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어에 숨은 ‘복종 사회’

일본을 짓누르는 수직적 위계질서

2020-07-31     미즈바야시 아키라 | 일본 소설가 겸 도쿄 조치대(上智大學) 교수

일본어에서는 윗사람에게 사용하는 말과 직장 동료에게 사용하는 말이 다르다. 심지어 형에게 하는 말과 동생에게 하는 말도 다르다. 이런 일본의 언어는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수직적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일본이 현재 겪고 있는 정치위기는 현행 일본 헌법이 발효된 1947년 이후 가장 심각하다. 집권 자민당이 2012년 개정헌법 초안을 내놓은 이후 시민들의 반응이 찬반으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의 총재 아베 신조 총리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억압하려 한다. 현행 일본 헌법은 대일본제국 헌법(1889년)을 대신한 것이다. 대일본제국 헌법하에서 일본은 식민지 수탈 침략 전쟁이라는 살육의 광기에 빠져들었다. 이 전쟁을 가리켜 ‘15년 전쟁’(1931~1943)이라고 부른다. 

이제 일본인들은 ‘신민’의 시대(주권이 천황에게 있는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시민’의 시대(국민 주권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 같은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체제의 변화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일어났다. 군국주의 일본은 식민지를 늘리기 위해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고,(1) 1945년 3월 10일 도쿄에 수많은 폭탄이 떨어졌으며 그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시키에 떨어진 두 발의 핵폭탄은 두 지역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왜? 일본 국민은 저항하지 않는가

비록 일본은 아직 천황제를 고수하고 있지만, 현행 헌법에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자연권과 시민권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담아’ 1789년의 인권과 시민권 선언(1789년 8월, 프랑스 혁명 당시 라파예트가 기초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국민회의 결의에 의해 발표한 선언)을 반영하고자 했다. 적어도 현재의 일본은 전쟁의 황폐함을 벗어난 후 군국주의를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특히 2012년 12월에 아베 2차 내각이 출범한 이래 전후 ‘민주주의’ 일본은 정치적인 후퇴를 보여주고 있다.(2) 헌법 개정의 1단계는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헌법 9조를 개정해 다시금 무장하려는 것이다. 이에 더해 궁극적으로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시스템에 해당하는 현행 헌법의 기본원칙을 없애고자 한다. 진정한 위험은 여기에 있다. 현재 일본의 집권세력은 천황 중심의 전통적 국가주의를 내세우고 헌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왜 국민은 저항하지 않을까? 지난 70년간 민주주의를 경험한 일본 국민이 왜 이런 정치권의 행태를 좌시하는 것일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후쿠시마 사태와 후쿠시마 이후의 불안한 현실(3)이 보여주듯 국민 대다수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권위적인 정부를 왜 일본 국민은 계속 지지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우선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정치의 큰 특징은 국가를 ‘시민’이 아닌 ‘민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같은 일본의 정치방식에서 일본인들은 특유의 집단주의를 따른다. 홉스에서 루소까지 사회계약의 기본개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철학에 따라 국민 국가를 세운 서유럽과는 달리 일본은 인권의 전신개념인 자연법과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는 공동체 사회는 정치 참여를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사상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건전한 공동체 생활로 이해되지 않고, 반대로 자연의 질서개념과 뒤섞인다. 자연의 질서개념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고적부터 존재한 질서다. 일본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사회를 자연주의 관점에서 보는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인들은 사회를 인간이 만든 것, 공동 의지의 결과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본에는 프랑스와 유럽의 계몽주의 정치철학에서 말하는 ‘국민’도 ‘시민’도, 심지어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충격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나는 감히 그렇게 주장한다.(4)

 

수직적인 인간관계와 존댓말

다음으로 일본 국민이 저항하지 않는 이유를 언어학적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는 수직적 인간관계가 특징이다. 일본의 ‘집단’은 철학가 레지스 드브레가 “나라는 더미가 쌓여 우리가 형성되는 기술”이라고 멋지게 정의한 공동체와는 다른 의미다.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에서 개개인의 위치는 수직적 위계질서 내에서만 정해진다. 윗선의 지배와 아랫사람들의 복종이 이런 생활방식에서 중심을 이룬다. 전형적인 ‘상명하달’ 시스템인 것이다. 

