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귀족’ 메리토크라트의 배타적 특권

지식인 부재의 지식사회

2020-08-31     피에르 랭베르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최근 우리 사회가 1%와 99%로 양분돼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자극적인 단순화 속에서 본질적인 문제, 즉 학력에 따른 불평등 문제가 간과된다. 그리고 ‘지적인 부르주아’ 계층의 역할도 은폐된다. 그들은 최상위 1% 계층을 위해 복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자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연출하기를 즐긴다. ‘메리토크라시’에 기초한 이 사회 계층은 과거 귀족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후손들에게 넘겨주고 있다.

 

1957년 여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웨일즈에 있는 어느 해변을 산책했다. 영국 노동당에서 오랫동안 연구원으로 재직했던 그는 1945년에 선언문을 쓴 이후 도망자 신세가 됐다. 영은 모래밭을 밟으며 최근의 일들을 반추했다. 무려 11명의 출판인이 그의 최신원고 발간을 거절한 것이다. 그는 해변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아무도 출판하기 원하지 않는 원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친구들이 원고를 출판하겠다고 나섰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메리토크라시의 반란』(1)이다. 영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혼합해 만든 신조어,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가 조롱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책은 5만 부 이상 팔렸고, ‘메리토크라시’는 널리 쓰이는 단어가 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큰 오해가 빚어졌다.

 

가장 지적인 사람들이 통치하는 2034년?

조지 오웰의 작품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강한 영향을 받은 영은 소설 속에서 다가올 디스토피아를 묘사했다. 그가 묘사한 미래 세계는 ‘가장 지적인 사람들이 통치하는’ 악몽과도 같은 세계다. 소설 속 상황은 2034년 초에 발생한다. 소설 속에서 과장이 심한 사회학자로 등장하는 화자는 20세기 영국 사회가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에 의해 폭정으로 치달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동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 하에 지능에 따라 사회적 위계가 결정된다. 

학업을 수행할 수 있는 특권을 ‘재능’과 ‘능력(mérite)’으로 바꿔주는 학교에 의해 사회 질서가 유지된다.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는 능력에 따라 지위가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반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하위 계층으로 가면 된다.” 정권은 이렇게 정당화하며 그들의 영웅들을 찬양한다. “과학자와 기술자, 예술가와 교사는 예전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게 됐다. 그들이 누리는 교육수준은 그들의 고상한 유전인자에 맞게 상향조정됐다. 선을 행하는 그들의 역량(compétence)은 더욱 커졌다. 진보는 그들이 거둔 승리요, 현대사회는 그들이 세운 기념비다.”

이런 상승세 속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는 ‘지식인’, 즉 지식을 생산하고 엘리트를 재생산하며 국가 및 기업 관리를 담당하는 인문학자 또는 과학자다. 프랑스 국립 통계 경제연구소(Insee)는 이들을 ‘관리자 및 고급 지식종사자’라는 별개의 범주로 묶는다. 인적자원 담당 이사, 공증인 및 천문학자, 언론인 및 치안 판사, 광고주 및 치과의사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마이클 영의 소설이 출판된 후 이 직종만큼 신속하게 성장하는 사회적 전문가 집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식·정보를 추구하는 ‘후기산업화’ 사회의 화신인 그들은 1962년 90만 명으로 프랑스 노동인구의 4.6%를 차지했으나 오늘날에는 500만 명으로 성장해 노동인구의 18%를 차지한다.

 

“비시정부는 프랑스 엘리트의 전형”

