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계획경제

2020-06-30     엘렌 리샤르 | 작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사태 속에 계획경제라는 낡은 용어가 여론의 전면에 떠오르고 있다. 스탈린 통치하의 전체주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시대라는 역사적 실험은 마치 르푸스와르(Repoussoir)* 기법을 사용한 회화 작품처럼 여전히 우리의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이 상투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부분은 최근에 찾아온 기후 위기 속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새롭게 단장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계획경제’, 이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최악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이 기근 속에서 아사하는 장면이다. 설령 가장 긍정적인 이미지를 꼽으라 해도, 물품이 다 떨어져 텅텅 빈 상점 앞에 수많은 사람이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일 것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사태 속에서 계획경제라고 하는 실패한 옛 실험이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을까? 최근 들어 극우 자유주의자를 포함한 다수의 정치 지도자들이 갑자기 국가를 경제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민간 기업의 국유화, 공적 자본 투입을 통한 경제 활성화, 배당금 지급 중단과 같은 정책을 지지하고 나섰다.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소비에트 경제체제는 회화 작품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르푸스와르 기법처럼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권위주의적이고 생산주의적이지만 동시에 비효율적인 소비에트 경제체제는 그 당시 성공을 했느니 어려움을 겪었느니 논란이 있지만, 하나의 독자적인 체제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최근에 찾아온 기후 위기는 경제적 이익 추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기존의 경제 논리에 경종을 울린다. 그런데 경제 문제에 관해서 정치적 자발성을 가장 많이 끌어낸 체제가 바로 소비에트 체제였다.

소비에트 체제는 생산 수단을 사유 재산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생산 수단은 사회적 요구 및 국가가 정한 우선순위를 충족시키는 데 활용되고, 자원은 수익성이 있는 산업 현장으로 투입되어 재화를 생산하는 데 쓰였다. 계획경제 설계자의 목표는 정밀한 계산을 통해서 불필요한 경쟁과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야금 공장에서 집단 농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업은 사무국으로부터 행정적인 감독을 받았다. 나중에 부서로 승격된 사무국이 매년 세우는 연간 계획은 마치 법률처럼 강제되었다. 

연간 계획에 따라 각 유형의 상품마다 생산해야 하는 총수량이 정해졌다. 총수량은 각각의 산업 분야마다 할당되었고, 개별 기업의 역량에 맞게 세분화되었다. 연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고스플란(국가계획위원회)**과 기업 운영진 사이에 지속적인 정보 교환이 필요했다. 고스플란은 생산 계획을 고려하면서 개별 기업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이 소위 ‘물적 균형’이라고도 일컫는 균형 상태인 셈이다. 

상품 가격은 거의 모두 정부의 관리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임금을 지급할 때도 참고해야 할 지표가 있었다. 그나마 기업은 노동자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거나 생산 할당량을 조정할 수 있는 등 약간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각 기업이 지급할 수 있는 임금 총액은 담당 부처에서 매년 미리 결정해주었다(이 부처 자체도 고스플란으로부터 교부금을 받아 운영된다). 따라서 소비에트 기업이 가져가는 ‘이익’(=판매가격-판매원가)은 미리 계산된 소득(또는 손실)의 형태를 취한다. 소비에트 기업의 소명은 중앙 부처가 기업에 하달한 투자금을 다시 중앙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다. 소비에트 가격체제 하에서는 활성화된 산업분야에서 거둔 수익이 강제 보조금의 형태로 징수되어 적자가 나는 산업분야에 투입된다. 수익성과 관련 없이, 정부가 정한 우선순위에 따라 자원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이다.

