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에서 벗어나 세계성에 눈뜨기

2020-06-30     로돌프 크리스탱 | 파리-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어떻게 하면 여행의 본질을 재발견함으로써 상투적인 관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전 지구적 현상이 된 이 악몽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지배에 얽매이지 않는 관계의 회복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 목적지 자체보다는 목적지로 가는 과정을 선호하게 되고, 타인의 일상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일상에서 떠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안티투어리즘(antitourism)’에 생사를 걸고 싸워온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못 한 일들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해낸 것 같다. 유엔 세계관광기구는 관광산업의 무한한 성장을 전망하며 자부심을 드러냈지만, 현재 관광은 전면 중단됐고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하이퍼모빌리티(hypermobility, 과운동성)’는 일반적으로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특히 관광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우리는 이제 언제든 이동의 중단이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며, 여기에 하이퍼모빌리티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잘 알게 됐다. 최소한의 물적·인적 자원을 이용하자고 파산과 해고, 자신이 속한 지역에 꼼짝없이 갇힌 상황, 그리고 모든 것을 소독해야 하는 사회를 감수해야 한다면, 이런 재난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대책과 보상책을 내놓으면서 코로나19 사태에 매우 잘 대처하고 있다. 지난 5월 중순,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관광산업을 강타한 ‘역사상 최악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180억 유로의 지원금을 풀었다. 벌써 저 멀리에서는, 일관성 없는 환경 정책을 감추고 있는 수많은 생략에 둘러싸인 녹색성장이라는 환상이 펼쳐지고 있다.

불편한 주제라고 해서 피하지 말자. ‘변화’를 원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변화했을 때 지금의 습관이 어떻게 바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한 변화가, 오늘날 정상적이고 실용적이며 무엇보다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안락함의 실존적 요소들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란 걸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지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소외는 삶과 일(주로 사람들이 기피하는 궂은일)의 구석구석으로 손을 뻗쳤다. 마찬가지로 행복, 풍족한 삶, 휴식, 쾌락은 물론이고, 일과 삶에서의 ‘해방’을 뜻하는 여가의 영역까지 소외 현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여기서 여가를 상품 영역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관광이 등장한다. 

중공업의 경우는 나쁜 냄새를 풍기고, 소음을 일으키며, 노동자를 근무지에 구속한다는 이유를 들어 비난하기가 쉽다. 반면, 더욱이 요즘에는 상품화된 여가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 무모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도 잘해야 비꼬는 농담으로 보고, 아니면 최악의 경우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모든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관광을 즐거운 일일 뿐 아니라 좋은 일로 보는 것이다. 관광은 인간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고, 남국이나 오지의 자연과 문화의 ‘가치를 발굴함’으로써 지역 개발에도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문화를 판매하고 이용하려면 이를 보호해야 하고, 이를 보호하려면 상품화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는 논리적 모순을 보지 못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관광은 관광이라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 즉 관광할 능력이 있다는 걸 행복으로 여기는 일반 소비자들에게 상징적인 특권이면서, 또한 최근에 다녀온 휴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아도취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임금 노동자가 늘어나고 이어서 소비사회가 발전하면서, 관광은 생산주의 사회의 보조 동력 역할을 했다. 이 위락 산업은 단숨에 노동한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생산성의 반대급부인 임금은 그리움 가득한 희망에 발을 붙인 악마와의 거래다. 임금을 받으면 어렴풋이나마 천국의 기분을 맛볼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유행과 욕망에 따라 몸을 옮기면서, 잠깐이라도 여러 종류의 천국에 들러야만 한다. 그뿐 아니라 상업적 여가가 발달하면서 임금 노동자를 소비의 테두리 안에 붙들어 둘 수 있게 됐다. 임금은 소비하기 위해 사용돼야 하는 것이다. 

 

유급휴가의 권리가 관광의 권리로 변모

노동자를 이런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은 오래된 전략이다. 일찍이 이 전략을 간파한 헨리 포드는 자동차를 더 많이 팔고, 개인의 이동성을 확실히 높이기 위해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했다. 테일러리즘(taylorisme, 미국의 발명가이자 기술자인 테일러가 창시한 과학적 관리 기법으로, 노동자의 움직임, 동선, 작업 범위 등을 표준화해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기법-역주)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헨리 포드는 강제력(coercion)을 실생활에서 실험한 나치즘을 신봉했다.(1) 다니 로베르 뒤푸르가 잘 보여줬듯이(2), 이처럼 임금 노동자는 한 번은 생산함으로써, 한 번은 소비함으로써 두 번 일한다. 광고의 선전 문구는 존재하기 위해 소비하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에게는 항상 ‘복종할 자유’가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그러면서 이 이중의 속박을 감추는 것이다. “네 자유를 내놔라, 그러면 쾌락을 선사하겠다….” 이것은 일그러진 지성의 결과물이자, 근사한 경치의 이미지와 누구든 반갑게 맞이해주는 축제 분위기의 사회가 가진 이미지를 죄다 끌어모아 마법을 부린 결과물이다. 이런 결과물만 보고 우리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위해 휴가를 떠난다. 이것은 휴가가 아니라 도피다.   

