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정말 똑똑해졌나

2011-05-09     도미니크 팽솔, 아르노 랭델

“프랑스 사람들이 TV 시리즈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아직까지는 힘들다.” 10여 년 전, 열렬한 프랑스 문화 옹호자이던 알랭 카라제와 마르탱 윙클러(1)가 신랄하게 내던진 말이다. 상황은 뒤바뀌었다. 언론이 앞다퉈 TV 시리즈물을 다루고, 대학의 토론회와 철학적 깊이를 강조하는 저술들이 TV 시리즈물을 논하고 있다. ‘학계가 지닌 텔레비전에 대한 편견의 갑작스러운 후퇴’(2)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출증과 리모컨을 맞바꿔라 
사람들이 ‘고급 텔레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초 비디오테이프 녹화기와 유선방송, 위성방송이 출현하면서 미국의 대규모 방송 네트워크(<CBS> <NBC> <ABC>)의 가정방송 독점이 사실상 종말을 고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방송사들은 독점을 포기하면서 특수한 시청자 계층, 특히 어느 정도 학력과 문화적 수준, 상당한 구매력을 갖춘 도시의 젊은 시청자 대중을 타깃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 시청자들은 게리 마셜(유명한 시리즈 <해피 데이스> 제작자)의 설명대로 ‘확보하기 어려운’ 시청자층이다. “그들의 지성에 호소하면서 (중략)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들어야”(3) 유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대중을 만족시켜야 할 필요성이 미국 텔레비전 제2의 ‘황금시대’(1950년대가 제1의 황금시대)를 만들었다. 모든 전문가들은 <힐 스트리트 블루스>(1981~87)를 그 모태로 본다. 이후 이 시리즈의 변형·아류 작품들은 <LA 로> <뉴욕 디스트릭트> <아이윌 플라이 어웨이> <프로피트> <라이프 온 더 스트리트> 등 무수히 많다.

이런 종류의 시리즈물이 애호가를 양산해냈지만, 그때까지도 식자층 대중은 도서관 대출증과 텔레비전 리모컨을 맞바꾸지는 않았다. 지식인 계층이 텔레비전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기까지는 미국의 유선 케이블 방송인 <홈박스오피스>(HBO)가 1990년대 말 고급 시리즈 분야의 ‘준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972년 영업을 개시한 <HBO>는 초기에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 다음 1990년대에 시리즈물 양산 체제에 돌입했다. 1995년부터 이 채널의 오리지널 프로그램 연간 예산은 5천만 달러에서 3억 달러로 늘어났다.(4) <HBO>는 그때까지 텔레비전이 거의 주목하지 않던 사회적 계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HBO>는 일반 텔레비전에 대한 일종의 네거티브, 음화(陰畵)가 되려 했다. 그래서 이전까지 ‘고급 텔레비전’이 개발해낸 모든 비결을 활용하고, 특히 거칠고 투박한 언어표현, 노출,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것에 의지한다. 관련법이 일반 방송 네트워크보다 유선방송에 덜 엄격해 더욱 쉽게 ‘금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투자 결과는 훌륭했다.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1998~2004)와 <소프라노스>(1999~2007)는 시청자와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얻었다. 2001년 12월 <뉴욕타임스 매거진>은 “이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올해 <HBO>는 텔레비전의 미니 ‘황금시대’에 근접하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선사했다”고 극찬했다. 성공에 고무된 <HBO>는 고비용 전략을 계속했다. 한 예로 <데드우드> 시리즈(2004~2006)의 회당 제작비는 450만 달러에 달했다. <ABC>의 비중 있는 프로그램인 <로스트> 같은 시리즈의 회당 제작비가 250만 달러인 것에 비하면 대단한 금액이다.

