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뉴라이트 정권, 해묵은 우파 본성
칠레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후계자인 올드라이트를 잊고, 비효율적이고 구시대적인 과거 정치에 종지부를 찍어 독재정권을 청산하겠다”고 약속했다. 백만장자 출신인 그는 ‘최고의 정부’를 자처하며, 자신과 같은 사장들에게 둘러싸여 국가를 기업처럼 운영하고 있다. 초기에는 그의 방식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지난해 1월 지진으로 폐허가 된 칠레 해안을 복구하며, 일각에서 그의 방식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산티아고에서 500km 떨어진 차디찬 태평양 바닷가에는 옛 광산 마을 로타가 있다. 신임 칠레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의 정치 프로젝트는 어쩌면 수도보다 이 마을에서 빛을 발한다. 남반구의 한여름, 쾌청한 아침 나절이다. 해안가의 시장 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당일 잡은 조개, 성게, 해초 그리고 각종 생선들이 삐걱거리는 좌판 위에 가득하다. <<원문 보기>>
상인 마리아가 로타 근해에서 잡은 톱상어를 훈제해 바구니에 담아 팔고 있다. 솔직담백한 미소와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을 지닌 그녀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소리쳤다. “한 마리에 2천 페소!” 2유로90센트이다. 그녀는 사흘 내리 10유로 매출에 만족해야 했다. 이는 한 달 평균 임금, 대략 450유로에도 못 미친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힘들게 일한다. 고기가 갈수록 줄어들어 고기잡이 수입이 예전 같지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부터 로타와 일부 칠레 해안 지역 주민의 생활비는 크게 올랐다. 마리아는 “지진이 났으니 물론 복구는 해야죠”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진 발생 1년, 잔해 속 이재민들
지난해 2월 27일, 엄청난 지진이 칠레를 뒤흔들었다. 몇 시간 뒤, 해일이 수백km의 남부 해안을 휩쓸었다. 칠레 당국은 사망자가 550명밖에 나지 않았다며 이들을 애도했지만, 막대한 물질적 피해와 8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특히 칠레의 최대 빈민 지역인 로타시가 자리한 마울레와 비오비오 지역의 피해가 컸다. 지역 중심지인 콘셉시온 시당국의 노력에도, 땅바닥에 널브러진 잔해가 도로 통행을 가로막고 있다. 사방이 갈라져 금방 붕괴될 것 같은 건물은 행인들을 위협한다.
피녜라 대통령(2010년 1월 당선)은 지난해 4월 13일 “우리의 주요 과제와 임무는 국민 화합과 국가 재건을 위해 뛰며, 비상사태에 대처하고, 지진 희생자들을 돕는 것”이라 선포했다. 마리아가 생선칼을 빙글빙글 돌렸다. 맛있는 해물요리 세비체를 만들기 위해 톱상어 손질에 들어간 것이다. ‘정부가 한 약속은 어떻게 됐느냐’고 묻자, 그녀는 “저들의 복구 계획은 다 헛소리였다! 저들은 우리를 버렸다”고 했다. ‘여기저기 공사현장이 눈에 띄던데’ 하고 다시 묻자, 우리의 대화를 경청하던 두 남자가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저 신축 건물들은 지진 피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매매할 것이다. 집 잃은 사람들은 작은 집에서 서로 엉켜 거지처럼 산다. 대부분 전기도 수돗물도 없이 산다.”
지진 피해자들은 오두막이나 다를 바 없는 판자로 지은 6㎥의 비상주택에서 온갖 악천후를 견디고 있다. 4인 가족을 염두에 두고 지은 오두막들은 대개 초만원이다. 그곳을 방문해 ‘어떻게 수천만 명이 이런 여건에서 겨울을 날 수 있는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마리아는 “소수의 부자들은 돈벌이에만 급급한다”고 말을 돌렸다.
뉴라이트 대통령의 재건 계획
공식적으로 재건 계획은 성공했다. 하지만 소외계층은 분노를 표출했다. 정부는 22만 명에게 보조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보조금은 대부분 건물 신축이 아닌 집수리에 쓰였다. 지난 2월 말까지 완공된 신설 주택은 1만2503채밖에 되지 않았다. 주택부 집행관인 프란시스코 이라라사발은 임시거처에 묵는 이재민 중 40%(1700명가량)는 “거처를 마련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1) 고전적 수법을 쓰는 것일까? 어쩌면 자연재해가 마침내 칠레 대통령 프로젝트의 본질을 세상에 드러내는 건지도 모른다. 그의 프로젝트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73~90 집권)의 ‘독재시대를 청산’하고,(2) 새로 출현한 ‘뉴라이트’에 기대는 것이다.
