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자본, 특권화한 노동

2011-05-09     조계완

2000년 초, 현대자동차노조 정갑득 위원장은 회사 쪽과 이른바 ‘고용안정협약서’를 맺었다. 하청 노동자 비율(16.9%)을 유지한다는 노사 합의였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청 노동자를 받아들이겠다. 하청 노동자는 정규직의 방패막이다.” 인력 감축이 닥치면 정규직 대신 정리해고할 충분한 하청 노동자 비율을 유지하겠다는 것으로, 비정규직은 자동차의 범퍼나 다름없었다. 2005년, 현대자동차노조가 회사 쪽과 맺은 단체협약 제32조(해외 현지 공장)는 ‘회사는 △해외 공장 건설과 운영을 이유로 일방적인 정리해고·희망퇴직을 실시하지 않는다 △세계경제의 불황 등으로 공장 폐쇄가 불가피할 경우 해외 공장의 우선 폐쇄를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지난 4월,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는 ‘정년퇴직자·25년 이상 장기근속자 자녀 우선채용’을 담은 단체교섭 요구안(제23조)을 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했다. 신규채용 때 정규직 조합원 자녀에게 가산점을 주라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범퍼 삼았던 현대차 노조
2000년, 2005년, 2011년 현대차 단체협상 테이블에 등장한 주요 이슈는 모두 (임금 인상이 아닌) ‘고용’ 조항이다. ‘자녀 우선채용’ 단협안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정규직 특혜’, ‘고용 세습’, ‘집단 이기주의’, ‘노동귀족’ 같은 언어로 표출되고 있다. 이번 현대차 단협 요구안은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4만5천여 현대차 정규직 개별 ‘노동자들’의 정서를 보여준다. 과연 현대차 정규직 노조와 노동자들의 부패한 의식을 질타할 것인가? 뒤에서 웃고 있는 자본을 비판할 것인가? ‘노동유연화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 노동자들의 슬픈 풍경을 말할 것인가?

미국의 GM 린든 자동차 조립공장에서 명예퇴직한 노동자들을 인터뷰한 루스 밀크맨은 <공장이여 잘 있거라>라는 책에서 “대다수가 명예퇴직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당수 노동자들은 공장을 우울하고 감옥 구멍 같은 ‘지랄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고, 하루빨리 공장에서 도망치고 싶어했다”고 썼다. 현대차 공장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노동생애도 모자라 감옥 구멍 같은 자동차 공장에 아들까지 입사시키려고 하는 늙은 노동자들은 도대체 누군가? ‘공돌이’, ‘공순이’라는 모욕을 받아야 했고 ‘노동자’라는 말은 지워버리고 싶어했던 아버지들이다. 낮에는 공장 노동자로 살아도 밤에는 비싼 과외를 시켜 자녀를 출세시키려는 소시민이었다. 그런데 왜 팍팍하고 고단한 공장 세계를 아들한테까지 대물림하려는 걸까? 그리고 공돌이·공순이가 어떻게 ‘기득권’으로 바뀐 것일까?

서구도 마찬가지지만 단체협약에는 대부분 ‘선임권’(Seniority) 조항이 있다. 노동자의 해고·재고용 등을 정할 때 근무연한의 우선권을 인정하는 제도로, 이번 단협 요구안은 선임권 조항을 자녀 채용에까지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우선채용 조항이 고졸 생산직(전문대 포함)에만 해당된다면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극소수 조합원만을 위한 별 쓸모 없는 협약이 되고 만다. 현대차는 자녀 2명까지 대학 등록금 전액을 지원하고 있고, 이 때문인지 울산의 대학 진학률은 93%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물론 우선채용 조항이 대졸 일반직 공채에도 해당되는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그러나 일반직에도 해당될 가능성이 높고, 학력 인플레이션 속에 현대차 생산직의 자격요건이 점차 대졸까지 확대될 공산이 크다.

