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코트디부아르의 또 다른 전쟁

2011-05-09     블라디미르 카뇰라리

코트디부아르의 알라산 다르만 와타라 신임 대통령이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을 체포하면서 ‘종전’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분열된 이 나라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지난해 11월 총선 갈등으로 촉발된 두 세력 간 분쟁은 신문사와 방송사를 통해 확산돼왔다.

지난 4월 11일 월요일, 전세계 텔레비전에는 망연자실한 로랑 그바그보와 낙담한 그의 아내 시몬의 영상이 방송됐다. 지난 10여 년간 코트디부아르의 정권을 장악한 부부는 유엔평화유지군(UNOCI) 소속 프랑스군 리콘(Licorne·일각수)이 폭격한 대통령 관저 지하에서 체포됐다. 무음의 짧은 영상은 <코트디부아르 텔레비전>(TCI)에서 처음 보도됐다(그바그보의 입술이 움직였는데, 과연 뭐라고 했을까?). 이 방송사는 알라산 와타라가 지난해 12월 말 국영기관인 <코트디부아르 라디오·텔레비전>(RTI)의 절대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설립한 채널이다. 신임 대통령은 국민에게 전쟁이 종결됐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논란이 계속되는 지난 대통령 선거 제2차 투표일인 2010년 11월 28일부터 영상은 총칼 못지않은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선 직후부터 무기가 된 영상

1960년 독립 이후로 30년간 <RTI>는 국영신문 <형제애의 아침>과 함께 미디어를 독점했다. 게다가 신문은 매일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오늘의 생각’으로 시작했고, 그는 유일 정당의 대표로 장기 집권했다. 대통령 개인 리포터인 조지프 디오망데가 한껏 고무돼 서술하는 정부의 활동과 국가원수의 일정이 주요 내용이었다. 농업이 주요 경제활동인 국가에서 국영 미디어는 보건위생방송, 전 국민 내 마을 가꾸기 대회, ‘방송교육’ 등을 통해 공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대다수가 아직 문맹인 국민을 교육하는 데 사용됐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오는 기자들은 권력의 대리인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아프리카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어오면서 당시 연로한 우푸에부아니는 시장을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긴 했지만 언론사는 급증했고,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코트디부아르에 20여 개 일간지가 생겨났다.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코트디부아르는 서부아프리카통화권 국가 중에 가장 부유한 나라였고, 코트디부아르 국민은 이웃보다 구매력이 높았다. 게다가 신문사 설립에 필요한 행정 절차 또한 간소화됐다. 불행히도 매체가 다양화됐다고 해서 전달되는 정보의 질이 향상되진 않았다. 정당의 지배를 받는 일간지들은 국영 미디어의 폐단을 답습했다. 명석한 기자들은 여기서 벗어나려 했지만 1993년 우푸에부아니가 숨진 뒤 긴박해진 정치 상황 때문에 점점 힘들어졌다. 언론 자유화는 점차 이런저런 프로파간다의 자유화로 변질됐다. 주로 신문 1면을 장식한 허황된 루머는 이른바 ‘제목 평론가’의 잡담거리가 됐다. 글자 그대로 그들은 지나다가 가판대에 놓인 신문의 1면 제목만 읽고 현안을 논했다. 이런 편협함 때문에 판매부수가 하락하면서 결국 기자들은 후원금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찬사로 가득한 기사를 후원하는 이들로 인해 체념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RTI>는 그나마 다른 매체보다 자제하며 국가원수를 찬양했지만, 우푸에부아니의 후임 앙리 코난베디에 대통령의 손아귀에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1993년 방송 허가를 받은 국제방송사 <RFI> <BBC> <Africa n°1>은 적절한 시점에 발을 뺐지만 점점 극단적으로 되어가는 국영 언론사에 정계 분위기는 악화됐다. 국가가 분쟁으로 황폐해지자 기사는 점점 증오에 차고, 기자는 자신을 전투병과 동일시했다. 집권 2년차인 그바그보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기 위한 반란이 일어난 2002년 9월 19일 외국 방송사는 즉시 방송이 중단됐고, (반란의 배후로 지목된) 와타라를 지지하는 일간지와 민영방송사 사옥은 습격을 받아 훼손됐다. <RTI>는 체제를 지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프로파간다 수단이 됐다. 공공미디어그룹 경영진은 와타라의 정당인 공화주의자연합(RDR)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전파를 타지 않도록 신경 썼다. 서방국가의 기자들은 일방적인 모함을 받아 범죄자로 세상에 알려지고 주소도 공개됐다. 그바그보 대통령을 지지하는 ‘애국자들’의 거센 비난이 끊임없이 방송됐다. 이웃 나라 부르키나파소가 반란군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부르키나파소 국민에 대한 보복이 이어졌다. 국영라디오도 2002년 10월 6일 논설위원의 목소리를 빌려 “코트디부아르에 거주하는 부르키나파소인 50만 명만 쫓아도 반군 지도자(부르키나파소 대통령 블레즈 콩파오레를 암시)가 서부아프리카 통화권에서 코트디부아르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거들었다.

