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기고 “주한미군 감축, 北 비핵화 협상 카드로 활용할 만”

6·25 70주년을 맞아

2020-05-29     문정인 |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최근 방위비 분담 문제와 관련하여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바, 미국이 점진적으로 주한미군을 감축할 의사가 있다면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이를 대북 비핵화 협상 카드로 사용하는 방안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문 특보의 본지 기고문이다. 

 

올해는 6.25 70주년이자 6.15 20주년을 맞는 해이다. 70년 묵은 전쟁을 끝내 평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20년 성년을 맞은 남북관계도 이제쯤 정상화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이자 이 시대의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남북대화는 단절되고 북미 관계는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그뿐 아니라 9.19 남북군사합의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고조되는 형국이다. 우리 모두의 염원인 핵 문제 해결은 요원하고 한반도의 앞날은 불투명해 보인다. 

 

롤러코스터 같은 한반도 평화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반도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는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크고 작은 군사충돌들이 발생해 왔다. 1968년 1.21 사태 그리고 바로 뒤이은 1월 23일 미 해군 첩보선 푸에블로호 피납 사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 두 차례의 서해교전,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건, 그리고 같은 해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의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남과 북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충돌이 계속됐다.

그러나 지난 3년처럼 남북관계가 극심한 변곡점을 보인 사례는 드물다 하겠다. 2017년은 위기의 한 해였다. 북한은 2017년 한 해 동안 단·중거리 탄도미사일을 15회 시험 발사했는가 하면, 9월 3일에는 수소폭탄으로 추정되는 6차 핵실험을 실시한 바 있다. 그리고 11월 28일에는 미국을 겨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화성-15를 시험 발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강경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로 요약될 수 있듯이 미국 정부가 예방전쟁, 선제타격, 코피 전략 등 다양한 군사적 대응방안을 고려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은 크게 고조된 바 있다.

2018년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가 발표되면서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북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두 차례의 고위 사절단을 서울에 파견했고 문재인 정부도 3월 5일~6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으로 구성된 특사단을 평양에 파견함으로써 남북관계에 커다란 돌파구가 마련됐다. 4월 27일에는 판문점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6월 12일에는 역사적인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연이어 9월 18일~20일 평양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남북 군사합의 의정서를 담은 9.19 평양 선언이 채택되기도 했다. 판문점과 평양, 이 두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필자에게는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2017년 4월 판문점의 구호가 허구가 아닌 하나의 현실로 다가왔다. 회고컨대 2018년은 참으로 평화와 희망의 한 해였다.

