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영국인이 박노해를 다시 소환한 이유는?

2020-06-30     안선재 | 서강대 명예교수

올해로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1984)이 출간된 지 36주년,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010)가 나온 지 10주년이 되었다. 특히 『그러니…』는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던 시인이 오랜 침묵을 깨고 12년 만에 펴낸 시집으로 표지만큼이나 붉은 304편의 시가 담겨있으며, 상업광고 한번 없이 6만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인은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라며 국가보상금을 거부하고 국경 너머 평화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떼제 공동체 수사로 한국에 와서 귀화한 뒤 학자와 번역가로 활동하며 박노해의 시를 영어권 국가에 소개해온 안선재 교수가 본지에 박노해를 다시 소환한 이유는 무엇일까?

 

1984년,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디에 살고 어떤 일을 하는지,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박노해,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가 아는 것은 그는 공장노동자이자 시인이라는 것,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착취를 고발하고 노동자들의 가혹한 삶을 어루만지는, 더 나은 세상과 더 좋은 삶의 소망을 담은 시를 쓴다는 것뿐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1980년대 중반 한국에는 박노해에게 사로잡힌 두 집단이 있었다. 한 집단은 학생, 반체제 인사, 노동자들로 박정희가 피격된 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독재정권에 극렬히 저항하는 이들이다. 다른 집단은 ‘한국의 CIA’라 불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와 경찰이었다. 전자는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고, 영웅이 된 시인의 개선 행진을 보고 싶은 이들이었고 후자는 그를 체포해 굴복시키고 철창에서 남은 생을 보내게 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집단이었다. 익명의 저항 시인만큼 독재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이 있을까. ‘박노해’라는 이름이 ‘노’동자 ‘해’방이라는 뜻의 필명임을 모두가 알았고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으므로, 그는 진정 이름 없는 시인이며 얼굴 없는 시인이었다. 

철저한 검열 속에 1984년 출간된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이 준 충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앞선 1960~70년대에도 저항 시인들이 있었다. 신경림은 『농무』(1973)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그려냈고, 고은은 1970년대의 시위 현장에서 마음을 울리는 시를 낭독했다. 부패한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오적』(1970)으로 오랜 세월 옥고를 치른 김지하의 일화는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노해는 매일의 현장에서 고된 삶을 사는 ‘노동자’였다. 지금껏 이토록 강렬한 시는 없었다. 시집은 군사정부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 부 가까이 판매됐고 한국의 모든 대학생이 『노동의 새벽』을 읽었다. 경찰은 그를 잡고자 혈안이 됐지만 헛수고였다. 

