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소프트 파워로 여는 검은 대륙
자국의 유럽연합(EU) 가입을 계속 반대하며 지연시키고 있는 EU에 실망한 앙카라는 외교 방향을 아프리카 쪽으로 돌렸다. 더욱이 서양 시장이 침체하자 터키 기업들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로 진출을 꾀해왔다. 터키와 검은 대륙 국가들의 관계가 강화된 지난 10년 사이, 양쪽의 무역 규모는 3배나 늘었다.
터키 기업인들이 아프리카 시장으로 새롭게 눈길을 돌리고 있다. 터키기업인연합(투스콘)의 리자누르 메랄 회장은 “아프리카 시장 진출에 대한 조언 요청이 꾸준히 쇄도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수십 건의 메시지를 받는다”고 했다.(1) 2005년 출범한 투스콘에는 1만5천 명 정도의 기업인과 150여 개 지역 상인 단체가 가입돼 있다. 이 조직은 인구 7500만 명에, 세계 17번째 강국인 한 나라 기업의 새로운 창이 되고 있다.(2) 이스탄불은 물론이고, 특히 중부지방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의 주요 도시인 카이세리·코니아·가지안테프 등 터키의 주요 20개 도시에서 연간 10억 달러 이상의 수출을 성사시키고 있다.
“서양 동맹국서 글로벌 당사자로”
터키는 1998년부터 국제무대에 재등장했다. 외무장관 메수트 일마즈와 이스마엘 센이 이끄는 터키 연정의 외무부는 “터키의 국제 정체성을 다시 정의해, 터키의 역할을 서양의 동맹국 지위에서 활동적이고 건설적인 글로벌 당사자로 자리매김하기로” 결정했다. 연구원 메흐메트 오즈칸과 비롤 아쿤은(3) “터키가 1997년 12월 룩셈부르크 유럽의회에 유럽연합(EU) 가입을 신청(4)했다가 거부당한 것을 계기로 터키의 전략이 일정 부분 변경됐다”고 했다. 매년 5% 이상의 경제성장을 기록하는 대륙이 앙카라에 경제발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집권 연정 내부의 긴장 고조와 제반 문제가 아프리카 예산 문제의 즉각적인 처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2002년부터 친이슬람계 집권 ‘정의개발당’(AKP) 정부는 외무장관 아흐메트 다푸토글루의 주도 아래 외교정책에 첫 수정을 가했다. 2005년은 ‘아프리카의 해’였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전임자들이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적도 남쪽을 방문했다. 그는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프리토리아와 아프리카연합 본부가 있는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방문했다. 이어 2007년, 터키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33개국이 포함된 최빈국 정상회담(PMA)을 개최해, 이 나라들에 2007~2011년 대략 2천만 달러의 개발 지원금을 약속했다. 2008년 말, 아프리카 응용 연구소가 앙카라대학에 문을 열면서 또 한 해가 예외적인 아프리카의 해로 마감됐다. 연구소 개관 몇 달 전, 이스탄불은 42개국 초청 터키-아프리카 협력에 관한 첫 국제회담을 개최했다. 참가국들은 양자 간 대화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2008년 가을, 앙카라는 검은 대륙의 53개국 중 51개국의 지지를 얻어 유엔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 회원이 됐다.
2000년대 후반, 유럽 경제의 쇠퇴와 전반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터키 기업인들(‘아나톨리아의 호랑이들’)의 새로운 물결은 터키의 외교력이 뚫어놓은 경로를 타고 중동, 중앙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일사천리로 흘러들어갔다. 터키 남서부 우샤크주의 한 싱크탱크에 근무하는 세다트 라시너는 “엘리트 집단인 터키경영자협회(투시아드)가 일반적으로 선진국과 비즈니스하며 위험 감수를 꺼리는 것과 달리, 투스콘의 기업인들은 아프리카를 자신의 새로운 세력권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했다. 잡지 <인사이트> 터키판 편집장이자 앙카라 소재 중동기술대학의 국제관계학과 교수로 활동하는 AKP 성향의 이산 다그히는 “우리가 새로운 민간부문의 적극적인 행동을 감안하지 않으면 정부가 현지와 세계에서 주도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이해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의 발언은 초기에 회의적이던 대부분의 터키 당국자들의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데 기여했다. 오즈칸과 아쿤은 “터키 정부가 2005년을 ‘아프리카’의 해로 선포했을 때, 많은 고위 공직자와 기자, 외교관들이 비난했다. 이들은 시간·에너지·인력의 낭비라고 했다. AKP 단체와 정부만 유일하게 이 시도를 믿고 지지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적을 내기 시작하자, 반대하던 모든 불협화음의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고 했다.