불행히도 2019년 2월 27일~28일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한반도는 불확실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이 제시한 “선 비핵화, 후 보상”이라는 빅딜 (big deal)과 북한이 제시한 “영변 핵시설의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폐기와 유엔안보리 제재의 부분적 완화의 동시 교환”이라는 섬딜(some deal) 간에 절충이 실패하면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결렬되었고 그 여파로 한반도의 불확실성은 과거 어느 때 보다 크게 증폭되고 있다. 북핵 문제에 이렇다 할 돌파구도 찾지 못한 채 북미는 물론 남북관계까지 완전히 얼어붙은 상태다. 이렇듯 지난 3년간 한반도 평화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일관된 한반도 평화구상을 제시해 왔다.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 목표는 간단하고 명확하다.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동번영하는 한반도를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안 된다’는 평화우선주의 원칙이다. 두 번째는 북한의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문재인 정부 비핵화 정책의 기조라 하겠다. 세 번째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 6일 베를린 쾨르버 재단에서도 천명한 바 있듯이, ‘우리는 북한을 흡수통일하지 않겠다. 북한의 체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네 번째는, ‘남북간 교류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고, 한반도 공동번영의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원칙이다. 마지막 원칙은 북한 핵문제를 풀어나가고 한반도의 평화번영을 만들어가는데 국제 공조를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문재인 정부는 네 가지 기본 전략을 추진해 오고 있다. 첫 번째는 평화유지(peace-keeping) 전략이다. 이는 굳건한 안보를 바탕으로 평화를 만들어가겠다는 정책 의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다분히 2017년 7월 북의 군사적 공세에 대한 대응이라 하겠다. 이는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대북 군사억제력을 가져야 하며,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즉, ‘억제와 동맹을 통한 평화유지 전략’인 셈이다. 이 평화유지 전략은 2017년 이래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전략의 기본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두 번째는 평화 만들기(peace-making)다. 군사적 억지와 동맹으로 전쟁을 막을 수는 있지만 평화를 만들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여기에 깔려있다. 평화 만들기의 요체는 2018년 <4.27 판문점 정상선언>에 잘 담겨 있다. ‘남북한 간의 적대적 군사행동을 종식하고 종전 선언의 채택을 통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면서 한반도에 지속 가능한 평화체제를 만들겠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종전 선언을 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이 선행되어야 하는 바 이러한 맥락에서 <9.19 평양선언> 제1조를 남북한 군사합의에 관한 의정서로 구성했던 것이다. 평화유지가 소극적 평화전략이라 한다면 평화 만들기는 적극적 평화전략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그보다 하나 더 나아간 평화구축(peace-building) 전략이다. 평화구축은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맥을 같이 한다. 영구평화론의 제1명제는 ‘무역하는 국가들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소위 자본주의 평화론이다. 제2명제는 ‘민주주의 국가들끼리 싸우지 않는다’는 민주평화론이다. 그리고 제3명제는 평화연방(The pacific federation)이다. 세계 정부의 한 형태인 평화연방을 만들면 사실상 국가 간의 전쟁은 있을 수 없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영구평화가 가능하다는 게 칸트의 기본명제이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구축 전략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남북한이 경제교류협력을 하고 철도, 에너지를 연결하여 경제공동체가 형성되면 남과 북이 싸울 일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게 이 구상의 핵심이다. 이 전략은 ‘평화경제론’과 ‘한반도 신경제지도’로 구체화 된 바 있다. 여기에는 남북 사이에 경제 분야의 물꼬를 터서 그것을 통해 우리가 대륙으로 나가고 남과 북이 더불어 해양과 대륙을 동시에 거머쥐어 공동번영의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적극적 외교(proactive diplomacy) 전략을 들 수 있다. 우리는 강대국 결정론이나 ‘코리아 패싱’이라는 단어에 익숙해 왔다. 때문에 독자적 외교 행보를 하나의 금기처럼 여겨왔다. 분단국가로서 사방에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정학적인 한계가 있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번영을 이룩하는데 우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외교전략이다.

 

대두되는 모순과 도전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구상은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이행 과정에서 여러 모순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우선 지난 3년간 군사억제력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평화유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이면 우리 국방비가 50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어서 국방비 총액이 일본보다 더 많아진다. 게다가 미사일 방어체계도 크게 향상되었다. 사드 배치는 물론이고 패트리어트-3 시스템을 포함해 북한 미사일 요격 능력이 크게 개선되었고 지대공미사일(M-SAM) 등도 완전히 전력화했다. 또한 북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세적 방어능력도 크게 증강되었다. F-35 스텔스 전투기 도입이 이를 입증한다. 정보감시정찰자산에도 고고도 무인 정찰기인 글로벌 호크 두 대를 들여오는 등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규모는 다소 축소되었지만 한미연합군사훈련 역시 지속해 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평화유지 전략은 어느 정도 이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평화 만들기에 있다. 우리 정부는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병행 추진한다’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고 있지만 하노이 결렬 이후 비핵화에 진전이 없으면서 평화 만들기에도 제동이 걸렸다. 물론 <9.19 평양선언> 제1조의 남북군사합의사항은 대체로 잘 이행되고 있다. 북이 서해에서 해안포를 시험 발사한 것과 비무장지대에서의 우발적 총격 사건을 제외하고는 서해에서나 군사 분계선 상에서 지금까지 가시적인 군사충돌이 없었던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렇지만 판문점 선언 3조 1항의 ‘종전 선언’ 부분은 전혀 진전이 없다. 그리고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과 지속 가능한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해서는 초보적인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북이 우리의 재래식 군사력 증강과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평화유지와 평화 만들기 전략 간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관심을 두고 있는 평화경제를 통한 평화구축 전략도 한계에 봉착하기는 마찬가지다. 원래 구상은 2018년 9월 평양 선언에 나와 있듯이 북한과 철도와 에너지 사업을 연결하고, 다양한 형태의 경제협력의 전개를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평화구축의 가능성을 모색하겠다는 것인데 이 역시 유엔 안보리 및 미국의 독자 대북 제재 때문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국이 북한에 대해 ‘최대한의 압박’ 전략을 지속하는 한 현 상태의 반전을 모색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주도적 외교’도 어려워 보인다. 2018년에는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남북관계의 활성화를 통해 북미관계를 접목시키는 ‘촉진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북이 남측과의 관계를 전면 단절하고 미국과의 대화도 중단하고 있어 우리가 들어설 외교적 공간이 전혀 없는 게 현실이다. 2018년처럼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야 미국에 대한 외교적 설득의 지렛대가 마련될 수 있는데 그럴 형편이 못 된다. 이렇듯 지금 우리 정부가 내놓은 평화전략은 여러 가지 모순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과 향후 전망

