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에 울리는 서툰 합창
튀니지가 혁명과 선거 사이에서 주춤거린 지 4개월이 되었다. 지난 1월의 열기가 식고 봄이 찾아온 지금, 튀니지에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감돌고 있다. 일부에서는 구체제 패거리를 제거해 1956년 독립 이후 자행된 정치 독재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현재의 불안정한 전환기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다가오는 7월 24일 제헌의회 선거 실시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물론 아직 시기상조라는 비판도 받는다.
과도정부와 공안위원회, 불안한 동거
이와 같은 여론 분열로 과도정부와 새로 구성된 튀니지 공안위원회의 공존이 난항을 겪고 있다. 공안위원회는 혁명 및 정치 개혁, 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최고 결정기구로 12개 정당과 19개 단체 또는 노조, 그리고 유력인사 72명으로 구성됐다. 구성원 임명 과정은 알려진 바 없지만 3주(3월 14일~4월 7일) 만에 구성원 수는 71명에서 155명으로 늘었고, 옛 상원이 있던 바르도에 설치됐다. 공안위원회는 국민에게 외면받은 기술관료 정부에 맞선 입법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과도정부 격인 공안위원회 소속 인사들은 축출당한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 정부 때 총리인 모하메드 간누치가 주로 임명한 사람들이다. 공안위원회의 목표는 정치 개혁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튀니지의 투자자나 다름없던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고 이웃 리비아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더욱 침체되고 있는 경제와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다.
지난 2월 27일 총리로 임명된 베지 카이드 에세브시는 과도정부에서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84살의 에세브시는 23년간 벤 알리 정부가 자행해온 독재적 군국주의로 생긴 정치계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갑작스럽게 임명됐다. 독재체제 속에서 근근이 연명해온 유일한 조직인 튀니지노동총연맹(UGTT)과의 오랜 공조 관계도 한몫했다. 교육 사무관이자 경제학 교수인 압델제릴 베두이는 “튀니지노동총연맹은 1946년 창립된 이래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아랍 세계의 유일한 조직이다. 노동총연맹은 튀니지가 겪어온 모든 역사적 사건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1952년 젊은 나이로 변호사가 된 에세브시는 당시 사형선고를 받은 아흐마드 트릴리 노동총연맹 사무총장을 변호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튀니지의 유일한 대중조직(50만 명의 조합원)인 노조와 정치계의 중심 중 하나인 변호사협회 사이에 의미 있는 공조 관계가 성립됐다.
’혁명 감시자’ 자처하는 지식인들
튀니지에는 각각 8천 명의 변호사와 연수생이 있는데, 대부분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 시디부지드의 빈곤한 젊은이들의 중개자 역할을 자처한 변호사들은 빈곤층의 절망적 외침을 공리화하고, 여기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155개에 불과한 법원에 비해 그 수가 너무 많은 변호사는 구체제에서 받은 핍박에 복수전을 펼쳤다. 이들은 거리와 TV에서 열정적으로 투쟁하고 격렬한 어조로 연설한 덕분에 반대파로부터 ‘선동가’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이들의 선두에는 적극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압데라작 킬라니가 있다. 그는 튀니지 남부의 명문가 출신으로 변호사협회 회장이다. 튀니지 법원 사무실에서 만난 킬라니는 “우리 역할은 1987년 벤 알리에게 속았던 것처럼 똑같은 과정을 겪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혁명의 감시자가 되어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것이지,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정파 간 양보로 선거법 채택 성과
당초 계획보다 11일이나 늦은 지난 4월 11일에 출범한 공안위원회는 민주주의적 방법인 선거법을 채택해, 독립선거위원회를 조직하고 남녀 평등하게 선거권을 부여하며 완전비례대표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는 위원회의 대표 정치세력인 이슬람주의, 사회주의, 중도파, 바스주의(아랍민족주의), 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범아랍주의 간 협의를 통해 정해졌고, 모두가 앞으로의 헌법은 협력을 통해서만 기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각자 주장을 굽히고 양보한 결과다. 에타흐리르당의 이슬람 원리주의 분파인 살라피파가 끊임없이 분위기를 격화시키는 동안에도 이슬람주의의 엔나흐다당조차 거수로 양성의 선거권 평등안을 표결에 부쳤다. 총리는 후보자 중 1명에게만 투표하는 단기투표제를 지지했다. 이 투표제는 1914년까지 프랑스 3공화국에서 시행했던 방식으로, 지역의 유력 인사가 선출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총리는 결국 ‘최대 잉여법’(유효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한 뒤 남은 의석은 최대의 잉여표가 남은 정당에 배분하는 방식)에 따라 의석을 하는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기로 했다. 이 방식은 군소 정당을 보호하는 장점이 있지만 (튀니지에는 이미 공식적으로 51개 정당이 있다) 과격파를 배제하고 온건한 내각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튀니지공화국의 헌법은 이집트나 모로코, 알제리에서처럼 정권이 임명한 전문가 위원회에 의해 몰래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제헌의회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공안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야드 벤 아쿠르 교수는 이 엄청난 과업을 환상이 아닌 현실을 고려해 접근하고 있다. “문화적 변화가 뒷받침돼야 한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사고방식이자 원칙이다. 즉 야당을 존중하고 승리의 과실을 독점하지 않아야 하며, 정권 교체를 감수하고 선거에서 패배의 위험을 수용해야 한다.”
