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선고를 받은 엘 알리아의 무고한 피고인들

‘인권변호사’, 지젤 알리미의 고백록

2020-08-31     지젤 알리미 l 변호사 (1927~2020)

지젤 알리미는 보비니(1972)와 엑상프로방스(1978)에서 열린 재판을 통해서 낙태를 범죄시하는 현행법의 문제를 고발하고, 강간을 엄벌에 처하도록 촉구했다. 7월 28일에 타계한 그녀는 프랑스의 옛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독립과 고문 관행의 종식을 위해서 평생 헌신했다.

 

1955년 8월 20일, 토요일 정오였다. 광산의 현장관리자 페르디난드 베르티니와 그의 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엘 알리아로 향했다. 엘 알리아는 알제리 북동부 도시, 필리프빌(현재의 스킥다)에서 몇 킬로미터 거리의 작은 광산촌이었다. 갑자기 엘 알리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베르티니의 아들이 복부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엘 알리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즉시 광산 감독관에게 위중한 상황을 알리려 했으나 전화선이 끊어졌다.

엘 알리아에서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집 밖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던 주민들은 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 반란군(알제리 국민해방전선,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FLN)이 소총과 권총을 쏘아대며 광산 작업현장과 거주지를 유린했다. 그들은 칼, 도끼, 삽을 동원하여 파괴와 약탈, 방화와 학살을 일삼았다. 유럽 출신의 백인 ​​노동자들, 즉 피에 누아르(Pied-Noir. 1830년대에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한 후 1960년대에 알제리가 독립하기까지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거주하거나 태어난 유럽 출신의 백인들을 통칭하는 용어) 역시 똑같은 참극을 당했다. 

그러나 광산 관리자는 가까스로 이 비극의 현장을 피할 수 있었다. 오후 3시가 되자 군용기 두 대가 마을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낙하산 부대가 투입됐다. 정부군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이 응징으로 인해 콩스탕틴 주에서 1,000명 이상의 알제리인들이 사망했다.

재판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 속에서, 마치 극장 무대에서 전개되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나와 함께 변호사로 선정된 레오 마타라소는 엘 알리아에 도착했다. 우리는 먼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묵을 곳을 찾아 나섰다. 호텔 몇 군데를 알아봤는데, 첫 번째 호텔이 우리를 거부했다. 현지 언론이 우리를 헤드라인에 이렇게 소개해놓은 상황이었다. “엘 알리아를 유린한 도살자들을 변호하러 온 파리 출신의 변호사들!” 

 

주민들의 적대감으로 가득 찼던 법정

그러니 그들이 우리를 달갑게 맞이할 리 만무했다. 다행히 우리가 두 번째로 찾은 호텔의 주인이 우리에게 방 2개를 내줬다. 하지만 그는 두 시간 만에 태도를 바꿔 우리에게 떠나 달라고 부탁했다. 세 번째 호텔을 찾은 우리는 주인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결국 숙소를 잡았다. 그러나 이틀 후 새벽 5시에 갑자기 호텔 주인이 나타나 호텔을 떠나 달라고 요구했다. “이곳 사람들이 모두 난리예요. 당신들이 머무는 숙소에 쳐들어가서 다 부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호텔마저 불태우겠다고 협박하고 있어요. 제가 당신들을 지켜주고 있다면서요. 이해하시겠죠?” 잔뜩 겁에 질려 보였던 그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우리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찾아왔던 군수의 경고가 맞았다. 그때 그는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신변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안전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우리에게 있었다. 다행히 필리프빌의 변호사회 회장이 직접 레오의 숙박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다른 변호사 한 명이 ‘동원’돼 내게 은신처를 제공해줬다. 우리 동료 변호사들은 이곳 주민들이 배타적인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 규범에 억눌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주민 중 아무도 우리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뿜어내는 엄청난 증오가 우리를 압도했다. 우리는 변호사가 아니라 마치 살인자의 공범처럼 여겨졌다.

기소 44명, 궐석 재판 30명, 증인 50명, 변호사 15명. 가로(Garraud) 대령이 주재하는 법정 주위를 국가경찰부대가 호위하고 있었다. 주심 판사를 맡은 가로 대령은 군 복무 기간 중 알제리에서 근무하기로 자원한 인물로서 이번 재판에서 엄정한 태도를 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변호사들을 호되게 꾸짖기도 했다. 11명의 배석 판사들이 보이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법적 결정권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은 마치 배심원처럼 토론 전에 선서를 하고 범죄자의 생사를 결정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칸막이가 쳐진 공간은 너무 좁은 나머지 40여 명의 피고인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피고인들은 5~6열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피고인들의 목에 걸린 나무 명판에는 1에서 44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들 모두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기도 하고, 방청석을 둘러보기도 했다. 간혹 방청석에 앉아 있는 부모와 친구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혹독한 규율, 폭언, 잦은 매질 등 수감환경은 잔혹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잔혹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피고인들은 인내심과 신중함으로 모든 상황을 견뎌내야 했다. 