1928년까지는 계획경제가 실시되지 않았다. 러시아 내전(1917~1922)이 끝나자 정부는 재산을 강제로 수용했다. 그러나 계획경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경제학자들이 계산을 해서 운영되는 편리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라고 강요하는 세력이 무력 충돌을 일으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계획경제는 전쟁처럼 엄중한 것이었다. 실제로 1927년에 열린 제15차 당회의에서는 이러한 발언이 등장했다. “군사적 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때,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경제 분야 전반 그 가운데 특히 산업 분야의 발전에 최대한 역점을 두어야 합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이 분야가 국가 방위 및 경제 안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혹한 집단화 추진, 반발 속에도 성과는 거둬

외국 투자 자본으로부터 차단되고 외교적으로 고립된, 그리고 대부분 영토가 농촌으로 구성된 이 나라에서, 자원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농민뿐이었다.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자 다수의 농민이 식량 공급의 안정성을 훼손하지 않는 속도로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갔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옛 러시아 농민들은 생산량의 많은 부분을 스스로 소비했다. 도시 외곽에 군데군데 거주했던 그들은 대부분 세금을 내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소비에트 당국은 농민들의 자급자족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집단화를 추진했다. 농민들은 이러한 당국의 시도에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그들은 가축을 도살하고, 파종 지역을 줄여서 식량 가격을 고의로 올렸다. 결과는 끔찍한 기근으로 이어졌다. 스탈린은 농민들에 대한 요구 조건을 강화하고 반항하는 농민을 추방하는 등, 단호하게 대응했다. 농민들에게 압박을 가혹하게 한 결과, 수확량이 증가했다. 1928년에서 1937년 사이에 잉여 농산물 판매량은 두 배로 늘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앨런은 이렇게 평가했다. “집단화로 인해서 지방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함으로써 산업화가 가속화되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집단화가 추진되지 않았다면, 시골에서 도시로 떠나는 이주 행렬은 미미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도시는 규모가 작아지고, 산업 생산량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물론 수백만의 희생자들이 있었지만, 결과는 나름대로 합격점이었다. 첫 5개년 계획(1929~1933)이 시작된 이후 10년 동안, 소비에트의 생산량은 1.5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서유럽의 생산량이 1.1배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옛 러시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경제적 특징, 즉 농민들이 인구의 약 4분의 3을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소련은 초창기부터 이미 라틴 아메리카 남부, 동남아시아, 서아시아처럼 불평등한 세계화의 영향 속에 정체 또는 저개발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1941년이 되자, 나치 독일군이 ‘군사 공격’을 일으켜 소련의 국토를 유린했다. 그러나 반격을 조직하기에 충분한 산업 기지를 보유하고 있었던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 독일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던 소비에트 산업화

소비에트 산업화의 폭력적인 성격은 계획을 하는 방법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계획을 추진하는 속도에서 찾을 수 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계획경제의 속도는 아직 느린 편이었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소비에트 경제가 ‘경제적 기업 활동’이라기보다 ‘군사 작전’에 더 가까웠다고 지적했다. 홉스봄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소련의 경제적 혼란이 극복되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었다고 진단하며 이렇게 적었다. 

“소비에트 시스템이 일단 우선순위를 설정하면, 전국적인 동원령이 선포된다. 그 후 비상사태에 의해서 몇 가지 우선순위가 더해지거나 갑자기 서로 상쇄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경제 주체들이 스스로 나서서 우선순위를 알아서 재조정한다. 본질적으로 이 체제는 거의 제도화되다시피 한 ‘충격’에 의해 작동한다. 비현실적으로 높은 목표를 일단 정해놓으면, 국민들이 거의 초인적인 노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죠.”(1)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적 슬로건은 경제적 손익 계산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비에트 체제는 국민들의 진지한 열정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아마 이 열정이 없었다면 소비에트는 금세 무너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소비에트는 교육을 받은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계층 이동을 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내전 중에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청소년의 수는 350만명에서 500만명으로 증가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성인 인구의 문맹률은 50%에서 20%로 급감했는데, 이 수혜는 주로 여성에게 돌아갔다.(2)

소련 지도자들은 한때 높은 용광로, 즉 고로(高爐)와 탱크의 대량 생산에 골몰했었다. 그러나 초창기까지만 해도 당국은 국민들의 소비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어떤 사회적 필요가 충족되어야 했었을까? 우리만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치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빈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현재의 소비 행태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소비 행태를 만들어야 할까? 절실하게 필요한 부문, 단순히 유용한 부문, 아니면 없어도 괜찮은 부문이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현실 사이의 격차, 종종 잔인하고 부족하고 불평등한 현실과 높은 이상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큰 격차를 어떻게 설명하고 줄일 수 있을까? 의류 생산 산업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는 이토록 풀기 어려운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3) 