일류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이 우수계층은 서구 노동인구의 5~10%가량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최상위 부유층 1%도 포함된다. 여기서 논의할 대상은 바로 이 1%다. 지식과 부를 독점한 이들은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이 보유한 교육 및 문화 자본으로부터 일정한 ‘배당금’을 받는다. 미국 정치평론가 토마스 프랭크는 이들을 두고 “우리의 증상을 다 알고, 정확한 진단을 내린 후 처방전까지 작성하는 권력을 보유한 자들”이라고 지적했다.(2) 그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지식인’이라는 명사의 의미는 드레퓌스 사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과거 지식인은 창조자, 지식의 창고, 기성의 질서를 전복시킨 혁명가로서 찬양받아왔다. 장 폴 사르트르가 1967년 8월 15일, 라디오 캐나다(Radio Canada) 방송사와 나눈 인터뷰는 그 대표적인 예다. 핵물리학자는 원자폭탄 개발에 기여하는 한 ‘실용 지식 기술자’에 불과했지만 그가 폭탄개발에 반대하는 순간, 그는 지식인이 됐다. 그러나 고분고분한 수백만 명의 관리자, 변호사, 도시 계획가 앞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현대판 사르트르, 보부아르 및 부르디외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계속 전승된다. 지적인 직업은 해당 공동체를 포함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집단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단지 허울뿐인 자존심만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관심사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전문가들인 그들은 2004년 2월 프랑스 시위에서 보듯 ‘지성을 억누르는 전쟁에 대항한 호소’를 외침으로써 영향력이 줄어드는 자신의 분야에 관심을 촉구할 능력을 지녔다. 연구자들은 농민계층의 해체, 노란 조끼 시위, 사회 복지사에 대한 열악한 처우 등의 주제에 대해 분석할 때 ‘농민’, ‘노동자’, ‘개인 서비스’ 등의 일반적인 범주의 도움을 받아 대중적 논쟁의 틀 안에서 분석한다. 반면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에 대해서는 개개인의 섬세한 고유성을 묘사하고, 그들의 당시 생각을 면밀히 해설하고, 그들이 보이는 각종 비일관성을 일관된 것으로 편집한다. 이런 경향을 두고 사회학자 장-클로드 샹보르동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3) 

“일반적으로 노동계급 연구에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유물론이 적용되는 반면 고등교육을 받은 계급을 연구할 때는 개별 주체의 자율성을 살려주는 섬세한 이론이 활용된다.” 우리가 균형 있는 관점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지식인’을 고유한 개인이 아닌,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인식해야 한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백과사전파 지식인, 혁명가, 불온 선전물 작가, ‘공화국의 경기병(輕騎兵)’ 등 진보적 지식인들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는 반면 그들과 관련된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축소한다. 미국인 역사가 로버트 팩스턴은 이렇게 회상한다. “비시 정부만큼 전문가 중심의 사회단체도 드물었다. (…)  비시 정부를 분석하면 프랑스 엘리트를 파악할 수 있다.”(4) 

통치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해온 엘리트들은 오래전부터 심지어 자본주의 태동 이전부터 사회 상층부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성경에의 접근을 독점했던 중세 서유럽의 고위 성직자 계층은 토지 소유자로서의 권력을 합법화고, 국토의 1/4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했다. 왕실에서 고문과 비서 역할을 수행했던 법률가들은 왕국의 행정적 기반을 형성했다.(5)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학 연구자 에티엔 발라즈의 설명에 의하면 기원전 221년에 시작돼 1911년까지 계속된 제국체제의 중국은 “극소수의 ‘문인관료층 또는 한족 지배층’이 모든 측면에서 전능에 가까운 힘을 휘두르는 사회였다.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그들은 최대 규모의 투지를 소유한 대지주이기도 했다. 그들이 누린 모든 특권 중에서도 가장 큰 특권은 교육에의 독점이었다. 이를 통해 후손에게 특권을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6)

식민지 이전 시기의 인도의 사례를 떠올려보면 우리가 흔히 지식인이라면 본질적으로 진보적인 미덕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해왔던 편견을 다시 점검해보게 될 것이다. 카스트 제도는 심각한 불평등 속에서 지식인 계층의 지배에 크게 의존한다. 브라만은 신성한 지식을 독점하는 배타적 특권을 누린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정밀한 연구서 『힌두교와 불교』(Hindouisme et bouddhisme, 1916~1917)의 번역자이자 연구원인 이사벨 칼리노스키에 의하면 “인도 사회에서 특히 ‘대중에 대한 예속화’라는 조작적 형태를 보장하는 것은 왕족, 군인, 영주, 부르주아가 아니다. 다름 아닌 브라만 계층이다.”(7)

자본주의 시대에도 이런 현상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업혁명과 교육의 확대 속에서 학위취득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됐다. 또한 각 집단 사이의 이질성이 강조되면서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대중에 대한 예속화, 그리고 대부분의 학위 취득자들에 대한 예속화는 경제적 합리성, 국가적 차원에서 검증된 ‘역량(compétences)’이라는 이름으로 실현된다.

