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쇼의 모순적인 사회참여 글쓰기

2020-05-29     마리옹 르클레르 외

영국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 계층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작품 소재에도 불구하고 조지 버나드 쇼에게 갈채를 보냈다. 쇼는 부르주아 계층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고 훗날 노동당을 탄생시킬 사회운동에 동참하면서, 진보주의자 쇼의 논거는 더욱 빛을 발했다. 

 

조지 큐커 감독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속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은 강압적인 렉스 해리슨의 지도에 따라 불어로는 번역하기 어려운 발음연습용 문장을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반복한다. “the rain in Spain stays mainly in the plain(직역하면, 스페인에서 비는 주로 평야지대에 집중된다)” 오드리 헵번은 거리에서 행인들에게 제비꽃을 파는 소녀로 나오는데, 런던 북동부, 이스트엔드 지역 억양이 강하다. 언어학자인 렉스 해리슨은 오드리 헵번의 말투를 적절히 교정해, 공작부인 행세를 시킬 수 있다는 쪽에 내기를 건다.

교육을 통해 부르주아 계층에 동화되면서 ‘더 나은 삶’을 얻게 된 최하층 노동자 출신 소녀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억양이 사회계층을 결정짓는다는 모티브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의 희극 『피그말리온』(1912년 발표, 1938년 영화화)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쇼가 20세기 초 영국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더욱 적다. 

노동절을 기념하는 1891년 5월의 어느 날 아침, 쇼는 윌리엄 모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자리를 나란히 했다. 몇십 년 후 소련을 방문한 그는 스탈린과 뜨겁게 악수를 하며 “영국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쇼는 아일랜드인이었다.(1) 아일랜드가 아직 정치·경제적으로 영국에 종속됐던 당시, 쇼는 런던과 비교하면 문화적 변두리였던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일랜드의 정체성에 크게 매달리지는 않았다. 

한편 그와 동시대를 살던 이들은 다소 상이한 방식으로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추구했다.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쇼보다 2년 앞서, 1923년 노벨문학상 수상)는 켈트 전통문화를 되살리고자 했고,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삶을 풍자했다. 쇼는 영국식, 혹은 런던식 삶에 동화되는 가장 통상적인 길로 접어들며 프랑스 문학평론가 파스칼 카사노바가 명명한 것처럼 “동화된 작가”가 된다.(2) 

1876년 런던에 자리 잡은 쇼는, 이전에 카를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대영박물관에서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세계적인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우정도 쌓았다. 심지어 그는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1879)을 연출하던 당시, 에레아놀 마르크스에게 대사를 주기도 하며 체제를 흔드는 자연주의, 그리고 노르웨이 극작가가 창조한 현대적 여성상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눴다. 쇼는 여성투표권을 옹호했다.

음악과 문학에 심취한 쇼는 작품활동 초기에 실패를 맛봤고(윌리엄 모리스만이 운동권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출간된 쇼의 초기소설이 지닌 가치를 어느 정도 알아봤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기 전까지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았다. 동시대에 활동한 오스카 와일드(역시 사회주의자이며 아일랜드인)처럼, 그 역시 작품 속 특유의 인물 캐릭터 덕에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쇼의 작품은 위선의 탈을 벗기는 신랄한 문체와 부르주아적 생활방식을 풍자하는 인물상, 특히 등장인물의 모순적인 행동으로 유명했다.

1890년대에 쇼의 희곡이 무대에 오르고, 공연은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쇼에 의하면, 입센은 “관객을 겨냥하는 엄청난 솜씨를 가진 저격수”다. 그의 연극에서 “관객은 할 일 없이 오락거리를 찾아 시간을 죽이려는 사람이 아니다. 관객은 하나의 극에 참여하는 책임과 생명력을 가진 존재다.”(3) 그가 평론서 『입센주의의 정수』에서 표현한 것처럼, 거짓된 이상주의가 불러오는 비극은 작품을 통해 영국화되고 정치화됐다. 쇼의 네 가지 ‘유쾌한 연극’들에서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 계층이 남용하는 거짓된 이상주의는 희극적 장치가 됐다. 

