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동… 무정부주의적 '제3의 길' 외치다

사유제·공산제의 중도책 모색, 풍부한 프랑스 사회 사상 선구자

2008-12-30     에드와르 카스트레통 | 역사학자, 조셉 프루동

2009년 1월 15일은 피에르 조셉 프루동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사유재산제는 강도짓이다"라는 문구 외에 그의 사상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생트-뵈브가 당대의 가장 위대한 산문가로, 또 조르쥬 소렐은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철학가로 칭하기도 했던 프루동은 이제 무정부주의 전문서점과 일부 학자의 서가에서만 발견될 뿐이다.
유명 출판사들은 칼 마르크스, 오귀스트 꽁트, 쥘르 미슐레, 빅토르 위고, 토크빌 같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상가 및 문필가와는 달리 그를 무시한다.
1909년,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는 그래도 지금과는 달랐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아르망 팔리에르는 프루동의 고향인 브장송을 방문하여 '무정부주의의 아버지'인 그의 동상 개막식에 참여하였다. 뒤르케임 학파 사회학자들, 급진-사회주의 법률가들 및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무정부-조합주의의 물결은 곧 잦아들었다. 1차 대전 이전에 프루동의 사상에 심취했던 지식인과 노동자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그의 사상을 반마르크스주의로 치부해 버렸다. 또한 2차 대전 중 친 나치 비시 괴뢰 정부는 프루동 사상의 조합주의적 요소를 일부 차용하여 정권의 이념적 정당성 구축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시 정권도 브장송에 있던 그의 동상을 구하지는 못했다. 나치 점령기간 중에 그의 동상은 녹여졌으며 이후 프루동은 진보주의자들에게 오랫동안 부정적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더욱이 2차 대전 이후, 마르크시즘이 프랑스 좌파를 지배하면서 19세기 프랑스 사회 사상의 매우 풍부하였던 다른 자원들은 외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유재산제(개인에 의한 재산의 전적인 소유)와 공산주의(국가에 의한 개인 재산의 몰수와 분배) 사이에서 중도적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프루동이 설 자리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면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적 '제3의 길'의 선구적 사상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양조업자 아버지와 요리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프루동은 어렸을 때부터 고전을 즐겨 읽었으나 집안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인쇄공으로 일할 수 밖에 없었다. 주위 사람들의 격려에 힘입어서 그는 브장송의 아카데미에서 3년간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언어학과 철학 연구를 할 수 있었다.
프루동은 당시 이 아카데미에서 파리 진학이 예정된 연구원들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계급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또한 유산자들의 월등한 '능력'에 주권의 기초를 세우려 했던 왕정 복고와 7월 왕정시대의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한계를 알아차렸다.
당시는 일정한 재산이 있어야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던 제한선거의 시대였으며 유권자들은 자신보다 더욱 재산이 많은 후보를 선출하였다. 침해할 수 없고 성스러운 사유재산권과는 대조적으로 현실의 빈곤과 비참함은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시민권에서 사회적 질서를 착근하려 하였던 기대가 허망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의정치보다 부의 분배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한 프루동은 일부 공화주의자들이 기대하듯, 사회 불평등 문제에 대하여 보통선거가 충분한 해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프루동은 사물의 가치는 그것의 '효용', 즉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사회적 효과에 의해 평가된다고 생각했다. 교환을 통한 부의 순환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그의 동시대 경제학자들은 생산자의 생존의 필요성과는 무관하게 사물의 가치를 정의하였다. "생산품은 생산품과 교환된다"라고 당시 프랑스 경제학자 쟝-밥티스트 세이는 말하였다. 이는 상품의 판매는 다른 상품의 유통에 의해 조장되며 상품은 최종적으로 그 시장가치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즉 상품가치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시장조건에 좌우된다는 뜻이다.

 '효용이 사물의 가치 결정'
프루동에 따르면, 생산품의 가치는 그것의 효용성에 의해 정해진다. 물론 생산과 소비가 균형잡힌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생산품과 그것에 포함된 노동 사이에 지속적으로 등식이 성립되어야한다. 그런데 소유에 관한 법률적 성격이 이러한 평등한 교환에 지장을 준다. 왜냐하면 부는 유산자, 지대수입자, 자본가의 손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이의 판로법칙(공급은 수요를 창출한다)을 더욱 혁명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역설적으로 프루동의 이러한 주장은 아돌프 블랑키와 같은 동시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그의 주장에 내포되어있는 우상 타파적 성격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비판(프루동은 이들이 박애와 같이 막연하고 착한 감상을 표현하는 신기독교주의적 희극을 쓴다고 비판하였다)과 보수적 경제학자, 법학자, 철학가에 대한 비판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 분야에 있어서 칼 마르크스도 프루동이 <소유란 무엇인가?>(1840)에서 표명한 부가가치이론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지급한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가는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의 수에 해당하는 하루 일당을 지불한다. 그런데 이는 절대로 똑같지 않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협력과 조화, 그들의 노력의 동시성과 집중이 가져오는 엄청난 힘에 대해 그는 전혀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명의 군인들이 몇 시간 만에 룩소르의 오벨리스크를 세워 올렸다. 단 한명이 200일 안에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해 보자. 어쨌든 자본가의 계산에서 이 두 경우의 전체 임금은 동일하다. 사막을 옥토로 만들고 집을 짓고 공장을 가동하는 것은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 산을 움직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장 작은 자본, 가장 작은 공장, 가장 보잘 것 없는 산업을 가동시키는 것이라도 단 한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노동과 다양한 재능의 조화를 필요로 한다."

