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국민 투기금융 뒷감당을 거부하다

2011-05-09     실라 시귀르게이르스도티르, 로버트 웨이드

미국의 공화당이 연방 예산 긴축을 위해 싸우는 동안, 포르투갈 정부는 구제금융 자금을 받기 위해 주권을 포기하려고 한다. 그리스는 부채 감면을 위해 긴축정책을 강화한다. 이처럼 금융투기꾼들 앞에 각국 정부는 하나둘 무릎을 꿇고 있지만, 아이슬란드의 국민투표 결과는 다른 해결책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위기의 대가는 위기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치러야 한다.

작은 섬, 아이슬란드는 지금 커다란 질문에 직면했다. 은행가들이 친 사고를 국민이 수습해야 하는가? 금융지배에 맞서 국민주권을 방어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력은 존재하는가? 지난 4월 10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국민은 답했다. 정부는 자국의 민간은행 상품 ‘아이스세이브’(Icesave)가 영국과 네덜란드 개인 예금자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지를 물었다. 2008년 금융위기로 초토화된 아이슬란드 국민의 대답은 이번에도 ‘아니요’였다. 전체 투표자 가운데 60%가 반대표를 던졌다. 이에 앞서 지난해 3월 첫 번째 국민투표에서는 반대표 비율이 93%에 달했다.

국민투표서 공적자금 투입 부결
유럽의 각국 정부가 금융투기꾼들,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압력을 받아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긴축정책을 펴는 시점에서, 아이슬란드의 국민투표 결과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한때 ‘탈규제’를 외치던 이들조차 모든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금융기관들이 서구 사회 전체를 위협한다며 우려를 나타내는 상황이다. 가령 아이슬란드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파이낸셜타임스>의 논설은 “시민이 은행보다 우선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며 기뻐했다(2011년 4월 13일자). 그러나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도 같은 생각인지는 의문이다.

아이슬란드 금융위기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이유는 1990년대와 2000년대, 금융산업의 팽창이 타  경제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쳐 경제 전체를 파탄시키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발생 직전인 2007년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당시 아이슬란드 국민소득은 세계 5위를 기록했다. 미국보다 60% 높은 수치였다. 레이캬비크에는 런던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화려한 고급식당들이 즐비했다. 그 옆 상점 진열장에는 럭셔리 상품들이 넘쳐났고, 길에는 덩치 큰 4륜구동 자동차들이 굴러다녔다. 2006년 한 조사에서 아이슬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혔다.(1) 아이슬란드의 3대 은행이 초고속으로 성장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8년까지만 해도 작은 공기업에 불과했던 은행들이 하루아침에 세계 300대 은행 반열에 올라섰다. 2000년 국내총생산(GDP)의 100%였던 자산 규모가 2007년에는 무려 800%에 달했다. 세계에서 이 수준을 넘어서는 국가는 스위스뿐이다.

그런데 2008년 9월 말 금융위기가 터지고 만다.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고 화폐시장은 마비됐다.(2) 채무 상환 불능에 빠진 아이슬란드의 3대 은행은 국유화됐다. 과거의 영광은 이제 스캔들이 돼버렸다.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이 사건을 역사상 가장 심각한 11개 금융사건 목록에 등재했다.

20세기 초, 600년간 외세의 지배를 받아온 아이슬란드는 북유럽에서 가장 봉건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요 외화벌이 수단은 어업이었으며, 수입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했고 그 덕분에 건설과 서비스·경공업 분야가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이슬란드 경제는 좀더 다양한 분야에서 탄탄하게 성장했다. 마셜계획 지원과 미군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기지 건설도 한몫했다. 소비자 구매력 변화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상품을 수출했고, 높은 한류 생선 어획량을 자랑했다. 인구는 적지만 교육 수준이 높고, 국가에 대한 국민의 소속감도 강했다. 아이슬란드는 국부가 쌓여감에 따라 북유럽 모델을 따라 세금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에 착수해, 1980년대에는 국민소득과 가처분 소득재분배 수준이 북유럽 평균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다른 유럽국에 비해 국가권력이 비대했고, 지역 기반의 소수 집단이 정치·경제 전반을 지배하는 체제였다.

북유럽 모델에 다가갔던 20세기
20세기 후반 현대 자본주의 체제 속에 19세기식 유사 봉건체제가 공존하는 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수십 년 동안 14개 가문이 아이슬란드의 정치·경제 요직을 독점했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문어’라는 별칭을 붙였다. 이들은 마치 지역 전체의 대표자인 양 행세하며 수입·교통·은행·보험·어업·NATO 기지 물자 공급까지 경제 전반을 장악했다.