사회적 성공의 상징인, 유급휴가를 갈 수 있는 권리가 급속히 관광의 권리로 변모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관광’이란 상품화된 ‘민주화'의 증거로 판매되는 휴가를 말한다. 소비사회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소비자 민주주의로 전락한다. 그렇게 정치는 결국 단순히 ‘가계 구매력'을 관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프랑스에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 “시간을 내라,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하라, 시간을 아껴라”라는 말이 일종의 공식처럼 읊어졌다. 지식인과 정치 운동가들과 정부는 누구나 갖고 있는 이 시간의 자유를 소중히 보존함으로써 어떻게 여가를 되찾고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더 깊이 숙고했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관광이 기업적 관광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기가 막힌 눈속임의 무대라는 것이 드러났다. 

인민전선과 그 이후에는 일간지 <라 리베라시옹>을 따라, 관광은 지리적·문화적 발견을 통한 해방과 대중교육에 기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후 자본주의는 관광에 소비사회의 재분배자 역할을 맡겼다. 서비스로 제공되는 ‘자유’는 이제 구매되고 소비될 수 있다. 더 난감한 것은, 여가 활용을 ‘상품화’라는 유통구조에 끼워 넣기 위해 시작된 이러한 터무니없는 마케팅 행위를 비판적으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개혁과 혁명 간의 해묵은 논쟁이 벌어진다. 어떤 이들은 상품화된 오락 활동의 사회적 기반을 넓혀서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를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는 존재의 목적을 재고함으로써 삶의 조건과 권력 행사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포스트 코로나시대, 위생적 관광풍토가 자리잡아야

관광은 연쇄적으로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정상적인 개인으로 만들고, 어떤 기능들에 적응하게 만들며, 직장에서는 생산자로, 휴가지에서는 즐기는 사람으로 만든다.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 일시적으로 위로를 받으면, 우리는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기쁨을 느낀다. 외국에 나가면 우리가 선진국에 살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그러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마주치면 자신은 부자라고 여기는 것이다. 더불어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최악의 경우는 경멸감만 가득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게 바로 고객을 늘리고 이익을 10배로 부풀리기 위해 확대된 부르주아식 라이프스타일이다. 팬데믹이 일시적으로 중지시켰지만, 이 세계는 더 아름다운 곳으로 다시 떠나기를 열망한다. 우리는 이제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고는 이 세계가 감춘 불편함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치료 목적의 관광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보건 위기가 정확히 관광산업의 대규모적, 전 세계적 중단을 야기했다는 건 하찮게 볼 일이 아니다. 여행 포탈 서비스 이지부아야주(Easyvoyages)의 창립자인 장 피에르 나디르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위생적 관광 풍토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런 제안을 한 것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몸을 치료한 다음에는 머리를 돌보는 게 좋을 것이다. 관광이 재개되면 올여름 의료진을 위한 ‘무료’ 휴가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개발할 수 있다(근사한 휴가의 형태로).(3) 이 엉뚱한 제안은 시사하는 바가 크긴 하지만,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여가의 상업적 형태인 관광의 사회적 효용에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이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생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임시방편으로 노동자들을 달래주자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여행사 직원들이 이 상황에서 빠져나기기 위해, 코로나블루(코로나 사태로 인한 우울감)를 느끼는 사람들과 지친 의료진을 돌보는 의사가 될 것인가? 관광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유하는 데 헌신하는 새로운 공공 서비스 사절단이 될 것인가? 진료소와 마찬가지로 많은 관광지가 폐쇄되고 고립된 상태라는 점에서 이런 질문은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관광지들은 이제 곧 보건부에 편입될 것인가?