 

온갖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

알제리 전쟁을 관찰한 사람이라면 이 피고인들이 보여준 품행이 얼마나 존엄한 것인지 쉽게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재판의 증거가 모두 피고인들의 자백을 통해서만 수집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들의 자백은 사실, 폭력의 결과로 조작된 것이었다.

사건 조사는 어떻게 시작됐는가? 용의자들은 뒤늦게 체포됐는데 이유는 정치적인 것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프랑스의 무력을 과시하는 한편 살해당한 유럽인들을 위해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유럽인들을 살해한 범죄자를 적발하기 위해 우리는 비난의 목소리나, 주민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활용했다. 우리가 특히 많이 사용한 것은 일부 알제리인들을 ‘민족주의자’로 분류해놓은 경찰의 서류철이었다. 폭동이 일어난 다음 날, 지역 검시관인 트라바이 박사는 시체를 부검한 뒤 사망 원인을 기록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피해자들은 총에 맞거나 목이 잘리거나, 낫으로 배를 찔려 죽었다. 도끼로 두개골이 깨져 죽은 자도 있었다.

피고인들은 마치 이상적인 통계 결과를 시연하듯 각자 몇 명의 희생자를 죽였다고 시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정확하게, 각각의 시체에 대한 트라바이 박사의 결론을 거의 문자 그대로 반복했다. 그들은 흉터나 고유한 몸짓, 독특한 실내장식, 언어습관이나 행동 등 가해자만이 알 수 있는 세부사항도 추가해 진술했다. 경찰의 가설을 명백한 진실로 바꾸는 행동이었다. 피고인들은 진술을 하는 과정 중에 몇 가지 상황을 임의로 섞어 말하기도 했다. 다양한 종류의 진술이 나왔다. 예를 들면, “그녀는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제가 그녀의 팔을 부러뜨렸습니다”, “그는 무서워서 침대 밑에 숨으러 갔습니다”, “여성이 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어미의 팔에서 아기를 낚아챘습니다”….

여러 증인이 한 명씩 호출됐다. 판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성과 이름, 그리고 특징을 말하십시오.”

“저는 세합 사이드가 산탄총으로 제 어머니를 죽이는 걸 봤어요. 그런 다음 그는 제 시누이를 등 뒤에서 쐈습니다. 그녀는 거의 즉사했어요. 그는 제 동생 올가의 가슴팍을 쐈습니다. 그녀는 바로 즉사했어요. 그다음에는 제 남동생 차례였어요. 그때 저는 언니 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어요.”

이 말을 한 젊은 여성은 사건 당시 17세에 불과했다. 그녀는 불과 몇 분 만에 온 가족이 죽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의 발언이 내뿜는 존재감 때문에 아무도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이 앳된 생존자는 피고인들이 앉아 있는 긴 의자를 향해 천천히, 그리고 당당하게 향했다. 깊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검지 끝으로 피고인을 가리켰다. “바로 저 사람이에요.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저쪽에 있는 저 사람이에요. 저는 저자들을 알아요.” 그녀는 지금까지 사진으로만 식별했던 그들을 직접 대면하고 있었다. “분명해요. 제 눈이 그들의 시선과 마주쳤던 것이 확실해요” 그녀는 아마도 두 남자를 보며, 마음속으로 사형을 선고했을 것이다.

“마타라소 변호사와 알리미 변호사, 다른 질문이 없나요?” 판사가 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리는 망설였다. 사실 방금 전 그녀가 지목한 피고인은 신뢰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8월 20일 사건 현장에서 20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지역은 군사적으로 엄격하게 통제돼 있으므로, 알제리인은 물론 누구도 쉽게 오갈 수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증인들을 통해 알리바이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저토록 확신에 찬 목소리로 피고인을 범죄자로 지목했던 것일까? “질문할 것이 없습니다.” 결국 레오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우리는 그녀의 행동이 뻔뻔하다고 느꼈다. 그 젊은 여성은 천천히 지나갔다. 그녀를 보며 우리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유죄여야만 했던 알제리인 피고들

