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디즘에 대한 거짓증거들
지난 2월 18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국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슬람 분리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슬람 분리주의를 규제하기 위해 이슬람 성직자 ‘이맘(Imam)’의 프랑스 유입과 아랍어 학습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슬림의 보수화, 그리고 지하디즘과의 연관성 의혹 속에서 이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특정한 지적논쟁이 사회발전에 대해 간결하고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한다면 거대 언론사들은 그것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지하디즘(Djihadisme)*을 둘러싼 논쟁의 지위는 독보적이다. 지하디즘을 두고 정치학자 질 케펠은 ‘이슬람의 근본주의화’로, 그의 동료 올리비에 로이는 ‘근본성의 이슬람화’로 정의한다.
최근 출판된 두 권의 책(1)을 통해 이 논쟁이 다시 불거지고 있는데 마치 권투경기처럼 서로 펀치를 날리고 있다.(<르 피가로>, 2020년 1월 17일자) 이 두 권의 책은 수감 중인 지하디스트들과의 인터뷰뿐만 아니라 프랑스 각 지역(툴루즈, 오베르빌리에, 망트라졸리, 아르장퇴유)과 벨기에 몰렌베크의 개별 연구사례까지 인용하면서 ‘이슬람적 생태계’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묘사한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슬람적 생태계는 예배소, 할랄 식당, 사이버카페, 교파별 학교, 문화협회, 스포츠협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베르나르 루지에는 “이런 사회화의 공간이 살라피 지하디스트**들을 국제사회와 그 기관으로부터 단절시키는 논리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종종 무슬림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이나 이슬람 국가(OEI)에 합류하고자 하는 충동을 부추기도 한다. 위고 미셰롱은 “감옥이 푸리에식 사회주의적 생활공동체이자, 지하디스트들이 사상을 전파하는 인큐베이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부 당국은 이런 현상을 알고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라며 어물쩍 넘기고 있다. 이런 현상은 표를 얻어 당선되는 데만 집착하는 지방의회 의원들, 그리고 이슬람을 옹호하는 지식인·운동가들 사이의 암묵적인 공모에 의해 일어난다.
바이러스처럼 전염되는 사상
이런 주장들은 대중매체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논설, 인터뷰, 라디오, TV프로그램이 앞다퉈 이 주제를 다뤘다. 그러나 이런 열광적인 반응은 이 주장들의 학문적 정확성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주장이 제시하는 이념적 틀에 열광하는 것이다. 정치학·사회운동·사회사 분야의 성과를 간과한 채 이런 작업들은 철이 지난 ‘사상사’를 되살리고 있다. 사상사는 개인이 텍스트나 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루지에는 칼 마르크스의 저술이 공산주의를 설명해주듯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기의 저작들, 그리고 아흐마드 이븐 한발(780~855), 모하메드 벤 압델와합(1703~1792), 또는 사이드 쿠틉(1906~1966)의 저술이 지하디즘을 설명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질 케펠과 베르나르 루지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벌어진 신학적 논쟁에 대한 주해 및 해석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단어의 힘을 믿고,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구체적 경험(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갈등부터 2001년 9월 11일 테러 이후 이슬람국가 수립까지)을 인용해왔다. 사상과 바이러스는 같은 방식으로 전파된다. 프랑스 정치학의 창시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앙드레 지그프리드는 “확산의 발생요소는 종자, 특정 방향으로 가해지는 힘, 그리고 확산을 가능케 하는 환경”(2)이라고 지적했다. 루지에의 표현에 의하면 노련한 운동가들은 “확산의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우리는 미셰롱의 표현대로 “줄기세포”가 둘로 분할돼 유럽과 중동에서 나란히 증식하는 모습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지하디즘 운동가들은 왜 정치 환경에 맞게 적용시키려 하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논증은 곧잘 빈 라덴, 아부 무삽 알자카위,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등 지하디즘의 주요 인사들이 했을 법한 생각을 지구적 전략으로 환원시켜왔다. 