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핵개발을 주도한 ‘폐쇄 기업도시’

폐쇄도시의 과학자, 연구원, 엔지니어, 실험자 비밀 공동체

2020-07-31     크리스토프 트롱탱 | 기자

수소폭탄, 우주항공 등 소련의 핵심적인 기술개발 프로그램은 비밀도시 내에서 진행됐으며 과학자, 엔지니어, 노동자들도 외부와 단절된 채 이곳에서 거주하며 일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핵 개발 연구의 요지였던 사로프를 비롯한 폐쇄 도시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매년 5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성 세라핌(Saint Seraphim of Sarov, 1754~1833)의 행적을 좇아 디베이에보를 찾는다. 이곳 숲에는 성인이 며칠간 기도하며 머물렀던 암벽이 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얼어있는 샘물에서 사람들은 준비해온 물병에 물을 담는다. 영적 기운을 받기 위해 근처 작은 호수에 몸을 담그는 이들, 성당 광장 앞에서 성호를 긋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이 성지에서 12km 거리에 사로프와 성모승천 수도원이 있다. 그러나 순례자들에게는 이곳 방문이 제한된다. 성 세라핌의 역사적 흔적이 가장 진하게 남아 있는 이곳을 순례할 수 없는 것이다.

‘아르자마스 16’으로 불렸던 사로프에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의 지도에서도 지워버렸던 이 도시는 지금도 가시철조망에 둘러싸여 있고 순찰대가 감시한다. 이곳 주민들은 2차 대전 후, 극비리에 ‘소련의 핵 방패’ 제작을 위해 까다롭게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이 비밀도시가 공개됐고 원래 이름 ‘사로프’를 되찾은 지금도 이곳 주민과 사전허가를 받은 방문객만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다.

약 1만 명의 사로프 주민도 출근할 때마다 특수 개인 명찰을 단말기에 스캐닝한 후 6자리 비밀번호를 누르고, 신분검사를 받아야 한다. 사전허가를 받은 방문객은 방문 전 핸드폰, 카메라, 기타 통신장비를 검문소 물품보관소에 맡기면 초대를 한 업체의 의전 담당자에게 안내된다. 그러면 이 의전 담당자는 방문객이 일정을 마치고 검문소로 돌아와 보관물을 수령하고 사로프를 떠날 때까지 수행원 역할을 철저히 한다.

 

‘핵 개발자들의 수호성인’

이런 순례지 방문 통제에 대해 동방정교회의 반응은 어떨까? 놀랍게도 기꺼이 수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7년 모스크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열린 국방부 핵무기 담당 12차 지도부 설립 60주년 기념식에서 푸틴 대통령은 1990년에 이뤄진 무기개발 엔지니어와 영적 지도자 간 화합을 언급했다. 그 해 사로프의 핵 개발자들이 그동안 점거하며 사용했던 수도원 건물을 교회에 반환했고, 총주교는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라핌을 핵 개발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했다.

사실 폐쇄도시 사로프의 역사는 창조의 신비보다는 과학적 지식을 더욱 신봉했던 소련 체제하에서 시작됐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영국 워싱턴 처칠 총리와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과 영국이 소련과 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내비쳤다. 스탈린의 예측은 적중했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던 시기부터 이미 영국과 미국은 전쟁으로 국력이 쇄한 소련과 동맹관계를 끊기 위한 전략을 논하고 있었다. 

같은 해 7월 16일, 미국은 소련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 맨해튼 프로젝트 완료 후 뉴멕시코 사막에서 역사상 최초 핵실험을 단행했고 뒤이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이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결단을 내렸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소련 정부는 미국의 핵실험을 강력한 경고라고 판단했다. 2차 대전으로 사상자 수가 2,600만 명에 달했고, 산업도 파괴돼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소련에게 미국과 영국은 어제의 동맹국일 뿐 4년 전 소련에 위협을 가했던 나치와 다를 바 없는 적국이 됐다. 