부검 보고서는 희생자 중 4명이 칼, 낫, 도끼 등 날카로운 물체로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대부분 가까운 친척들)은 반란군이 권총과 산탄총을 발포해 살해했다고 증언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 이 4명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는 피고인들은 이들을 다른 방식으로 죽였다고 자백했다. 그들은 총이 아니라 낫으로 자르고, 도끼로 부수고, 칼로 찔러 살해했다고 시인했던 것이다. 실제로 4명이 총격으로 사망했다면, 피고인들의 자백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더 나아가 이 자백은 도대체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우리는 추가로 다른 시신을 부검할 것과 이미 매장된 4구의 시신을 매장지에서 꺼내 확인할 것을 요구했고, 더 많은 법의학자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조사 결과 트라바이 박사의 실수 내지는 잘못이 드러났다. 그 외에도 보고서상에 기록된 자백은 또 다른 범죄, 즉 피고인들을 상대로 고문이 가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가 됐다. 단번에 검찰의 기소는 그 근거를 상실했다. 만약 첫 번째 보고서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비록 자백이 맞다 해도 증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증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트라바이 박사는 시신을 아예 부검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피고인들은 하급법원의 판결이 파기될 정도로 잔혹한 행위를 했다고 자백할 뻔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그들은 전례 없는 엽기적 살인죄에 대해 법적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1955년 8월 20일에 일어난 사건의 서류철에는 증거도, 압수된 무기도 없고, 심지어 지문도 없었다. 경찰은 용의자를 심문할 당시까지만 해도 나중에 부검결과를 반박할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밀어붙였다. 이 알제리인들은 ‘유죄여야만’ 했다. 이들이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경찰은 이들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물고문, 전기고문에 담뱃불로 고환을 지지기까지 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철저한 비밀이 유지되고, 면책이 보장될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용의자들은 입을 열었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타자기가 연신 탁탁 소리를 내자, 어느덧 조서가 작성됐다. 경찰이 꿈꾸던 조서는 사법적인 현실이 됐다. 피고인들의 진술은 완벽하게 일치했고, 증거도 다 확인됐다. “나세르 아흐메드 씨, 당신은 목을 베어 사람을 죽였군요. 그리고 벤게타 호신 씨 당신은 이 노루사냥용 총으로 사람을 쐈구요.” 나세르 아흐메드와 벤게타 호신, 그리고 그 다른 모든 피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일관되게 짜 맞추어진 이 이야기를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발전시키고 있는 합리적인 대안에 성가셔하면서도, 우리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아마도 이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 아니면 이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짧은 심의 끝에 가로 판사는 우리가 내린 결론을 지지했다. 낙하산 부대의 라티고 대령은 네 구의 ‘소송’ 중인 시신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거짓으로 뒤죽박죽이던 부검 결과 

“재판을 재개합니다.” 판사가 선언했다. “라티고 대령, 발언하십시오.” 앞으로 나온 대령은 잔인할 만큼 명료하게 말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부검 결과 4명의 희생자는 칼이 아니라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트라바이 박사는 거짓 부검결과를 법정에 제출했던 것이다.

판사는 트라바이 박사를 재판석과 방청석 사이의 난간으로 불렀다. “트라바이 박사, 들었나요? 보고서와 진술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까?” 판사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물었다. 피에 누아르 의사 한 명이 우물쭈물하며 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법정은 논란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지금까지 트라바이 박사가 밟아온 이 재판은 그 자신뿐 아니라 역사적인 차원에서 매우 위험한 길로 접어들었다.

이윽고 사건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했다. 트라바이 박사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시인했다. 자신이 틀렸다고. 그는 확신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아마도 군법무관의 말이 맞을 것이라며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레오와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번갈아 가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머지 보고서를 얼마나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피해자의 부검결과는 어떻게 나올까요? 피고인의 고백이 어떤 피해자와 관련돼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피고인의 자백이 맞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몰라요.” 트라바이 박사는 완전히 무너졌다. “저는 실수로 시체기록 카드를 뒤죽박죽 섞어버렸습니다. 일부 카드는 분실했어요. 일부의 경우는 제가 일일이 대조하며 그 사람이 맞는지 추론해야 했습니다.” 그는 안색이 잿빛이 된 채 갑자기 핼쑥해진 모습으로 방을 떠났다. 이날 트라바이 박사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쭈그렁 노인이 돼 버렸다.

3월 4일 아침, 검사가 구형을 선고했다. 그는 먼저 피고인들이 ‘살인과 방화를 자행하는 굶주린 무리’이자 ‘알제리에서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수많은 가족을 위해 잔학한 짓을 감행하는 기나긴 행렬’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감정에도 호소했다. “우리는 엘 알리아에서 살해당한 사람들, 특히 우리의 어린아이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떨고 있었다. 그는 몽테뉴와 카뮈의 글을 인용하면서, 9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해달라고 법정에 요청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피고인들의 자백에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고문이 사용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리 모두 속죄의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 법정은 무고하게 죽은 자들을 위해 복수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프랑스의 힘은 결코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폭력과 기만으로 손상된 이번 조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의례적인 질문이 나왔다. “피고인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추가로 변론할 것이 있습니까?” 피고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들은 어떤 절차를 따르거나 수단을 활용해도, 다시는 발언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순진한 말과 폭력적인 말을 번갈아 사용하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다른 사람들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대령 판사의 연이은 사형 선고, 밀고자만 무죄…

