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 ‘제도적’ 문제를 논한다고?

2020-06-30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의 많은 다국적기업은 기부활동을 자신들의 배를 불려준 각종 해악을 숨기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들 기업은 지난 5월부터 ‘블랙라이브즈매터(Black Lives Matter,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캠페인을 비롯해 미국 내 여러 흑인 단체에 수억 달러를 기부하고 있다. 이들은 미리 보험이라도 들 듯이 ‘제도적 인종차별(systemic racism)’ 반대 운동을 펴는 흑인 인권 단체를 후원한다. 애플, 시스코, 월마트, 나이키, 아디다스, 페이스북, 트위터처럼 ‘제도’가 뜻하는 바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기업들은 시위대가 경찰이 휘두르는 폭력을 넘어, 궁극적으로 (기업 경영진의 행태에 가까운) 파렴치함이라는 제도적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는 현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런 경우, 흑인들 앞에서 무릎 꿇기, 동상 철거하기, 거리 이름 바꾸기, ‘백인 특권’ 반성하기 같은 보여주기식 행동만으로는 ‘제도적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사람들의 환심을 그리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다. 최근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질식사하는 장면이 유포되면서(7쪽 참조) 대중운동이 일어났고, 미국 사회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됐다. 다국적기업 경영진들의 속셈은 기업이 손해 볼 것 없는 일련의 틀에 박힌 방식에 기댄 채 대중운동의 불똥이 튀지 않게 보호막을 치는 것이다.

 

금융위기 당시 결코 상환할 수 없을 규모의 주택담보 대출을 미끼로 무수한 흑인 가정을 파탄에 몰아넣었던 제이피모건(J.P. Morgan)의 CEO 제이미 다이먼은 최근 자사 은행의 대형 금고 앞에서 ‘무릎 꿇기’ 퍼포먼스를 펼쳤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미트 롬니는 미국 인구의 47%가 기생적으로 ‘정부에 의존해 먹고 산다’라는 발언을 했다. 그랬던 그 또한 얼마 전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참여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고 말했다.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로데는 1,000만 달러를 쏟아부어 ‘인종과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교육 접근성을 보장한다’라고 밝혔다. 이 회사는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캠프 선거운동 자금을 지원했을 당시에도 분명 이런 목적에 이바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을 것이다.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수준을 넘어선 눈 가리고 아웅 하기식 대응과는 별개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현 ‘제도’에 실제로 맞서 싸울 가능성이 누구보다 컸던 후보 버니 샌더스가 사실상 이번 사태에 지대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인 조지프 바이든에게 패했고, 그 후 불과 몇 주 만에 ‘제도적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바이든은 상원의원이던 1994년 경찰력 강화법을 마련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이후 이 법은 흑인들의 대거 체포를 허용하는 장치가 됐다. 38명의 흑인 의원 중 26명이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던 이 사례처럼, 피부색이 반드시 올바른 선택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미국 내 대다수 흑인 가정의 순자산은 2만 달러를 밑도는 근소한 수준이다.(1) 이들은 가난한 동네에 살면서 자녀를 낙후된 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다. 대출금과 주택보유세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형편 때문이다. 빚에 묶인 아이들의 장래마저 위태롭다. 문제의 핵심인 ‘제도’는 본질적으로 ‘백인의 특권’이자 자본의 특권이다. 하지만 상징적 특권을 논한다면 미국의 흑인들은 이미 대통령직까지 쟁취했다. 버락 오바마라는 대통령을 통해서.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Dalton Conley, ‘Aux États-Unis, la couleur du patrimoine 미국 내 가계 자산과 피부색’,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