결국 소련은 1945년 8월 29일 각료회의에서 두 가지 역사적인 결의안을 채택했다. 첫 번째는 서구와 겨룰 수 있는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연구에 박차를 가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적국이 알아채면 무기개발을 먼저 끝낼 위험이 있으니 최대한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45년 말부터 비공개 연구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라브렌티 베리아가 이끄는 실무팀이 장기간 심사숙고한 끝에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350km 떨어진 곳에 약 9,500명이 거주하던 사로프를 선정했다. 그 다음 사로프와 인근 촌락을 모르도바 행정 구역에서 빼고, 지도와 공식문서에서도 완전히 삭제했다. 그리고 주민들을 분류해 포탄을 생산하는 N 550공장에 취직시켜 남아 있게 하거나, 적합 판정을 받지 못한 주민은 모두 당국이 접근금지 구역 밖으로 이주시켰다.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이 대거 유입되자 마을은 점차 소도시로 변모해갔다. 주택과 병원, 경기장, 문화원, 도서관, 극장, 공원이 들어섰다. 공사는 사전 계획 없이 서둘러 진행됐고, 수도원 건물 안에 연구실이 ‘급조’됐다. 당시 공사현장에 투입됐던 노동자 중에는 ‘특수 할당 인원’(공공문서에서 수감자들을 이렇게 칭했다)도 있었다. 

설계국 ‘KB 11’의 엔지니어든 특수 작업장에서 일할 단순노동자든 채용 전 반드시 보안기관에서 지원자의 ‘3세대 전 조상’까지 조사를 했다. 그리고 한번 채용이 결정되면 보안기관의 허가 없이 정해진 구역 밖으로 외출이 불가했다. 개인적인 외출도 휴가도 금지됐다. 이렇게 규제가 심했던 대신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특권으로 느낄 만큼 급여는 높았으며, 사로프 상점에는 항상 다른 지역보다 물품이 풍부했다.

이 소도시는 ‘아르자마스16’이라 명명됐으며, 이전 명칭을 언급하는 것은 기밀누설로 간주했다. 개인 서신은 ‘모스크바 센터 300(Moscou Centre 300)’라는 특별 우체국을 통해서 주고받았고 아르자마스 16의 거리명은 모스크바의 거리명을 그대로 따랐다. 만일 KB 11의 엔지니어가 이동하던 중 경찰이 신분검사를 하더라도 거주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기밀을 유지하고 외부와 격리된 생활은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누려야 할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회상했다.(1) 보안 담당 공무원들의 융통성 있는 일처리 덕택에 그 생활이 만족스러웠다는 이들도 있다.(2) 사로프의 출입통제 규율은 매우 엄격해 엔지니어들에게 이곳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수도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 세라핌은 “진정한 믿음이 있는 곳에 무위란 없다. 깊은 믿음이 있는 자는 항상 행한다”라고 말했다. 이 금언은 사로프의 과학자들에게 딱 들어맞았다. 그들은 가끔 주어지는 휴가도 임계 질량과 중성자 농축기에 대해 논하면서 보냈다. 

 

폐허 속에서 핵을 건져 올린 소련

한편 1947년 3월 12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한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면서 냉전 시대를 열었다. 이 사건은 당시 과로에 시달리던 연구자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 트루먼의 참모진은 ‘드롭샷 작전’을 세우고 1950년 초 소련의 주요 산업·군사·과학 시설에 200~300개 핵폭탄을 투하할 계획이었다. 이에 맞선 소련은 저명한 과학자, 엔지니어, 기술자, 정보국, ‘핵기술 간첩’들도 합심해 단 4년 만에 소련 최초 핵무기 RDS-1 개발에 성공했다.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수장이었던 율리 카리톤은 이후 “1946년에서 1949년 사이 우리가 일궈낸 업적은 경이로웠다. 우리는 열정, 영웅심, 창의력, 그리고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소련은 파시즘 국가, 독일을 격퇴한 지 불과 4년 만에 미국의 핵개발 독주를 막는데 성공했다”고 회상했다.(3)