언론 자유 아닌 프로파간다의 자유뿐
언어폭력은 처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신체적 폭력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반목이 불거지고 한 달 뒤 프랑스군이 개입해 반란군을 저지하면서 사실상 국가의 분할을 인정했다. 반군이 점령한 중부와 북부에서는 <RTI> 방송이 중단됐고, 현지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국민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2007년 3월 (부르키나파소) 와가두구 평화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양쪽 진영의 수탈은 계속됐다. 협약 내용이던 대선은 6차례나 연기돼 지난해 11월에 실시됐다. 주기적으로 방송이 중단되던 <RFI> 같은 외국 미디어들이 방송을 재개했다. 2010년 대선 운동 기간 전까지 정계에 이어 미디어업계의 긴장이 완화됐다. 지난해 11월 28일 일요일 제2차 선거일 저녁 8시 뉴스부터 <RTI>는 다시 작전을 개시했다. 와타라와 참모진은 방송에서 사라졌다. 북부에서 자행된 폭력과 비리에 관한 르포르타주만 이어졌다. 반박할 권리도 없고 남부와 서부에서 일어난 수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11월 30일 화요일 오전 전국이 1차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RTI>는 독립선거위원회(CEI)에서 철수했다.(1) <RTI>에는 헛되이 개표 결과를 발표하는 CEI 대변인의 모습이 빠졌고, 위원회 일원이자 코트디부아르학생연맹(Fesci)의 전 지도자인 다마나 피카스는 외국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대변인이 들고 있던 서류를 찢어버렸다. Fesci는 2000년부터 그바그보에게 용병을 공급하던 조직이다.(2)

방송마다 지지 후보를 당선자로 발표
지난해 12월 2일 목요일, 놀랍게도 와타라의 지역에 있는 걸프호텔에서 유수프 바카요코 CEI 위원장이 와타라를 당선자로 발표했다. 이 모습은 <RTI>에서 방송되지 않았고, 이를 방송한 외국 미디어 송출과 SMS 발송은 중단됐다. 다음날 헌법위원회는 그바그보가 당선자라고 발표했다. (전날부터 유일하게 방송을 계속하던) 국영텔레비전은 이 장면을 반복해서 방송했고, 이 결과를 타당하다고 설명하는 변호사들 인터뷰도 중간중간 방송됐다. 이상하게도 이런 경우 기존 선거는 무효이고 선거를 재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의 코트디부아르 선거법 제64조를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2월 4일 국영텔레비전에는 자신이 코트디부아르의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선서하는 그바그보의 모습이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유엔, 미국, 프랑스, 아프리카연합이 와타라의 승리를 인정한 상황에서 이후 몇 주간 불평등한 이두체제가 자리잡았다. 내부적으로 그바그보는 권력의 중심지 아비장을 장악했다. 와타라는 UNOCI의 보호를 받으며 걸프호텔로 물러나 있었다. 와타라의 지지 세력은 외국이었다. 이런 대치 상태에서 그바그보는 그가 직면한 외국의 일치된 모습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 ‘미디어 전쟁’을 시작했다.