왜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가? 복기해 보면 북미 핵 협상 교착 상태, 특히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 미국은 ‘선 비핵화, 후 보상’이라는 접근법을, 북한은 ‘동시행동 교환원칙’을 제시했는데 이 양자 간의 차이가 너무 컸다. 트럼프 대통령은 “핵, 화생무기, 탄도미사일을 선제적으로 폐기하면 북한 경제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겠다”고 나온 반면 김정은 위원장은 “영변에 있는 모든 핵 시설을 완전히 영구적으로 폐기할 터이니 미국은 2016년 이후 유엔 안보리에서 채택한 5개 제재 결의안 중 민수경제와 민생과 관련한 부분을 해제해달라”고 요구했다. 두 정상은 이 간극을 메꾸지 못했다.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북미 정상회동, 그리고 10월 4일 미국과 북한이 스톡홀름에서 실무접촉을 했지만 진전을 보지 못했고 오히려 의견차는 더 벌어졌다. 이는 회담 직후 북한 김명길 대표의 다음 발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우리 인민들의 발전권을 저해하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폐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미국과의 대화에 더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과거 제시했던 동시교환 원칙보다도 더 퇴행한 입장이다. 북의 이러한 입장은 한편으로 대화를 하자면서 다른 한편으로 ‘최대한 압박전략’을 강화해 나가는 미국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불만 표시라 하겠다. 결국 현 교착 국면의 일차적 원인은 핵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경직된 태도에 있다 하겠다. 

우리 정부의 역할 부재도 현재의 불확실성을 증폭하는 데 일조했다. 사실 2018년의 대반전은 문재인 대통령의 창의적 촉진자 역할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 결렬 이후 우리 정부는 무기력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한국 정부에 ‘최대한 압박전략’에 동참할 것을 요구해 왔고, 북은 한국 정부를 미국과 한통속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 정부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여 왔다. 더구나 김정은 위원장의 불만은 매우 커 보인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제시했던 ‘영변 카드’가 남측 제안에 따른 것인데, 미국이 이를 거부한 것에 대한 불만은 물론이거니와 판문점 선언과 평양 선언에서의 합의사항을 남측이 하나도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도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적극적 역할이 이러한 불확실성을 완화 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역할 역시 제한적이다. 미국과의 마찰은 물론 코로나 사태 때문에 중국으로서도 외교적 여력이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중국이 북핵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하겠다. 미국의 일방주의, 북한의 경직성, 한국의 무기력, 중국의 소극 외교가 현재의 불확실성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향후 전망은 현시점에서 세 가지로 내다볼 수 있다. 첫째, 북한이 인내의 한계를 느끼면서 화성 15형과 같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나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 같은 신형전략무기들을 시험 발사하거나 7차 핵실험을 한다면 상황은 아주 어려워질 것이다. 지난 5월 23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확대 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핵전쟁 억제력 강화’를 강조했다는 했다는 점에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북한의 이러한 도발에 대해 군사행동과 같은 강경책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한반도는 전쟁의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두 번째는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을 재개하거나 아니면 2018년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약속했던 서울 답방을 이행해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다면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될 수 있다고 본다. 서울에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에서 현안들을 검토하고 거기에서 도출된 합의안을 가지고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돌파구를 찾는다면 2018년 모델이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11월 미국 대선 전에 북미 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국면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북, 북미, 한미 간에 선순환 구도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처지에서는 이 시나리오가 가장 바람직하다. 세 번째 가능성은 악화된 현상 유지(worsened status quo)의 지속 시나리오다. 미국은 최대한의 압박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 북한은 미국의 군사행동을 촉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도발적 행동으로 맞서면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지속되면 한반도의 불확실성은 더욱 심화 될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그러면 어떻게 현재의 교착 상태를 풀어나가는 동시에 최악의 파국을 막으면서 대화와 협상을 재개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남북관계가 복원되어야 한다. 남북이 풀려야 북미가 풀리고 한미관계도 좋아질 수 있다. 특히 6월이면 21대 국회가 개원된다. 여대야소 구도에서 과거처럼 보수 야당이 남북관계의 덜미를 잡지는 못할 것이다. 미국의 반대가 있겠지만 이에 굴하지 말고 우리 정부가 단호하게 남북관계 개선에 나가야 할 것이다.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국제 제재 체제의 틀 안에서도 인도적 지원을 포함, 다양한 교류협력을 북한과 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가능하리라 본다. 특히 최근 코로나 사태와 관련한 의료지원과 공공 보건 협력 등은 얼마든지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7일 신년사서 제기했던 개별 방문과 관광, 비무장지대에 국제평화지대 조성과 문화유산 유네스코 등재, 남북철도 연결사업 활성화는 물론 9.19 공동선언에 명기된 2032년 하계올림픽 서울평양 공동 유치 건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미국도 입장을 수정해야 한다. ‘선 비핵화, 후 보상’이나 ‘최대한의 압박’ 전략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핵 시설, 핵 물질,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북한이 아무런 보장과 보상 없이 선제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계속하는 한 북한은 최후의 순간까지 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접근도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일 필요가 있다. 밴 잭슨 교수도 주장한 바 있지만 ‘선 비핵화’에 기초한 비핵화 패러다임으로는 북한 핵문제를 풀지 못한다. 목표는 비핵화에 두지만, 실질적으로는 핵군축 협상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제 전쟁을 끝내고 평화로 가야”