광고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이 지출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HBO>가 이런 투자 부담을 충당할 수 있던 첫 번째 방법이 바로 유료 시청자 확보였다. 1994년 1920만 명이던 유료 가구 수는 1995~2007년 50% 이상 증가했다. 현재 <HBO>는 세계 70개국에 유료 가입자 8100만 명을 확보하고 있다(영화 전문 채널 <시네막스> 가입자 포함 수치). 유료 가입자에 의존하면서 <HBO>는 마케팅과 홍보전을 중요시하게 됐고, 여기에 들어가는 돈이 타 방송사의 2배를 넘었다. 새로운 시리즈나 시즌의 시작은 그야말로 대이벤트가 됐다. 포스터와 텔레비전 스폿광고를 동원해 대대적인 선전을 폈다. 그 전체 과정은 저속한 선전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고도로 복잡해졌다. <HBO>의 광고담당 자하 엔터린 부회장이 <트루 블러드> 시리즈를 두고 했던 말처럼, “과녁의 중심은 (중략) 광고주들로부터 바보 취급 당하거나 조종당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전문지식을 갖춘 시청자 대중이다”.(5)

<HBO>가 이끈 지식인 겨냥 시리즈
<HBO>가 유료 가입자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제작비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한 프로그램을 한 번만 방송해서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투자 이익을 회수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오랫동안 TV 방송으로 한정돼 있던 시리즈물의 수명과 활용이 최대한 연장돼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 <HBO>의 수익은 국외 텔레비전 방송사 판매, 재방영권(‘신디케이션’·네트워크를 거치지 않고 프로그램 제작사에서 개별 독립 방송사로 완성된 프로그램을 직접 공급하는 것), DVD 판매와 주문 비디오 제작(아직까지는 많이 활성화되지 않았다)으로 대변되는 2차 시장에서 자신의 제작물 생존 가능성에 좌우되는 실정이다. 프로그램 재판매 관련 수익이 전체 수익에서 차지하는 몫은 1998년 5%에서 2004년 20%로 4배 성장했다.(6) 이 수치는 파생상품 판매로 거둬들인 수익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HBO>의 재정 구조와 관련해 정확한 수치를 확보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정황이 2차 시장의 중요성이 계속 커져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3년, <소프라노스>의 처음 세 시즌 제작비는 DVD 판매로 완전히 충당됐다.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는 2004년 <TBS>와 다른 지역 채널들에 판매되면서 3억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 <HBO>의 수익은 10억 달러 정도였다. 보완시장은 광고주들의 구미를 당겼다. 한 미국 광고회사의 경영진은 2002년 매주 1100만 명의 미국인이 시청한 <소프라노스> 시리즈의 제품간접광고(PPL)가 ‘이상적’이었다고 설명한다. “그와 견줄 만한 광고 메시지는 없다. 사람들은 텔레비전 시리즈를 매회 보고 또 본다. 그러고는 DVD를 구입해서 또 본다.”(7) 유료 또는 무료(불법) 다운로드 가능성이 점점 더 확산되는 것까지 염두에 두면 더욱 이상적이다.

유료 가입자 증가 추세가 한풀 꺾인 만큼 <HBO>에는 자신이 제작하고 방영한 프로그램의 재판매가 중대한 문제다. 따라서 보완시장에서 수요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더 커진다. 보완시장에서의 수요는 무료 가입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프로그램의 명성뿐만 아니라 팬들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컬트’ 작품, 비평과 토론을 즐기는 식자층 대중에 의해 분석 대상이 될 수 있는 작품의 능력에 좌우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래전부터 영화와 문학 작품들이 구축해온 문화시장, 즉 문화 전문지, 문학 서클, 영화 서클, 대학의 전문 과정 등으로 텔레비전 제작품이 침투해 자신의 ‘사용가치’를 증대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9)

재판매 등 치밀한 마케팅으로 고수익
<HBO> 경영진이던 크리스 알브레히트가 ‘독특한 프로그램 편성’이라 부른 이 전략에는, 통상적 텔레비전 상업 논리를 벗어나 자신의 제작품을 예술작품으로 소개하는 홍보 담론이 동반된다. 1996∼2009년 <HBO>가 채택한 ‘이것은 TV가 아니다, 이것은 HBO다’라는 슬로건이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HBO>는 광고주들에게 직접적으로 종속돼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물론 고도로 상업적인 시스템 안에서 얽히고설킨 실제 현실은 항상 어둠 속에 남는다), 미디어 산업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며 픽션 작품이 ‘한가한 지식인들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가진 사회계층의 비난을 비켜갈 방법을 찾았다.