피녜라 대통령은 정통 우파의 특권층 출신이 아니다. 에르네스토 카르모나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피녜라는 정치 입문 당시, 중도보수 성향의 기독교민주당(DC)의 문을 두드렸다. 그의 아버지가 DC의 창당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1988년, 군사독재 정권의 1997년까지 집권 연장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반대했다. 이렇듯, 그는 한 발은 자신과 별로 관계 없는 DC에, 다른 한 발은 그에게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는 우파 조직에 담갔다.”(3) 그는 결국 군사정권의 충복들로 구성되고, 보수적인 사제단체 오푸스데이의 지지를 받은 독립민주연합(UDI)보다는 정치 행동이 자유로운 국민혁신당(RN)을 선택했다. 하지만 피녜라와 독재정권 사이의 간극은 지극히 상대적이었다. 그가 1989년 피노체트 정부 당시 재정장관 헤르난 부치의 고문으로 정치에 입문한 것부터가 그렇다. 또한 RN은 변화를 표방하면서도, 자유주의자들뿐 아니라 UDI의 가톨릭 보수주의자들까지 받아들였다.
피녜라가 지난해 1월 8일 일간 <라나시온>에 “피노체트 정권에서 일한 것이 죄는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은 이 시기가 그에게 비교적 큰 성공을 안겨줬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우선 이 ‘암흑기’ 동안 부동산과 건축, 금융에 투자해 부를 축적했다. “군사정권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내며 연기금의 민영화를 주도한 형의 뒷배를 이용해, 자신의 재산 축적 과정과 일부 관련이 있는 은행의 대형 사기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옥살이를 면했다.”(4) 그는 시민 항공사 ‘란칠레’의 일부 지분을 매입(추후 회장에 취임)하는 한편, 핵심 분야에 대한 투자를 다각화하며 전면에 나섰다. 2005~2006년, 그는 최고 인기 축구클럽 콜로콜로와 지상파 TV 채널 <칠레비시온>을 매입했다. 이후 피녜라는 세계 500대 부호 중 한 명이 됐다. 미국 잡지 <포브스>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성 51위로 선정했다. 그의 은행계좌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의 자산은 1년 만에 2억 달러가량 불어나 약 24억 달러에 이르렀다. 일부 소외계층이 피녜라의 이런 돈벌이를 규탄하자, 피녜라는 오로지 “죽은 자들과 성인들만 이해관계에 무관심하다”고 맞받았다.(5)
새 집은 지어도 이재민 위한 집은 태부족
독재 기간에 부자가 되고, UDI의 지지로 정권을 잡았음에도 피녜라는 독재 청산을 공언하고 있다. 그 이유는 1958년 이후 처음으로 우파가 투표를 통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가 독재 청산을 표방하는 것은, 정치 방식을 바꿔 국가를 자신의 기업 중 하나처럼 운영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최고의 정부’는 내각보다는 기업 이사회와 더 흡사하다. 각료의 절반 이상은 정치 경험이 일천하거나 아예 없는 민간 부문 출신들이다. 예를 들어 외무부 장관 알프레도 모레노는 대형 유통 체인업체 팔라벨라의 최고경영자로서, 자신의 사업체를 이웃 나라에 확장할 때 ‘외교적’ 경험을 쌓았다고 주장한다. 후안 앙드레 폰테인 신임 경제장관은 자유우파 진영의 싱크탱크 중 한 곳인 공공연구센터(CEP)의 소장이다. CEP는 칠레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 중 하나가 통제하는 마테그룹(산림·통신·금융)과 연관 있다.