나라 밖 언론 플레이 VS 자기 방송사 신설
미디어 전쟁의 핵심은 구식민지 대국이자 오늘날까지 코트디부아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프랑스에서 펼쳐진다. 그바그보는 다양한 프로필의 언론계 인맥을 가졌다. 2010년 선거운동 당시 그바그보는 스테판 푸크 Euro RSCG(아바스의 자회사) 사장을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볼로레 그룹(프랑스계) 소속 방송사 선정은 2003년 볼로레 그룹에 아비장항 운영권을 수의계약으로 양도하고 2008년 뱅상 볼로레 회장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선거 이후 몇 주 동안 볼로레 그룹 신문들은 그바그보에게 많은 힘을 실어줬다. 그바그보의 다른 인맥은 정치판에 몰려 있다. 우선 기 라베르티를 필두로 한 사회당(PS) 출신 옛 동료들이 있다. 그는 당에서 ‘미스터 아프리카’로 통했고, 1980년대 그바그보가 프랑스로 망명했을 때 그를 자신의 집에 묵게 해줬다. 사회당 지도부가 그바그보에게 퇴진을 요구할지라도 그는 그바그보를 지지할 것이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연방방어그룹(GUD)의 전 책임자 베르나르 우댕, 장마리 르펜의 전 고문이자 변호사인 마르셸 세칼디 같은 극우 출신 동료들도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의 개입주의를 비난하는 장마리 르펜의 딸 마린 르펜도 그바그보의 지지자다. 그바그보는 코트디부아르 내전을 프랑스와의 분쟁으로 비화하려 하는데, 그녀가 이를 돕고 있는 셈이다. 그바그보의 의도는 프랑스 여론은 물론 아프리카 여론에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바그보 실각 뒤 국영방송도 중단
이 모든 인사들이 ‘저항적인’ 그바그보를 지지하고 국제적 개입보다 코트디부아르 헌법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프랑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출연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 자크 베르게스와 로랑 뒤마는 그바그보 진영에 프랑스 미디어로 통하는 새로운 창문을 열어줬다. 이 변호사들은 ‘백서’ 작성을 발표했다.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은 채 ‘두 명의 대통령’에 대해 외국 여론에서 의심의 싹을 틔우는 것이 목표이다. 이 두 명은 대부분 <RTI>에서 차용한 ‘증거’를 바탕으로 논고를 작성했다. 미디어 전쟁에서 와타라는 코트디부아르 국민이 보게 될 화면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내부 전선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2010년 선거운동 때 그 역시 ‘아프리카 이미지 컨설팅’이라는 수익성 좋은 시장에서 높이 평가받는 파트리샤 발(PB Com)을 홍보관으로 임명했다.(3) 12월 16일 와타라가 국무총리로 임명한 기욤 소로가 주도한 코트디부아르 민주화를 위한 평화행진은 최종 목적지인 <RTI> 본사에 도달하지 못했다. <RTI>와 경쟁하기 위해 와타라는 12월 말 독자적인 라디오 방송사를, 지난 1월 말에는 독자적인 텔레비전 방송사 <TCI>(정보 신뢰도 면에서는 <TCI>도 별반 나을 게 없다)를 설립했다. 그러나 그바그보의 프로파간다를 계속 강요하는 <RTI>의 중립화는 선결 과제로 남아 있었다. 와타라의 ‘보이지 않는 특공대’(4)는 방송사 송출 기지가 있는 아비장의 아보보 구역에서 전 대통령의 부대를 집요하게 공격했고, 프랑스군 헬리콥터도 이곳을 노렸다.

지난 4월 10일 밤에 시작된 프랑스군 리콘의 폭격은 <RTI>의 방송에 마침표를 찍었다. 4월 11일 정오에 <RTI> 방송 화면은 마치 그바그보의 미래를 보는 듯 암흑이었다. 그바그보를 지지하던 기자들은 이제 쫓겨다니게 생겼다. 미디어가 정치색을 버리고 방송 콘텐츠가 중립성을 유지해야 코트디부아르 국민 간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다.

글 · 블라디미르 카뇰라리 Vladimir Cagnolari

번역 · 서희정 mysthj@gmail.com

<각자>
(1) 방위안보군(FDS)은 외국기자들도 내보냈다. UNOCI FM 라디오 기자들에게는 현장 스튜디오를 철수하라고 부탁했다.
(2) ‘코트디부아르, 학생들의 광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 참조.
(3) 토마 델톰브의 ‘아프리카 독재자를 지지하는 프랑스 예찬자’,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년 3월호 참조.
(4) ‘보이지 않는 특공대’는 그바그보 축출을 위해 연합한 모든 전투병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