내전이 한창이던 무렵, 볼셰비키는 국민들에게 의복에 대해서까지 혁명적인 금욕주의를 견지하도록 강조했다.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끊임없이 옷장을 갱신하도록 요구하는 부르주아식 의복문화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실용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의상이 더 금욕적인지를 두고 따지기까지 했다. 쿠폰 배급 시스템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다시 한번 실시된 이 시스템은 정권 유지에 중요한 계층에 안정적으로 물품을 공급해주었다.(임원, 엔지니어 및 기타 엘리트 등의 ‘노동자’들은 125개의 쿠폰을 받았다. 이는 남성용 셔츠 2개와 면화 드레스 3개를 살 수 있는 가격에 해당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이보다 약간 적은 쿠폰 100개를 받았다. 그리고 피부양자 또는 학생은 80개를 받았다. 농촌 사람들에 대해서는 농산물 생산량을 ‘급증’시켰다고 판단될 때만 쿠폰을 지급했다.)(4)

판매할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정적인 지시만으로 바지나 셔츠, 드레스의 총생산 수량을 결정하고 특정 모델의 상품 판매를 촉진할 수 있었을까? 고스플란에서 근무하는 통계학자들은 일정 소득 수준 이상이 되면, 소비자의 의류 구매가 더 이상 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임계치를 사용하여 소득별로 각 개인의 ‘합리적’ 구매기준표를 작성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러한 기준에 따르는 계획경제가 “과학적”이라고 선전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한 기준’이라는 것은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 사회적 수요와 개인적 필요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모델 하우스’(의상 창작 공간 겸 작업장)는 패션 트렌드를 정의하고 의류 공장에 상품모델을 공급하는 곳이다. 소비에트의 기초를 세운 개국공신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하는 패션을 주의 깊게 참고하면서, 유용한 패턴과 기법을 소련에 도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적 혁신은 종종 소비에트가 처한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혁신적인 의상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특정 상품모델의 재고가 바닥이 나면, 판매자는 많이 팔리는 품목을 고려하여 비슷한 신상품으로 매장을 채웠다. 따라서 매장에 전시된 컬렉션이 새롭게 갱신되는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의류산업의 70%는 여전히 스탈린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구식 모델에 따라 생산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국민의 수요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관찰하는 조치, 즉 ‘시장 조사’가 조심스럽게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감탄할 정도로 창의적인 디자인을 뽐내는 ‘모델 하우스’의 전시품과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유행이 한참 지난 의류, 이 격차야말로 소비에트 사회가 서둘러 메우고자 하는 간극이었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대다수 사람이 집에서 직접 바느질을 하거나, 몰래 재봉 공장에 찾아가 가족의 옷을 만들어 입었다. 당국은 의상 제작 매뉴얼과 규격을 널리 배포함으로써, 국민들이 집에서 바느질하는 것을 장려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 가사노동이 국가 부문과 경쟁할 정도로 성장하여, 정부가 다 채워줄 수 없는 수요를 국민들이 자체적으로 충당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최근 수천 명의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으로 제작한 소위 ‘대체용’ 마스크를 떠올릴 것이다. 공무원에게조차 마스크를 지급하지 못했던 프랑스 정부는 그들을 얼마나 기특하게 바라보았을까!

 

소련 산업부의 역할은 정치적 중재

의류산업에서 발생한 이러한 어려움은 행정부가 추진하는 계획경제가 야기하는 문제를 잘 보여준다. 과연 상품의 가격을 시장에 맡기지 않고도, 적절한 때와 장소에, 자원의 낭비도 없이 물품을 공급할 수 있을까? 한때 고도의 경제성장률에 도취되었던 소련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뒤늦게 인식했다. 그러나 생산 공정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생산량을 조정하는 문제는 더욱 커져만 갔다. 당국은 관료적 질서에 따라 이 문제에 대응해갔다. 1932년에 3개에 불과하던 산업위원회는 1940년 이전에 무려 32개로 증가했다. 고스플란은 이 문제에 압도된 나머지, 1965년부터 원자재 및 전략 장비 계획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타자기로 작성된 문서 1만1,500쪽이 70권으로 묶인 자료집에서 그 정황을 읽을 수 있다.(5) 