『노동의 새벽』의 시 한 편, 한 편에는 그가 일상에서 만난 노동자들의 잊힌 목소리가 담겨 있다. 시에서는 부유한 공장주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시스템 안에 갇혀 쥐꼬리만 한 박봉을 받는 노동자들의 감정이 단순하게 그려진다. 철야 노동에 지치고 가난에 시달리며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박탈당한, 해고와 실직의 위협에 시달리는 고된 노동의 일상이 담담하지만 생생하게 표현된다. 첫 번째 시 <하늘>은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하늘]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 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여기 젊은 노동자 부부의 비애와 설움, 좌절이 담긴 시편이 있다. 이들은 단 하루도 쉴 수 없어 일상을 함께하지 못하고, 어딘가를 가거나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가난하다. 화공약품에 지문이 다 닳아 사회적 신분을 증명할 수 없어 전입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시에서는 번뜩이는 해학이 느껴진다. 기계에 손목이 잘린 노동자에 대한 시도 있다. 피 흘리는 그를 비싼 차에 태워주지 않는 사장과 공장장 때문에 그는 트럭 짐칸에 실려 병원으로 간다. 동료의 집을 찾아간 노동자가 잘린 손을 차마 가족에게 전하지 못하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에 묻어주었다는 시는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로 시는 계속된다. 자연스럽게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 은신해 있는지 아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누구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박노해가 생각하기에 한국 노동자들이 직면한 문제는 본질적으로 공동체 수준에서 해결되어야 했다.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개별 공장 수준의 노조 활동가들도 쉽게 색출되어 체포되기 십상이었다. 박노해는 더 넓은 사회정치적 차원의 집단적이고 혁명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이들과 긴밀히 교류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와 그 이전부터 남한에서 ‘사회주의자’는 ‘공산주의자’와 같은 말이었고 ‘빨갱이’ 낙인이 찍힌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대통령 정부하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를 열망하는 시민 의식이 성숙해지자, 1989년 박노해와 급진적 운동가들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사회주의라니! 남한 보안당국은 적색경보를 발동했다. 체포 행렬이 이어졌고 1991년 3월 10일, 마침내 박노해가 체포되었다. 그의 본명이 박기평이라는 것도 알려졌다. 아마 그는 자신의 수배 생활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사법부는 그를 시인의 위상에 걸맞게 대했다. 안기부는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인 악명높은 남산 기슭의 한 건물로 그를 데려갔다. 그는 지하 밀실에서 그 시대에 용인된 온갖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다행스럽게도 1987년 박종철 열사의 죽음 이후 금지된 물고문은 없었지만 24일간 밤낮없는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견뎌야 했다. 최근 박노해는 그 시간을 뚫고 나올 수 있게 해준 주문은 단 한마디라고 회상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루만 더. 하루만 더! 나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그래 오늘 하루가 나의 끝이다, 내 생의 마지막 하루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 더! 죽는 최후의 순간까지 하루만 더!”였다(사진에세이 『하루』 서문 중에서). 고문관들은 그가 가담한 조직 구성원을 모두 색출하고자 했고 집요하게 “단 한 명만 불어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에 응하면 계속해서 다른 조직원들의 이름도 요구할 것이었으므로 그는 침묵을 지켰다. 무자비한 24일이 지나고 법정으로 가는 길에 얼굴 없는 시인의 얼굴이 마침내 대중에 공개되었다. 그는 환하고 밝게 미소지었고, 그가 겪었을 일을 아는 사람들은 TV 화면과 신문의 사진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사법부는 시인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검찰은 그에게 ‘국가의 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다. 남한 국가 권력이 수백만 노동자와 무력한 시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공모했다면, 박노해는 분명 국가의 적이었다. 모든 시인은 국가의 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최종적으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주교도소에 수감 되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비좁은 독방에서의 감옥생활이 시작됐다. 대부분 죄수에게는 추가 징벌로 주어지는 동료들과 격리되어 고독과 싸워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시인에게는 오히려 선물과도 같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1991년에서 1993년까지 옥중에서 쓴 시를 모아 『참된 시작』(1993)이 출간됐고, 첫 달에만 3만 부, 1년간 6만 부가 판매되었다. 체포되어 고문받고, 재판받고 수감 되는 내용을 담은 시들은 노동자의 삶을 다룬 이전의 시와는 사뭇 달랐다. 실패의 인정과 좌절, 몸과 마음의 고통의 기록인 동시에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와 희망의 시편이었다. 이는 「그해 겨울나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해 겨울나무]

 

그해 겨울은 창백했다

사람들은 위기의 어깨를 졸이고 혹은 죽음을 앓기도 하고

온몸 흔들며 아니라고 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는

그 푸른 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팔락이던 이파리도 새들도 노래소리도 순식간에 떠나 보냈다.

잿빛 하늘에선 까마귀떼가 체포조처럼 낙하하고

지친 육신에 가차없는 포승줄이 감기었다.

그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

 

 (….)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죽음 같은 자기 비판을 앓고 난 수척한 얼굴들은

아무데도 아무데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디를 긁히며 나이테를 늘리며 부리는 빨갛게 언 손을 세워 들고

오직 핏속으로 뼛속으로 차오르는 푸르름만이

그 겨울의 신념이었다.

한점 욕망의 벌레가 내려와 허리 묶은 동아줄을 기어들고

마침내 겨울나무는 애착의 띠를 뜯어 쿨럭이며 불태웠다.