이런 수직적인 위계질서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일본어 ‘죠우이 카타츠’(죠우이 上意는 ‘윗사람의 의지’, 카타츠 下達는 ‘아래에 전달’을 의미)에 완벽히 나타나 있다. ‘상의하달 上意下達’을 뜻하는 ‘죠우이 카타츠’는 일본 사람들의 생각에 뿌리 박혀 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지배와 복종으로 이루어진 강제적인 집단주의는 8세기 고대 천황제 때부터 형성된 후 에도시대(1600~1868) 막부체제 때 강화됐다.

‘지배’와 ‘복종’을 바탕으로 한 이 같은 정치체제가 역사 속에서 형성되면서 그에 걸맞는 언어 질서가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언어도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따라 상대방이 윗사람이냐 아랫사람이냐에 따라 다른 단어와 어법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즉, 위계질서가 강한 사회의 특징이 어느 정도 언어에 반영돼 있다는 뜻이다. 상황에 따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 있다. 정부와 정당, 회사와 학교, 심지어 가정에까지 모든 사회 내부에 위계질서가 깊이 박혀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회사에 다니는 두 남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A는 직원이고 B는 회장 겸 대표이사다. 두 사람이 서로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랑스어라면 A가 B에게 “아버님은 몇 년도에 태어나셨습니까?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등을 질문할 수 있다. 그러면 B가 A에게 대답한 후 정확히 같은 어휘를 사용해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지위와 무관하게 ‘아버님’, ‘태어나시다’, ‘하시다’ 등 같은 어휘를 사용한다. 대화 상대자 모두 동등하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어에서는 절대로 프랑스어와 같은 방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A(아랫사람)와 B(윗사람)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A는 B의 아버지에 대해 높임말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낮추며 표현을 조절해야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형제끼리 서로 어떻게 부를까? 프랑스어에서는 형과 동생이 간단히 서로에게 ‘너’라는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한다. 나이 차이가 난다고 해서 형과 동생이 사용하는 호칭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일본어에서는 형과 동생이 사용하는 호칭이 다르다. 형이 윗사람이기에 동생에게 ‘너’라고 말하거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동생은 형에게 이런 식으로는 말할 수 없다. 동생이 형을 가리켜 이름을 부른다든지 ‘너’라는 2인칭 대명사를 쓸 수 없다. 여기에도 언어에 깃든 위계질서가 분명히 나타난다.

일본어가 사회의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그대로 보여주는 도구라는 것을 증명하는 세 번째 예가 있다. 스무 살의 지체장애인 청년이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잘못 사용해 멀어지는 불편한 상황이 그것이다. 나의 소설 『깊은 물속에서』에 등장하는 다카시는 어느 중견기업에서 일하는 청년이다. 그는 장애(정신연령이 10세) 때문에 우편물을 분류해 임직원들에게 전달하는 단순한 일을 한다. 그래서 다카시는 회사에서 대표이사부터 인턴까지 모두 알고 있다. 