이 문서에 따르면 2만개의 제품이 재료 및 장비를 공급하는 국가 위원회, 고스납(Gossnab, 국가조달위원회. 전국의 주요 기업을 연결하여 개별 기업의 생산재 및 원료 조달경로를 계획하고 지시하던 기관)과 그 산하에 있던 분산된 행정기관들에 위탁되었다. 각 지역의 현물 거래소는 금융 거래소와 상응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 임무는 소련중앙은행, 고스방크(Gosbank)의 손에 맡겨졌다. 중앙은행은 판매량 예측 업무를 수행하는데 충분한 자금을 유통하며 “돈은 계획을 따라 흘러간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수많은 경제 ‘작전’을 일일이 관리해야 했다. 전국에 있는 기업 운영자들이 관리자에게 보내는 상품 가격 및 경제지표는 무려 27억 개에서 36억 개에 달했다.(6)

그러나 경제계획 수립자가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경제 관련 정보는 양질의 것이 아니었다. 관리자들은 그들의 요구를 부풀려 보고하거나, 그들이 쌓아놓은 재고에 대해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원자재가 늦게 오거나 불충분하게 배달되는 경우, 생산 계획량이 갑자기 상향 수정된다거나, 예기치 않은 고장이 발생하는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경제계획 수립자는 끊임없는 요구와 제한된 자원에 직면하자, 다운스트림, 즉 판매 중심의 생산 사슬을 활용했다. 예를 들어, 정부는 다른 제품의 구성 요소가 되는 플라스틱 생산 공장에 촉각을 기울이고 제반 요구 사항을 충족해주었다. 만약 판매하려는 바지의 수량이 부족하다면 최종 소비자만 불편을 겪겠지만, 플라스틱이 부족하기라도 하면 전국적인 규모의 ‘물적 균형’이 일거에 흐트러질 것이기 때문이다.(7) ‘돈으로 투표하기’(voter avec son porte-monnaie)가 가능했던 투표 제도조차 없어진 마당에 최종 소비자들이 경제부처의 결정을 번복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민주적 장치는 전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소련의 산업부는 정치적인 중재를 하는데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군사 산업 복합체는 흥정 과정에서 스스로를 잘 변호했지만, 경공업 분야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소비에트 경제는 생산량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고, 특히 소비재 산업이 크게 약화되었다. 

소련이 여러 나라와 지정학적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더욱이 군사 대결 이외의 분야에서도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진 이후로, 모스크바는 서구 경제와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나름의 수완을 발휘해야 했다. 그들은 더 많은 노동력, 더 많은 원자재, 더 많은 자금을 투입했다. 그러나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었음에도 경제적 성과는 썩 좋지 않았다. 자본투입은 1950년대에 연간 9.4%의 비율로 증가했지만, 추가 생산량은 ‘단지’ 5.7%만 증가한 것이다. 경제성장 속도는 1960년대 초부터 둔화되기 시작하여, 10년 동안 매년 평균 5.2%를 기록했다.

 

이윤 개념을 도입한 ‘토바르니크 학파’

의사가 병상에서 투병하는 환자 곁으로 호출되듯이, 경제학자들이 모스크바로 하나 둘씩 소환되었다.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어느 방향으로 개혁해야 하는지를 두고 크게 양 진영이 경쟁했다. 

1962년 9월, 경제학자 예브세이 리베르만은 <프라우다>(Pravda)에 ‘계획, 이윤, 보너스’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했다. 그런데 ‘이윤’이라는 경제학 용어는 소련의 전통적인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리베르만은 계획경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인물이었다. 자유로운 시장 경제 질서를 지지했던 리베르만을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을 ‘토바르니크(Tovarnik) 학파’라고 부른다. ‘상품 학파’라는 뜻의 이름 그대로 이들은 각 재화마다 투입되는 작업량을 최대한 정확하게 조사함으로써, 가격체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경제와 관련된 결정의 권한을 여러 기관으로 분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들의 두 번째 주장은 1965년 ‘경제 관리 기준’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관리 기준이 변화함에 따라 기업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도록 강요받았다. 생산량이 아니라 회전율을 기준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기업들은 제품의 품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기업 경영진은 발전소에서 제공 받은 기계에 ‘임대료’를 지불하기 위해서 보다 긴축적으로 기업을 운영해야 했다. 이제 경영진은 직원의 근로 의욕을 고취 시키기 위해 특별수당을 지급할 권한을 갖게 되었고, 투자를 하거나 공급 업체와 계약을 체결하는 데 있어서 더 많은 자율성을 누리게 되었다.