예컨대 『캔디다』(1894)에 등장하는 사회주의자인 기독교 목사를 통해 쇼는 자기도취와 불평등의 이면(아내를 ‘착취’하는 목사의 허영심)을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무기와 인간』(1894)에서는 군국주의와 국수주의를 조명했다. 한편, 그는 ‘유쾌하지 않은 연극’이라는 연애와 사회풍속을 담은 세 가지 희극을 통해 직설적으로 사회문제를 겨냥했다. 그 중 하나인 『홀아비들의 집』(1892)은 약혼녀의 재산이 런던의 거대 빈민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젊은 의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초인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다

쇼의 독창성은 ‘사회’와 ‘감정’이라는 두 세계가 작품 안에서 하나로 융합된다는 점에 있다. 사회적 빈곤은 배경으로 국한되지 않고, 멜로드라마의 성립조건이 된다. 빈민가에서 나온 돈이 결혼자금이 되지만,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결혼 자체가 깨진다. 그리고 다른 혼담이 이어진다. 유쾌한 연극이든, 유쾌하지 않은 연극이든, 작품의 결말은 대부분 처음의 현상유지로 귀결된다. 쇼는 중산층을 대중이자 연극소재로 삼아 한두 시간 동안 그들에게 ‘불쾌한 진실’을 퍼붓지만, 적절한 전달방식과 장소 선택으로 무거움을 중화하고 수준 높은 재미를 선사한다. 

평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강조하듯 “쇼의 작품이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을 압도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그만큼 끈질기게 인간의 이해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쇼의 작품세계는 서로 다른 의견이 대면하면서 성립한다. 이견들은 각 등장인물의 운명이 된다. 쇼는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자기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우리의 의견과 대조할 기회를 주는 장치를 줄거리 속에 심어뒀다.”(4) 그렇지만 주역이 되지 못한 노동자 계층의 빈자리는 크다. 노동자들은 하인이나 졸부 등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가끔 등장할 뿐이다.

이같이 의미심장한 노동자 계층의 희화화 또는 부재는, 부분적으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1820~1903)의 사회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쇼가 초인을 숭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숭배의 감정은 특히 사극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운명의 사람』(1895)의 나폴레옹, 『성녀 조앤』(1923)의 잔다르크, 또는『인간과 초인』(1903)의 돈 후안과 같은 인물이 그렇다. 극 중 시대와 의복을 통해 초인의 반낭만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성향, 군대식의 노하우, 리더쉽이 드러난다. 

이런 인물상은 『혁명당원 안내서』(1903)에서 허구적 인물의 목소리를 빌어 이미 잘 정립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쇼는 “프롤레타리아의 민주주의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초인의 민주주의”를 소망한다. 요컨대 그의 작품은 강렬한 해방감을 선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평등을 주창하는 동시에 초인에 매료된,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프롤레타리아를 간과한 사회주의가 등장한다.

쇼의 이런 한계는 곧 페이비언 협회의 한계이기도 했다. 1880년대 전개된 영국식 사회주의, 페이비언주의의 영향으로 부르주아 계층이 노동당의 지도부를 차지했고, 점진적인 개혁은 핵심이념이 됐다. 점진주의는 혁명보다 선거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페이비언(Fabian)’이라는 명칭 자체에서 점진주의 이념이 드러난다. 페이비언은 쿵크라토르, 즉 ‘기회를 기다리는 자’라는 별명을 지닌 로마 장군 파비우스 막시무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그는 지구전을 유도하는 신중한 전략으로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양의 탈의 쓴 늑대 모습을 한, 협회의 상징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1884년 페이비언 협회가 창립된 후 찍어낸 초기 선전물은 자본주의식 생산원리를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잉여가치 창출이라는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페이비언 협회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주를 이뤘고, 경제불황으로 노동자들의 불안감이 고조되면서 등장한 동시대의 다른 사회주의 세력들과 흐름을 같이했다. 일일 근무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기 위해 공동전선을 펼치며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여권신장 운동가이자 특출난 페이비언주의자였던 애니 베산트는 1888년 벌어진 브라이언트 앤메이 성냥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했다. 마찬가지로 1884년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한 쇼는 윌리엄 모리스가 조직한 사회주의 연맹에서 연설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했고, 모리스와 함께 사유재산 폐지를 주장했다.