지식의 독점과 권력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지식인을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묘사한 첫 번째 연구는 방대한 학위 소지자들의 공공 서비스, 최초의 대기업 행정부와 그 후 중앙집권화된 노동자 정당과 함께 19세기에 등장했다.(8) 생시몽(1760~1825)은 과학자와 산업가들을 열심히 일하는 일벌에 비유해 허영심에 가득 찬 귀족과 성직자들을 전복시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날이 오기를 꿈꿨다. 한편 라인강 반대편 독일에서 헤겔은 계몽군주가 ‘보편계급’을 형성해내는데 근대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법철학 Philosophie du droit』, 1821)

 수십 년 후 미하일 바쿠닌은 그의 저서에서 마르크스가 전망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반박했다. “이 체제를 유지하려면 고도로 발달한 학문은 물론이고, 탁월한 지성을 갖춘 인재들이 무수히 필요하다. 이 체제는 역사상 그 어떤 체제보다도 귀족적이고, 전제적이며, 거만한 학문적 지성의 통치가 될 것이다.” 1905년에 또 다른 무정부주의자, 얀 바츨라프 마차이스키가 자신의 저서 『19세기 사회주의 파산』(La banqueroute du socialisme du XIXe siècle)에서 애도했듯 이것은 노동자의 힘이 아니라 ‘지식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후방으로의 대약진’이 남긴 악몽

소위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들’은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지는 않지만 자본가에게 수익을 안겨줄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그들에게 업무감독, 생산자 통제, 업무 조직, 기술을 통한 생산성 향상 등의 임무를 위임한다. 그리고 학교와 이런 인재들을 초과 생산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주의자 카를 카우츠키는 이미 1892년에 지식 노동자들이 제출하는 자격증의 범람 속에 ‘학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과정을 분석했다. “공무원 예정자일지라도 근무를 시작하기까지 여러 해 종종 10년 이상 무작정 대기해야 한다. 그 사람이 비록 공무원이 되더라도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박봉에 시달린다. 다른 사람의 경우 실업과 과로 사이를 오가며 산다. (…) 머지않아 프롤레타리아와 다른 임금 소득자 사이에는 단 하나의 차이만 남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말하고 싶다.” (『사회주의 프로그램Le Programme socialiste』). 학위 취득자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인식은 실제로는 항상 공존하는 두 개의 운명 사이에서 한 세기 반 동안이나 오갔다. ‘점차 지배계급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집단’, 또는 ‘프롤레타리아에 속해 있으며 자신을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언제든지 반격할 수 있는 집단’... 

마이클 영이 1950년대 후반에 『메리토크라시의 반란』을 펴냈을 때만 해도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다소 긍정적인 어조로 사용됐다. 동구권에서는 소비에트 교육 시스템이 고등교육을 마친 엔지니어 인력과 행정직원을 수백만 명 이상 양산함으로써 “가장 교양 있는 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추진력”을 구비했다.(9) 서구권에서는 1920년대에 테일러에 의해 산업 생산의 과학적 조직화가 이뤄졌다. 그 후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거치며 더욱 활성화됐다. 이윽고 문어발처럼 사방팔방 확산되는 방대한 경제 회로를 조정하고 계획하는 지식인 ‘테크노스트럭쳐’(technostructure)가 등장했다. 이 용어는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새로운 산업국가』(1967)에서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신부르주아 계층은 반체제 신좌파와 케네디 행정부라는 사회적 기반 위에서 베트남 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는 탁월한 학력의 학위소지자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극단주의나 집단주의, 전통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공유했다. ‘이데올로기의 종식’이라는 신념이 강조되면서 이제 곧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가 출범할 것을 알렸다. 그것은 훌륭한 경력이 확대 재생산되는 즉 지식인들이 학문적 역량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기회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이 집단의 급진적 분파는 1968년에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반면 경제학자·변호사·언론인 집단은 소위 ‘후방으로의 대약진 운동’(Grand Bond en arrière, 1950년대 후반 중국에서 추진된 ‘대약진 운동’에 빗대어 신자유주의로의 지향을 가리키는 세르주 알리미의 조어-역주)을 전개하며 자유주의로 나아갔고 금융기관에서는 수십만 개의 고임금 관리직을 신설됐다.(10) 그러나 사회학자 앨빈 굴드너가 1977년에 큰 반향을 남긴 그의 저서에 적은 것처럼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다음과 같은 확신이 주를 이루었다. “새로 등장한 계급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력이다. 이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실현될 인류 해방의 중심에 놓여있다.”(11)

그러나 20년 전의 마이클 영은 굴드너보다 비관적이었다.