 

‘경제학자-컴퓨터학자’, 집단이 꿈꾸었던 유토피아

이처럼 현실적 개혁주의자들이 시장경쟁 질서를 모방하려고 노력했던 반면 ‘경제학자-컴퓨터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은 경제계획 시스템을 구현해내고자 했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수학 및 경제 연구소(CEMI)를 중심으로 모인 이 집단은 선형계획법(linear programming)을 발명하여 1975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레오니트 칸토로비치(1912~1986)의 선구적 업적으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다. 이들은 제너럴 모터스와 같은 미국 대기업들이 생산비용을 감축하기 위해 공장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소비에트 경제를 하나의 거대한 기업으로 조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계획경제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물가 조정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컴퓨터 네트워크로 전국을 연결하는 꿈을 꾸었다. 이것이 바로 컴퓨터 공학자 빅토르 글루시코프(1923~1982)가 키예프에서 수행했던 프로젝트다. 한편 수학 및 경제 연구소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우수한 연구자, 니콜라이 페도렌코(1917~2006)는 당국에 ‘정보 계산 및 처리를 위한 국가 통계 시스템’을 판매하고자 시도했다. 이 시스템은 러시아 전역을 연결하는 초기 형태의 인터넷이 될 수도 있었던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그는 모스크바에 컴퓨터 센터를 건설하고 전국에 2만여 개의 터미널을 설치하여 국가에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이 발상은 미국 경제로부터 가장 중요한 영감을 받아 착안 된 것이었음에도 역설적이게도 중앙 집중화에 가장 충실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과학적 분석의 토대 위에서 종합적인 계획을 수립함으로써, 올바른 정보 및 의사 결정 시스템으로 국가를 무장시키는 것”이었다.(8)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자동화 경제’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미국의 대표기업 아마존은 위에서부터 계획을 세워 아래로 하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결과로 계획을 세운다. 소비자들이 보여주는 선호도에 따라 중국에 있는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부터 프랑스에 있는 물류 창고에 이르기까지 전체 생산사슬이 결정된다. 그러나 경제학자-컴퓨터학자 집단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직접 생산사슬을 조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시스템은 당국이 내린 결정에 따라 재화의 가격을 실시간으로 조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국은 계획한 수량에 맞게 재화를 생산할 수 있게 되고, 모든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9)

 

완수되지 못한 경제개혁

그러나 소비에트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개혁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완수하지 못했다. 다만 1965년과 1969년 사이에 토바르니크 학파로부터 영향을 받아 일어난 개혁 운동이 부분적으로 전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개혁은 소비에트 경제를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공기업은 진단을 실시 할 때마다 환자에게 비용을 지불하도록 요구해야 하는 프랑스 병원과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즉, 민간 기업처럼 주요 고객층을 겨냥해서 마케팅 전략이나 가격 인하 정책을 사용하지 않고도, ‘수익’을 거두어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받았던 것이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처럼 소비에트 기업은 ‘높은 곳’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에 따라 ‘긴박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새로운 금융 시스템을 도입한 뒤로 소비에트 기업의 부채는 급증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콤비나트(Kombinat, 사회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서로 연관된 업종의 산업체가 모여 이루어진 대규모 공업단지-역주)는 파산하지 않았다. 콤비나트는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스방크 덕분에 빚을 탕감받았다. 고스방크는 국가 재정에 해를 입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콤비나트로부터 떠안은 부채를 국가 재정으로 메워 주었다. 