살점 에이는 밤바람이 몰아쳤고 그 겨울 내내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참된 시작』 출간 이후 박노해는 수감생활을 영적 수행과 성장의 과정으로 삼았다. 삭발하고 침묵을 지키며 시가 차오를 때만 펜을 들었다. 불가의 선수행자처럼 매일 벽을 마주 보고 몇 시간씩 정좌했다. 내면으로부터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물론 이따금 친구들이 면회를 왔다. 교도소 담장 밖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고 1993년 첫 민간인 대통령이 당선되며 민주주의를 향한 오랜 염원의 상징적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박노해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고, 1997년 새로운 책이 출간되면서 그의 석방 운동이 시작되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1997)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추천사가 담겨 있는데, 추기경은 수십 년간 군부독재에 맞서 인권을 위해 헌신해온 박노해에게 경의를 표하며 석방을 기원했다. 이 책은 옥중에서 침묵하는 동안 시인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화두를 간결하게 적어 내린 시적 에세이집이다.

책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가는 호송 차량 안에서 만난, 막 감옥에서 풀려난 한 여성 노동자와 나눈 대화로 시작한다. 그녀는 시인을 알아보고 자신이 마음 깊이 성찰한 생각을 토로한다.

 

 

좋은 세상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전 솔직히 공짜로 바란 거예요

좋은 세상, 좋은 세상, 하면서도 사실은

가진 자들의 부귀와 능력을 시샘하면서

좋은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몫의 행복을 훔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며 살아온 겁니다

 (….)

 

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변하려는 노력 없이

가난한 제 돈과 시간과 관심을 쪼개서 

참여하고 보태려는 구체적인 실천 없이

좋은 미래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어요

좋은 세상은 어찌 보면 우리 안에 이미 와 자라고 있는 건데,

 (….)

 

그렇게 좋은 사회가 누구 힘으로, 

어느 세월에 이루어지겠습니까?

언제쯤 이기적인 우리 노동자와 서민들이 

그런 성인으로 변화하겠습니까?

그 여자의 소박한 물음 앞에서 

나는 산산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성실하게 땀 흘리며 살아온 한 여자가 

온 삶으로 던져오는 화두 앞에,

태산처럼 육박해오는 준엄한 심문 앞에,

아아 나는 꼼짝없이 무너지고 깨어졌습니다

 (….)

 

그로부터 지난 7년 동안 나는 이 벽 속에서 죽음을 살았습니다

실패한 혁명가로서 ‘내가 왜 살아 있어야 하는가’를 찾는 것이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참혹했습니다

그 날 밤 그 여자가 내게 내린 화두가 나를

죽더라도 정직하라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이렇게 아픈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살게 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제야 

내 안에서 싹이 트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야 고요한 희망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그 날 밤 하늘이 내게 보내신 그 여자 앞에 

자신 있게 다시 서는 날까지

나의 기다림과 정진은 계속될 것입니다  

- 「그 여자 앞에 무너져내리다」 중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더 좋은 곳, 더 나은 세상,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에 필요한 삶의 모습을 그려낸다. 

1998년 초 민주주의의 수호자 김대중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노해는 그해 8월 15일, 7년 6개월의 독방 수감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다. 당시 그를 추종했던 많은 사람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감옥에서 출간한 박노해의 두 시집이 80년대 급진적 학생들에게 당연시되었던 투쟁적 혁명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노동의 새벽」도 그들의 주장과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이미 박노해는 한국 노동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급진적 투쟁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두 권의 옥중 시집에 깊게 공감한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고, 감옥에서의 사색을 통해 확신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에게 함께 살며 나누는 공동체만큼 중요하고 인간적인 공동체는 없었다. 이 생각은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농촌 공동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자연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삶의 고통과 슬픔, 기쁨을 함께 나누며 살았다. 2000년, 그와 같은 사회적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함께 비영리단체이자 비정부기구 <나눔문화>를 설립했다. 나눔 문화는 자율적 활동을 해나갈 수 있도록 정부와 재벌의 재정 지원을 거부하고, 회원들의 회비만으로 재정적 자립을 이루어냈다.