2000년 초부터 유럽을 강타했던 소규모 조직들은 대개 자율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2015년 11월 13일에 일어난, 악명 높은 파리 테러의 주동자들은 예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미셰롱과 루지에의 관점에서 보면 지하디즘의 주요 인사들은 중계자가 없는 지역에서도 거의 전능한 권능을 발휘한다. 미셰롱과 루지에는 경찰이 사건을 조사하듯 현장 정보를 분석한다. ‘X는 모스크에 종종 등장한다. X는 그곳에서 종종 Y를 만난다. 그리고 Y는 시리아에 있는 Z와 자주 연락한다...’ 이런 식으로 관계의 실타래를 따라 추적하다 보면 결국 지하디즘의 근거지에 도착한다. 이런 추론방식은 고전적인 것이다. 이 방식에 따라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탈리아 붉은 여단과 독일 적군파, 또는 프랑스 직접 행동단의 활동 배후에 모스크바 지도부의 지시가 있었다고 추정하곤 했다. 역사가 카를로 긴즈부르그는 과거 마녀사냥의 현장 속에서 이 추론방식이 사용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추론방식이 “논리적인 거짓말을 만들어낸다”라고 지적했다. 은연 중에(그리고 부당하게) 단순한 가능성으로부터 확고한 사실로 건너뛰는 이 방식은 “조건법 문장을 직설법 문장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3)
종교와 폭력의 상관관계
마찬가지로 “이슬람적 생태계”에 부여된 역할을 관찰할 때도 이런 전략적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미셰롱이 보기에 이것은 때때로 폭력으로 향하는 가속페달이 되기도 하고, ‘종교적 색채에 따른 이탈’을 목표로 한 ‘공동체의 고립’을 지향하는 자율적인 기획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유럽에서는 특정지역에서 종교집단의 출현과 폭력행위의 증가 사이에 인과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 지하디스트들의 궤적을 추적해보면 일부는 종교조직에 가입하지만 종교조직이 너무 온건하다고 판단해, 얼마 후 조직을 이탈하곤 한다. 반대로 아예 종교조직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종교와 거리를 두는 행동방식은 가족 구성원이나 소규모 또래 집단으로부터 모방되고, 확대 재생산된다.(4)
게다가 프랑스 내무부가 살라프파***의 주요 근거지로 추정하는 마르세유에는 지하디스트의 수가 매우 적다. 이것은 이런 유형의 구조가 정치적 폭력을 막는 ‘병마개’가 될 수도 있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자들은 열정적인 운동가들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민중에 그들이 미치는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 루지에의 주장에 의하면 지하디스트 운동가들은 자신을 레닌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선봉대는 억압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미셰롱은 “무슬림들은 먹잇감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채, 살라피 지하디스트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어진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루지에와 미셰롱은 프랑스 내 이슬람의 다양성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세력의 균형을 간과하고 있다.
정보기구의 자료에 의하면 2018년 현재 6,200여 개의 무슬림 예배소 중 5%에 해당하는 130개가 “근본주의적”이었다. (<르피가로>, 2018년 12월 27일자) 주로 ‘이맘(Imam)’이 성직을 담당하며 기도실에서 여러 가지 현실적인 가르침을 제공한다. 보통 지역공동체의 신자들이 이맘을 선발하지만 일부 이맘은 알제리, 터키 등 이슬람국가에서부터 프랑스로 파송되기도 한다. 이맘의 권위는 교리 그 자체보다는 가정 및 직장에서 겪는 일상적인 딜레마, 교리와 현실이 어긋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이맘은 종교적 분리주의를 옹호하기보다 사회 안에서 “종교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대안을 찾는 경향이 훨씬 강하다.(5) 이런 경향으로 인해 이맘은 때때로 교조주의적인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맘을 공격하는 이들은 다수 신자로부터 배척당하며 소수세력인 그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시리아를 떠난 청년들이 남긴 법정기록을 살펴보면, “현지에서 얻을 수 없는 답을 다른 곳에 가서 찾으라”며 내린 가혹한 추방 명령으로 가득하다.