지금은 노동해방보다는 일할 수 있는 ‘한 짝의 장갑’이 더 소중한 시대다. “공장 일이 힘들긴 해도, 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이렇게 좋은지 예전엔 몰랐다”는 GM대우 부평공장의 한 직장 복귀 노동자의 말은 ‘괜찮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고용불안이 횡행하는 한국 노동자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차 울산공장은 그 감옥 구멍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매혹시키는 괜찮은 일자리가 됐다. 정규직 일자리가 곧 자산(Job Assets)인 시대다. 2006년 기아차 광주공장 신규채용 때는 취업원서를 받으려는 줄이 1km를 넘어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이처럼 수많은 청년이 (정규직) ‘공장 노동’을 원하는 것이 우리 시대 노동의 생애다. 아버지는 정규직, 아들은 비정규직인 시대에 늙은 노동자들은 “나를 자르고 내 자식을 정규직으로 써달라”고 요구한다.

기득권으로 바뀐 ‘공돌이’, ‘공순이’
자동차는 ‘세상을 바꾸는 기계’이고,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자동차공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간 자본주의 황금 시절을 이끈 포드의 포드주의 시스템이 그렇고, 위대한 경영자로 불리는 GM 슬론 사장의 경영철학이 그렇다. 현대차 대공장의 단협안도 달라진 세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일까? 현대차 공장의 내부 노동시장에는 복지와 임금 등 물질적 기반이 갈수록 더 두껍게 쌓이고 있다. ‘입직구’(入職口)를 통해 그 내부에 들어가기만 하면 강고한 노동조합 울타리 속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과 고임금을 누릴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우리 사회 독점 대기업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란 수치를 넘어 이런 구조 속에서  진정한, 현실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그 반대쪽에는 하청 노동자의 저임금과 불안이 역시 거대한 두께로 웅크리고 있다. 회사 쪽은 속으로 크게 웃고 있을지 모른다. 장기근속자 자녀 우선채용 조항이 체결되면 사내하청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굳이 감시·감독하지 않아도 정규직 노동자는 더 오래 회사에 붙어 있기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고, 필사적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 할 것이다. 비정규직 외면은 더 심화되고, 위기 때 안전판 역할을 해줄 비정규 고용은 오히려 더 늘리라고, 혹은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말라고 요구할지 모른다.

내 자식 위해 비정규직 더 늘려야 하나
정규직 자녀 우선채용이 뜨거운 논란이 된 건 우리가 ‘비정규직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2300만 명이 매일 출근하는 나라에서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없는 100만여 명의 건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런 실업자도 있지만, 날마다 출근하면서도 희망이 없는 약 850만 명의 비정규 노동자가 있다. 최장집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1988)에서 “우리 시대에 있어 노동은 우리의 개인적, 그리고 집단적 삶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했다. 비정규 노동은 사무실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식당에서 시야에 넘쳐나지만, 어떤 의미에서 ‘실종’되고 있다. 너무 흔하고, 비정규(Non-standard)가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표준적(Standard) 고용 형태가 돼버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여기저기서 수많은 장기투쟁과 싸움이 벌어지는데도 비정규 노동 문제는 흡사 물에 젖은 장작처럼 큰 불길로 번지지 못하고 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일까?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양보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워라”는 고함이 터져나오는 건 비단 현대자동차뿐만이 아니다. 그런 고함은 자신의 고용안정과 상대적 고임금이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의 희생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인건비 장사로 전락한 자본 앞에서
1990년대 말 호텔 청소부 등 저임금 노동 생활을 체험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렌라이히는 <빈곤의 경제>에서 “(저임금 비정규직에 대한 우리의) 적절한 감정은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다. 누군가 생활비에도 모자라는 임금을 받으며 일한다면, 예컨대 그 사람이 굶음으로써 우리가 더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능력과 건강, 그리고 인생의 일부를 우리에게 선물로 내주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경제적 결핍과 고용불안을 넘어 주거·환경·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의 ‘사회적 배제’를 의미한다. 기업은 경쟁적으로 값싼 물건을 만드는 ‘임금비용 통제’를 경쟁우위 전략으로 삼고 있다. 이른바 ‘저임금 경제’다. “경쟁 기업이 비정규직을 사용해 더 싼 가격으로 시장에 상품을 내놓을 경우 더 많은 비정규직을 활용해야 이윤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며 인건비 따먹기만 추구하는 ‘무능력한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처럼 무능한 자본이 만들어낸 취약하고 불안한 고용불안 세계에서 노동자는 ‘유연화’라는 유령과 싸우고 있다. 이 체제에서 삶의 불안정과 위험은 하청·외주·용역 노동자들의 어깨에 전가된다. 자본은 ‘도급·하청’이란 이유로 노동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은폐하고, 일자리 불안 속에 정규직 노동자도 자녀 고용 세습에만 매달리고 있다.