이런 성공의 여세를 몰아 사로프의 핵 개발 연구진은 이후 4년 만에 첫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놀라운 점은 당시 소련은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폐허가 된 상태에서 재건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막대한 재정과 월등한 군사산업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950년 당시 미국 경제는 세계 국민총생산(GNP)중 27%를 차지했으나, 소련은 9.6%에 불과했다. 소련은 1945년부터 핵개발 프로젝트에 사로프 같은 폐쇄 ‘기업도시’ 모델을 적용했다. 아르자마스16(사로프)이 기초 연구를 하는 최고 권위자들이 집결하는 곳이었다면, 우랄과 시베리아 지역에서 선정된 10여 개 소도시는 아르자마스16의 지시에 따라 실험연구에 필요한 원자재를 극비리에 생산,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1946년 첼랴빈스크 인근 폐쇄도시 오제르스크(첼랴빈스크65)에 있는 마이아크 과학 기술 연구소에서 제작한 원자로 프로토타입으로 핵무기용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1949년에는 또 다른 폐쇄도시 톰스크 7에서 우라늄 235를 생산했다. 스탈린은 “민족의 적이라 할지라도 사회주의 건립을 위해 마땅히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노동수용소 관리기관, 굴라크에서는 정치범 등 수감자들을 우라늄 광석 채굴이나 핵분열물질 운반처럼 가장 위험한 작업에 투입했다. 역사학자 유리 피오도로프에 의하면, 1945년 소련내부인민위원회 NKVD(소련 내무부)가 관리하던 13개 노동수용소의 약 10만3,000명 수감자가 핵 개발 프로젝트에 동원됐다. 이후에도 약 19만 명의 수감자가 광석 채굴장에서 일했다.(4) 물론 이들 중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스크바400’의 탄생

이론적 연구도 원자재 공급도 순조로웠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핵실험을 계획할 수 있었고, 적절한 지리적 사막 지대를 물색했다. 그리고 세미팔라틴스크 인근에 있는 카자흐스탄의 초원 지대를 선정한 다음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예상 진앙지를 중심으로 핵폭탄의 파괴력을 측정할 수 있도록 건물, 벙커, 지하철역사를 배치해 건설했다. 그리고 건설노동자와 충격파 및 방사능 파괴력을 연구하는 생물학자, 물리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핵실험 장소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에 모여 거주했다. 이곳이 바로 비밀도시 ‘모스크바400’이다. 

모스크바400은 현재 소련 핵 프로그램을 주도했던 과학자 쿠르챠코프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바꿨고 현재도 약 1,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쿠르챠코프는 이제 허가 없이 방문이 가능한데 과거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다. 콘크리트 포석이 깔린 거리에는 오래된 가로수들과 스탈린 시대풍의 낡은 건물들, 그리고 촌스러운 호텔 건물들이 드문드문 있다. 거기에 핵물리 연구소가 소련시대 ‘유물’로 남아있다. 이 연구소는 일본 과학자들과 연구용 원자로에서 위기상황을 모델링하고 테스트한다. 방사능 안전 연구소도 남아 있지만 일반인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대신 폴리곤 박물관에서 소련시대에 사용했던 지도와 흑백사진들을 통해 핵폭탄 실험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다. 진열된 지진 측정기, 방사능 계측기, 카메라, 그리고 발사를 명령했던 조종석은 먼지로 덮여있지만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이드 안내를 받아 쿠르챠코프가 근무했던 사무실도 볼 수 있다. 지금 쿠르챠코프에서는 핵기술 인큐베이터, 파크(Parc)가 과거 과학 연구의 명맥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핵무기 개발을 위해 조성한 폐쇄도시에 모인 과학자, 엔지니어, 핵실험자들은 조국 수호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를 이뤘다.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마티우츠킨은 사로프의 연대기에서 “역설적이게도 이 폐쇄도시는 다른 대도시에 있는 주요 국가산업 기업들보다 정보력이 뛰어났다. 외부 수백 개 기관과 기업에 대한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고 적었다. 폐쇄도시의 주민들은 다른 자국민들보다 국가 밖의 동향에 훨씬 민감했으며 자신들이 역사적, 세계적으로 중요한 일을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5)

 

국민의 분노, 재정의 붕괴

그러나 영웅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제동원으로 작동하던 시스템이 결국 흔들렸다. 게다가 독재적인 서기장이 장악한 소련 지도부는 순응주의에 빠져 무기력해졌고, 산업 시설은 점차 노후화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성과만을 강요받은 폐쇄도시의 주민들은 지쳐가면서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가의 긴급상황을 빌미로 환상만 심어주는 소련체제에 실망했다. 시민들은 환멸과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이 문제를 직시했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1990년대에는 민주주의 체제를 시도하면서 소련이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펼쳤던 5개년 계획의 뒤를 이어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 했다. 러시아와 외국 경제학자들은 여러 과도기 방식을 비교하고 이점을 저울질했으나 신중하지 못한 소수 과두 정치인들은 기업, 석유 콤비나트, 철강, 알루미늄 제련소, 광산, 화학 공장들을 저가에 대거 매수했다. 그러자 도산사태가 번졌고 실업률은 급증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기업들은 가치가 대폭 하락한 루블화로 급여를 지불했다. 재정이 바닥난 보건, 교육, 치안, 사법 등 사회 모든 분야가 점차 붕괴됐다.