『메리토크라시의 반란』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더 끔찍한 악몽으로 이어진다.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정부는 노동자 계급의 자녀 중 가장 똑똑한 아이들을 선발해 요직에 배치한다. 교양 있는 계급의 정부는 이제 전문가들로만 구성된다. 경이로운 ‘자동화’로 인해 ‘취업불가’ 상황에처한 학위 미취득자들은 ‘어느새’ 지식인 계층의 하인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영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묻는다. “엘리트들 사이에 천재들만 있고, 노동자들 사이에 노동자들만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의 ‘평등’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식인 정부는 21세기 초에 성숙기에 도달한다. 고급교육을 받은 계급은 쾌적한 주택, 맛있는 식사, 호화로운 휴가 등 각종 특권을 누린다. 그리고 자녀들을 특별한 시설에서 교육시키며 같은 계급 내에서 배우자를 만나고 후손을 낳는다. “엘리트는 세습의 길로 가고 있다. 상속과 능력은 서로 맞닿아 있다.” 화자는 이렇게 관찰하며 변화하는 세태에 대해 안타까운 입장을 넌지시 내비친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60년 전에 출간된 이 소설의 결말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여기에 묘사된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과 극도로 유사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서구 인구의 5~10%에 해당하는 소수의 고학력자를 구별 짓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인류의 99%와 최상위 부유층 1%를 대립하는 구도로 제시하는 프레임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결구도는 한 세기 반 동안의 메리토크라시 경쟁에서 이익을 얻은 더 큰 집단을 보지 못하도록 호도하는 측면이 있다. 

사실 이 집단 없이는 상위 1%를 차지하는 부유층도 지배력을 발휘하거나 그들의 지위를 영속시킬 수 없는데도 말이다. 메리토크라트는 이 계급투쟁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경멸받는 자들의 곁에 자신들을 배치함으로써 ‘대중화’의 길을 택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영이 예상하는 두 가지 현상, 즉 지식인이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 그리고 지식인들의 지배가 점차 세습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학력자들의 민주주의

훗날의 시앙스포(Science Po), ‘무료 정치과학 학교’의 창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에밀 부트미 교수가 1871년에 남긴 진술은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다수 시민의 권리를 억누르며, 자신을 상위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저들은 가장 유능한 권리를 소환해야만, 정치적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다. 특권과 전통이라고 하는 그들의 무너져가는 방벽 너머 파고드는 민주주의의 파도는 빛나는 능력, 명성이 필수적인 우월성, 광기 없이는 빼앗을 수 없는 역량으로 세워진 두 번째 방벽과 충돌한다.”(12)

이로부터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정치가들의 초상이나 사진을 담은 인명부(trombinoscope)를 넘기다 보면 정부의 주요 직책을 수행하는데 공식적으로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 것이다. 마크 보벤스와 안크리스트 빌(Anchrist Wille)은 유럽 ​6개국 정치 지도자에 대해 연구한 결과 현재의 대표선발 체제는 ‘학위 취득자들만의 민주주의’라고 단언한다. “고학력자들은 정당, 의회, 내각, 압력 단체, 심의기관 심지어 인터넷 상담까지 모든 기관과 정치적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13) 2016년 벨기에와 독일 장관의 100%가, 프랑스 장관의 95%가 고학력자였다. 영국에서는 60%의 장관들이 옥스퍼드 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엘리트들이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시민들이 전체 유권자의 약 70%를 차지한다”라고 지적한다. 

학문적 우수성이 더 효율적인 선출직 대표, 더 통찰력 있는 의회의원을 보증하는가? 놀랍게도 이런 문제의식은 학계의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불과 몇 편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학력 정치인들이 “유독 더 근면한 것도 아니고, 의회 활동에 더 큰 기여를 하는 것도 아니며, 더 자주 당선되는 것도 아니다.”(14) 물론 이는 새로울 것도 없는 현상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신흥 민주주의는 보편적 교육을 기반으로 한 “국민에 의한, 그리고 국민을 위한” 정부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대학교가 공장에서 찍어내듯 지원자들을 대량 생산해내는 상황 속에서 소수의 ‘학자 겸 지도자’들은 어떻게 통치를 영구화할 수 있을까? 19세기 초, 미국과 유럽 성인 인구의 1% 미만이었던 대학교 졸업생의 비율은, 오늘날 35%로 크게 증가했다. 진입장벽을 높이는 일은 쉽다. 새로운 문화적 및 재정적 장애물을 세워놓되 학위 미취득자는 물론 취득자들조차 넘을 수 없을 만큼 높이를 조정하면 된다. 미국에서 효과적으로 사회적 분류를 하려면 지식과 돈이라는 끈을 종횡으로 잇대어 체로 거르면 끝난다.