노동운동은 더 이상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행위자가 아니며, 이제 ‘노동계급에게 안녕을 고할 때’가 된 것일까? 노동조합은 ‘정의의 칼’과 ‘독점 기득권적 이해’라는 두 얼굴을 가졌다. 약자들의 집단적 목소리를 대변하고 산업민주주의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소수 조합원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그들만의 조직이기도 하다. 대공장에서는 파업이 발생하면 회사 쪽이 알아서 물질적 이익을 챙겨주는 관행이 형성돼 있다. 반면 노조가 가장 필요한 다수의 노동자는 노동조합조차 가져보지 못하고, 설령 노조가 있어 파업한다 해도 회사에서 얻어낼 물적 기반 자체가 없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1987년 이후 노조의 민주화·자주화는 이뤄냈지만 노동자끼리의 계급적 단결과 연대는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 힘있는 노동조합에서 투쟁의 구호는 요란했으나 결과는 언제나 조합원만의 임금·복지 향상으로 축적됐다. 이제 ‘어떤’ 노동자를 위한 운동인지가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가르는 잣대다. 한국에선 국민파·중앙파·현장파 등 정파 노선이 아직도 노동운동 주변을 배회하고 있지만, 국제 노동운동은 노동 유연화 물결이 대대적으로 불어닥친 1980년대부터 조직화 모델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돼왔다. 기존 정규직 조합원이 독점적 지대를 향유할 수 있도록 ‘올해를 관통하는 사업’을 ‘정규직 조합원 서비스’에 계속 배치할 것인가, 비정규 노동자를 ‘조직화’하는 사업에 나설 것인가?

힘은 있다, 저항이 없을 뿐…
1970년 11월 전태일이 분신하면서 “어머니… 배가… 고파요”라고 말했듯, 비정규 노동자는 배도 고프고 노조도 고프다. 1천 명 이상 대기업은 노조조직률이 80%에 달하지만 100명 이하 사업장 조직률은 3%에 불과하다. 경제적 결핍은 우리 사회가 지닌 자원의 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원 배분을 결정하는 제도와 권력 때문에 발생한다. 현대·기아차 공장 조합원과 가족은 단체협약을 통해 진료비와 대학생 자녀 등록금을 상당 부분 이미 지원받고 있다. 즉, 무상교육·무상의료 같은 ‘세상을 바꾸는’ 사회적 의제에 적극 나설 이유가 없다. “(독점 대기업의) 오아시스를 버리고 (전체 노동자를 위해 제도를 바꾸는) 강을 찾아나서는 모험”을 하려 들지 않는다.
“자본의 역사는 통합의 역사이고, 노동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라고 했던가. 한 사회의 생산을 담당하는 직접노동자들은 ‘불의 연대’를 달궜던 변혁의 시대를 지나 이제 나와 가족의 고용불안, 그리고 내 옆의 비정규직이라는 ‘새롭고 복잡한’ 노동세계와 대면하고 있다. 어려운 문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대공장의 강한 노조는 아직 노동자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발언’할 기회와 물질적·조직적 권력 자원을 갖고 있다. 다만 이런 힘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 정규직 조합원의 이익이 다른 노동자의 이익과 충돌할 때 이를 해결할 대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저 ‘조합원의 정서’ 뒤에 숨고 만다면 노동조합 ‘운동’이 아니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지금 부족한 건 ‘힘’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저항’이다.

글 · 조계완
<이코노미 인사이트> 국내편집장. 고려대 경제학 박사 과정(노동경제)을 수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