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늙어가야 한다
이 시대가 말하는 ‘몸의 아름다움’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젊음’이다. ‘젊음’을 무대의 전면에 내세우고 ‘늙음’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시대의 반감을 난 서울 탑골공원에서 마주한다. 그곳은 마치 ‘그들의 게토’ 같다. 나도 ‘그들’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들을 이미 타자화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어두운 그림자를 등에 업고 허리를 구부린 채 폐휴지를 줍는다. 한 끼 식사를 위해 길게 줄을 서고, 낡은 포장마차에 무기력하게 앉아 소주 한 잔을 기울인다.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이들의 ‘돈 없는 늙음’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길 위의 투명인간이 되어 시대의 풍경처럼 자리한다.
추앙받는 젊음, 밀려나는 늙음
오늘날 서울 도심엔 마치 젊음과 생(生)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늙음과 죽음 언저리에 닿은 적 없다는 듯 순결한 그것들은 아름답고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옆으로 리어카를 끄는 투명인간이 적막하게 스치듯 지나간다. 한 공간 안에서 두 장면을 동시에 마주할 때면 어떤 시대적 비틀림을 느낀다.
작은 생채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가 TV 화면과 거리에 전시된다. ‘젊은 육체’는 그 흔한 작은 상처 하나 없어 비현실적이지만, 오늘날에는 그것이 ‘아름다움의 표본’이다. 그 대상도,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 시각도 결벽에 가깝다. 극한은 반대의 극한을 몰아낸다. 젊음이 추앙받을수록 그 반대편에 있는 늙음은 우리 삶 도처에서 밀려난다. 어느 순간부터 이 시대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돈벌이’가 되었다. 젊음과 아름다움의 조합은 그 자체로 ‘돈’이 된다.
비정상의 몸이 아름다움이자 돈
화가이자 건축가, 환경운동가인 훈데르트바서(1)는 인간이 다섯 개 피부를 가졌다고 말한다. 제1의 피부는 생물학적인 우리 피부이며, 두 번째는 의복, 세 번째는 주거공간의 피부이다. 그가 훗날 추가한 네 번째 피부는 사회적 환경과 정체성이며, 다섯 번째 피부는 글로벌 환경과 생태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를 둘러싼 세계 또한 우리 피부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피부에 주입하는 아름다움의 폭력- 보톡스를 맞거나 성형을 하는 행위- 과 오늘날 무작위로 행해지는 주거공간의 불안정성, 즉 재개발의 모습에서 어떤 욕망의 교집합을 보게 된다.
늙고 늘어지고 낡은 피부에 ‘젊음’의 평지를 내주는 보톡스와 성형수술. 그리고 낡고 오래된 공간을 밀어내고 ‘뉴타운’을 건설하는 재개발사업. 오래된 것은 추방되고 밀려난다. 오래된 것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오래된 것에 담긴 역사는 ‘새것’ 앞에서 그저 ‘낡음’일 뿐이다. 오늘날, 젊음과 새것은 자연스러움을 역행하며 파괴를 통해 재구성된다. 그런 파괴를 우리는 아름다움이라 지칭하고 성장과 개발이라 부른다.
몸, 정확히는 살과 주름에 대해 더 예민하게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내가 극장 안 관객으로서 존재할 때이다. 연극을 보기 위해 객석에 앉을 때, 우리는 무대 위 배우의 몸과 마주하게 된다. 어둠 속에서, 몸과 몸은 마주한다. 그 사실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배우가 온몸으로 연기할 때, 나 역시 온몸으로 배우의 존재를 바라본다.
보톡스와 재개발, 욕망의 교집합
지난해 봄, 제롬 벨의 <루츠 푀르스터>(2) 공연을 봤다. 50살이 훨씬 넘어 보이는 한 남자 무용수의 ‘자전적 에세이’ 같은 공연이었다. 갈색 나무 의자 하나, 바닥에 놓인 생수병, 그의 몸만이 서울 남산예술센터의 둥그런 무대를 채우고 있었다. 지난해에 봤던 공연 중 유독 그 공연을 인상 깊게 기억하는 이유는 중년 남성의 ‘몸’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는 중년 남성의 ‘몸답게’ 배가 조금 불룩 튀어나왔고, 은발에 키는 훤칠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젊은 시절 자신이 추었던 춤을 기억에서 몸으로 불러온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춤은 무대 위에서 그의 몸에 새겨진 삶의 주름이 되어 우리 앞에 상연된다. 그리고 그가 펼치는 주름은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이 소박하고 텅 빈 무대와 그곳에 홀로 서 있던 배 나온 은발의 중년 남성 몸은 내게 색다른 충격을 안겨줬다. 퇴역한 무용수의 몸은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귀하며 품위 있었다. 그 또한 이 공연을 위해 많은 연습을 했겠지만, 어쩐지 ‘가공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몸은 ‘자연’스러웠다. 무대에서 ‘잘 훈련된’ 배우의 몸을 만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이토록 ‘자연스러운’ 몸을 만나기는 더 힘든 것 같다.
살과 주름 하나하나에 배우의 인생과 희로애락이 숨어 있다. 비단 배우뿐만이 아니다. 신체를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살에 지니고 있다. 살은 내 세계의 외부와 내부가 만나는 경계이다. 시간의 흐름이 내 살에 칼집을 낸다. 시간이 억세게 물결칠수록 그 주름은 깊고 굴곡지게 새겨진다. 무대 위에 올라온 자연스러운 배우 몸이 소중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배우의 몸은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진정성을 담고 있다.
이런 진정성이 때로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진다. 내가 이 시대의 아름다움을 ‘이미지’라 지칭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인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아름다움이라고 호명하는 것이 내 아름다움과 진정 일치하는가. 배우의 진정성과 각자의 아레테(Arete·사람이나 사물에 갖추어져 있는 탁월한 성질)를 가리는 ‘아름다움의 이미지’는 차라리 벗겨야 할 껍데기에 가깝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이것이 안타깝고 답답하다. 여성에게 좀더 강하게 강요되는 아름다움의 이미지가 한 명의 여성으로서 불편하다. 이 시대가 말하는 ‘아름다움’과 ‘젊음’의 기준에 저항감마저 든다.
나는 30살이 되면 누드사진을 찍고 싶다. 서른, 마흔, 쉰, 예순 살에도 살아 있다면 그 후에도 계속 누드사진으로 내 모습을 남기고 싶다. 내 삶의 모든 기억은 몸, 정확히는 ‘살’과 ‘주름’에 세세히 기록돼 있으리라. 그리고 내 장례식장에 이 모든 사진을 전시하고 싶다. 자연스레 늙어갈 수 있다면, 난 내 늙어가는 모습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연스러움이란 어쩌면 소멸을 인정하며 자신의 자리를 다른 존재에게 내주는 사라짐의 모습인지 모르겠다. 이런 자연스러움을 거부하고 젊음과 생만을 고집하는 것은 집착이며, 또 다른 죽음의 모습이다. 우리는 죽음을 거부할수록 죽음과 같은 색채를 띠게 된다. 고로, 우리는 늙어야 한다. 아름답게 늙어야 한다.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살아간다는 것이며, 잘 살아가기 위해 지금-여기, 이 순간이 중요하다. 지금-여기라는 시공간이, 그리고 지금-여기에서 호흡하고 있는 내 몸이.
<각주>
(1) 서울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2010년 12월 5일~2011년 3월 15일 훈데르트바서의 전시회가 열렸다.
(2) 2010 페스티벌 봄 참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