영의 예언대로 메리토라트가 간직하고 있는 핵심 정수는 마치 귀족들이 혈연에 의해 지위를 세습하듯이 대대손손 대물림될 것이다. 모든 학위 소지자가 전부 부유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부자가 고학력자들이다. 2017년에 평균 연봉의 2.5배 이상(약 9만4,300달러)을 벌어들인 미국인 가운데 98.4%가 학사학위(프랑스의 리성스(licence)에 해당하는 4년 과정의 학위) 또는 그 이상의 학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자선 재단에 후원금을 보내고 스탠포드 또는 하버드 대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실리콘 밸리의 억만장자들처럼 부모들은 귀족이라는 ‘신분’이 아닌, 더욱 권위 있고 값비싼, ‘학벌’을 자녀에게 증여한다.

19세기를 풍미했던 계몽된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 즉 나태한 생활과 과시적인 소비, 그리고 보모에게 자녀를 맡겨 놓는 관행은 정반대가 됐다. 엘리트 중 최상위 계층은 일하는 가운데 자녀의 교육, 복지, 문화, 건강의 증진을 위해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그들은 어린 자녀에게 2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보모를 붙여주고, 연간 5만 달러의 엘리트 보육원에 자녀를 보내며 3세부터는 미적 감각을 키우는 수업에 등록시킨다. 게다가 지원자의 5%만 입학이 허용되는 외국어 및 과학 섹션이 있는 엘리트 유치원에 입학을 시킨다. 부모는 자녀를 이 입학 전형에 통과시키기 위해 전문 컨설턴트를 고용해 지원서류를 작성시킨다. 

이처럼 ‘인적자원’을 조기개발하려는 노력은 온갖 투자를 정당화한다. 2014년에 사회학자 엘리자베스 커리드할켓은 이렇게 설명했다. “절대적인 가치와 지출의 비율을 계산해봤을 때 최상위 부유층 1%는 1996년보다 교육에 3.5배 시간을 할애한다. 전국 평균보다 8.6배나 높다.”(15) 상위 5% 사람들은 그들이 보는 것들로부터 강한 영감을 받는다. 마치 왕가의 혈통 계승을 연상시키는 이 교육 재생산 프로그램의 비용 중에는 가정교사 인건비도 포함된다. 자녀를 위한 개인비서를 고용하는 부모도 있다.

 인근 명문 사립학교에 등하교시키기 위해 상위지역에 거주하는 비용, 하버드·예일·프린스턴·스탠포드 등 일류대학교에 최종적으로 입학하기 위해 권장되는 문화여행 비용, 바이올린 등 개인교습 비용, 게다가 미국인들의 평균연봉보다 훨씬 높은 연간 4~7만 달러의 대학교 등록금... 이 금액을 모두 합치면 엄청나다. 법학부 교수 다니엘 마르코비츠가 추정한 결과 최상위 부유층 1%에 속하는 가정이 중산층 가정보다 추가적으로 지출하는 교육비는 자녀 당 약 1,000만 달러에 이른다. 그는 한마디로 단언한다. 

“사실 ‘메리트’라는 개념은 사기다. 그리고 모든 문명은 이 결론에 대해 반발한다.”(16)

 

1950년대보다 더 커진 빈부 교육격차 

여기에 제시된 숫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문화 자본의 전승은 자녀가 태어난 이후부터 부모,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가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엘리자베스 커리드할켓은 지식인들이 신생아를 가르치고 교육하는데, 일반인들보다 2~3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밝혔다. 지식인 여성들은 이런 관행이 자녀의 인지 능력을 발달시킨다고 확신하면서 신생아에게 더 자주, 더 오래 모유수유를 한다. 이 바람에 ‘수유 상담원’이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을 정도다. 전문직 자녀는 3세가 되면 중산층 자녀보다 각자 평균 2,000만 단어를 더 듣는다. 이 아이가 구사하는 어휘는 이미 49%나 더 다양하다. 부모는 교사가 학생을 상대로 구사하는 교육 행위를 자녀와의 관계에 적용함으로써 정서적 감수성, 집중력, 생활규범을 발달시킨다. 마르코비츠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18세가 되면 읽기, 말하기, 문화 행사, 스포츠 훈련 등 여러 활동 속에서 중산층 출신의 자녀보다 부모로부터 약 5,000시간 이상 많은 관심을 받는다.” (…) “그 대신, 같은 나이의 중산층 자녀는 부유한 가정의 자녀보다 스크린 앞에서 5,000시간 더 오래 앉아있었을 것이다.” ‘창조적 계급’은 공간적으로도 분리된다. 진보적이고 개방된 대도시의 특정 지역에 더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과 더 넓은 소셜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모든 자원을 결합한 가구가 모일 때 자녀가 성공할 확률은 미국의 최빈층 거주지역보다 80%나 높아진다.(17)