대중과 언론은 열광했다. 이는 단지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전위적 형식과 정치적 대담성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들(<트레메> <더 와이어>)을 감상하고 논평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작품 분석에는 어느 정도 지식과 교양이 필요하고, 그런 분석은 전문가들 사이의 토론을 조장한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는 시리즈물 <더 와이어>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10) 파리고등사범학교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철학하기’라는 제목의 토론회 과정을 개설했다. 그렇게 해서 몇 년 만에 일반 시리즈물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문화와 구별되는, 고급 시리즈를 대상으로 하는 ‘유식한 문화’가 탄생했다.

영화 제작이 위축된 반면 <소프라노스>, <식스 피트 언더>(2001~2005), <더 와이어>(2002~2008), <트레메>(2010), <보드워크 엠파이어>(2010년 시작) 같은 시리즈들은 ‘제8의 예술’로 인정된 텔레비전 시리즈의 보배가 됐다. 사람들이 ‘텔레비전 제3의 황금시대’로 규정하게 된 데 <HBO>만 기여한 것은 아니다. 현재 <매드 맨>의 성공은 공교롭게도 <HBO>의 침체와 일치하고 있다. 까다로운 일부 시청자가 야심찬 시리즈들의 중단(2005년의 <카니발>)을 비난하고, 프로듀서 자크 오디아르처럼 불협화음을 내는 사람들이 TV 시리즈 숭배가 영화팬들의 죽음을 가져왔다고 비난하지만, 새로운 ‘시리즈 애호가들’의 열광이야말로 <HBO>가 거둔 가장 큰 성공일 것이다. <HBO>는 자신의 시청자 중에서, 온라인 토론에서 대학의 학술대회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토론의 대상이 되는 복잡한 줄거리와 난해한 인물들에 열광하는, 가장 훌륭한 <HBO> 홍보 주동자들을 찾아낸다.

열광과 토론, ‘유식한 문화’ 탄생
‘<HBO> 모델’은 지금도 작동 중이다. <HBO>는 2008년 타임워너 그룹에서 가장 수익이 높은 회사였다. 슈퍼마켓의 명품 코너 자리에 견줄 만한, ‘정보화 시대의 월마트’(11)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1990년대 말부터 다른 케이블 채널들 역시 시리즈물에 투자하고 <HBO>에 필적하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 채널들에 대한 지지(약 100만-400만 명의 시청자)는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에 대한 지지(약 1500만 명)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말이다. 대형 방송사들은 광고주를 끌어들이기 위해 ‘고급’ TV 시리즈 모델을 성공적으로 각색해냈다(<로스트> <위기의 주부들> <닥터 하우스> <CSI>). 이 와중에 시나리오작가 조합의 힘이 커졌고, 2008년 파업에서 거둔 그들의 승리가 그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글 · 도미니크 팽솔 & 아르노 랭델 Dominique Pinsolle & Arnaud Rindel

번역 ·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각주>
(1) 알랭 카라제·마르탱 윙클러, <새로운 영미 시리즈, 1996~1997>, Les Belles Lettres, p.5~6, 1997.
(2) 올리비에 도나, <디지털 시대의 프랑스 문화 실천: 2008년 여론조사>, 라데쿠베르트/문화통신부, p.95, 2009.
(3) 장자크 젤로블랑이 <텔레비전 연속극>(M. A. Editions·p.8·1990)에서 한 말.
(4) 게리 R. 에저튼·제프리 P. 존스, <The Essential HBO Reader>, 켄터키대학 출판부, p.32, 2008.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경우 각종 수치는 이 책에서 인용한 것임.
(5) <PR 뉴스>, 2008년 8월 4일.
(6) 마크 레브레트·브라이언 L. 오트·카라 루이스 버클리, <이것은 TV가 아니다: 포스트 텔레비전 시대>, 뉴욕, Routledge, p.59, 2008.
(7) www.usatoday.com, 2002년 2월 12일.
(8) <AP통신>, 2010년 11월 4일. <월스트리트저널>, 2011년 3월 11일.
(9) 데이비스 벅스톤, <텔레비전 시리즈: 형태, 사상 그리고 생산양식>, L’Harmattan, 파리, 2010.
(10) 로리 무어, ‘In the life of The Wire’,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vol.57, n°15, 2010년 10월 14일.
(11) <The Essential HBO Reader>에서 저널리스트 켄 올레타가 쓴 표현, 앞의 책, 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