개인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피녜라는 (광적이라 할 만큼) 자신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도록 스케줄을 짜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한다. 그는 산호세(아타카마사막) 광산에서 매몰된 광부 33명을 구조한 덕분에 몇 주 동안 칠레와 세계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이 구조 작전이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자평했다.(6)
곧이어 사람들은 ‘피녜리즘’을 들먹였다. 피녜라의 잦은 미디어 노출이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의회에서 피녜라를 지지하는 전통 우파의 유력 인사들은 그의 행보에 염증을 내지 않았던가. 국제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노장’(전통 우파의 유력 인사들)과 ‘거물’(피녜라) 간 동족상잔의 일화로 가득한 산티아고 주재 미 대사관의 통신문을 공개했다. 그러자 피녜라는 RN의 안드레 알라만과 UDI의 에블린 마테이 같은 일부 유력 정치인사들에게 대통령 ‘참모’의 문을 개방해 국방장관과 노동장관에 임명했지만, 노장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독재 때 떼돈 벌고 대통령 돼서도 증식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은 그렇다 쳐도, 일부 공공 정책에 대해 그의 지지자들은 화나 있다. 피녜라는 신임 교사 양성을 위한 대학 장학금 지급, 군 사법부의 권력 제한, 출산휴가 6개월 연장, 퇴직자 건강보험을 위한 조처, 가사도우미 최저임금 보장, 환경 시위 이후 일부 화력발전소 위치 재조정, 칠레 국외 거주민에 대한 투표권 제안, 선거인 명부 자동 등록제를 발표했다. 지난 3월 11일에는 ‘약간의’ 소득을 재분배해, 절대빈곤 속에 살아가는 50만 명에 대한 ‘윤리적 가족소득제’ 시행을 발표했다. 국제 무대에서는 남미의 여러 정치 지도자들, 주로 좌파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을 자유·주권·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사장 대통령’의 충복, 로드리고 히츠페터 내무부 장관은 “사회민주주의적 뉴라이트가 필요하다. 뉴라이트는 새로운 근심거리에 유념한다. 각별히 개발과 환경 간 관계, 경제와 사회정의 간 균형 등 인권에 관여한다”고 했다.(7) 야당은 이 프로그램에 반대할 경우 여론의 비난을 우려해, 대놓고 반대하지 못하고 있다. 정당연합 콘세르타시온 의원(2010년 독재정권 말기에 권력을 행사한 사회당과 기독교민주당 소속의 의원)들조차 어김없이 정부의 프로젝트를 지지할 정도이다.
요컨대 피녜라는 우파와 단절하고 지속적으로 중도좌파와 손잡겠다는 속셈일까? 피녜라는 대선 캠페인 때 “콘세르타시온이 실행한 대부분의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09년 12월 19일자에서 “실용적 측면에서, 피녜라의 승리가 정치적 충돌을 감소시킬 것”이라 단정하며, 피녜라와 그의 전임자들 간에 교감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 교감 속에서 칠레 뉴라이트가 ‘왼쪽으로 이동’한다고 봐야 할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사회당으로 출범한 칠레 좌파는 몇 해 전부터 (신자유주의의) 자체 노선을 꾸준히 걷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론 사회민주주의적 뉴라이트
프랑스의 기 소르망 같은 마르크시즘 회의론자들은 신자유주의로 변신한 칠레 좌파를 칭찬했다. 2008년 기 소르망은 “시카고학파가 주창한 자유무역이 1973년 칠레 쿠데타 정권부터 큰 효과를 발휘해, 2005년 사회주의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정권까지 경제규칙이 거의 수정되지 않았다”고 했다.(8) 현재 콘세르타시온의 고문으로 일하는 전 공산당 운동가 에르네스토 오토네와 세르지오 무노즈 리베로스는 칠레 좌파가 ‘경제 현실주의자로’ 개종한 것을 이렇게 분석했다. “현실성 문제와 맞닥뜨린 칠레 좌파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과거의 믿음을 저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지만, 특정한 경제 문제를 해결할 ‘훌륭한 교사들이 맞은편 보도’(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쪽) 위에 있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것이다.”(9)
‘맞은편 길로 건너간’ 좌파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땅 칠레를 세계 금융 모델로 변모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헤리티지재단>이 매년 발행하는 세계 ‘경제자유’ 순위에서 칠레는, 179개국 중 미국의 바로 뒤를 이어 11위를 차지해 프랑스(64위)를 한참 앞질렀다. 칠레는 친절한 세무 서비스, 일반 연금의 보편화, 교육과 보건 서비스 요금의 저렴화를 제공하며 미국·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칠레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입을 목전에 둔 지난해 1월 11일, 당시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는 “칠레가 저개발국의 굴레를 벗고, 선진국으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다”며 기뻐했다. 칠레 대통령궁에서 벌어진 서명식에 재무부 장관을 대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바첼레트는 OECD 가입에 필요한 마법의 열쇠를 손에 들고 있었다. 1961년 출범한 OECD 회원국은 현재 34개국이며, 이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칠레는 가입이 까다로운 이 클럽에 남미 국가로는 처음으로 가입했다.
신자유주의 좌파와 독재 청산을 외치는 우파 사이에서 실제 대안을 찾지 못한 일부 서민들은 변화의 이미지를 피녜라의 모습에서 찾았다. 30대인 이반은 수도에서 행상을 한다. 안개 낀 알라메다(산티아고의 주요 간선도로)의 중심가, 미니버스들의 소음 속에서 과자와 개비 담배를 파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이 정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피녜라를 찍은 것은, 적어도 그는 인생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 나라도 성공시켜 우리가 그 혜택을 조금이라도 봤으면 한다.”
