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또하나의 역사책

2011-05-09     이정우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5월이다. 그러나 봄소식을 전하는 것은 포근해지는 날씨뿐만이 아니다. 기후와 더불어 매년 요맘때면 우리에게 새로운 시즌이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것이 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의 개막이다. 동계훈련을 마치고 그라운드로 돌아온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승컵을 둘러싼 각 팀들의 각축전이 올해는 어떤 양상을 띨지 예측해보는 일 등은 봄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스포츠와 함께 봄기운을 한껏 만끽하는 가운데, 문득 ‘한국인에게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스포츠란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질문이 머리를 스쳐간다. 분명 스포츠는 한 편의 드라마요 스펙터클로서, 보는 이에게 흥분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스포츠는 한민족이 경험한 역사적 질곡을 함께하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정치·사회적 의미를 양산하는 장으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근대화와 식민의 경험
대한민국에서 스포츠의 발전은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구한말 스포츠는 근대화의 첨병이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야욕이 점차 증대하는 가운데 날로 쇠약해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통탄하며,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강한 조선인을 육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스포츠의 활성화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들은 신체 활동을 경시하는 유교사상을 국권 침해의 주원인으로 인식하고, 그 대안으로 강건한 육체를 강조하는 스포츠의 보급을 통해 조선 근대화를 앞당기려 했다. 나아가 1896년 12월 3일자 <독립신문>의 사설은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축구경기에서 일본인보다 뛰어난 기량을 보일 뿐만 아니라, 영국인들과 견주어도 실력이 뒤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를 근거로 조선이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스포츠가 조선인에게 서구열강 및 일본에 비해 근대화 과정이 뒤처져 있다는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스포츠는 서구에서 건너온 선진 문명 중 하나로 간주됐기에 여기서 서양인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곧 조국의 근대화를 상징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스포츠는 항일투쟁 수단으로 작동한다. ‘민족’과 ‘국가’라는 이름 아래 자연스레 동원되는 스포츠의 속성상, 이를 통한 저항적 민족주의의 발현은 어찌 보면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특히 강압적 식민정책의 영향으로 해방을 위한 민족운동의 조건이 점차 열악해지는 가운데, 스포츠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반일 감정을 비교적 자유롭게 내뿜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다. 조선인 선수를 응원하면서 한민족은 억눌린 민족 감정을 분출했고, 조선인 선수가 일본인 경쟁자를 누르고 승리라도 하면 마치 광복을 이룬 듯 통쾌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한-일전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해방, 분단, 냉전
그중에서도 손기정·남승룡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한 쾌거는 한국 체육사와 민족운동사에 길이 기억돼야 할 사건이다. 일제는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을 근거로, 조선인은 일본인에 비해 인종적으로 열등하므로 일본 지배는 응당한 것이라는 관념을 한반도 전반에 주입했다. 나아가 춘원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일제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조선 지식인들도 여럿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두 청년이 일본 선수들은 물론 서양의 건각들을 누르고 당당히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는 사실은, 조선 민족을 열등시하는 사고를 바로잡고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올림픽이었지만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성과는 조선인에게 그동안 짓눌린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사건이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은 지당히 민족국가의 재건을 고대했다. 하지만 이런 민족의 열망에 반해 타의에 의해 분단되는 비극을 겪는다. 통일을 향한 민족의 염원은 스포츠를 통해서도 발견된다. 1946년 3월 25~2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경평축구대회가 그것이다. 서울과 평양의 축구대회는 일제 식민 치하에서 겪은 애환을 담고 있는 경기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간 축구경기는 한민족의 단결을 도모하고 항일정신을 기르던 행사다. 일제에 의해 중단된 경평축구전이 해방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부활했다는 점은, 통일된 민족국가의 형성을 갈망하는 한민족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은 이듬해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이는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한국전쟁과 냉전을 겪으며 남북한은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민주화와 스포츠, 그리고 올림픽

1966년 북한은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둔다. 북한과 극심한 체제 대립을 겪고 있던 남한에 북한의 선전은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국제 경기에서의 승리는 곧 정치체제의 우월성을 알리는 계기로 인식됐기에, 당시 남한은 북한과의 일전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면 차라리 기권을 해가며 되도록 맞대결을 피해왔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꿈도 못 꾸던 월드컵 본선에서 북한이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세간의 집중을 받게 된 것이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의 축구팀은 약체로 평가되던 시절이었고, 북한의 선전은 남한에 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국제정치에서 스포츠가 가진 의미를 지각하고 북한 스포츠를 따라잡기 위한 계획을 수립한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 아래 청년들의 신체 기량을 강화하기 위한 군대식 체육 활동이 학교에 장려됐다. 중앙정보부는 잉글랜드 월드컵 뒤 ‘양지’라는 국가대표 축구단을 결성했고, 대한축구협회는 1967년을 ‘한국 축구 정진의 해’로 지정하며 도약을 준비했다. 각종 국제경기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태릉선수촌이 개장한 시기도 이즈음이다. 결과적으로 남북한의 이념 대립이 스포츠에서 남한의 국제 경쟁력을 증진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셈이다.