마르코비츠가 관찰하기에 “엘리트 교육에 의한 대규모 투자는 그 열매를 맺고 있다. 오늘날 부자의 자녀와 빈자의 자녀가 교육 면에서 보이는 격차는 1954년에 백인과 흑인을 구별했던 격차보다도 더 크다.” 1954년은 대법원이 학교에서 이뤄졌던 인종 차별을 위헌이라고 판결한 해였다. 마르코비츠에 의하면 “오늘날, 경제적 불평등은 과거에 미국의 인종차별보다 더 심각한 교육적 불평등을 낳고 있다.”

부유한 최상위층 지식인들은 언론과 문화를 통해 표준화되는 까다로운 교육 형태의 성벽 뒤에 은거한 채 새로운 문화·사회생활과 식사 패턴을 공유하지 않는 부모를 ‘덜 개방적이고 덜 진보적이고 덜 관대하다’며 경멸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 세대들이 “공부밖에 한 것이 없다”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이 판단은 그 자체로 자유주의 프로그램의 ‘사회적’ 측면을 요약해준다.

그러나 메리토크라트 엘리트의 인생을 잔잔히 흐르는 강처럼 연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대부분의 아이는 경쟁에서 바로 배제해버리는 사회 다윈주의는 부자들의 자녀들을 무한경쟁으로 몰아넣는다. 3세부터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해, 하루 12시간 일하는 로펌의 파트너로 근무하기까지 메리토크라트들은 자본과 심지어 문화적 소비에 투자하기 위해 일, 그것도 ‘자기 자신만의 독자적인 일’을 통해 이익을 창출할 필요성을 깨닫는다. 사회적 유용성이 없어진 채 전문성을 최우선가치로 여기는 기업에서 퇴출 돼버린 사람은 수공업, 인도주의 활동, 보도블럭 깔기 등 작지만 점점 성장하는 부문에서 일을 시작한다. 물론 이렇게 새로운 일을 하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다. 엘리트 교육 시설에 입학이 확정된 사람이라면 대개 운명에 순응하게 마련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12개 대학의 학생 가운데 절반이 최상위 10%안에 드는 부유층 가정 출신이다. 프랑스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분리가 아직 이 정도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최상위 10% 계층이 벌어들이는 소득의 비율이 1970년대 초에 미국에서 13% 증가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정체됐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정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커리어를 시작될 때 불안한 단계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재산은 물론이고 사회적 계층 구조를 구성하는 희소한 자원, 즉 ‘좋은 학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층적 ‘특권’을 인식하도록 장려하지는 않는다. 

끝으로 프랑스 고등교육의 저렴한 비용은 미국에서 요구되는 엄청난 비용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엘리트 시설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국립행정대학교(E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 ENA)의 경우 현장 노동자와 일반 노동자의 자녀는 6%에 불과한데, 이 직종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는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경우 노동자 자녀는 전체 인원의 1.1%에 불과하고, 정원의 93%가 고위 공무원 또는 고급 전문직 종사자의 자녀다.(18) 메리토크라시에 입각한 차별정책은 이미 1950년대부터 성장해 왔다. 지식을 대중화하고 정보를 확산시키기 위해 세워진 기구가 다른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상위 10%의 엘리트를 선별하는 센터가 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이다.(19)

 

미덕을 발휘해 돈 세탁하기

미국 작가 매튜 스튜어트는 2018년 월간지 『The Atlantic 대서양』 에 기고한 저명한 칼럼에서 ‘운 좋은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고 적었다. “우리, 상위 9.9%에 속하는 사람들은 (…), 소위 ‘비천한 출신’일 때 입던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걸어 다닌다. 우리는 유기농 사료를 섭취하고, 자녀들이 거둔 사회적 성취 및 우리가 사는 지역의 생태주의적 환경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알리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빼어난 미덕을 발휘해 돈을 깨끗하게 세탁하는 방법을 파악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 모든 혜택을 전달하는 법을 배웠다.”(20) 