터키로 초대되는 아프리카 사절단
아프리카 대륙과 터키의 외교 및 무역 관계가 탈바꿈했다. 지난 10년간, 앙카라는 아프리카 대륙의 자국 대사관 수를 3배로 늘려 현재 인도와 마찬가지로 27개 대사관을 두고 있다. 이 대사관들 중 15곳이 2009~2010년에 열렸다. 아프리카연합의 옵서버 자격을 지닌 터키는 아프리카의 평화 유지를 위한 5대 임무에 참여하는 한편,(5) 터키 군함 12척 정도가 해적을 소탕하러 국제 함대에 편입돼 소말리아 연안을 순찰한다. 아프리카개발은행그룹(AfDB) 가운데 비아프리카 회원국인 앙카라는 경제적 측면을 고려해 동부아프리카공동체(EAC)와 손잡고 자유무역지대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EAC는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등이 관세동맹 체결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다.
세계 8위 규모인 터키 항공사는 현재 아프리카 12개국 14개 도시에 운항하고 있다. 터키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서부 아프리카와 특히 나이지리아) 간 2009년 무역 규모는 2003년 실적의 3배 이상인 약 200억 달러에 달했다. 터키가 사하라 이남에 수출한 규모(2009년 100억2천만 달러)는 요즘 터키 전체 수출 규모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대사관이 길 닦고 자본이 흘러들고
유럽산보다 20~30% 저렴한 터키산(건축자재, 농수산 가공, 공학, 기계, 섬유, 의류, 의료기기, 정보기술, 개인 및 청소 위생용품과 보석 등) 제품은 아프리카 소비자 사이에 중국산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50년 동안 트랙터와 디젤 자동 경작기를 생산해온 ‘팬카 모터스’ 사장인 메틴 데미르는 2008년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터키-아프리카 무역가교’ 행사(6)에 참여한 콩고민주공화국 사업가 40명의 사절단에게 “아프리카 농부들이 첫눈에 우리 제품을 알아본다. 우리 기계는 여러분이 관리만 잘해주면 수십 년간 끄떡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르줄 금속’을 운영하는 세레프 세이요글루와 세르다르 세이요글루 또한 흡족해했다. 이 회사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냄비와 차 도구를 생산하는데, “강철 제품보다 가격이 저렴해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이 좋다”고 이들은 말한다.
대형 공사(북부 나이지리아의 카두나고속도로, 엘멕과 수단의 수도 하르툼을 잇은 현수교 등) 중인 대형 터키 건설회사 뒤엔 400개 이상의 터키 중소기업들이 아프리카에 뿌리내린 채 지난해부터 5억 달러 이상을 현지에 투자하고 있다. 카메룬기업인단체(Mecam) 회장인 투생 음보카 통고는 지난해 3월 압둘라 귈 터키 대통령이 야운데를 방문했을 때 “터키가 원자재 가공을 필요로 하는 현지 사장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전했다.
앙카라는 베이징과 마찬가지로 파트너 국가의 국내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그렇다고 터키 정부가 솔직한 표현조차 못하는 것은 아니다. 터키 총리는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ICC)에는 기소된 직후인 2008년 터키-아프리카 정상회담에 참가했을 때, 다르푸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심하게 견책했다. 그러나 아랍연맹 회원국이기도 한 앙카라는 결코 ‘집단학살’이란 용어는 쓰지 않았다. 양국 관계는 오래됐다. 수단이 1820~55년 오스만제국에 편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수단에 정착한 터키 기업은 80개를 웃돈다.
앙카라 주재 수단 대사 오메르 히다르 아부 자이드 이뎀은 터키는 수단의 ‘뜨는 별’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터키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하고 있다. 예컨대 인권단체가 지난해 추진한 ‘가자지구 구호선단’을 지지하며 현지에서 호평받고 있다. 반면 터키는 브라질과 함께 지난해 유엔 안보리가 이란에 부과한 새로운 제재 조처에 반대했다.
중국산보다 인기 높은 터키 공산품
라시너는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터키는 냉전시대에 성장한 아프리카의 중요성을 소홀히 했다. 우호적인 아프리카 친구의 부재가 국가 경제를 현격히 저하시키고, 정치적 이익에 손실을 끼치자 정부가 방향을 틀었다”고 말했다. 앙카라에서부터 중동까지 ‘신오스만’의 야망을 밀착 취재하는 국제 분석가들은 터키의 이런 방향 전환에 주목한다. 일부는 터키의 경제 팽창과 이슬람 팽창의 연관성을 연구한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터키 종무원(Diyanet)이 아프리카 무슬림 지도자들과 함께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아프리카 학생 300명을 터키 기술 유학에 초청한 것에 긴장한다. 그래서 미국 외교정책위원회의 피터 팜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 성향을 지닌 중동 열강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어 좌시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7)
터키를 최일선에서 돕는 단체로 지목되는 단체는 ‘가자지구 구호선단’ 공격 사태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는 이슬람 구호단체 ‘인권 및 인도주의 원조 재단’(IHH)이다. IHH는 1990년대 중반부터 아프리카에 진출해, 현재 41개국에서 대대적인 백내장 수술 캠페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IHH는 “터키인이 10만 아프리카인의 시각을 되찾아주어, 10만 아프리카인이 터키와 함께 볼 수 있도록 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IHH 책임자들은 “IHH가 아무도 찾아뵙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뵙고 있다”고 했다.