 정계 진출, '대의제'에 대한 회의
 물론 마르크스도 자신의 1844년 프루동이 제기하였던 비판을 공유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를 '거친 공산주의'라 칭했다. 파리를 자주 들렀던 이 두 사람간의 결별은 1846년 일어났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결별 서한에서 '작은 불'로 사유재산제를 불태우려 드는 프루동의 사상의 순진함을 풍자하였다.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와 중간계급간의 화해를 기대하였던 프루동을 두고 그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정치경제학과 공산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망설이는 쁘띠 부르주아"의 성향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1848년 혁명, 그리고 제2공화국의 성립 이후 프루동은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하원 재정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금융을 중앙에 집중하고 상품 본위 화폐제도를 실행하기 위한 국립은행의 설립을 주장하였다.(당시 프랑화는 금본위제도였다). 프루동은 또한 이자율, 할인율, 임대료 및 지대의 인하를 주장하였다. 6월의 소요사태 이후1) 당시의 부르주아 언론은 그를 끔찍하게 왜곡하기 시작하였다.
프루동의 개혁 프로젝트는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이후 그는 대의정치의 문제점에 대해서 골몰하게 되었다. 그에게 제2공화정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선출 과두제에 불과하였다. 이 과두제에서 국회의원은 진정한 국민의 대표가 아니고, 시민의 법률에 대한 동의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간접적으로 표명될 뿐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국민들은 자신의 대표자에 대해서 무기력하며 이들을 제재할 수단은 단지 이들의 재선을 거부하는 것에 국한될 뿐이다. 사실 대표자와 유권자 사이의 단절은 급속히 진행된다. "한 국가들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국가의 상태에 대해서 그렇게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 국회의사당이라고 부르는 이 격리된 장소를 체험해봐야 한다"고 프루동은 증언했다.2)
그러나 그의 분석은 사실의 단순한 확인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1848년 헌법이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독재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3)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1851년 12월 2일 쿠데타에 대한 중산층의 비겁함과 제국에 대한 서민층의 지지에 실망하여 프루동은 자신의 감옥에서 제2제정의 수립을 비참한 심정으로 맞이하여야만 했다.

 '상호부조적 노동 분업' 주장
1852년 석방 이후 그는 부의 집중, 특히 철도사업의 양도와 증시 투기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부를 증식하는 자들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하였다. 1858년 그는 <혁명과 교회속의 정의>라는 반교회적인 저작의 출간 이후 다시 투옥될 것을 피하기 위하여 벨기에로 망명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에야 다시 파리로 돌아왔으며, 보통선거의 '민주적' 성격에 대하여 더욱 비관적이 되었다. 1865년 1월 19일 그의 사망 전 최후의 글에서 프루동은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후보의 무용론을 주장하였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제도'와 결별하고 상호부조의 원칙에 입각한 협회를 창설하고, 상호성을 제도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노동 민주주의'의 창설을 주장하였다.
19세기 사회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프루동 사상의 일부 부정적인 측면(반페미니즘, 여성 혐오, 심지어 약간의 반유태주의)을 제하면 그의 사상은 아직도 유용하다. 특히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민주주의 제도의 기능에 대한 현재의 회의적인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말이다. 서민과 노동계층의 이해가 오늘날 프루동이 살던 시대에 비해서 정당들에 의해 더욱 잘 '대표'된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든 현실이다.
오늘날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쇄신'하려는 모든 시도 속에는 근본적이고 평화적인 계급 결별을 주장하는 이념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즉 상호부조적 노동의 분업에 의해 사회를 구성하고 임금격차의 최소화를 지향하면서, 경제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구하고, 권력집중을 초래하는 보통선거 대신 직능 대표제를 선호하면서, 또 투기꾼과 갑부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철저히 분권적인 연방제이면서 자유무역주의적 유럽 통합을 거부하면서, 다민족 국가에 대한 강대국의 '인도주의적' 간섭을 배척하는 그런 이념 말이다. 아니면 프루동은 TV 토론 프로그램 무대보다는 무정부주의 책방을 선호하는 주변인들에게만 평가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인가?
2009년 1월 15일 프루동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이 브장송을 방문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우리는 사상가이면서 사회주의 운동가인 프루동이 100년 전에 누렸던 명성의 일부분이라도 찾기를 단순히 희망해 볼 뿐이다.

 


 

 

 

 

 

 

 

 

 

* 브장송 프랑슈-콩테 대학부설 인간과 환경과학연구소 연구원. 프루동 전집 편집위원, <제2제정 일기> 2월 출간예정

1) 1848년 4월 23일 총선거를 통해 국회를 장악한 보수주의자들은 국민작업장(파리 실업자들에게 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조직)을 폐쇄하면서 파리에서 유혈폭동을 야기하였다. 6월 22일에서 26일에 거쳐 4천명 이상이 이 소요사태에서 사망하였으며 비슷한 수의 파리 시민은 알제리로 강제 이주되었다.
2) Pierre-Joseph Proudhon, <한 혁명가의 고백>1849.
3) 그는 1848년 12월 압도적인 지지를 안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