그리고 스튜어트는 경영진들과 지식노동자들이 회피하려고 애쓰는 객관적인 진실을 압축적으로 요약했다. “우리는 90%의 자원을 0.1%로 변환하는 기계를 돌리고 있다. 우리는 점유할 수 있는 파이가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한다.” 백인 남성이 여전히 서구사회의 특권층이라고 말한다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10% 집단은 또 다른 종류의 특권층이다. 그러나 이 특권을 누리는 수혜자들은 이 소속의 존재를 쉽사리 상대화한다. 부유한 지식인이 증가하면서 서구의 정치 환경은 빠르게 재구성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부자들은 주로 좌파 정당에 투표했고, 공공 부문과 연결된 소수의 지식노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연합은 얼마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미국 사회당, 민주당, 녹색당은 1990년대 이래로 토마스 프랭크, 그 뒤를 이어 토마스 피케티가 분석한 바와 같이 ‘고학력자들의 정당’을 형성하며, 대중 계급으로부터 서서히 외면당했다. 2016년 11월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최고 학력자뿐 아니라, 최고 부유층도 민주당에 투표했다. 일반 노동자들과 종업원들은 아예 투표를 포기하거나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가 없다면 자유주의 엘리트 진영의 반대에 있는 정당에 투표했다. 피케티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포퓰리즘’의 부상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엘티리즘’의 부상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21)

이미 해묵은 계급 간 대립을 없애려고 노력한 논평가들에게 단절이 보여주는 경계선은 마치 하늘에서 온 선물처럼 반가운 존재였다. 자유주의 노선의 주간지 『The Economist 이코노미스트』는 2020년 6월 6일에 이런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경제학에 근거해 좌파와 우파, 두 진영으로 나누던 낡은 분류 기준은 이제 여러 나라에서 문화를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진영의 대결로 대체됐다.” 

그러나 이 분석과 달리 문화와 경제는 서로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합세하는 경향을 보인다. 프랑스에서는 석사학위 취득이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2017년에 전문직 종사자의 자녀 40%가 공학 학위 또는 석사 학위에 해당하는 ‘bac+5’(고교 졸업 후 학사‧석사취득과정) 디플로마를 취득했다. 반면 물류 부문에 종사하는 숙련된 노동자의 자녀는 4% 미만이었다. 부유한 지식인들의 정부는 더 이상 전통적이라고 할 수 없는 새로운 계급투쟁에 진입했다.

 

70년 전 예견된 디스토피아, 2034년의 총파업

자살, 알코올, 마약 등 ‘절망 속에서 사망한’ 미국인들의 이야기는 숱한 비극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연구원 앵거스 디톤과 앤 케이스에 의하면 1999~2017년 증가한 약 60만 명으로 추정되는 45~54세 백인 사망자는 대다수가 학사학위 미취득자들이었다. 1990년 이후 사망률은 25% 증가한 반면 학위 취득자는 40% 감소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의 경우 고통의 수준 정신장애의 정도가 증가하는 반면 업무역량과 사교성은 감소한다. 직업에 있어서도 소득수준과 가족의 안정성에 있어 격차가 커지고 있다. 대학교 학사학위는 사회적 지위의 주요 지표가 됐다.”(22)

마이클 영은 무려 70년 전 묘사한 디스토피아에서 이 같은 현상을 예견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낙관적인 메모로 끝이 난다. 2033년 5월에 강력한 ‘포퓰리스트’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남성 위주의 메리토크라시 권력에서 배제된 한 여성에 의해 촉발됐다. 화자는 마이클 영을 대신해 말한다. “반대 의견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 계층은 그때까지 그렇게 고립되고 연약했던 하층계급과 처음으로 동맹을 체결했다.” 

물론 그 시위대가 노란색 조끼를 입었는지는 명시돼 있지 않다. 상황은 심각했다. 명품을 판매하던 직원들은 자신들이 일하던 상점을 파괴했다. 교육부 장관은 복부가 잘린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2034년 5월 1일 40년 만에 처음으로 대대적인 총파업이 일어났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화자는 갑자기 맥이 풀린 채, 운동의 열기가 금세 식어버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화자의 이야기는 갑자기 끝난다. 편집자가 원고에 남긴 짤막한 메모는 화자가 폭동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글·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미디어비평 행동단체 Acrimed에서 활동 중이며, 대안언론 <르플랑베>를 발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Libération, de Sartre à Rothschild 해방, 사르트르에서 로스차일드까지』(2005) 등이 있다. 