이와 관련해서 북한이 현재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제재 완화를 의제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일방적이고도 맹목적 제재 완화는 비핵화 협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비핵화에 진전을 보이면 더 과감하게 완화해 주고 반대로 비협조적 행동을 보이면 제재를 강화하는 조건부 제재 해제(snap-back sanction relief)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워킹그룹도 조속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북이 원하는 것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 폐기다. 북미 간 국교 관계가 정상화되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제도적으로 구축이 된다면 북한의 핵보유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최근 방위비 분담 문제와 관련하여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바, 미국이 점진적으로 주한미군을 감축할 의사가 있다면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이를 대북 비핵화 협상 카드로 사용하는 방안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1989년 미 민주당 상원의원 샘 넌과 공화당 상원의원 리차드 루가가 법제화한 ‘협력적 위협 감소’(Cooperative Threat Reduction) 방식을 북한 비핵화에 따른 보상 메카니즘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거금 150억불 규모의 예산을 마련하고 그 예산으로 소련, 그리고 나중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에 있던 핵무기들을 검증 가능하게 폐기·감축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그 예산으로 소련의 핵 관련 과학기술자들의 전업을 도모하기도 했다. 북에 대해서도 CTR과 같은 구체적인 인센티브를 제시한다면 북의 비핵화에 커다란 유인 효과가 될 것이다. 이제 북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금이 적기라고 본다. 남북대화의 통로도 재개하고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과감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정면돌파의 길’이라고 믿는다. 지금 실기하면 되돌릴 수 없는 파국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비핵화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선 비핵화, 후 평화’라는 공식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비핵화와 평화는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발상이 아니라 이 시대의 상식이다. 평화는 강압과 굴종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 신중하고 자제하며 역지사지의 자세로 타협하고 양보할 때 비로소 비핵화와 평화가 얻어질 수 있다. 한국전쟁 70년. 이제 끝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평화의 지평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의 소명이다.  

 

 

글·문정인
연세대학교 명예특임 교수,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분교(UCSD) Krause 석좌 펠로우이며,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로 활동 중이다. 미국 켄터키 대학과 윌리엄스 대학, 듀크 대학 등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이후 연세대학 국제학대학원과 통일연구원 원장,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과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를 역임했다. 김대중 대통령 도서관장과 다보스 포럼 교수 요원을 지낸 바 있다. 2000년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으로 참가한 유일한 학자로서, 미국, 중국, 일본, 유럽, 중동은 물론 북한에 이르기까지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폭넓은 인적 연계망을 가진 ‘국제적 마당발’이다. 세계적인 저명 학술지와 각종 논문집에 300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The Future of East Asia (2018), The Sunshine Policy (2012), 그리고 『중국의 내일을 묻다』(2010)를 비롯해 50여 편의 영문 저서와 편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