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의 위태로운 ‘명령’
불과 한 달 사이, 유엔 안보리는 두 차례나 무력 개입을 승인했다. 한 번은 리비아, 다른 한 번은 코트디부아르에서다.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유엔헌장에 비춰볼 때 예외적으로 보이는 이번 결정은 최근 대두된 ‘국가의 민간인 보호 의무’ 원칙에 따라 내려졌다. 유엔은 이제 자의적으로 ‘개입 권리’를 발동할 수 있을까?
“시민을 상대로 중화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필요한 조처를 취하도록 명령했다.” 지난 4월 4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한 말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유엔의 전투헬기와 프랑스군(Licorne) 병력이 알라산 드라만 와타라 진영 반군과 함께 코트디부아르 전 대통령 로랑 그바그보 진영 군대에 공격을 시작했다. 뉴욕의 유엔본부 안에는 이번 군사 개입 결정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직원은 이번 작전이 지난 3월 30일 만장일치로 채택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1975호)에 따라 수행됐더라도, 사무총장이 그 ‘명령’(그 주체는 안보리다)을 내릴 권한이 있는지 의문을 나타내며 ‘필요한 조처’라는 표현의 모호함을 지적한다. 유엔 소속이라는 명분으로 실무자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은 지금까지 강력한 군사적 작전과 내전 개입을 자제해왔다. 리비아에 이어 코트디부아르까지, 유엔은 지금 무리수를 두고 있다.” 한 유엔 직원의 말이다.(1) 다른 직원은 “무력에 호소하는 방식이 일반화돼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채 가시지 않던 1945년, 유엔 창설에 참여한 사람들은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정의했다. 유엔헌장이 원칙적으로 국제관계에서 ‘무력의 사용 혹은 무력을 통한 위협’을 금지(2조 4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2) 헌장에는 주권국가 내부 문제에 대한 불간섭 원칙도 포함됐다(7조 1항). 이 조항은 자주 비판 대상이 됐지만, 처음 도입할 때는 안정적 국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강대국은 다양한 구실로(자국민 보호, 부채 회수, 실제적 혹은 가상적 이웃 국가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항, 무역 분쟁 등) 다른 나라들을 침략했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범죄 행위를 일삼았다. “불간섭 원칙은 약소국들의 역사적 투쟁의 산물이다. 19세기 내내 이 국가들은 ‘문명적 가치’ 수호자를 자처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서구 국가들은 오스만제국, 아프리카, 극동 지역에 대한 군사 개입의 명분으로 인도주의를 자주 내세웠다.”(3) 그러나 무력 사용을 금하는 2조 4항은 정당방위(51조)와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단절, 침략 행위’에 대해 안보리가 결의한 조처(7장)는 예외로 두고 있다.
리비아에서 코트디부아르까지
어떤 경우이든, 유엔헌장은 무력 사용을 고려하기 전에 전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원칙에 기초해 있다.(6장) 이를 위한 수단으로는 중재 임무 수행, 사절단 파견,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등이 있다. 가령 1990년 이라크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진 바 있다. 2011년 코트디부아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리비아는 달랐다. 해당국에 비군사적 제재를 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주체는 안보리이며, 국제적으로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국가가 주도해서는 안 된다. 그 방법으로는 금수 조처(이라크), 자산 동결과 지도자의 출국 금지(리비아, 코트디부아르 등), 국제기구에서의 임시 제명(2010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리비아 제명, 아프리카연합에서 코트디부아르 제명) 등이 있다.
2002년 창설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역사상 처음으로 심각한 범죄(전쟁범죄, 반인륜적 범죄, 침략)를 저지른 지도자들에 한해 그들이 현직에 있더라도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사법적으로 기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유럽연합(EU) 의원을 거쳐 유럽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엠마 보니노는 “ICC가 전쟁범죄자가 면책권을 남용하는 것을 억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4)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중 3개국(미국·중국·러시아)은 ICC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안보리가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ICC에 제소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역사학자 츠베탕 토도로프는 말한다. “정치 무대에서 오로지 잔인한 선택지만 남는 상황은 흔치 않다. 따라서 무기력하게 상황을 방관하거나, 폭탄을 퍼부어 혼돈을 초래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식의 생각은 옳지 않다. 이런 태도는 처음부터 개입 자체를 군사적 개입으로만 사고하는 데서 비롯된다.”(5)
1945년에 선포된 이 원칙들이 마치 마술처럼 세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20세기 후반의 분쟁들을 거치며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 원칙들은 무력적 수단의 위험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벨기에 법학자 올리비에 코르탕은 “유엔헌장이 이런 (제국주의적) 관행을 뿌리뽑지는 못했더라도 침략당한 국가가 무력에 대항해 자국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래서 강대국들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때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했다. 1967년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예방적 정당방위’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역시 같은 표현을 썼다.