1980년대는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이 어느 때보다 불타오르던 시절이다. 10·26 사태 이후 찾아온 ‘서울의 봄’은 이듬해 5·17 비상계엄과 함께 얼어붙었고, ‘체육관 선거’로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군부독재는 다시 시작됐다. 대학생과 노동자, 지식인은 치열한 민주화운동으로 군부에 맞섰다. 전두환은 시민 저항에 대응하는 데 스포츠의 효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정부는 컬러TV 도입, 연예산업 확대 등 유화정책을 폈다. 점차 정치화해가는 국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혹은 멀게 하려는 의도였다. 스포츠 정책도 같은 맥락에서 전개됐다. 1981년 프로축구리그가 시작됐고, 82년에는 프로야구와 프로씨름이 출범했다. 83년에는 농구 ‘점보시리즈’, 84년에는 배구를 ‘백구의 대제전’으로 포장하며 겨울스포츠의 중흥기를 유도했다. 즉, 1년 내내 스포츠를 보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프로스포츠 경기는 컬러TV를 통해 생생하게 안방에 전달됐고, 같은 시기에 허용된 스포츠신문의 지면 확대와 새로운 스포츠 언론사의 등장은 프로스포츠의 인기몰이를 가속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국민의 관심을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에서 ‘건전한’ 스포츠로 전환하려 했다.

남북 교류협력 시대의 스포츠

‘서울올림픽’이라는 초대형 스포츠 프로젝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민주적 방법으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집권 초기 국민에게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다. 올림픽 유치 사업에 뛰어든 것은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카드였다. 1981년 9월 30일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고, 이때부터 1988년까지 올림픽이라는 거대 이벤트의 준비가 국가정책의 방향을 결정짓는 주요인으로 작용한다. 올림픽은 한국인에게 국제 수준에 부합하는 새로운 행동 지침을 강요했고,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한다는 이유로 진행된 환경미화 정책은 빈곤층을 도시의 중심에서 몰아내는 무자비한 재개발 정책으로 이어졌다. 즉, 대한민국 민중의 삶은 국제화의 ‘세련미’가 강조되는 가운데 철저히 도외시됐다.

하지만 ‘시민의 탈정치화’를 목적으로 시작된 올림픽 사업은 역설적으로 전두환 정권에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게 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1987년 6월 9일 대학생 이한열이 최루탄 직격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올림픽을 1년 앞둔 시점에서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지자 한국이 올림픽 개최지로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국제사회에서 거론되기 시작했고, 제3국으로 개최지가 변경돼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왔다. 올림픽을 놓칠 수 없던 전두환 정권은 결국 국민의 요구인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태를 일단락지었고, 올림픽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2000년대의 큰 특징은 남북한 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다. 햇볕정책과 남북 정상회담, 그리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통해 남한과 북한이 적대적 관계에서 협력적 관계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한은 올림픽 참가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 입장했고, 향후 올림픽에서의 남북 공동 입장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해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까지 이어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직후 북한 축구대표팀이 서울을 방문해 남북 통일축구대회가 열렸고, 같은 해 부산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에는 남한에서 열리는 국제경기대회에 사상 최초로 북한 대표팀이 대규모 응원단과 함께 참가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남북한 탁구 대표선수단이 현지에서 공동으로 훈련하는 행사를 마련해 남북 간 우정을 과시했고, 폐막 이후 차기 베이징올림픽에서 단일팀으로 참가하기 위해 실무 접촉을 빈번히 했다. 때마침 경의선 철도까지 연결됐다. 남북은 단일팀 구성에 실패하더라도 공동으로 응원단을 구성해 철길로 남북을 가로질러 베이징으로 이동하자는 계획을 구체화했고, 이는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합의됐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남북 교류협력 시대에 스포츠는 남북한의 하나된 정체성을 다른 어떤 분야보다 강하게 보여주었다. 즉 스포츠는 남북관계 개선을 촉매하고, 이를 통해 남북한은 한민족의 공통된 정체성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스포츠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맞물려 때론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청량제로, 한편으론 정치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모하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이한 의미와 가치를 양산해왔다. 이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향후 스포츠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스포츠는 단순한 신체 활동 차원을 뛰어넘어 복잡한 사회적 가치를 내포하는 기제로 항상 우리와 함께하리라는 점이다.

글 · 이정우
영국 러프버러대학 스포츠사회학 박사. 문화연대 체육문화위원회 운영위원, 한국스포츠외교포럼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