분노한 국민 사이에 분리주의가 확산됐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체첸 전쟁이 발발했으며 충격에 빠진 국민은 복수심을 불태웠다. 러시아의 파벨 그라체프 국방부 장관은 공수 사단으로 단시간에 체첸을 굴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 공화국을 하루빨리 굴복시키라는 목소리도 점점 커졌지만 피로 물든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시대에 자행됐던 숙청, 억압, 구금으로 인구수가 충격적으로 급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체제 붕괴 이후 1992년에서 2008년까지 약 15년 동안 같은 상처를 남겼다”고 강조했다. 이 기간에 러시아-체첸 전쟁, 낙후한 의료 서비스, 범죄율과 자살률 급증, 사고, 재해로 인해 사망자 수가 신생아 수보다 1,100만 명이나 많았다.(6) 1990~1994년 러시아인들의 평균 수명은 남성의 경우 65세에서 58세, 여성의 경우 74세에서 71세로 급감했으며, 이후에도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이런 시국에서도 그간 보호구역이었던 폐쇄도시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곳 주민들은 오래된 동료 사이였으며 심각한 부정부패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폭력 조직이나 범죄도 없었다. 다른 지역에 있었던 소련의 과학 장비들은 헐값에 팔려나가기도 했지만 자유주의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이곳에서는 핵분열물질 생산(군사용, 민간용), 핵연료 재처리, 군비 해체, 신무기 개발과 같은 핵심적인 연구개발을 이어나갔다. 

초창기 폐쇄도시는 지역 주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던 ‘기업도시’를 위한 베드타운의 기능을 주로 했지만 점차 다양한 경제활동이 시작됐다. 식당과 영화관, 쇼핑센터가 들어섰고, 여행사와 부동산도 생겼다. 하지만 소련 붕괴 후 경제침체로 인해 연구활동은 활기를 잃었고, 주민들도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전기, 하수처리, 대중교통과 같은 공공서비스 조차도 휴양마을이나 문화, 스포츠 시설처럼 지역 행정 소관으로 넘어가거나 민영화됐다. 또한, 폐쇄된 도시의 핵심인 과학연구동의 경우 고유의 문화적 특수성이 남아 있긴 했지만 점점 ‘평범한’ 곳이 되어 갔다.

 

‘러시아산’ 시스템을 장착한 미국과 유럽

그러나 지금 사로프 주민에게 사로프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자고 제안한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을 것이다. 소련 시대에 누렸던 영광은 사라지고 비밀도시의 존재는 이미 세상에 공개됐으며 주민들도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폐쇄도시는 그대로 ‘폐쇄적’으로 남아 있으려 한다. 과거의 영웅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났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대부분 이곳에 남아 있다. 

이들 중 절반은 기업도시에서 민간, 군사 상관없이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 개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의 핵 연구소와 핵연료 보관 및 재처리 공장은 현대화돼 ‘청정 민간 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아직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지침을 따르고 있으며 위험 물질을 강에 폐기해버렸던 과거와 달리 폐기물 처리 규범도 개선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스타트업이나 대기업의 하청 업체에서 근무한다. 예를 들어 사로프에 있는 인큐베이터 비나르(Binar)는 15년 전부터 안내삽입렌즈, 비접촉식 철판 평탄도 측정기, 원자력발전소 핵안전 센서 등과 같은 하이테크 분야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성실하고 진중한 분위기, 높은 과학 연구 수준, 그리고 전문 기업과의 접근성은 폐쇄도시에서 하이테크 분야가 번창하는데 기여하는 강점들이다. 그래서 폐쇄도시는 다른 비슷한 규모의 도시에 비해서 실업률이 낮다(국가 평균 실업률은 6%, 폐쇄도시의 실업률은 4%다).(7) 이 폐쇄도시들은 상호 교류, 연수, 주민 자녀들의 방학 프로그램을 장려하면서 서로 결속된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일반인에게 완전 개방한 비밀도시의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민간 원자력 발전소를 개발했던 오브닌스크, 입자 가속기와 기초과학 연구소가 있는 두브나, 그리고 과거 세균무기 연구소가 있었던 자고르스크 7은 더 이상 폐쇄도시가 아니다. 그리고 우주항공 연구시설이 있던 비밀도시들도 1986년부터 개방됐다. 다만 국방부 산하, 또는 민간 핵 사업을 관장하는 국영기업, 로사톰(Rosatom)에서 인수한 연구기관은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제 폐쇄도시에 있던 과학연구의 성지는 더 이상 특별한 곳이 아니다. 