대형 공사 참여하며 내정엔 신중한 태도
이런 구호는 기업인과 투스콘의 엄격한 민족주의자들이 ‘페툴라 굴렌의 평신도회의’와 맺은 관계를 공고히 하고 있다. 이 단체의 이름은 2008년 미국 잡지 <포린폴리시>와 영국의 <프로스펙트>가 온라인 투표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를 선정할 때, 평신도회의의 신도들이 총동원돼 뽑은 터키 종교 철학자 페툴라 굴렌의 이름을 딴 것이다.(8) 페툴라 굴렌 제국은 미디어, 재단, 인도주의 단체를 운영한다.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페툴라 굴렌의 ‘이맘 글로벌’이 세운 학교는 남아공·우간다·케냐·탄자니아 등지에서 교육한다. 터키 기업인들은 종종 이 학교들을 후원하며, 대가로 이들의 주소록을 챙긴다. 실제로 학교 교사들과 관리 책임자들은 현지 문화와 언어를 배우며 현지 사회에 뿌리내렸다.
1999년부터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굴렌은 이후 논쟁에 휘말린 적이 거의 없다. 굴렌이 가장 최근에 휘말린 논쟁은 전 터키 정보국 대표 오스만 누리 군데스가 “굴렌이 1990년대 중앙아시아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의 방패막이 노릇을 했다”며 CIA와 그의 관계를 비난했을 때다. 지난해 3월 초반, 터키의 유명한 기자인 네딤 세네르와 아흐메트 시크는 굴렌 회원들이 국가기관에 침투했다고 문제 제기를 한 이후 ‘증오감을 부추긴 죄’로 이스탄불에서 기소됐다.
현재 ‘신누르쿠’(Neo Nurcu)(9) 운동 추종자들은 이 운동을 마치 ‘터키 사회의 대안 엘리트’ 운동처럼 정의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운동이 이따금 반유대주의 음모 이론과 비슷하다며 맹비난한다. 여기자 수지 한센은 “이들은 미디어를 운영하고, 돈이 많고, 잘 뭉친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측근들만 돌본다”고 지적했다.(10)
‘이슬람주의 확장’ 경계 시선도
오스만제국이 1863년부터 케이프타운 신도 공동체의 요구로 이맘을 파견하는 남아공 수도 프리토리아 주재 조지 프랑시스 다니엘 가톨릭 명예 대주교는 “터키 방문 때 굴렌의 철학과 활동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이슬람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슬람이 우리를 발견했다”며 비난을 자제했다.(11) 5개 ‘터키’ 학교는 앙카라의 아프리카 최대 파트너인 남아공에서 대략 3천 명의 학생들에게 굴렌 교육을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터키의 확장을 종교적 차원으로 과장하는 것은 잘못됐다. 앙카라 국제협력기관(Tika)은 많은 소수 이슬람 국가(에티오피아·르완다·마다가스카르 등)에 개입하고 있다. 오즈칸과 아쿤은 “터키식 이슬람은 서양의 가치와 호환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이 아프리카에 정성을 다해 설파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안”이라고 했다. 한편, 현재 아랍 무슬림 세계에서 일어나는 혁명이 앙카라의 시장 역동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특히 리비아 사태로 2만5천 명의 리비아 거주 터키 교민과 노동자들이 대부분 대피했다. 그러나 터키는 이런 상황을 잘 활용해 자신의 세력을 사하라 이남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글 · 알랭 비키 Alain Vicky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Africa as a savior for turkish firms>, Hurriyet, Istanbul, 2011년 3월 4일.
(2) John Feffer, ‘Pax Ottomanica?’, www.tomdispatch.com, 2010년 6월 13일 참조.
(3) ‘Turkey’s opening to Africa’, <The Journal of Modern African Studies>, Cambridge, 2010년 11월 4일.
(4) 유럽의회는 1999년 터키에 유럽연합 가입 후보 지위를 부여했다.
(5) 5대 임무는 유엔의 콩고민주공화국 정상화(Minusco), 다르푸르에서 유엔과 아프리카연합의 임무(UNAMID), 라이베리아에서 유엔의 임무(UNMIL), 수단에서 유엔의 임무(MInus), 마지막으로 코트디부아르에서 유엔의 작전(UNOCI) 등이다.
(6) ‘Anatolian firms explore african opportunities’, <Today’s Zaman>, Istanbul, 2008년 5월 16일.
(7) 피터 팜, ‘Turkey‘s Return to Africa’, <World Defense Review>, 2010년 5월 27일, worlddefensereview.com/pham052710.shtml.
(8) 가브리엘 앙제, ‘AKP와 페툴라 귤렌 운동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공동 전략을 펼치고 있을까?’, ovipot.blogspot.com/2010/08/une-strategie-commune-entre-lakp-et-le.html, 2010년 8월 23일.
(9) 페툴라 굴렌 단체는 사이드 누르시(1873~1960)가 창설한 누르쿠 단체의 분파다.
(10) 수지 한센, ‘The Global Imam’, <The New Republic>, Washington, 2010년 11월 10일.
(11) 페툴라 굴렌, ‘Catholic Church in South Africa Discusses Gülen Movement’, www.fethullahgulen.org, 2010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