 

한계효용에 밀려난 마르크스주의

그러나 그 후 쇼는 영국에서 윌리엄 제번스와 필립 윅스티드가 발전시킨 ‘한계효용’이라는 경제학 이론(재화의 소비가치는 효용, 즉 재화를 소비하는 인간 욕망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을 접한다. 게다가 1887년 11월 13일, 반실업시위에 대한 가혹한 진압이라는 쓰라린 경험까지 겪은 그는 두 가지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버릴 결심을 한다. 첫 번째,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와 잉여가치는 효용가치라는 개념에 밀려났다. 두 번째, 가혹한 진압으로 ‘피의 일요일’이라는 악명이 붙은 11월의 시위에서, 그는 노동자 무리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목격한 후 노동자 계층은 사회변화의 주요 원동력이 될 수 없으며, 반항적인 방식은 실행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5)

쇼가 페이비언 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만큼, 협회의 변화는 곧 쇼의 변화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을 그만두고, 깨어 있는 관료체계에 권력을 위임하는 엘리트적 사회주의 노선을 취했다. 이 같은 이념은 위험한 성향을 띤 우생학에 휩쓸리거나, 혹은 1930년대 초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향한 존경심에 사로잡힐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제 페이비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의 공유화가 아닌 술책, 그리고 세금인상을 통한 토지소득과 산업소득의 재분배였다.(6)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쇼가 『혁명당원 안내서』에서 예견했듯,(7) 대다수 국민은 눈치도 채지 못한 ‘위로부터 유도된 변화’를 의미했다. ‘도시사회주의’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그대로지만, 현존하는 자본주의 구조가 바탕을 이룬다. 이 같은 노선의 사회주의는 20세기 초 페이비언 협회와 독립노동당의 합작으로 탄생한 노동당에 이념과 행동강령을 제공했다. 1945년 노동당의 승리와 페이비언주의적 국유화 정책의 도입(에너지, 교통, 영국은행, 제철산업)은 사기업의 종말을 초래하진 않았다. 1950년 쇼의 죽음은 좌파 페이비언주의가 쇠락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1년 후 페이비언 협회가 이를 구시대적 사회주의라 규정하고 선거의 패인으로 꼽으며 관계를 끊은 것이다.(8) 

페이비언주의자인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1990년대 성공적으로 도입했던 신노동당 이념의 기초는 이렇게 마련됐다. 2020년 4월, 페이비언 협회의 사무총장 앤드류 해럽은 제레미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의 좌경화를 고발했다. 협회의 상징은 본래 부르주아 계층 속으로 침투하는 사회주의를 의미했다. 오늘날 그 상징성은 그대로지만 의미는 변했다. 페이비언주의는 사회주의 속으로 침투한 부르주아가 됐다. 레닌은 쇼에 대해 “페이비언주의자들 속에서 길 잃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메투셀라로 돌아가라』(1921)에서 쇼가 쓴 다음의 내용을 보면, 그가 소신이 뚜렷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있는 것을 보고 ‘왜?’라고 묻지만, 나는 전혀 존재한 적 없던 것을 생각하며 ‘왜 없었지?’를 묻는다.”  

 

 

글·마리옹 르클레르 Marion Leclair
아르투아 대학교 부교수
에드워드 리식스 Edward Edward Lee-Six
파리 고등사범학교 강사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Ivan Maïski, 『Journal 1932-1943 일기 1932-1943』, (편집 및 코멘트 Gabriel Gorodetsky), les Belles Lettres, Paris, 2017.
(2) Pascale Casanova, 『La République mondiale des lettres 세계 문학 공화국』, Seuil, Paris, 2008.
(3) George Bernard Shaw, 『The Quintessence of Ibsenism, in The Works of Bernard Shaw』, Constable, London, 1891.
(4) Bertolt Brecht, ‘Ovation pour Shaw 쇼에게 보내는 갈채’, 연극을 위한 글, 1, Paris, L’Arche, Paris, 1972. 
(5) Edward Palmer Thompson, 『William Morris: Romantic to Revolutionary』, Lawrence & Wishart, Londres, 1955. 
(6) George Bernard Shaw (dir.), 『Fabian Essays in Socialism』, London, 1889.
(7) George Bernard Shaw, 『Bréviaire du Révolutionnaire par John Tanner, membre de la classe riche oisive… Suivi de Maximes pour révolutionnaire 한가한 부유층 존 테너가 쓴 혁명당원 안내서... 혁명당원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Editions des Cahiers libres, Paris, 1927.
(8) Tom Nairn, ‘The Nature of the Labour Party – 2’, <New Left Review>, 1964년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