이 과두 지배 세력은 독립당(우파)과 언론을 장악했고 행정부와 경찰, 군대의 고위직 인사에도 관여했다. 당시 집권당인 독립당과 농촌에 지지 기반을 둔 진보당(3)은 지방 공공은행들을 직접 관리했다.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 대출받으려 해도 지역의 당 간부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정도였다.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는 양 행세하는 가부장적 권력자들의 인맥이 지배하는 분위기에서 권력자의 위협, 그들에 대한 아첨과 불신이 팽배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급진적 신자유주의자들이 전통적 질서를 내부에서 뒤흔들기 시작했다. 법학도와 경영학도가 중심이 되어 만들던 <기관차>(Locomotive)라는 학생신문이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자유교역 논리를 선전하고 소수 지배 집단인 ‘문어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출세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좌파가 부진을 면치 못하는 동안 <기관차>는 성장을 거듭해 마침내 첫 총리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바로 다비드 오드손이다.

과두체제 허문 엘리트 젊은이들
1948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오드손은 독립당 소속으로 1974년 레이캬비크 시의원, 1982년 시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는 <기관차> 회원들에게 이권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민영화를 추진했다. 그중에는 시 소유 어선 매각도 포함돼 있었다. 1991년 그는 총선에서 독립당을 승리로 이끌며 총리직에 올라 무려 14년 동안 집권하고 -‘지배했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2004년에는 중앙은행 총재가 됐다. 아이슬란드 금융산업의 급격한 팽창을 주도한 것은 그였다. 그는 소수 지배계층의 이익만 대변하면서 민생을 등한시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1998~2005년 재무장관을 지낸 게이르 하르데가 그의 뒤를 이어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기관차> 그룹에서 오드손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사람이다(그 사이 진보당의 할도르 아스그림손이 잠깐 총리직을 지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신자유주의
아이슬란드의 경제자유화는 1994년부터 시작됐다. 아이슬란드는 리히텐슈타인, 노르웨이와 함께 유럽경제지역(EEA·EU 국가 간 자유무역 협정)에 가입하면서 역내 자본과 재화·서비스·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오드손 정부는 국가 자산 민영화와 노동시장 규제 완화 정책을 단행했다. 1998년에는 오드손 총리와 당시 연정 파트너였던 진보당의 할도르 아스그림손의 주도 아래 금융시장이 개방됐다. 란즈방키은행은 독립당 고위 간부 손에 넘어갔고, 경쟁사인 카우프싱은행은 진보당 인사가 차지했다. 그 뒤 소규모 은행들의 합병으로 탄생한 글리트니르은행은 국내 3위의 은행으로 자리를 잡았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이슬란드에는 값싼 금리에 힘입은 국제금융 투자 바람이 불었다. 국내적으로 3가지 요인이 바람을 부채질했다. 첫째, 금융시장에 우호적인 정부 정책이 뒷받침됐다. 둘째,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합병으로 투자은행들도 정부가 상업은행에 제공하는 보증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국가 부채 감소로 국제신용평가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란즈방키, 카우프싱, 글리트니르와 다양한 부속 계열사의 주주들은 금융에 대한 오랜 정치적 통제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오드손 정부는 국가가 보증하는 담보 대출 조건을 완화해 대출 한도를 자산의 90%까지 늘려주었다. 이제 막 민영화된 은행들은 더 좋은 조건의 상품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정부는 아이슬란드를 국제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 아래 법인세와 부가세 인하를 단행했다. 거품은 더욱 커져갔다.

법인세·부가세 인하, 세계가 격찬

아이슬란드 경제 전반에 영향력 확장을 꾀하던 신금융엘리트들은 쾌재를 불렀다. 이들은 자신의 주식 지분을 담보로 ‘자사’ 주식을 추가로 매입하기 위해 ‘자사’에서 엄청난 금액을 대출받았다. 그 결과 주가가 폭등했다. 이들은 다른 은행에까지 손을 벌렸다. B은행의 주주들이 자사 주식을 매입하기 위해 A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대신, A은행의 주주들이 자사 주식 매입을 위해 B은행에 손을 벌릴 때 편의를 봐주는 식이었다. 그 결과 A은행과 B은행의 주가는 실제 자산가치와 상관없이 폭등했다.

