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하는 엄마는 신성하지 않다
유럽연합EU은 이제 ‘아이에 대한 정서적 관심의 부재’, ‘아이의 사회 적응을 돕는 능력 결여’까지 ‘아동학대’의 개념에 포함시킨다. 이 원칙들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우선 여성들이다.
다양한 사회기관들이 일시적 혹은 장기적으로 부모와 분리된 아이를 더 잘 돌볼 수 있게 된 것은 아이의 심리적 · 정서적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덕분이다. 이는 상당 부분 정신분석학에 빚지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다양한 이론은 어린이를 돌보는 인력을 전문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이론의 파급효과는 전문가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확산됐다.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위계질서가 비판받는 등 탈권위주의가 부상하던 1970년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역할은 여전히 모호했다. 프랑수아즈 돌토(1908~1988)로 대표되는 ‒돌토 혼자 이 경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경향은 남녀 역할을 생물학적으로 구분하는 관점에 기초해 아이 문제를 바라봤다. 돌토는 당시 가톨릭적 가족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임신중절에 반대한 돌토는 여성에게 끊임없이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강조했다. 다만 그는 여성에게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던 노골적 보수주의의 편에 서기보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중시했다. 돌토는 아이의 심리적 안정이 생후 초반 몇 년간 엄마의 주의 깊은 보살핌에 달려 있다고 봤다. 달리 말하면 엄마라는 존재를 아이를 중심으로 정의하는 관점이기도 했다.
‘나쁜 엄마’라는 죄의식 심기
이 개념 속에서 오로지 아이에게만 헌신하는 엄마의 역할은 당연시된다. 돌토는 엄마들에게 자신의 역할의 중요성과 위험 요소를 상기시키기 위해 엄마가 아이에게 초래할 수 있는 수많은 위험을 차례로 열거한다. 그는 엄마들이 자신의 정신분석학이 제안하는 방법들을 숙지하면 이런 위험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무지한 엄마는 ‘나쁜 엄마’로 간주된다. 이 새로운 이미지는 여성에게 중상위 계층의 권위 형태에 기초한 일군의 조언을 따르도록 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배려’와 ‘감시’라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곧 이런 모성의 이미지는 과중한 임무와 완벽한 어머니상의 압박감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엄마들을 안심시키려 애써왔다.1 그러나 엄마들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이 작업은 동시에, 출산 직후 아이에게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야 하는 비대칭적 관계에 엄마들을 심리적으로 가두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 작업은 ‘아빠 역시 우는 아이를 달래거나,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을 시킬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묻는 대신 여성이 능숙하게 모성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전통적 질서에 순응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 머물도록 한다.
가사도우미 쓰는 육아 전문가들
부모의 역할을 엄마에게 떠넘기는 관점2은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도 엄마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부모의 역할에 대해 흔히 하는 말들은 아이의 행복을 빌미로 엄마에게만 책임을 강요한다. 가령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할 수 없지만, 아이를 온종일 탁아소나 학교에 맡겨놓는 것은 좋지 않다. 이왕이면 집에서 낮잠을 자거나 점심을 먹게 하는 게 좋고, 저녁 시간을 탁아소 같은 곳에서 보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남녀 간 가사 분배나 여성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고용 형태, 혹은 불완전고용 문제 등에 대한 통계자료 등에서도 이런 식의 간접적 충고를 자주 접할 수 있다.3
돌토에 따르면, 아버지는 ‘불연속성’을 상징하며, 어머니는 ‘연속성’을 상징하는 존재다.4 연속성이란 쉽게 상상할 수 있듯 일상적인 돌봄 노동을 뜻하며, 가장 어려운 임무 중 하나다. 아버지는 엄마와 하나가 되려는 본능을 가진 아이를 엄마에게서 떼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혹은 배우자를 ‘돕기 위해’ 엄마의 역할을 ‘흉내 내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1970년대 반권위주의 분위기 속에서 아이의 입장을 중시하는 돌토의 정신분석학이 교육 문제에 대해 내놓은 해법들은 비현실적일뿐더러 어른들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다. 더욱이 돌토가 경고하는 몇 가지 심리적 위험의 가능성은 단순한 가설로 보더라도 근거가 희박하다. 돌토에 따르면, 청결함에 대한 부모의 교육은 아이 자신이 원한다면 모를까 아이에게 심리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다. 또한 대부분의 처벌, 단 몇 분간의 부주의, 부모의 감정적 흥분은 아이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조언은 아이가 직면할 위험을 과장하고 이 모든 것을 부모의 ‘실수’로 ― 더 정확히는 엄마의 실수로 ― 돌리려는 경향이 있다. 다른 모든 사회적 관계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 역시 각자의 고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힘겨루기에 나선다는 측면을 경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일을 하는 시대에 엄마들에게만 지나친 역할을 강요하는 상황을 뒤로 한 채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 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프랑스 국립보건의학연구소INSERM가 2005년 어린이 탈선 방지와 관련해 내놓은 보고서5에 이어, 유럽 차원에서 내놓은 가족 정책 보고서는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아 보인다.
‘현대 유럽의 긍정적 부모의 역할’을 주제로 한 유럽연합EU의 정책보고서는 공공정책을 위한 새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 원칙은 기존 아동학대 개념을 확장한 ‘교육적 비폭력’이라는 개념에 기초한다. 이제 아동학대는 “정서적 관심 부재, 감수성 결여, 무관심한 방치(부모들은 자신의 문제로 정신없는 나머지, 아이의 정서적 필요를 모두 충족해주지 못한다)” 혹은 “아이의 사회 적응을 돕는 능력 결여(잘못된 사회화, 무관심 혹은 심리적 실패로 적절한 인지적 자극, 경험을 통한 학습 가능성 등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6 등으로 정의된다. 이처럼 과도하면서도 모호한 요구들을 모두 만족시키려면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도 부족할 것이다. 아마 이 보고서를 작성한 전문가들은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계층에 속할 것이다(돌토 역시 실제로 유모를 고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는, 특히 여성은 아이 교육 이외의 여러 문제들과 씨름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EU의 규범은 차라리 어린이 보호 임무를 수행하는 전문가들이나 친권 대리인들의 직업적 임무, 혹은 사회복지요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의 사회계층에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글·상드린 가르시아┃부르고뉴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교육 사회학자. 주요 저서로 『어머니들과 독서 장애 치료 학교』(Mères sous influence et À l’école des dyslexiques(La Découverte, 2011; 2013) 등이 있다.
1 ‘신경쇠약 직전의 엄마들’, 〈르몽드〉, 2011년 3월 20 · 21일자.
2 Anne‒Marie Devreux, ‘부모의 권위와 역할: 아버지의 권리, 어머니의 의무’, Dialogue, n°165, Le Kremlin Bicêtre, 2004.
3 프랑스 통계청(INSEE)이 1998~99년 실시한 시간 사용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하루 평균 3시간 26분을 가사에 쓰는 반면, 남성은 2시간 1분만 썼다. 2010년 기준, 프랑스 여성의 30%는 파트타임 노동자였다.
4 Françoise Dolto, 『학업 실패: 교육에 관한 에세이』, Ergo Press, Paris, 1989.
5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동장애’, INSERM, www.inserm.fr, Paris, 2005.
6 ‘부모 역할의 변화: 오늘의 아이는 내일의 부모, 현대 유럽의 긍정적 부모의 역할’, 유럽연합 가족 담당 각료회의, Lisbonne,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