전임 사민주의 정권조차 우향우
하지만 대통령의 사회개혁 담론은 오히려 급진적 신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이것은 그의 지진 대처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의 해안 복구 과정은 노골적인 정치적 가신주의로 문제가 된 부분만 빼면,(10) 나오미 클라인이 2008년에 출간한 저서 <쇼크 독트린>에서 영감을 얻는 듯했다. 그가 일시적으로 기업에 세금과 주요 광산 기업의 광산 사용료를 올려 4년간 30억 달러의 기금을 모으겠다고 발표했지만, 국민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방식은 경제정책이 케인스주의로 전환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자발적으로 2년간의 추가 기금 모금에 참여한 광산 기업들(주로 다국적기업들)은 그 대가로 2025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부가세를 보장받았다. 신규 자금에 대한 요구는 피녜라에게 “반드시 필요한 국유자산이 아닌” 에너지 부문(전력회사 에델노르)과 수도사업 부문(아구아 안디나스)의 민영화를 밀어붙일 꿈같은 기회를 제공했다. 여세를 몰아, 그는 노동의 유연성과 새로운 광산 양도안을 담은 법률 제정 검토에 나섰다. 경제학자 휴고 파지오는 “재건 기금이 국가를 약화시키는 핑곗거리가 될 것이며, 공공자산은 사리사욕을 취하는 데 쓰일 것”이라고 지적했다.(11)
현 정권, 급진적 신자유주의 노선 채택
올드라이트는 뉴라이트에게 항의하고 있지만, 뉴라이트는 정작 자신의 지지 기반인 올드라이트를 외면하지 않고 있다. 국제인권연맹에 가입돼 있는 ‘국민의 권리 증진과 수호협회’ 회장인 비비아나 우리베는 “이 정부는 기업의 정부”라며, 사회민주주의 우파의 신화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시장 법칙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우리가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즉각적인 탄압이 뒤따른다”고 원망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피우던 담배를 잠시 내려놓고, 정부의 지진 정책에 집중 포화를 가했다. 그녀는 일부 진보단체의 시위에 대한 경찰의 강경대응뿐 아니라, 산미구엘 감옥의 화재 때 수감자 81명이 희생되면서 드러난 교도소 시스템 문제 등을 성토했다. 또한 그녀는 마푸체(Mapuche) 원주민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정책을 비판했다.
최근 칠레 남부 카네테에서는 마푸체 원주민들에 대한 뉴라이트의 상징적 재판이 있었다. 주민 17명이 독재 시대의 산물인 ‘대테러법’을 근거로 절도·방화·테러 혐의로 기소됐다. 모든 국제 규범에 반하는 이 법은 신분을 숨긴 채 사법부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증인의 말을 ‘증거’로 삼았다.(12) 피고인들 대부분은 3개월여에 걸친 시위와 86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풀려났다. ‘마푸체 정치범들’의 대변인 나비다드 랑키예오의 두 오빠는 아직도 수감돼 있다. 법대생인 그녀는 숭굴숭굴한 용모에 명확한 언변을 구사했다. 26살인 그녀는 주민의 입장을 옹호하러 고향으로 귀환한 신세대를 대변했다. 그녀는 단식투쟁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못 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투쟁의 성과를) 깨닫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피녜라가 어쩔 수 없이 협상에 응한 것”을 성과로 꼽았다.
피녜라는 협상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마푸체 원주민에 대한 대테러법 적용 반대와 이들에 대한 군과 민간의 이중기소 제도의 폐기를 요구하며 자신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이런 언론 플레이는 눈가림에 불과했다. 랑키예오가 ‘정치재판’이라 부른 이 재판에서 아라우코-마예코(CAM)공동체연합의 활동가 4명이 기소됐다. 이 중 리더인 헥토르 라이툴은 25년형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
지금은 ‘뉴레프트’가 필요한 때
노동부는 지난해 파업으로 인한 민간부문 손실이 33만3천 일의 업무시간에 해당하며, 이는 2000년에 비해 192%가 상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요 노조연맹인 노동자중앙연맹(CUT)은 뉴라이트가 출범 첫해인 올해 “노동자와 시민,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갈피를 못 잡고 있다”고 비난했다.(13) CUT는 ‘실질적인’ 최저임금 상승 없이 물가만 가파르게 오르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가스값이 뜨거운 감자다. 칠레 정부는 올해 초 마가야네스 지역에서 발생한 일주일간의 폭동으로 가스값을 올릴 수 없었다. 지난 2월 여론조사 기관 아디마르크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49%가 피녜라의 국정 운영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벌써 2014년 대선(재출마할 수 없지만)을 준비하는 대통령을 위협할 정도로 충분한 힘을 지닌, 사회적·정치적 전선의 출현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그는 인기 있는 자신의 장관들을 전면에 내세워, 조준선을 새로운 임기(2018년)에 맞춰 뛰고 있다.