유엔은 창설 이후 지금까지 모두 21차례 무력 수단 사용을 (유엔헌장 7장에 의거해) 허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1950년 한국전 파병이다. 무력 수단은 다른 수단이 근본 목표 도달에 실패했을 때, 즉 평화 유지에 실패했을 때 마지막으로 고려할 수 있는 선택이다. 따라서 오직 긴급한 상황에서만 사용해야 하고, 그 결정권은 안보리에 있다. 가령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한 행위는 이 분쟁에 개입한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본다면,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을 금지하는 국제법에 대한 침해였으며 유엔 회원국에 대한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유엔헌장, 원칙적 금지와 예외 사이
군사 개입의 명분으로 인권 수호를 내세우는 것은 얼핏 논리와 정당성을 갖춘 듯 보이지만, 항상 그 안에는 불투명한 영역과 논쟁의 여지가 남기 마련이다. 가령 리비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의결하는 자리에서 러시아와 중국, 인도는 기권했고 독일은 반대표를 던졌다. 미국은 마지못해 찬성표를 던졌다. 작전 수행 주체가 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부에도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영국과 미국 언론들은 작전을 무리하게 이끈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조지 W. 부시와 비교했다. 인도 대표는 “결의안을 검토할 시간을 더 달라”고 요구하며 “파병국들이 자국 군인들의 작전 참여 방식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설 이후 21차례… 한 달 새 2차례
무력 사용에는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국제적 의견 충돌이 불가피하다. 어떤 명분에서든 살상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인권 차원에서 보면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특정 민간인을 구하기 위해 다른 민간인을 위험에 빠뜨리겠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법학자들이 ‘정의로운 전쟁’(조지 W. 부시가 한 연설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9)의 저작에 등장하는 이 말을 인용했다) 혹은 ‘인도주의적 전쟁’이라는 표현을 거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00년 구성된 한 특별위원회에서는 이 표현들 대신 ‘인도주의적 보호를 목적으로 한 군사 개입’이라는 표현을 썼다.(10) 다소 긴 이 문구는 차원이 다른 두 가지 개념(인간의 기본권과 군사적 폭력)을 간편한 흑백논리로 결합해 현실을 은폐하려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국제적십자위원회 부위원장 자크 포르스테르 역시 이 문제에 우려를 표명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인도주의가 정치적 혹은 군사적 행위와 결합되면 분쟁을 종식시키기는커녕 더 부추긴다.”(11) 이런 우려를 의식해서인지 정치인들과 언론은 완곡어법을 즐겨 사용한다. 가령 ‘공습’ 대신 ‘타격’이라는 표현을 쓴다든지, ‘전쟁을 벌인다’는 표현보다 ‘군사작전을 개시한다’는 표현을 쓰는 식이다. 끊임없이 이미지가 생산·소비되는 세계에서 리비아나 코트디부아르에서의 전투 장면을 언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개입의 의무’는 아직 논쟁 중
군사작전은 항상 예측 불가능한 측면을 내포하며, 안보리가 허용하는 작전 권한의 범위에 대해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유엔의 군사 개입이 코트디부아르 상황을 더욱 악화할지 모르며, 리비아 사태를 장기전으로 몰아갈 수 있으리라는 우려도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다. ‘국경 없는 의사회’의 창립자 로니 브로만은 리비아에 대한 군사 개입에 대해 “군사 개입이 성공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인가?”라며 의구심을 표시했다.(12)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진행 중인 작전이 유엔이 부여한 권한을 넘어서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유엔 결의안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역시 그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13) 그러나 이런 선택은 불간섭주의와 국민에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부여하는 유엔의 원칙에 위배된다. 어느 면에서 보든 무아마르 카다피가 독재자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호한 상황 속에서 각국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특정 국가 지도자를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 인도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75호에 찬성하면서도 “평화유지군은 어떤 경우에도 코트디부아르의 정권 교체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민간인 보호 의무’는 언제라도 ‘개입 의무’를 눈가림하기 위한 핑계가 될 수 있다.