다카시는 일본어에서는 윗사람에게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2인칭 대명사 ‘아나타(당신)’을 누구에게나 남발한다. 다카시는 지적장애가 있어 자신의 언어 사용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무도 다카시의 이런 언행에 화를 내지 못한다. 다카시는 일본어에 깃든 서열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파시즘이란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5)라는 롤랑 바르트의 말에 의하면 일본어에는 파시즘이 깔려있다. 이런 일본어의 ‘파시즘’에 맞서려면 위계질서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본인들은 대화할 때 상대방이 윗사람이냐 아랫사람이냐를 따지고 그에 따라 ‘너’를 사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정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이야기하며 어울리는 수평적인 시민사회에서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것은 일본인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끼친 유교 도덕을 나타내는 오륜이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 주군과 신하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역할, 형제 사이의 질서, 친구 사이의 신뢰 관계를 규정한 것이 오륜으로 여기서 언급된 관계는 모두 수직적이다. 어쩌면 동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 우정은 예외일지도 모르겠으나, 유교적 사회에서 우정조차 수직적인 인간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여하튼 우정의 지위는 유교적 가치에서 아름다운 관계의 맨 마지막, 즉 다섯 번째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관계에 포함되지 않는 이와의 관계, 즉 모르는 사람의 존재는 사회관계의 표준 룰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서로 몰라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는 사람들과 정확히 일본인들이 시민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지배와 복종의 구조로 이루어진 일본 사회에서는 수평적인 공동체 경험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배와 복종의 체계에서 벗어나 동료 입장에서 동등하게 말하고, 생각을 나누는 공간을 만들고자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곳이 공동체인데 우리 일본인들은 국민이 모여 토론하는 공공의 장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장 자크 루소는 『언어의 기원』에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언어는 복종의 언어다”라고 주장했다. 제네바 출신의 루소가 되살아나 일본에 온다면 복종과 지배라는 끝없는 곡예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본인들을 가리켜 “자유롭지 않으며 ‘복종하는 언어’를 쓴다”고 지적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복종하는 언어’는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와 닮아있다.

 

시지프스의 일

민주주의는 정부가 아니라 사회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왜 일본 열도에서는 이런 인식이 수용되기 어려울까? 왜, 일본에서는 유럽에서처럼 민주주의가 자체적으로 탄생하지 못했을까? 이는 언어적 요소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을 오랫동안 간과했다. 오래전에 루소가, “언어란 사회의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다”라고 주장했음에도 말이다. 루소에 의하면 한 사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회의 구조가 형성 및 유지되고, 이 사회의 성격에 따라 언어가 만들어진다. 이처럼, 언어와 사회는 서로에게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다. 사회적 관계는 언어를 통해 형성되고 유지된다. ‘복종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복종하는 언어’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다카시처럼 언어의 룰을 뒤흔드는 것, 언어의 사회적 사용에 개입하려는 것, 그래서 언어를 변화시키는 것은 개개인, 집단 내 시지프스가 할 일이다. 그 결과는 오직 역사만이 평가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쓰는 위기 속에서 일본인 감염자 수는 상대적으로 적다. 일본인들이 마스크 착용에 익숙하고, 신체적 접촉을 즐기지 않는 덕분일 것이다. 또한 토론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평소 침을 튀길 만큼 대화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문득 궁금해진다. 만일 내 짐작이 맞았다면 슬프지만 ‘복종하는 언어’가 전염병 예방에는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글‧미즈바야시 아키라 Mizubayashi Akira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글을 쓰는 소설가. 도쿄 조치대학교 교수. 소설 3권이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프랑스어로 출간되었다. 2011년에 『다른 데에서 온 언어』로 프랑스어작가협회로부터 아시아 문학상, 프랑스 학술원으로부터 프랑스어와 불문학 보급상을 받았다. 그 외 작품으로는  『멜로디』(2013), 『방황에 대한 작은 찬사』(2014) 등이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번역위원


(1) Cécile Marin, ‘Empire en accordéon 주름진 제국’, <마니에르 드 부아>, n° 139, 2015년 2~3월호.
(2) Akira Mizubayashi, 『Dans les eaux profondes-Le bain japonais(La rencontre) 깊은 물 속에서-일본의 목욕(만남)』, Arléa, 파리, 2018.
(3) Philippe Pataud Célérier, ‘À Fukushima, une catastrophe banalisée (한국어판 제목: 우리 모두는 피폭당했다! - 후쿠시마 원자력 재앙 7년의 악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4월호.
(4) 강연 ‘언어 망명 생활-방식의 한계를 넘어’, 2018년 9월 25일, 제네바 국제 모임, www.mizubayashi.net
(5) Roland Barthes, 『Leçon 강의』, Seuil, 파리, 197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