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는 학원에서 나지 않는다
한국은 공부 잘하는 학생일수록 사교육을 더 많이 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사교육을 더 많이 받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사교육을 더 받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네 나라(한국·체코·그리스·일본)뿐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성적이 저조한 학생이 사교육을 받는다.
한국과 다른 나라들과의 또 다른 차이는, 한국 학생들의 학습 시간이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길다는 점이다. 만 15살 학생들의 OECD 평균 학습 시간은 주당 33.92시간인 데 비해, 한국 학생은 49.43시간이다.
한국 학생의 사교육 시간 역시 주당 4.73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3.59시간 길다. 특목고 준비생들의 사교육 시간은 더하다. 특목고는 평준화 정책이 학력 하향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보수 지도층의 우려에 따라 영재교육의 일환으로 설립됐다. 이른바 ‘영재들의 학교’인 특목고를 가기 위해 학생들이 하루 사교육을 받는 시간은 주당 30시간을 넘는다. 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고 오후 5시 30분부터 밤 10~12시까지 학원에서 수업을 받다. 이후 학원자습실이나 집에서 새벽 1~2시까지 숙제나 자습을 한 뒤 2∼3시에 잠들었다가, 아침 6시에 일어나 학교에 간다. 한창 자라야 할 15살 안팎의 아이들 수면 시간이 고작 서너 시간에 불과하다.
공부 잘하면 사교육 더 받는 묘한 나라
한국은 왜 대다수 OECD 국가들과 달리, 성적이 좋은 학생이 성적이 낮은 학생보다 사교육을 더 받는 것인가? 그들의 사교육 시간은 왜 그토록 긴 것인가? 이는 우선 학교 교육의 질이 낮기 때문이다. 평준화 정책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다양한 능력을 지닌 학생들이 한 학급에 있다 보니 교사는 중간 수준의 학생에 맞춰 획일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성적 우수자들은 수준에 맞는 적절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사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 설명이 옳다면 학교 교육 만족도나 질이 사교육 지출에서 큰 요인으로 작용해야 한다. 하지만 사교육 지출을 분석한 결과, 학교 교육의 질이나 만족도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더 좋은 학력을 얻기 위한 지위 경쟁 요인이 사교육 지출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성적 우수자로만 구성돼 있어 그들의 학습수준에 맞게 가르칠 수 있는 특목고 학생들은 일반고 학생에 비해 사교육 지출이 낮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교육 실태 조사 연구에 따르면, 연간 500만 원 이상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학생의 비율은 일반고 학생은 18.7%였으나 특목고 학생은 34.9%로 일반고 학생의 2배에 가까웠다.
일부에서는 학교 교사들이 학원 강사를 본받아 열심히 가르쳐야 사교육 참여율과 사교육비가 감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학원의 교수 방식은 공교육 교사가 따라 해야 할 만큼 교육적 가치가 있을까?
학교 교육 수준과 사교육 수요는 무관
사교육 관계자들은 학교와 달리 학원에서는 수준별 수업이 철저히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특목고 준비 학원과 학원의 수준별 수업을 조사한 결과, 성취가 높은 학생의 수업과 일반 학생을 위한 수업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학원에서는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에게 중학교 수준을, 중학교 학생에게는 고등학교 수준을 가르치고, 고등학교 입학 예정자와 1학년 학생에게 수능을 준비하는 교육을 한다. 성취가 낮은 학생에 비해, 성취가 높은 학생이 진도를 더 빨리 나가고, 더 많은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배운다는 점이 달랐다. 심지어 서울 강남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경시 및 과학고 준비 학원에서 사용하는 학원 교재는 동일한 문제가 여러 번 실려 있었다. 문제 유형을 익히고 반복 학습 효과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반복해서 문제를 푸는 강도는 높아졌다. 실수 안 하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사가 내주는 숙제를 안 해오거나, 시험 성적이 낮은 학생에게는 매질과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이른바 ‘우수 학생’들은 별도의 과외와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영재 학원의 주입식 반복 교육
학습 속도가 빠른 영재에게 속진 교육은 필요하다. 하지만 사교육 시장에서 하는 선행학습은 교육 논리가 아닌 시장 논리를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행학습이 사교육 시장 확대에 중요한 경영전략이기 때문이다. 학원에서는 학생들이 속한 학년의 진도보다 앞서 가르치기 때문에 모든 학생을 잠재적 고객으로 만들 수 있다. 학원에서 학교 수업을 이해하지 못한 학생을 위한 보충학습 형태로 가르친다면, 학교 수업 시간에 이해한 우수 학생들은 고객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학교 진도보다 앞서 나가는 선행학습은 성적이 낮은 학생은 물론 우수한 학생까지 모두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다. 자신의 학년보다 미리 학습하되, 어려운 내용을 빠른 시간에 학습하기 때문에 성적 우수자라 하더라도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 역시 다시 그 내용을 학습해야 한다. 이는 그만큼 더 많은 학생이 더 오랫동안 학원에 등록해야 함을 뜻한다. 학원 관계자들은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공부함으로써 경쟁 우위를 갖는다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초등학교나 중학교 학생들이 고등학교 수준의 학습을 미리 해놓으면, 설령 특목고 입시에 실패하거나 경시대회에 입상하지 못하더라도 대입 준비에 유리하기 때문에 결코 손해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 특목고나 경시대회에 성공하면 성공해서, 실패하더라도 손해가 나지 않는 일이니, 학원의 선행학습은 전천후로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강력한 경영전략이 된다.