75살을 넘긴 좌파 저명인사 마누엘 카비에세스는 훤칠한 키에 유쾌한 사람이다. 바람과 해일 문제를 다루는 잡지 <푼토 피날>을 편찬하는 산디아고 거리의 사무실에서, 그는 현 정부를 “독재정권 후계자들의 정부”라 비판하며, 콘세르타시온과 무관한 ‘뉴레프트’의 창설을 주창했다. 그는 극복해야 할 난관을 인식했다. “우리는 젊은 시절 20대의 정치적 무관심과 사회 분열 때문에 경험한 것보다 훨씬 힘든 시기를 지금 살고 있다.” 그는 “1973년 9월 11일(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과 사회주의 정권을 축출함)의 패배가 여전히 여기,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불평등 사회 : 세바스티안 피녜라 곁에는 산티아고 증권거래소 주가의 절반을 통제하는 세 집안(앙헬리니, 마테, 그리고 세계 재계 순위 27위에 오른 기예르모 룩식)이 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자산 비율은 2004년 9%에서 현재 12.5%로 상승했다. 여기에 호르스트 파울만(세계 재계 순위 154위에 오른 유통그룹 센코수드의 사장) 일족과, 세계 전 대륙에 진출한 이들의 슈퍼마켓을 추가해야 한다.
이들 집안엔 정부 관료와 주요 언론매체의 사장들이 있다. 특히 피녜라가 심한 정부 비판을 문제 삼아, 국가가 대부분의 지분을 소유한 일간 <라나시온>을 폐간한 이후 독재정권의 핵심 인물인 에드워드 일가와 칠레 정기 간행물 컨소시엄(Copesa), 이들 양대 축이 종이신문 시장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했다. TV 영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30% 노동자들은 한 달에 최저임금 수준에 불과한 255유로를 번다. 유엔 산하 중남미·카리브경제위원회(Cepal)에 따르면, 칠레는 브라질과 함께 남미 최대 불평등 국가 중 하나다. 게다가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최상위 20% 계층의 소득은 최하위 20% 계층 소득의 13~14배에 달한다. 전자가 칠레 부의 55%를 차지한 반면, 후자는 4%를 나눠 갖고 있다.
글 · 프랑크 고디쇼 Franck Gaudichaud
프랑스남미협회(FAL) 공동 위원장.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ciperchile.cl/tag/reconstruccion/ 참조.
(2) ‘S. Pinera, la nueva derecha que se desprende de la dictadura’, 일간 <엘 문도>, 마드리드, 2006년 1월 16일.
(3) Yo Pinera, Mare Nostrum, Santiago, 2010.
(4) Ana Veronica Pena, ‘La historia no contada de los origenes de la fortuna de Sebastian Pinera’, 일간 <라나시온>, Santiago, 2009년 4월 19일.
(5) <Solo los muertos y los santos no tienen conflicto de intereses>, Clarin, Buenos Aires, 2010년 4월 9일.
(6) ‘칠레, 미디어의 향연 뒤에 있는 인사들’, <La valise diplomatique>, 2010년 11월 14일.
(7) ‘Hinzpeter, sus definiciones y la nueva derecha’, <Capital>, Santiago, 2010년 11월.
(8) 기 소르망, <경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Fayard, Paris, 2008.
(9) <혁명 이후, 현실주의자로 꿈꿔라>, L’Atalante, Nantes, 2008.
(10) 비오비오 지역 지사인 독립민주연합(UDI) 소속 반 리셀베르히는 이재민이 아닌 지역 주민에게 재건 혜택을 준 것이 빌미가 돼 지난 4월 지사직을 사퇴해야 했다(<Radio Cooperativa>, 2011년 4월 3일).
(11) Hugo Fazio, ‘La “formula” de Pinera para reducir el Estado’, 칠레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5월.
(12) www.amnistia.cl/web/category/tags/conflicto-mapuche/-ley-antiterrorista 참조.
(13) ‘La CUT frente al primer ano de Pinera’, www.cutchile.cl, 2011년 3월 11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