지역 차별과 실업, 또 다른 난제
튀니지 국민이 불만을 갖게 된 가장 근본적 원인인 지역 차별과 고용 문제는 해결하기 더 어렵다. 부르기바를 지지하는 타하르 벨크호자 전 장관은 “경제 문제는 특히 빈곤지역의 문제로, 이 지역들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흥분했다. 2억 디나르(약 1억500만 유로)의 긴급 예산이 총 24개 지역 중에서 가장 빈곤한 14개 지역에 지원됐다. 14개 지역 중에는 지난 4월에 소규모 폭동이 이어졌던 카세린, 시디부지드, 가프사가 맨 앞에 서 있다. 선거에 앞서 튀니지를 가로지르는 도르살레산맥 지역에서 확실한 첫 성과를 거두고 싶은 총리는 7월 24일 전에 ‘젠두바에서 메드닌에 이르는’ 야심찬 지역발전 계획을 발표하려고 한다. 계획명도 ‘부아지지 계획’이라고 이미 결정해놓았다. 시디부지드의 노점에서 채소를 팔던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이름을 딴 것으로, 지난해 12월 17일 부아지지의 분신이 반정부 시위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부아지지 계획에는 튀니지의 서부 개발과 교육수준 향상, 의료 시스템 현대화 및 지역 자원 개발 등이 포함될 것이다.
또 다른 과제인 고용은 국가적 차원의 문제다. 실업자 50만 명 가운데 4분의 1이 대학을 졸업했고, 폭동과 그 여파(공장 파손 및 폐쇄, 약탈 등)로 지난 1월 1일 이후에만 노동자 2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노동자 5만 명이 리비아에서 돌아왔다. 심지어 오는 7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시장에 유입될 인원이 7만 명에 달한다. 즉, 6개월 만에 총 14만 명의 구직자가 증가한 것이다. 낙관적인 정부는 관공서 및 경찰, 민간부문에서 6만 개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첫 번째 중등교원자격증 시험 결과 발표조차 몇 주 미뤄야 했다. 3천 명을 뽑는 데 10만 명이 지원한 상황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지 않을지 긴장이 고조됐기 때문이다.
젊은이 수천 명이 이탈리아의 람페두사섬으로 불법 이민을 시도하고, 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버젓이 밀수품을 판매하며, 사회 혼란을 틈타 미성년이 범죄에 빠져드는 사이 사회·정치적 시위 형태가 변화하고 있다. 관료주의에 의해 오랫동안 묻혀왔던 소송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30여 명이 함께 버스를 빌려 튀니스로 와서 고속도로나 철길, 호텔, 관공서, 가스공급관 근처 등 상징적 장소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는 일이 많아졌다. 책임자나 관료, 기업 사장이 해고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도르살레의 시위가 잦은 지역에서는 튀니스에서 임명한 시의원을 여러 차례 쫓아낸 바 있다. 또한 ‘도르살레의 과격파’는 지난 1월 말 입헌민주연합의 장관 8명을 몰아냈고, 2월 말에 다시 한번 대규모 시위를 벌여 입헌민주연합 소속의 간누치 총리를 사임시켰다. 과연 혁명의 다음 표적은 누가 될 것인가.
글 · 장피에르 세레니 Jean-Pierre Séréni
번역 · 배영미 youngmib0222@gmail.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