이 작은 섬나라의 금융시장은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신용 과잉 상황 덕분에 국민은 더 이상 소수 지배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대출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말 그대로 이들에게서 ‘독립’한 셈이다.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아이슬란드인들의 자부심의 정체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은행 소유주와 임원들은 점점 더 많은 이익과 보수를 챙겼다(이런 걸 두고 ‘내부자의 소행’이라고 한다). 이들은 돈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지원하는 정치인들에게서 점점 강력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가장 밑바닥의 서민들은 레이캬비크 상공을 가로지르는 개인 전용기들을 질투와 선망이 뒤섞인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소득 하위 50% 인구에 대한 세금 부담을 가중시키는 정부 정책 때문에 계층 간 소득과 재산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당시 “오드손의 개방 정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예”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4)

그 후 2006년 초부터 조금씩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금융 관련 언론들은 통화시장에서 자본 조달의 어려움을 겪는 은행들의 안정성을 의심했다. 아이슬란드의 국가 부채는 2003년 GDP 대비 5%에서, 2007년에는 당시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인 20%로 5배 가까이 불어났다. 2007년 주식 시가총액도 2001년에 비해 5배 수준이었다. 란즈방키·카우프싱·글리트니르 세 은행의 부채는 아이슬란드 중앙은행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실제 자산 규모는 의심스러웠지만 부채는 분명한 현실이었다. 2006년 2월, 신용평가사 피치는 아이슬란드의 국가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내렸다. 아이슬란드 경제에 ‘작은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크로나 가치는 급락하고 은행 부채는 급증했다. 외화 가치 기준으로 작성된 채무의 이행 자체가 ‘사회문제화’됐다.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 도산이 줄을 이었다. 덴마크의 단스케방크는 당시 아이슬란드 상황을 ‘가이저 경제’(Geyser·간헐온천)라고 묘사했다.(5)

아이슬란드 정치 책임자들은 그들에게 가하는 비판을 무시했고,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를 늘리기 위해 자금을 끌어들였다. 란즈방키, 카우프싱, 글리트니르와 계열사 대표들이 장악하는 상공회의소는 언론 공세에 앞장섰다. 미국의 경제학자 프레더릭 미슈킨은 거의 다 아이슬란드 경제학자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에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로 13만5천 달러를 챙겼다.(6) 아이슬란드 금융의 안정성을 보증하는 내용의 보고서였다. 런던비즈니스스쿨 출신의 리처드 포츠 역시 비슷한 일을 하고 5만8천 파운드를 챙겼다. 2007년 말, 공급주의 경제학 이론가 아서 래퍼는 “아이슬란드 경제는 전세계 경제의 모델이 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7) 당시 은행 주가 총액은 GDP의 8배에 달했다.

국가 부채 급증, 더 큰 도박에 올인
집권당이던 독립당은 2007년 5월 총선 결과에 따라 사회민주연합(8)과 연정을 구성했다. 사회민주연합은 유권자들에게 내건 공약을 어기고 금융시장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란즈방키, 카우프싱, 글리트니르는 2006년의 ‘작은 위기’에서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신규 투자와 부채(대부분 외화 기준) 상환을 위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은행들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묘책을 생각해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란즈방키가 개발한 ‘아이스세이브’라는 상품이었다. 아이스세이브는 일반은행보다 훨씬 유리한 금리를 제공하는 온라인 금융상품이었다. 2006년 10월 영국에서 먼저 출시되고 1년 6개월 네덜란드에서도 출시된 아이스세이브는 금융 전문 인터넷 사이트들의 추천에 힘입어 큰 인기를 끌면서 수많은 예금자들을 끌어모았다. 수천만 파운드가 쏟아져 들어왔다. 주고객 중에는 케임브리지대학, 런던 경찰, 정부 재정 감독기관인 영국 감사위원회 등도 끼어 있었다. 수십만 명의 개인 예금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영국에만 아이스세이브 계좌 소유자가 30만 명을 헤아렸다).

아이스세이브는 ‘지사’가 아닌 ‘지점’ 방식으로 운영되므로 지점이 설치된 현지 정부가 아닌 아이슬란드 금융 당국의 감독을 받는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금융감독원 직원 수가 안내원을 포함해 45명뿐이라는 사실을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더욱이 이들 대부분은 은행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인턴사원이었다. 또한 유럽경제지역 내 예금 지급 보장 규정에 따라 은행이 부도날 경우 아이슬란드 국민(인구 32만 명)이 해외 예금자들에게 돈을 갚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려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아이슬란드 은행들이 실질적 자산 가치를 입증하지 않고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또 다른 묘책이 있었다. 아이슬란드 3대 은행은 자신의 채권을 지방의 작은 은행들에 매각했고, 이 은행들은 이 채권으로 중앙은행의 보증을 받아 대출받은 돈을 다시 3대 은행에 빌려주었다. 금융 전문가들은 허황된 약속에 불과한 이 채권을 ‘연애편지’라고 불렀다. 3대 은행은 룩셈부르크에 지사를 설립하고 유럽중앙은행(ECB)에 연애편지를 보여줘 얻은 유동성을 아이슬란드로 송금했다.