이른바 ‘일류대학’ 졸업자들이 고용과 승진, 임금, 사회적 관계에서 그렇지 않은 졸업자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우리 사회에서 소수의 일류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따라서 대다수 한국 학부모와 학생들은 경쟁에 대한 불안감을 오랫동안 강도 높게 가진다. 따라서 남보다 더 빨리 배우고 여러 번 학습하게 하는 선행학습은 심리적 안정감을 주면서 동시에 선행학습을 하지 않는 다른 학생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해 강력한 시장 확대 효과를 발휘한다. 좋은 대학의 졸업장에 대한 한국인들의 강한 욕망과 그로 인한 높은 불안감과 경쟁 구도는 다수의 학생을 사교육 시장으로 쉽게, 그리고 오랫동안 포획할 수 있는 견고한 토대가 된다.
영재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영역에서 높은 성취와 창의력을 보이거나, 보일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창의적 문제 해결력은 이들의 큰 특징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연령대보다 높은 수준의 내용을 속진해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의 흥미와 관심, 호기심을 자유롭고 깊게 탐구하고,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교육 환경과 교수 방식이다. 하지만 학원에서는 시험 출제 가능성이 있는 지식만 더 빨리 더 많이 습득하게 하고, 정해진 공식을 기계처럼 외워서 남보다 더 빨리 적용하고 실수 없이 문제를 풀어내는 기술을 반복적으로 훈련한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풀고,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그런 행동에 몰입하는 것은 일류대학 입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치스럽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치부된다.
선행학습의 본질은 불안감 마케팅
사교육 시장에서 장시간의 주입식 교육을 받는 대한민국의 ‘우수’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비합리적이라고만 비난할 수 있을까? 사교육이 학업 성취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사교육은 교과별로 볼 때 수학 교과에서 비교적 일관된 효과를 보이고, 장기적 효과보다는 단기적 성적 향상 효과가 있다. 따라서 설령 사교육 투자 효과가 적을지라도, 그 적은 차이로 일류대학과 그 외 대학의 입학이 결정된다면, 그리고 미래 삶에서 큰 차이가 있다면 사람들의 사교육 투자는 합리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상위권 대학과 그렇지 않은 대학 졸업자들 간 사회적 보상의 차이가 크다. 미국에서 미국대학입학수능시험(SAT) 성적이 100점 높은 학교에 다닐 경우 3~7%의 임금 상승 효과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상위권 대학의 임금 프리미엄은 약 20%였다. 그 격차는 2000년 이후 더욱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처지에서 사교육 투자는 합리적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구성원이 다수를 이룰 때, 그 사회가 합리적이고 바람직한가라는 점이다. 우선 사교육에 대한 투자는 학생 자신이 아닌 부모의 사회·경제적 능력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사교육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 사회 격차를 확대시키고, 가지지 못한 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증가시킨다. 둘째, 사교육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사교육 시장에서는 우수 학생을 위한 수준별 교육과 선행학습을 강조하나, 실제로는 주입식 교육과 반복학습에 불과하다. 학생이 궁금해하고 관심 있는 것을 스스로 탐구하고, 기존 풀이 방식과는 다르게 문제를 해결하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몰두하고, 자신의 느낌과 사고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시험 준비의 효율성을 위해 억압되고 제한돼야 할 활동이 된다.
최근 일부 학원은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함양하는 곳이라고 선전한다. 학원에서 주장하는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은 교사나 부모의 잔소리 없이 학습하는 습관에 불과하지, 스스로 문제를 탐구하고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경쟁과 불안을 강조하면서 수동적으로 지식을 습득하게 하는 어른 감시자들을 내면화한 학생에 불과하다. 어른들의 잔소리 없이 주어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습관의 형성은 사교육의 성취를 위해 일정 수준 강조할 수 있다. 하지만 사교육 종사자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독창적으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는 학생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사교육 시장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사교육 종사자들은 시장 확대를 위해, 또는 존립을 위해 학생들의 참된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보다는 의존적 학습 태도를 함양한다. 학생들의 이런 경향성은 이미 국제 성취도 평가에서 입증됐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국제학업성취도에서 상위 성적은 보이지만 낮은 교과 흥미도와 내적 학습 동기, 그리고 문제 해결에 대한 낮은 자신감이 바로 이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물론 이것이 사교육의 문제라고만 말할 수 없으나, 학원에서의 많은 학습 시간, 시험 성적 높이기 위한 반복학습, 기계적 문제풀이 훈련, 실수 안 하기 훈련,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지속적인 불안감 강조는 우리 청소년의 ‘학습된 무기력’을 내면화하는 데 크게 일조한다.
학벌 따른 사회 격차 줄어야 영재 출현
‘좋은 대학’ 졸업자와 그렇지 않는 자들 간에 큰 사회 격차가 있는 사회, 일류대학 입학자들의 선발이 반복적인 훈련에 의해 습득된 지식의 양과 문제를 푸는 속도와 정확성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 또 이런 능력이 엄청난 사교육 투자와 사교육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창의력 있는 영재를 육성하기 어렵다. 이런 사회는 남들이 해놓은 것만 빠르게 모방해 성장할 수 있을 뿐이다. 진정 우리 사회가 영재들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그들이 창의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사회가 되려면 일차적으로 학력에 따른 고용·임금·승진 등의 문제가 해소돼야 한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일정 수준의 삶의 질을 영위할 수 있게 사회복지 정책이 강화돼야 한다. 무엇보다 다양한 능력과 잠재력을 지닌 우수한 청소년들이 공교육 체계 안에서 그들의 창의력을 함양하고 발휘할 수 있게 적절한 교수 학습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영재들이 일류대학 입학을 위한 무모하고 어리석은 문제풀이 훈련과 경쟁 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글 · 김미숙
사교육, 대입정책, 평준화정책, 북한이탈청소년 등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