인도주의 명분 뒤엔 전략적 이해관계
처음부터 리비아에 대한 군사 개입에 반대해온 독일은 안보리가 현지 상황과 무력 봉기의 실질적 성격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현 리비아 사태를 부족 차원의 봉기로 볼지, 아니면 체제 탄압에 대항한 민중의 정치적 투쟁으로 볼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군사 개입이 ‘마술’처럼 정치적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우려한다. 브로만은 “인권은 정치적 이해타산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권과 현실 정치를 분리해서 보는 관점이 옳은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서 결과를 이끌어내는 기술로서의 정치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리비아 반군 세력이 “서구 사회가 상황을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으며, 결국 그들 자신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NGO를 비롯한 몇몇 인사는 ‘불공정한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국제사회를 비판한다. 가령 아랍연맹은 이스라엘의 규칙적 공습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는 가자지구 상공에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해달라고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유엔 안보리는 특정한 태도를 취하거나 결의안 실행 방법을 선택할 때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정치기구 성격이 강하다. ‘세계 경영자 회의’와도 같은 안보리의 결정은 강제성을 띠며- 유엔총회의 결정과 달리- 실질적으로 법적 제재에서 자유롭다. 언론이나 단체들이 압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 영향력은 별로 크지 않다. 심지어 2003년 미국과 2011년 프랑스에서는 언론들이 여론 조작을 통해 정부의 군사 개입을 정당화했다. 리비아는 오히려 언론이 먼저 무력 개입을 정당화했다.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자를 자처하는 쿠슈네르(‘국경 없는 의사회’ 설립자·현 프랑스 외무장관) 같은 인물들이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군사작전을 찬성하기도 한다. 때로는 안보리 내부의 의견 불일치로 무력 개입이 늦어지기도 한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중국의 암묵적 지지를 업고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반대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유엔 안보리의 행동반경이 갈수록 확장되는 반면, 그 결의안은 여전히 우연적(사후에 변경 가능한) 요소에 좌우된다. 또한 유엔의 헌법에 해당되는 헌장의 무력 사용 관련 조항들이 안보리의 새로운 위상에 걸맞게 재검토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군사 개입은 이처럼 새로운 법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이스라엘 침략 방관하는 자의성
이런 상황에서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하다. 1990년 국제적 차원에서 이라크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국가들은 그 지역에 대해 전략적 속셈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과거 식민 모국이던 프랑스가 와타라가 이끄는 코트디아부르공화국군(FRCI)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 역시 서아프리카의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프랑스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편 반기문 사무총장은 이번 ‘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사르코지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정 국가가 이미 군사 개입을 결정한 상태에서 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인 경우 유엔을 앞세우는 것은 유용할 수 있다. 프랑스의 한 장교가 냉소와 걱정이 반반 섞인 어투로 말한다. “문제가 생기면 유엔은 어느 나라에 손을 벌리겠는가? 당연히 프랑스다.”(14) 세비야대학의 다비드 산체스 루비오 교수는 “역사상 조직적으로 벌어지는 대규모 인권유린 사태를 막겠다는 이유만으로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이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15)고 말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의 원칙을 담은 법적 체계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일각에서는 지역 대표를 두는 식으로- 가령 남아공이나 브라질에 상임이사국 자격을 부여하는 식으로- 안보리의 대의체계를 개선하면 자의적 결정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16) 그러나 안보리의 기구 성격상 지역적 대의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또는 유엔헌장에 명시된 상임 참모부가 설치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문제들보다 더 심층적 문제에 대해 질문해보아야 한다. 세계 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명백히 합법적인 국제적 대의 형태는 존재하는가? 유엔은 국가 간 이견을 좁히고 국제적 합의 속에서 도출된 규범을 점차적으로 도입하는 기구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반기문은 왜 사르코지와 통화했을까
상당수의 법학자들은 개입 의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개념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코르탕은 “현대의 국제법은 어떤 경우에도 한 국가의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국내 문제’라는 이유로 자국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국가의 행위를 ‘합법적’ 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국가가 성립하는 것은 자국 국민의 생존권이나 신체적 자유의 존중, 자국 영토 내에서의 학살 금지 같은 기본 원칙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통해서다. 각국은 ‘주권적으로’ 그런 약속을 한 것이며,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의무 역시 ‘주권적으로’ 도출된다.”(17) 따라서 이는 법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다.