리먼 파산하자 섬나라 경제 폭삭
아이슬란드 은행들은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고 2주 뒤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2008년 9월 29일, 글리트니르는 오드손이 총재로 있는 중앙은행에 구제자금을 요청한다. 금융시장 정상화를 위해 중앙은행은 글리트니르은행 지분의 75%를 사들이지만 오히려 불안만 증폭시켰다. 뒤이어 아이슬란드 국가신용등급은 곤두박질치고, 란즈방키와 카우프싱의 신용 공여 한도가 재조정되자 아이스세이브에 계좌가 있는 해외 예금자들의 대량 인출 사태가 발생한다. 10월 7일, 오드손은 크로나에 대한 통화바스켓 연동제 도입을 결정한다. 그러나 크로나 가치는 이미 급락했고, 아이슬란드의 외화보유고는 금세 바닥나버리고 말았다.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통화바스켓 연동제는 몇 시간 만에 정지됐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이 좋은 조건으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크로나를 환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몇 시간 사이에 수십억 크로나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크로나 가치는 말 그대로 바닥을 치게 되었다. 10월 8일,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노동당이 입안한 테러방지법에 의거해 영국 내 란즈방키 자산을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뒤이어 아이슬란드의 주가와 은행 채권,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다. 국민소득이 급격히 하락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아이슬란드 위기 해결을 위해 나섰다. IMF가 선진국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은 1976년 영국 위기 이후 처음이었다. IMF는 크로나화 안정화를 조건으로 21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한편, IMF는 영국과 네덜란드 정부의 요청도 받아들였다. 유럽연합의 예금 지급 보증 규정에 따라 아이슬란드가 영국과 네덜란드 예금자의 돈을 상환하라는 내용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정부는 우선 자국의 아이스세이브 예금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슬란드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표적은 하르데와 오드손, 독립당 중진, 사민당 소속 외무장관 지슬라도티르였다. 2008년 10월~2009년 1월 매주 토요일 레이캬비크 중앙광장에는 추운 날씨에도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수천 명씩 모여들었다. 그들은 인간사슬을 만들어 국회를 에워싸고 건물벽을 향해 과일과 요구르트 등을 집어던지며 내각 해산을 요구했다.

2009년 1월 실시한 조기총선에서 패배한 독립당-사민당 연정이 해체되고, 사민당과 새로이 부상한 좌파녹색운동이 좌파연합 정부를 구성했다. 국제금융 위기로 직격탄을 맞은 국가에서 정부가 ‘좌향좌’한 보기 드문 예다. 이 총선에서 독립당은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제도에도 불구하고 16석을 얻는 데 그쳤다. 1929년 창당 이래 최악의 참패였다.

새 연정은 신속하게 영국과 네덜란드의 아이스세이브 예금자들에게 돈을 상환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IMF 지원을 받기 위한 선결조건이었다. 새 정부는 또한 EU 가입과 유로화 도입 정책을 추진했다. 정부는 오랜 협상 끝에 2009년 10월 아이스세이브 예금 상환과 관련한 합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2016~2023년 아이슬란드 GDP의 50%에 해당되는 55억 달러(약 37억 유로)를 영국과 네덜란드에 상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좌파녹색운동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 당 소속의 보건장관이 사표를 내고, 의원 5명이 당 중앙의 투표 방침에 반기를 들었다. 2009년 12월 30일 지배적인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법안이 강행 처리되자, 그림손 대통령은 국민 정서에 반하는 법은 공포할 수 없다고 발표한다. 지난해 3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전체 투표자의 93%가 아이스세이브 합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찬성표는 고작 2%뿐이었다. 사민당과 좌파녹색운동의 지도자들은 기권을 선언했다. 지난해 5월 실시된 레이캬비크시의회 선거에서 사민당 득표율은 19%로 떨어졌다. 이 선거에서 한 코미디언이 레이캬비크 시장에 당선됐다. 10월이 되자 다시금 시위가 잇따랐다. 좌파연정은 제헌의회 구성을 승인했지만 최고법원에서 기각되고 만다.