로사톰은 10여 개 폐쇄도시에 있던 연구소, 우라늄 농축 시설 그리고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공사는 이란, 인도, 중국, 방글라데시의 발주금액이 1,000억 달러 이상이며, 30여 개 원전을 건설 중이다. 항공우주 분야에서도 내구성 강한 러시아 기술력이 인정을 받아 국제 우주 정거장(ISS) 설치 프로젝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로켓은 이미 오래전부터 안전 모듈에서 로켓 엔진까지 여러 ‘러시아산’ 시스템을 장착하고 있다. 

 

러시아는 과거의 영광을 되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AI나 슈퍼컴퓨터, 나노테크놀로지, 의학연구와 같은 최신 분야에서는 러시아가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노기술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아나톨리 추바이스(침체된 러시아 경기의 회생을 위해 ‘충격요법’을 주장했다)는 공공 기금으로 2011년에 나노기술공사 로스나노(Rosnano)를 창립했으나 기술혁신은커녕 부당하게 TVA 면제 혜택을 누려서 회계 감사원에 고발을 당했다. 

소련은 세계대전 후 현재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에도 훌륭한 과학 연구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되살릴 힘이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 도입으로 러시아의 날개가 잘린 것일까? 물론 러시아가 도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21세기 초부터 시와 지역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공기업도 각자 인큐베이터, 연구개발단지, 연구실, 스타트업 양성소를 갖추고 곧 실적을 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주로 민관 공동출자형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우후죽순 형성되기 시작한 이런 ‘테크노파크’는 2019년 말 그 수가 무려 169개에 달했다. 

이런 환경만 갖춰 놓으면 창의력을 갖춘 기업들이 성과를 낼 줄 알았으나, 테크노파크 연합에 의하면 스타트업의 성공률은 점점 떨어졌다(미국과 유럽에서 스타트업 인큐베이션 기간이 종결되는 시점에 생존한 기업 비율은 각각 87%, 88%지만 러시아는 27%에 그쳤다). 어쩌면 이런 결과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천재들이 차고에서 스타트업을 창립하고, 세상에 혁신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상이 현실이 되기를 기다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는 홍보를 위해 기술을 개발한 것이 아니다. 러시아의 폐쇄도시, 실리콘 밸리, MIT의 성과를 통해서 알 수 있듯, 성공의 결정적인 열쇠는 ‘차고’가 아니다. 꾸준한 공적자금 투입으로 장기간 다져진 기초연구다. 도전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글·크리스토프 트롱탱 Christophe Trontin
기자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Andrey Sakharov, 『Souvenir 회상』, Alfa-Kniga, 모스크바, 2019년(초판 1978년).
(2) V.I.Joutchkine, A.N.Tkatchenko, Vladimir Matiouchkine,『La vie quotodienne à Arzamas-16 아르자마스16의 일상』, Molodäïa gvardia, 모스크바, 2008년.
(3) Y.Khartion, Y Smirnov, 『Mythes et réalités du projet atomique soviétique, Arzamas-16 아르자마스16, 소련 핵 프로그램의 환상과 실제』, 1994년.
(4) Youri Fiodorov, ‘Le Goulag Atomique 핵개발을 위한 굴라크’, <Tradicion russe>(온라인 신문), 프라하, 2015년 9월 30일. 
(5) Vladimir Matiouchkine,『La vie quotodienne à Arzamas-16 아르자마스16의 일상』, Molodäïa gvardia, 모스크바, 2008년. 
(6) Goskomstat.
(7) Rosstat, Faïk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