번역·이근혁
번역위원


(1)  Michaël Young, 『The Rise of the Meritocracy 1870-2033. An Essay on Education and Equality』, Thames and Hudson, 런던, 1958. 
(2) Thomas Frank, 『Pourquoi les riches votent à gauche 왜 부자는 좌파에 투표하는가?』, Agone, 마르세유, 2018. 
(3) Jean-Claude Chamboredon, ‘La délinquance juvénile, essai de construction d'objet 비행 청소년, 객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노력’, 『Revue française de sociologie』, vol. 12, n° 3, 1971.
(4) Robert Paxton, 『La France de Vichy 비시 프랑스』, Seuil, 파리, 1973 (1972년 초판의 재판).
(5) Pierre Bourdieu, 『Sur l’État 국가에 대해』, Seuil/Raisons d’Agir, 파리, 2012. 
(6) Etienne Balazs, 『La Bureaucratie céleste. Recherches sur l’économie et la société de la Chine traditionnelle 천상의 관료: 전통 중국의 경제와 사회에 관한 연구』, Gallimard, 파리, 1968.
(7) Isabelle Kalinowski, “Ils ne songent pas à désirer le nirvana”. La sociologie des intellectuels dans 『Hindouisme et bouddhisme』 de Max Weber “그들은 열반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막스 베버의 『힌두교와 불교』에 담겨있는 지식인의 사회학, Johan Heilbron, Rémi Lenoir 및 Gisèle Sapiro (sous la dir.), 『Pour une histoire sociale des sciences sociales』, Fayard, 파리, 2004.
(8) Lawrence Peter King과 Ivàn Szelényi, 『Theories of the new Class. Intellectuals and Power』, University of Minesota Press, 미니애폴리스, 2004.
(9) Marc Ferro, 『La Révolution de 1917』의 새로운 판본에 대한 서문, Albin Michel, 파리, 1997.
(10) Serge Halimi, 『Le Grand Bond en arrière 후방으로의 대약진 운동』, Fayard, 파리, 2004.
(11) Alvin Gouldner, 『The Future of Intellectuals and the Rise of the New Class』, MacMillan, 런던 및 배싱스토크, 1979.
(12) Dominique Damamme, ‘Genèse sociale d'une institution scolaire. L'Ecole libre des sciences politiques 교육기관의 사회적 기원: 무료 정치 학교’, 『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파리, n°70, 1987.
(13)  Mark Bovens와 Anchrist Wille, 『Diploma Democracy. The Rise of Political Meritocracy』,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독일,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14) Nicholas Carnes와 Noam Lupu, ‘What Good Is a College Degree? Education and Leader Quality Reconsidered’, 『The Journal of Politics』, vol°78, n°1, 2006.
(15) Elizabeth Currid-Halkett, 『The Sum of Small Thing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7. 
(16) Daniel Markovits, 『The Meritocracy Trap. How America’s Foundational Myth Feeds Inequality, Dismantles the Middle Class and Devours the Elite』, Penguin Press, 뉴욕, 2019.
(17) Benoît Bréville, ‘Quand les grandes villes font sécession 한국어판 제목: '진보주의'로 분칠한 도시의 변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0년 3월호. Richard V. Reeves, 『Dream hoarders. How the Americain Upper Middle Class is Leaving Everyone Else in the Dust』, Brookings institution Press, 워싱턴, 2017.
(18) 미국의 경우, Raj Chetty 외, ‘Income Segregation and Intergenerational Mobility Across Colleges in the United States’, NBER working papers, 2020년 2월. 프랑스의 경우, Pierre François와 Nicolas Berkouk, ‘Les concours sont-ils neutres ? Concurrence et parrainage dans l’accès à l’École polytechnique 경쟁은 중립적인가?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시 과정의 경쟁과 추천’, 『Sociologie』, 파리, n°2, vol. 9, 2018.
(19) Emmanuel Todd, 『Où en sommes-nous. Une esquisse de l’histoire humaine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나? 인류 역사에 대한 개요』, Seuil, 파리, 2017.
(20) Matthew Stewart, ‘The 9.9 Percent Is the New American Aristocracy’, <The Atlantic>, 워싱턴, 2018년 6월. 
(21) Thomas Piketty, 『Capital et idéologie 자본과 이데올로기』, Seuil, 파리, 2019.
(22) Angus Deaton과 Anne Case, 『Deaths of Despair and the Futur of Capital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