투표 결과, 국제 분쟁 비화 우려
지난 4월, 2차 국민투표에 부친 새 아이스세이브 합의안은 이번엔 40억 달러(약 27억 유로) 상환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투표 결과 반대표가 우세하자 영국 및 네덜란드와의 분쟁은 법정 싸움으로까지 번질 기세다.

대규모 긴축정책 시행 시한이 2011년까지 연장됨으로써 아이슬란드 경제에 숨통이 조금 트였다. 지금까지 아이슬란드에는 아일랜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에 비해 비교적 덜 가혹한 긴축 의무가 부과됐다. 2006년 2%던 실업률은 2009년 7~9%로 급등했다. 아이슬란드를 떠나는 사람 수(예를 들면 아이슬란드인을 포함해 외국인 노동자, 특히 폴란드인)도 1889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어쨌든 좌파연정은 2011년부터 긴축정책을 하겠다고 약속해놓은 터다. 지방정부들은 예산 부족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행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병원과 학교 노동자들의 임금이 삭감되고 정리해고도 시작됐다. 부동산 압류 금지 조처도 지난해 말을 기해 해제됐다.

독립당-사회민주연합 연립정부가 집권 당시 발표한 예금 무한보증 방침은 나라 전체의 운명을 금융엘리트들의 손에 맡기는 상징적인 조처였다. 전체 95% 예금자 보호를 위해서는 500만 크로나(약 5만 유로) 보증상한제도로 충분했다. 그러나 상위 5%는 무한한 보증을 제공받았다. 이들이 바로 현재 공공재정을 압박하는 장본인들이다. 국가 규모가 작기 때문에 정부의 맹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의 허점이 더 빨리 드러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일찌감치 오드손은 언론과 정보의 ‘민영화’를 단행했다. 2002년 정부는 그때까지 연구의 독립성을 보장받아온 아이슬란드 국립경제연구소를 없애고 대신 은행의 연구·분석 부서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존했다.

책임자 일부 기소… 고통은 국민의 몫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아이슬란드 경제가 거품을 키우던 초반, 비판적인 보고서를 내놓던 중앙은행조차 2007~2008년 경제위기 위협이 현실화되자 오히려 보고서의 비판 강도를 낮춘 것이다. IMF 보고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식 금융기관, 은행, 정치인 모두 암묵적 합의에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은행이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말을 삼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국회는 직무유기를 이유로 하르데 총리를 기소하기로 결정했다. 금융 고위 공무원 발두르 구들로그손(과거 <기관차> 멤버)은 2008년 9월, 앨리스테어 달링 영국 재무장관과 면담하고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자신의 란즈방키 지분을 매각함으로써 내부자 정보 유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았다.

오드손은 자신이 한 일에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이번에는 레이캬비크 유력 일간지 <모르군블라디드>의 편집장이 되어 위기 상황을 호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한 해설자의 비유에 따르면, 이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불거진 상황에서 리처드 닉슨이 <워싱턴포스트> 편집장이 된 것과 같다.(9)

글 · 로버트 웨이드 실라 & 시귀르게이르스도티르 Robert Wade & Silla Sigurgeirsdottir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이 기사는 <뉴 레프트 리뷰> 65호, 2010년 9~10월호에 실린 ‘아이슬란드의 교훈’을 현재 시점에 맞게 재구성, 편집한 것이다.

<각주>
(1) World Database of Happiness, 2006, worlddatabaseofhappiness.eur.nl.
(2) ‘좌초한 신자유주의’, <Maniére de voir>, n°102, 2008년 12월~2009년 1월.
(3) 당시 야당으로는 사회민주당과 좀더 좌파 성향의 보통사람당(Common People‘s Parti)이 있었다.
(4) Hannes Gissurarson, ‘Miracle on Iceland’, <Wall Street Journal>, New York, 2004년 1월 29일.
(5) Danske Bank, ‘Iceland: Geyser Grisis’, 2006.
(6) 2008년 금융위기 발생 직후, 미슈킨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보고서 ‘아이슬란드 금융의 안정성’의 제목을 슬그머니 바꿨다. 현재 그의 이력서에 기재된 보고서 제목은 ‘아이슬란드 금융의 불안정성’이다.
(7) Arthur Laffer, ‘Overheating is not dangerous’, <Morgunbladid>, 레이캬비크, 2007년 11월 17일.
(8) 사회민주연합에는 사민당, 여성 단체, 인민연합(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 모두에 반대하는 좌파세력의 한 분파) 일부 세력이 참여했다.
(9) Thorvalder Gylfason, ‘From Boom to Bust: the Iceland Story’, <Nordics in Global Crisis>, Helsinki, p.158,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