그러나 관광은 생필품이 아니다. 관광은 ‘즐기기’ 위해 집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물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불평등 감시단(Observatoire des inégalités)에 따르면 기업의 간부들은 80%가 휴가를 가지만 노동자들은 50%만이 휴가를 간다. 조건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이 비율이 꼭 같지는 않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일수록 격차는 더 커진다. 관광산업이 판매하는 서비스들은 우리가 지역과 맺는 관계가 세계화되면서 야기된 변화, 즉 탈지역화(déterritorialisation)의 징후를 드러낸다. 반면 이동 제한은 그간 부족했던 일상의 경이로움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 바로 지금 우리의 존재 조건이 적힌 중요 목록을 참조해, 현실에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동원해야 한다. 이국취향을 없애고 빅토르 세갈렌이 말한 ‘다름이라는 개념’을 일반화해서라도, 그런 취향을 우리 자신에 대해 갖도록 바뀌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일상을 살기 힘들게 만드는 것을 살기 좋게 만들고, 일상을 잊고 세상 끝으로 떠나라고 떠미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게 우리의 목표다. 우리의 일상을 대체할 수 있는 장소들을 개발하는 것에 저항하고, 현실을 개발해 기꺼이 황폐화하는 행위에 맞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토를 고립무원의 진지로 만들자는 게 아니다. 세계화(mondialisation)를 세계성(mondialité)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선구자인 시인이자 사상가 에두아르 글리상(4)은 “연속 공격을 퍼부어 대격변을 일으키는 세계화와 세계성을 구분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성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장소들, 우리가 공존하는 이 공간적 형태를 다시 생각해봄으로써, 평범한 동네에서 숲에 이르는 이 공간을 모임의 공간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 인간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혹은 인간과 물질세계 혹은 자연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맺어질 수도 있다. 민감하게 사고하고 시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지성을 지닌 사람들은 공생의 개념에서 파생된 것들을 목표로 삼는다. 남은 문제는 일반화된 효율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의 균형 잡힌 관계를 고안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대중 교육(일종의 여름철 숲속 임간학교)이 필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세계성은 생태학을 목표로 추구해야

세계성이 요구되면 상업적 관계에서 벗어난 손님 접대 정책도 반드시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도시 간, 지역 간, 국가 간에 물물교환 방식(숙소나, 소파 같은 가구 등)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세계를 향한 개방은 재지역화(relocalization) 및 정착과 공존할 것이다. 정착이란 이제 더 이상 유전적 특징(heredity)의 문제가 아니라, 여행객과 집주인이 함께 접촉 방식을 고안하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다. 이를 테면 업무 지원, 서비스 및 기술 교환, 단순히 대화에 참관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 지역 견학 등의 방식이 있다. 여기서 균일한 모델을 다른 곳으로 확장하는 것(세계화의 논리)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각 사회가 각자의 자연적 영토와 관계를 맺을 때, 분명하게 각 사회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성은 필요에 따라 문화적·자연적 다양성에 적응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적이고 지역적이며 가능한 한 멀리 확대되는 생태학을 목표로 추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에두아르 글리상과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5)의 사상이 결합될 것이다. 정치 노선은 생명 전체에 열려 있는 연대정신을 통해 세계의 ‘삶의 가능성’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여행은 이러한 확장된 연대정신을 민감하고 활발하게 경험함으로써 그 완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영혼도 없고 흥취도 없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더 깊이 있고 드물며 시적이고 덜 피상적인 교류를 행하는 것이다. 이런 여행은 원칙이 있고 정치적으로 준비된 환대의 상호적 가능성 위에 뿌리를 내릴 것이며, 여행객과 집주인이 경제적으로 비대칭적 관계에 놓이는 그런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글·로돌프 크리스탱 Rodolpe Christin 
작가. 저서에 『La Vraie vie est ici. Voyager encore? 진짜 삶은 여기에 있다.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인가?』(Écosociété, 몬트리올, 2020), 『Manuel de l'antitourisme 안티투어리즘의 매뉴얼』(2018) 등이 있다.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Johann Chapoutot, 『Libres d’obéir. Le management, du nazisme à aujourd’hui 복종할 자유. 경영, 나치즘에서 오늘날까지』, Gallimard, Paris, 2019 참조.
(2) Dany-Robert Dufour, 『Le Délire occidental et ses effets actuels sur la vie quotidienne: travail, loisirs, amour 노동, 여가, 사랑의 일상에서 서구의 정신착란과 그 실제적 결과』,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14.
(3) <Tour hebdo>, 2020년 4월 14일, www.tourhebdo.com
(4) Édouard Glissant, 『Philosophie de la Relation 관계의 철학』, Gallimard, Paris, 2009 참조.
(5) Murray Bookchin, 『Qu’est-ce que l’écologie sociale? 사회생태학이란 무엇인가?』, Atelier de création libertaire, Lyon,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