분리주의 강조의 위험성
선봉대가 무슬림의 종교성을 괄목할 정도로 부흥시켰다는 추론에는 무리가 있다. 현 상황을 이해하려면 우선 무슬림들이 지난 40년 동안 겪었던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점점 가난해졌고 공공서비스는 계속 악화됐으며 정치적 사회적·결속력은 쇠퇴했다. 1983년 뵈르들의 행진****을 통해 얻어낸 해방에 대한 사회적 약속도 이행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이런 상황은 심지어 형제자매 사이에도 세대 차이가 날 정도로 온갖 ‘세대별 사회화’를 야기시켰다.(6) 이런 변화는 무슬림에게 개별성과 공동체 의식의 동시 발현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안겨줬다. 이런 과정에서 무슬림들을 정치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자들이 등장했다. 프랑스 무슬림 민주주의 연합은 2019년 유럽 선거에서 2만8,500표를 얻어 전체 득표의 0.13%를 차지했다. 이런 동원력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미미하지만 지역적 차원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는 무슬림들의 예배소 건설 및 보수, 학교 내에서의 배척, 식당 메뉴 문제 등 여러 현안과 관련돼 있다.(7) 루지에의 표현에 의하면 ‘이슬람의 유일한 권위를 통해 각기 다른 사람들을 전략적으로 재조직화하며 새로운 집합적 정체성을 지닌, 활동적이고 일관적인 이념적 프로젝트’을 관찰하다 보면 금세 망각하게 되는 것이 있다. 대개 한 집단을 대표하는 프로젝트들이 지닌 지극히 경쟁적인 본성, 그리고 그런 경쟁적 본성이 이념에 미치는 효과들이다.
세력집단은 그 배후에 사상을 지니게 마련이다. 사상이 곧 그 집단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종교적으로 사상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의지는 내부적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외부적인 확장을 가로막는다. 반면 세력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조직이라면 타협과 거래와 양보를 추구하게 된다.(8) 이런 맥락에서 ‘합의에 의한, 원한을 품지 않는(consensuel et non vindicatif)’(9) 이슬람 세력으로의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 실제로 프랑스 이슬람조직 연합(UOIF)은 특정 신도들을 배제하더라도 지역 당국으로부터 소통 가능한 조직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별개의 집단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프랑스 사회에서 무슬림들이 남겨온 발자취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차별을 받기는 하지만 프랑스 사회와 절연하거나 고립된 채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들이 교육과 노동의 현장 속에서 맺는 여러 관계를 간과한 채 ‘분리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한다면 마치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묘사하는 셈이다. 이는 분석과정의 오류는 물론, 정치적 미숙함을 초래하는 일이다.
글·로랑 보넬리 Laurent Bonelli
파비엥 까리에 Fabien Carrié
로랑 보넬리는 파리 낭테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파비엥 까리에는 벨기에 과학연구기금(FRS-FNRS) 연구원. 두 사람은 『La Fabrique de la radicalité: Une sociologie des jeunes djihadistes français 급진주의의 제조: 프랑스 지하디스트 청년들에 대한 사회학)』 (Paris, Seuil, 2018)의 공동저자다.
번역·이근혁
번역위원
(1) Hugo Micheron, 『Le Djihadisme français. Quartiers, Syrie, prisons 프랑스의 지하디즘: 지역, 시리아, 감옥』, Gallimard, coll. <Esprits du monde>, Paris, 2019 / Bernard Rougier (sous la dir. de), 『Les Territoires conquis de l’islamisme 이슬람에 의해 정복된 영토』,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2020년.
(2) André Siegfried, 『Itinéraires de contagions. Épidémies et idéologies 확산의 경로: 전염병과 이념』, Armand Colin, Paris, 1960년.
(3) Carlo Ginzburg, 『Le Juge et l’Historien. Considérations en marge du procès Sofri 재판관과 역사가: 소프리 재판에 대한 주변적 고찰』, Verdier, Paris, 1997년.
(4) Laurent Bonelli, Fabien Carrié ‘En finir avec quelques idées reçues sur la radicalisation(한국어판 제목: 그들은 어떻게 ‘급진화’됐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9월호.
(5) Solenne Jouanneau, ‘Imams en France, loin des clichés 한국어판 제목: 프랑스 무슬림 교단을 이끄는 이맘들은 누구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4월호, 한국어판 2016년 6월호.
(6) Stéphane Beaud, 『La France des Belhoumi. Portraits de famille(1977~2017) 벨루미 가족의 프랑스: 가족의 초상화 (1977~2017)』, La Découverte, Paris, 2018년.
(7) Étienne Pingaud, ‘Un militantisme musulman ? 무슬림 전투주의?’, Savoir/Agir, n° 22, Bellecombe-en-Bauges, 2012년 12월.
(8) Pierre Bourdieu, 『Langage et pouvoir symbolique 언어와 상징권력』, Seuil, Paris, 2001년.
(9) Margot Dazey, ‘Les conditions de production locale d’un islam respectable 상당한 규모의 이슬람 세력이 지역적인 수준에서 생산되는 여러 조건들’, Genèses, vol. 117, n° 4, Pari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