) 그러나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 3부작은 1억 5,000만 부가 넘는 판매 부수를 기록했고,(2) 이 작품을 실사화한 피터 잭슨의 영화는 아카데미에서 17개 부문의 오스카상을 받았고, 이를 다시 드라마로 만들고자 아마존이 판권비 2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한 것은 모두 엄연한 사실이다.

그보다는 좀 더 소소한 사실을 곁들이자면, 톨킨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작가전(2019년 10월 31일~2월 16일)에 작품이 걸리는 영예를 누린 유일한 외국 작가다. 오뷔송 국제 태피스트리 박물관(Cité internationale de la tapisserie d’Aubusson)에 전시된 장식융단 13점과 양탄자 1점에는 톨킨이 손수 그린 삽화가 들어갔다. 톨킨은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자, 예술적 창의력으로 가공의 세계관을 선명하게 재현해낸 작가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오늘날 톨킨은 진부한 구시대의 상징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했고, 연구와 집필 활동에 전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이자 고대·중세 영어학과 영문학자로서 고트어(고트족이 사용했던 죽은 언어), 노르드어(중세 스칸디나비아어), 핀란드어를 구사했고, 북유럽 서사시, 에더(북유럽 신화 시가집, Edda), 칼레발라(핀란드 민족 서사시, Kalevala)에 열정을 불태운 학자였다.

그런 그가 아동문학에 속하는 『The Hobbit 호빗』(1937)을 시작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장장 20여 년에 걸쳐 『반지의 제왕』 3부작(1954~56)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족적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루이스 캐럴로 더 잘 알려진 찰스 루트위지 도그슨 역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교수로 재직하는 가운데, 동화 집필에 몰두했다. 톨킨이라는 인물에 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가 독실한 가톨릭(영국의 소수 종교) 신자였다는 사실이다. 

 

물질보다 정신, ‘옥스퍼드 운동’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와 소속 사제들은 ‘옥스퍼드 운동’을 펼쳐 성공회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존 헨리 뉴먼(1801~1890)은 ‘자기 헌신과 진리를 향한 직관’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성찰해 기독교, 특히 성공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그는 성공회에서 가톨릭교회로 회심해 파장을 낳았고, 1878~1903년 재위한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비오 13세는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새로운 사태)’이라는 회칙을 공표해 노동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제시한 바 있다(1922~1939년 재위한 교황 비오 11세가 그의 업적을 이어받아 발전시킴). 

‘레룸 노바룸’은 노동조합주의는 지지하지만, 사회주의는 반대한다. 그리고 가족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비롯된 경제이론이 바로 ‘분배주의(Distributism)’로, 개인보다는 집단에 귀속된 사유재산을 추구하고, 토지와 도구에 있어 길드(Guild)의 부활을 주장하며, (상호부조를 제외한) 금융제도를 거부하고, 가족을 사회의 기본단위로 삼아 농부와 장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모든 극단의 정치를 거부한다. 

‘옥스퍼드 운동’은 평소 ‘정신이 물질보다 강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단호히 반국가주의를 지향했던 톨킨을 감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화가이자 소설가인 윌리엄 모리스(1834~1896)의 세계관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윌리엄 모리스는 이상화된 중세 신화와 아이슬란드 전설을 영어로 번역했고, 수공업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면서 ‘미술공예운동’을 전개했다.(3) 엘리노어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자동맹(Socialist League)을 결성하기도 했던 그는 『The Well at the World's End 세상 끝의 우물』이라는 초기 ‘판타지 소설’ 작가이기도 하다.

신학적 성찰, 신화와 중세 전설에 대한 감수성이 싹튼 곳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옥스퍼드의 한 선술집에 모여 함께 글을 읽고 토론하며 친목을 다졌던 ‘잉클링스(Inklings)’라는 모임이었다. 톨킨을 포함해 클리브 스테이플스 루이스(C. S. 루이스), 찰스 윌리엄스가 이 모임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이자 성공회 신도였던 C. S. 루이스는 기독교 변증에 관한 연구를 비롯해 동물, 마술 등의 요소를 더해 선악의 대투쟁을 그린 작품 『The Chronicles of Narnia 나니아 연대기』(1949~1954)로 특히 유명하다. 