유엔은 조직 면에서 불충분하지만, 능동적 평화주의의 이념 위에 창설됐다. 유엔 이념은 협력과 대화, 상호성, ‘사회적 제재’ 방식에 기초한 문화를 선호하며, 각 회원국이 힘의 논리가 아닌 공동의 규범과 ‘수평적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목표가 순진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목표는 국제 ‘공동체’가 아닌 국제 ‘사회’의 논리가 되는 힘의 논리에 맞서 점진적으로 대안을 마련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또한 민중이 스스로 선언한 주권을 존중하고(프랑스 정부는 공공연하게 선거 결과를 조작하는 아프리카 정부들을 지지한다) 서구 강대국이 주도하는 논의의 장을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장 핑 아프리카연합 집행위원장은 자신의 관점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는 의미로 지난 3월 19일 파리에서 열린 리비아 문제 관련 정상회담에 불참했다. 능동적 평화주의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위키리크스의 성공에서 보듯이 반대 의견을 존중하는 언론의 다원주의가 필요하다. 아울러 각국 정상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역사적 관점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
국제경제의 내재적 폭력이 더 심각
분쟁 예방 활동은 단지 평화적 갈등 해결(유엔헌장 6장)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무력 개입이 잦아지는 지금 상황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지구 남반구 국가들- 군사적 개입이 이뤄는 지역이 이곳에 집중돼 있다- 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국제경제 질서의 내재적 폭력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경제학자이자 해방신학자인 프란츠 힌켈라메르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권유린을 막으려는 실질적 의도로 행하는 인도주의적 개입은 민간인의 생명을 직접적이고 집단적으로 심각하게 위협하는 한계상황에서 직접 행동과 군사 개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정상적’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이미 간접적으로, 그러나 집단적이고 심각한 방식으로 인간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직접적 생명의 위협은 비난하면서, 겉으로는 인간 생명을 해치려는 어떤 의도도 없어 보이는 행위에서 비롯된 간접적 결과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18)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10년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인구가 10억 명에 달했다. 유엔의 이름으로 군사적 개입을 전개할 능력이 있는 국가들은 국제 교역 규범의 대대적인 개혁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남반구 빈곤 계층들의 사회적 권리 요구를 묵살하는 국가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 지구적으로 연결된 경제 관계 속에서 자유의 범위가 규정된다. 루비오는 지적한다. “인간 존재가 가치를 상실한 마당에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폭탄이나 인도주의적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이상해 보이지 않는가?”(19)
글 · 안세실 로베르 Anne-Cecile Robert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Radio France Internationale>, 코트디부아르 위기 관련 실시간 보도, www.rfi.fr.
(2) 1928년, 영국과 프랑스 등 15개국은 국가 차원의 정책 수단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금하는 내용을 담은 ‘켈로그-브리앙 조약’을 체결했다.
(3) Olivier Corten, ‘인도주의적 개입 권한의 모호함’, <Le Courrier de l’Unesco>, 1999년 6월, www.aidh.org.
(4) Emma Bonino, ‘La distintas formas de inetervencion’, <Revista de Occidente>, Madrid, 2001년 1월, n°236~237.
(5) Tzvetan Todorov, <Memoria del mal y tentacion del bien. Idagacion sobre el siglo 20>, Peninsula/HCS, 바르셀로나, 2002. <악의 기억, 선의 시도: 20세기를 파헤치다>(Robert Laffont·Paris·2000).
(6) Mario Bettati, <개입할 권한: 국제 질서의 변화>, Odile Jacob, Paris, 1996.
(7) 결의안 43/131, ‘자연 재앙 혹은 그에 준하는 위기 상황의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 1988년 12월 8일, 유엔 총회에서 투표 없이 채택.
(8) 결의안 2006/267, ‘무력 분쟁 상황에서의 민간인 보호’, 2006년 4월 28일.
(9)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정당한 목적’에 따라 치르는 전쟁은 정당하다는 식의 선악 흑백논리를 편 가톨릭 사상가에 속한다.
(10) 국가 주권과 개입을 위한 국제위원회, ‘보호해야 할 책임’, iciss.gc.ca/report-e.asp., 2001.
(11) Worldwide Faith News archives, 2000.
(12) <Libération>, Paris, 2011년 3월 21일자.
(13) ‘카다피는 떠나야 한다’, <Le Figaro>, <Times>,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Washington Post>, <Al-Hayat> 2011년 4월 15일자 공동 게재.
(14) <르몽드>, Paris, 2011년 4월 13일자.
(15) David Sanchez Rubio, ‘인도주의적 개입: 원칙, 개념, 현실’, <Alternatives Sud>, vol.11, n°3, Louvain-la-Neuve, 2004.
(16) 프랑수아 당글랭, ‘남반구 거인들, 열강의 시녀 노릇 거부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3월호 참조.
(17) Olivier Corten, op. cit.
(18) Franz Hinkelammert, <Leben ist mehr als Kapital: Alternativen zur globalen Diktatur des Eigentums>, Publik-Forum Verlags GmbH, Oberursel, 2002.
(19) David Sanchez Rubio, op.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