 1968년 보고서에 따르면 고스방크가 일부 소비재의 가격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조치가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무료 임대 주택에 거주하는 국민들에게 임대료를 부과하는 조치도 우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계획경제의 근간을 흔들고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신념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였다. 기어이 고스플란의 책임자, 니콜라이 바이바코브가 나서서, 개혁을 추진하는 경제학자들을 맹비난했다. 바이바코브가 보기에 그들은 “사회주의로부터 고정 가격 제도를 분리해내려 하고, 소비에트의 5개년 계획을 장기 계획으로 대체하고자 꾀하며, 부르주아적인 관행을 도입하여 국가를 파산으로 이끄는 자들”이었다.(10) 이렇게 개혁은 중단되었다.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된 글루시코프 프로젝트는 이미 1970년에 이르자 완전히 폐기될 운명에 처했다. 컴퓨터라는 기계에 재화의 가격을 전적으로 맡기는 행위가 합당한지에 대한 논쟁은 이미 오래전부터 불거져왔다. 컴퓨터 기술은 감미로울 정도로 순진하게 작동했다. 그러나 1962년에 노보체르카스크 사건이 일어났다. 유제품 및 육류 가격의 급증에 불만을 품고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경찰이 과잉 진압한 결과, 민간인 28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정부는 1992년까지 이 사건을 비밀에 부쳤다. 이 사건은 재화의 가격을 조정하는 임무가 얼마나 심각한 정치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수학자들의 손에 맡기기에 얼마나 무거운 중책인지를 잘 보여준다. 소비에트는 한동안 컴퓨터가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정보 처리 기술 수준으로 이 임무를 수행하려면 아마 수백만 년이 걸렸을 것이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정부는 전국적인 경제 활동을 조정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컴퓨터가 발휘할 수 있는 거대한 잠재력을 보았다. 그러나 결국 알고리즘의 힘을 활용하는 데 성공한 쪽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힘은 계속 대중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  

 

 

글·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작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러시아, 중앙아시아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번역·이근혁
번역위원


*르푸스와르(Repoussoir) : 프랑스어로 ‘밀어내다’라는 뜻의 동사, repousser에서 유래한 회화 기법 용어로, 회화 작품의 전경(前景)에 배치되어 감상자의 시선을 화면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나 물체를 일컬음. 
**고스플란(Gosplan) : 국가계획위원회. 1921년에 창설되어 소련의 경제 계획을 수립하던 기관. 

 

(1) Eric Hobsbawm, L’Ère des extrêmes. Histoire du court XXe siècle (1914-1991) 극단의 시대 : 20세기의 역사, Agone, 마르세유, 2020. 
(2) Robert Allen, Farm to Factory : a Reinterpretation of the Soviet Industrial Revolu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3) Larissa Zakharova, ‘Sur le chemin de l’abondance matérielle dans l’URSS khrouchtchévienne : suivre la mode ou consommer rationnellement 흐루시초프 집권기 소련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방법 : 유행을 따라 살거나 합리적으로 소비하기’, Vie quotidienne et pouvoir sous le communisme 공산주의 치하의 일상과 권력, Éditions Karthala, 파리, 2010. 
(4) Julie Hessler, ‘Postwar normalisation and its limits in the USSR : the case of trade’, <Europe-Asia Studies>, vol. 53, n°3, 글래스고, 2001.
(5) 참고할 논문 : Gertrude E. Schroeder, ‘The "reform" of the supply system in soviet industry’, <Soviet studies>, vol. 24, n°1, 글래스고, 1972.
(6) Alec Nove, The Economics of Feasible Socialism Revisited, HarperCollins, 런던, 1991.
(7) Francis Spufford, Capital rouge : un conte soviétique 적색 수도 : 소비에트 이야기, Éditions de l'Aube, 라 뚜흐-데그, 2016.
(8) Yakov Feygin, Reforming the cold war state : economic thought, internationalization, and the politics of soviet reform, 1955-1985,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7.
(9) 상동.
(10) 상동.
(11) 참고할 논문 : Vsevolod Pugachev, ‘Questions sur la planification optimale de l’économie nationale avec l’aide d’un réseau unifié de centres informatiques 통합 정보 네트워크 시스템을 활용하여 국가 경제에 대해 최적화된 계획을 세우는 과제’ (러시아어 원문), Voprosy Ekonomiki, 모스크바, n°7, 1964. (Durand Cédric, Keucheyan Razmig, ‘Planifier à l’âge des algorithmes 알고리즘 시대에 계획하기’, <Actuel Marx>, 파리, n°65, 2019에서 재인용.)