찰스 윌리엄스는 영국 성공회 신자로서, 한때 장미십자회(Rosicrucianism)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상호내재적 벗(Companions of the Co-inherence)’이라는 비공식 기독교 분파를 창시하기도 했다(옥스퍼드를 배경으로 한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 <Endeavour 인데버>에 이 분파에 관한 내용이 일화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울러 『War in Heaven 천국의 전쟁』(1990)이라는 판타지 소설에서,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을 주제로 다뤘다.

즉 ‘잉클링스’는 신자와 학자 등 열정이 넘치는 이들의 모임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신비와 은총에 대한 인식을 돕는 초자연적이고 경이로운 이야기에 혼을 불어넣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바는 모름지기 탈 기독교화된 세계에서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자생적 전원사회로의 회귀를 꿈꾸다

『반지의 제왕』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 바로 이런 주제와 신념, 담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개념을 구현해낸 일례 정도로 톨킨의 작품을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은 미적 가치를 포함한 다양한 가치를 매개로 정치와 종교가 추구해야 할 비전을 제시한다. 『반지의 제왕』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둠의 군주’는 절대권력의 도구로 강력한 힘을 지닌 반지를 만들어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만, 절대반지는 그의 수중을 벗어난다. 반지 운반자 ‘호빗(Hobbit)’은 절대반지가 만들어진 곳에 반지를 던져 파괴하는 사명을 안고, 반지원정대의 동맹들과 힘을 합쳐 갖은 위기를 헤쳐나간다. 이때 가장 힘겨운 난관은 다름 아닌 ‘반지의 유혹’이다. 그러나 마침내 호빗은 임무를 완수하고, 왕이 잃었던 왕국을 되찾는다.

이 소설은 악에 맞서 싸우며 영적인 탐구를 이어가는 이야기이자, 양심의 고통과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도록 해주는 끈질긴 사랑의 힘(무릇 사랑의 힘이 자연을 되살리듯)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그리고 작품의 바탕에는 종교가 깔려있다. 톨킨은 예수회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종교적 요소를 반영했다”고 밝혔다. 

톨킨은 종교색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특유의 독창적이고 유쾌한 역량으로 이상적인 세계, 즉 모험을 펼치는 하플링(Half-lings, 소인족)인 호빗족의 세계를 그려냈다. 호빗족은 장구한 세월 동안 변함없는 규범을 자발적으로 지키며 정부나 경찰력, 국경 없이도 겸손하고 유쾌하게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다. 톨킨이 만들어낸 호빗족 캐릭터는 이후 각종 ‘판타지’의 모티프가 됐다. 

호빗족은 ‘중세적’ 세계관 내에서 마법은 수용하지만, 기술과 역사의 발전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암흑의 군주를 상징하는 검은 땅(Mordor)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은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삶의 태도를 배척한다. 행복을 만끽하면서 좋은 음식을 요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재주꾼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호빗족 정원사’라고 할 수 있다.

호빗족 사회모델은 자주적 방어와 절제, 가이아에 대한 기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초록색 잎과 열매를 맺는 식물에 관심을 쏟으며, 봉건적이지만 영주는 없는 이 사회모델을 60년대 저항운동가들은 높이 평가했다. 게다가, 그 반대편에 있는 네오파시스트 정당 ‘이탈리아 사회운동당(Movimento Sociale Italiano, MSI)’도 1977~1981년 ‘호빗 캠프’를 조직했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은 오늘날 생태감수성을 지닌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자연의 진리에서 인간을 멀어지게 하는 기술에 대한 회의와 반감, 자급자족하는 목가적인 전원사회를 향한 열망은 현재 우리가 겪는 보건위기가 지나간 후에도 식지 않을 것이다. 반지원정대가 어둠의 힘과 권력에의 유혹에 맞서 싸운 끝에 결국 왕을 복위시켰다는 것을 부디 보건 위기가 끝난 무렵에 기억해주기를.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작가, 문화비평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Lloyd Chery, ‘Ce que les fans du « Seigneur des Anneaux » doivent à Christopher Tolkien » <반지의 제왕> 팬들이 크리스토퍼 톨킨에게 감사해야 할 점’, <Le Point>, Paris, 2020 1월 17일, www.lepoint.fr
(2) Christian Bourgois 출판사, 3부작으로 출간. 
(3) Marion Leclair, ‘William Morris, esthète révolutionnaire 혁명을 꿈꾼 탐미주의자 윌리엄 모리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7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