판결을 듣기까지는 거의 12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법정은 저녁 8시 30분에 다시 채워졌다. 저녁 식사를 마친 필리프빌 주민들은 이 판결을 보기 위해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판결에 대한 배려로 이날만큼은 통금이 해제됐다. 법정에 도착한 주민들은 나무 벤치에 앉아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가 그들 곁을 지나갈 때 몇몇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비열한 놈들,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 괴물들아, 나가 죽어라!” 빨간 머리를 한 덩치 큰 남자가 일어나더니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 험한 말들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그 옆에 앉아 있던 한 여자였다. “만약 일이 틀어지면 각오해. 우리가 네 가죽을 벗겨버릴 테니까”

마침내 법복을 입은 판사가 서류철을 들고 입장했다. 그는 책상 위에 모자를 올려놓고 이렇게 선서했다.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모두들 판사의 목소리에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법정에서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문서에 코를 댄 채, 마치 노래 가사를 읊듯이 판결문을 읽었다. “무슬림 민간인 X를 사형에 처한다. 무슬림 민간인 Y를 사형에 처한다….” 조종(弔鐘)이 울리는 시간이었다. 나는 떨어질 머리를 세었다. 셋, 넷, 다섯 (…) 아홉. 검찰이 기소한 아홉 명 모두 사형이라니. 아 검찰의 염원이 이뤄져 버렸다!

그런데 판사가 판결문을 계속 읽어나갔다. 어딘가 잘못됐다. 아니, 잘못돼야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열한 명, 열두 명. “무슬림 민간인 Z를 사형에 처한다….” 레오는 창백한 얼굴로 나를 봤다. 열셋, 열넷, 열다섯. 우리가 최근 함께 지냈던 열다섯 명이 사형에 처해지게 됐다. 하지만 단 한 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무죄를 선고받은 자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모든 동료를 고발한 밀고자였다. 법정에 모인 주민들은 판결이 내려지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거의 자정이 됐을 무렵이었다. 법정 앞에 모인 주민들은 ‘자신들만의 축제’를 벌이기 원했다. 경비원들이 우리 곁에 동행했다. 우리는 작은 옆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흥분된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우리를 밀고, 모욕하고, 우리를 끌고 가려고 했다. 경찰부대는 인파에 파묻힌 우리의 안전을 확보해주고 길을 터줬다. 레오는 지프차 한 대에 몸을 실었고, 나는 다른 지프차를 타고 이동했다. 경호원은 내 방까지 나를 데려다주면서, 다음날 아침 10시까지는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우리를 데리러 올 계획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군부대의 보호를 받으며 필리프빌의 작은 공항으로 이동했다.

 

* 형식적인 이유로 인해 첫 재판이 취소된 후, 1958년 말에 두 번째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피고인들에게 사형이 언도됐다. 그러나 지젤 알리미와 레오 마타라소는 드골 장군을 설득해 1959년 5월, 그들의 사면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들은 사면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령 알제리의 극단적인 신봉자들에 의해 곧 암살될 운명이었다. 

 

 

글·지젤 알리미 Gisèle Halimi
페미니즘 운동가. 튀니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세때 파리로 이주, 1956년부터 프랑스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튀니지 및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71년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여성 임신중절 금지에 반대하는 ‘여성 343인 선언문’에 서명하고, 같은 해 운동단체 ‘여성들의 대의명분을 선택하라(Choisir la cause des femmes)’를 만들어 보부아르의 뒤를 이어 이 단체의 협회장을 맡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의 현재 발행인 세르주 알리미가 그의 둘째 아들이다. 2000년 채택된 정치적 평등에 관한 법은, 당시 반대자들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 국민을 두 부류로 갈라놓으며 프랑스 공화국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반면 변호사이자 전 국회의원인 지젤 알리미는 여성 참여가 배제된 정치를 타파할 필요성을 1994년부터 주장해왔다. 페미니스트, 반전·반식민지·반자본주의 운동가로 명성을 떨쳤던 지젤 알리미는 올해 7월 28일 93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젤 알리미의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었다. 프랑스는 오늘 열정적인 공화주의자이며, 여성 해방을 위해 싸운 위대한 투사를 잃었다”는 헌사를 바쳤다.


* 이 글은 알리미의 저서 『Le Lait de l’oranger 오렌지 나무에서 나오는 우유』(Gallimard, Paris, 1988)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임.

번역·이근혁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