 

‘소비에트 세탁기 공장 책임자’의 계획경제

 

1976년의 어느 날, 버찌나무에 빨간 열매가 맺힐 무렵 소련 시민 아나톨리 페트로프 씨는 봄이 지나기 전까지 매듭지어야 할 과제를 떠올렸다. 그것은 내년에 생산할 목표량을 주무 부처에 신고하는 것이다. 세탁기를 제조하는 공장의 책임자인 페트로프 씨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올해 세탁기 1,000대를 생산하겠다고 신고했지만 사실 회사에 무리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1,200대를 준비할 계획이다. 국가계획위원회인 고스플란이 갑작스럽게 목표를 상향 수정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페트로프 씨는 국가조달위원회인 고스납에 세탁기 제작에 필요한 생산 요소, 즉 드럼에 사용할 금속과 컴퓨터 프로그램용 전자 카드, 코팅용 스테인레스 스틸 등의 수량을 보고했다. 고스플란과 고스납은 전국적으로 정보를 집계하는데, 대개 생산 요소로 요구되는 물량(수요)이 최종적으로 생산될 재화의 양(공급)보다 많기 마련이었다. 신고한 수량을 바탕으로 조정 작업이 진행되었다. 11월경이 되면 페트로프 씨는 정부로부터 쿠폰을 지급받았다. 이 쿠폰을 가지고 특정 공급 업체에 제출하면 신청한 생산 요소를 받을 수 있었다. 어느덧 새해가 밝았다. 페트로프 씨는 수북이 쌓인 눈을 바라보며「기술·금융 생산계획」(tekhnopromfinplan) 책자가 배송될 날을 눈 꼽아 기다렸다. 거의 100쪽에 달하는 이 문서에는 페트로프 씨가 한 해 동안 개인적으로 달성해야 할 모든 목표뿐 아니라,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 임금 총액까지도 기록되어 있었다. 운이 좋은 해라면 새로운 장비가 지급되리라는 반가운 소식도 담겨 있었다. 

페트로프 씨는 소위 ‘붉은 지도자’다. 같은 나이 또래의 자본가에 비해서 그는 여생이 보장되는 매우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는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애쓰거나 판매처 직원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었다. 정부는 페트로프 씨의 회사에 물품 생산 비용을 미리 조달해주고 회사의 수익까지도 보장해 주었다. 물론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 사업 운영이 복잡하게 꼬일지도 모른다. 배송이 지연된다거나 제품 생산에 투입되는 생산 요소에 결함이 발생하거나, 기계의 성능이 설명서에 적혀있는 것보다 훨씬 떨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페트로프 씨가 수령하는 보너스나 장차 듣게 될 승진 소식을 가로막을 우려가 있다. 페트로프 씨는 이러한 불안요소를 해소하기 위해 암암리에 알게 된 톨카치(tolkatchi)와 연락을 하고 지냈다. 톨카치는 늦게 배송되는 물품을 빠른 속도로 배송해야 하는 상황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불법인 것을 알면서도 긴급하게 용역을 맡길 수 있는 비공식적인 대리인이었다. 페트로프 씨의 주요 관심사는 노동자 모집이었다. 기업은 재정적인 제약이 없기 때문에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 덕분에 노동자들은 구직시장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비록 독립적인 노동조합은 없지만 노동자들은 두 다리로 ‘저항의 뜻’을 표시한다. 단적인 예로 1975년에는 20%의 노동자들이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기업 운영자는 각종 무료 서비스, 즉 거주지 제공, 넉넉한 여름휴가, 쾌적한 구내식당, 매점 설치 등을 추가적으로 제공해서라도 노동자들을 근무지에 붙잡아 두고자 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이유는 노동자들이 월급을 받아 물품을 구매하는 것보다 소비재를 직접 배급받는 편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은 소비에트 복지제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소비에트 복지의 특징은 주택·교육·건강 분야를 비롯한 전 분야에서 국민들이 광범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1970년대 중반, 각 개인이 매달 누리는 복지혜택을 돈으로 환산해보면 평균 임금의 약 1/3에 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