 

많은 이들은 박노해 시인이 한국 사회에서 지구촌의 문제로 관심을 옮긴 것을 놀라워한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 그는 유럽과 미국의 주요 도시를 방문했고, 그의 소식이 다시 화제가 된 것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이었다. 시민들을 보호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인간 방패’로서 전쟁 공포에 떨며 우는 아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홀로 이라크로 향했던 것이다. 그는 이라크 바그다드를 비롯한 중동 국가에서 평화 활동을 펼쳤고 2006년에는 한국군 중동 파병에 반대하며 레바논으로 향했다. 이후 전쟁과 폭력,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쿠르디스탄, 파키스탄, 아체, 버마, 인도, 에티오피아, 수단, 페루, 볼리비아를 찾아갔다. 이 여정에서 그는 작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그곳에서 마주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시를 쓰기 위한 노트도 가지고 다녔지만, 흑백사진이 그의 시적 창조의 주요한 부분이 되었다. 2010년 서울에서 첫 사진전이 열렸고 2012년에는 서울 도심에 ‘라 카페 갤러리’를 열고 한 나라 혹은 특별한 주제에 초점을 맞춘 사진전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부터 계속된 사진전에는 지금까지 30여만 명이 다녀갔다. 

2010년 저항과 삶, 혁명과 사랑을 주제로 한 300여 편의 시가 담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다. 대부분 시는 시인의 유년 시절과 해외평화활동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그려낸다. 지금 박노해 시인은 서울에서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집필을 이어가고 있다. 새로 나올 책이 무척 기대된다. 그는 2016년 10월 시작된 촛불집회 기간에는 매주 나눔문화 연구원들과 촛불집회에 참여했고 이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됐다. 

남은 이야기가 조금 더 있다. 박노해는 박기평이라는 이름으로 나고 자랐다.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나 고흥의 벌교 농촌 마을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유년 시절에 부모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7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아이들을 친척 집에 맡기고 공장에서 일했다. 

박노해의 시는 번역되어 출판된 적이 없다. 그는 아직도 세상에 ‘얼굴 없는 시인’으로 남아있다. 지난해 나눔문화 측에서 그의 삶과 작품을 해외에 알리고 싶다며 나에게 몇 편의 시를 번역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시들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가져가 관심 있는 출판사를 찾아보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시집 『노동의 새벽』,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참된 시작』 번역 초안이 완성되었다. 나눔문화 연구원들은 그의 작품을 다른 나라에 알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박노해의 작품은 정의와 평화를 향한 지구촌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정의롭고 서로 나누는 세상을 희망하는 누구에게든 영감을 주고 삶을 이어갈 힘을 주는 그의 시는 단순한 시편 모음 이상의 것이다.

그는 최근에 다양한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낸 사진전 <하루>를 서울 ‘라 카페 갤러리’에서 개최했고, 동명의 에세이집에는 전시된 작품과 한글 및 영문으로 적힌 시와 같은 캡션이 담겨 있다. 책에 실린 서문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카메라를 든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그 숨은 빛의 사람을 알아보고, 경외하고, 사랑하는 일밖에 없으니. 나의 사진과 글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하루 속에 살아있는 좋은 삶의 원형과 고귀한 인간성을 알아보고 그 ‘희망의 씨알’을 그대 순정한 가슴에 전해주는 것이니.” 

 

※ 현재 박노해 사진전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8월30일까지)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에서 무료전시 중이다.

 

 

글·안선재 Brother Anthony of Taize
1942년 영국에서 태어나 1969년 프랑스 떼제공동체 수사가 되었다. 1980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의 초대로 처음 방문한 이후로 한국에서 살고 있다. 1985년부터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2007년 이후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10년 이후에는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2011년부터 왕립아세아학회 한국지부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4년에 대한민국으로 귀화했으며 2008년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김지하, 고은, 도종환, 정호승, 신경림, 이문열 등 40권 이상의 한국 시와 소설의 영문 번역서를 냈다.

번역·유창곤
문학 전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