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전역에 번지는 청원 물결

2020-08-31     브누아 브레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이동 제한령이 내려지자 여행과 외식, 쇼핑의 자유를 빼앗긴 월드 스타들은 무료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그들은 재택 콘서트를 열고, 웹캠 인터뷰를 하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Stayhome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미국의 아티스트 25인은 각자의 호화로운 거주지에서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을 한 소절씩 이어 부르는 챌린지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요,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는 세상을 상상해요.” 

다른 스타들도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청원운동에 재능을 발휘했다. 5월 초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 천체물리학자 오렐리앵 바로가 주창한 ‘정상으로의 복귀는 없다(Non à un retour à la normale)’라는 선언에 마돈나, 로버트 드니로, 에마뉘엘 베아르를 비롯한 200인의 아티스트와 과학자들이 서명했다. 

이 선언문에는 “소비주의로 인해 우리는 생명 그 자체, 즉 식물의 생명, 동물의 생명, 그리고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 전 영역에서 요구되는 근본적인 변혁을 가능하게 하려면, 과감함과 용기가 필요하다. 이 변혁은 대중의 결연한 참여 없이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단호한 주장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후 이들이 이자벨 아자니, 모니카 벨루치, 기욤 카네가 로레알, 크리스찬 디올, 카프리스 데 디외(치즈) 등의 광고를 찍는다면 누가 이들에게 이런 발언을 상기시켜 주겠는가?

 

‘다시는!’ ‘그때가 왔다’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선언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년 전에도 쥘리에트 비노슈와 오렐리앵 바로가 ‘지구를 구하기 위해’(1)라는 선언으로 국제사회의 유명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았는데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들의 최근 선언이나, 몇 주 전 ‘노조, 협회, 환경단체 대표 18인’이 발표한 ‘다시는!(Plus jamais ça!)’이라는 선언도 역사의 유물이 될 것이다. 환경운동가 니콜라 윌로가 올해 5월 5일 발표한 ‘그때가 왔다(Le temps est venu)’라는 성명도 마찬가지다. 원래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고, 공동의 지평을 마련하며, 인류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자연과 화해할 때가 왔다’라는 긴 문장은 아주 간결하게 ‘그때가 왔다’로 줄었다. 이후 네티즌들은 이 문구를 응용해 나름의 방식으로 재생산하기도 했다. 이제 선의로 가득 찬 선언들과 결별할, ‘그때’가 온 것일까?

니콜라 윌로가 성명을 발표한 며칠 뒤, ‘좌파 인사 150인(프랑스 공산당의 이안 브로사, 생태운동가 야닉 자도, 사회당의 올리비에 포르, 중도좌파 정당인 플라스 퓌블리크의 라파엘 글룩스만)’이 ‘미래를 건설하자’라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는 니콜라 윌로의 견해와는 분명 결이 다르다. 서명인들은 ‘위기(이 단어는 성명에 22번 나온다)’의 긴급성과 ‘분열세력(유럽연합에 적대적인 정당들)’의 위험성을 주장하며 “앞으로 수개월 동안 근본적인 변화를 갈망하는 남녀 시민들, 정치조직, 연합세력, 조합과 NGO의 이니셔티브 등 사용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대사건, 즉 ‘공동 세계협약’을 맺음으로써 좌파연합을 결성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라파엘 글룩스만이 ‘너무 늦기 전에 행동하자(Agir avant qu’il ne soit trop tard)’고 호소하면서 플라스 퓌블리크 운동을 벌인 2018년 11월에 이미 나온 게 아닐까? 로랑 조프랭은 지난 7월 예술계 및 학계의 지인들과 ‘참여합시다(Engageons-nous)’라는 프로젝트를 조직했는데 그는 이 프로젝트가 어떤 효과를 거두리라 상상했을까? 그는 이미 ‘1차 결선투표는 좌파에게’(<누벨 옵세르바퇴르>, 2005년 10월 27일)와 ‘1차 결선투표를 위해, 단결!’ 운동(<리베라시옹>, 2016년 1월 26일)을 벌이지 않았던가? 

“온 세상이 자본주의 세계화의 위협을 받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화는 여러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고, 수십억 인구의 존립과 생태학적 균형을 위태롭게 한다. 지금 우리는 퇴직연금과 공공서비스의 잔인한 공세에 직면해 있고, 내일은 건강보험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공격은 실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계속되고 있다. (…) 좌파가 다시 희망을 얻으려면 기존 정치와 관계를 끊은 대안을 열어야 한다.” 이런 글은 어제 쓰인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2002년에 나온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한다’는 호소문이나 2003년에 나온 ‘좌파의 대안을 위해’(이 호소문이 작성된 장소인 음식점 이름에서 ‘라뮐로 호소문’이라고도 불린다)에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2007년에 문화잡지 <레 쟁록큅티블(Les Inrockuptibles)>이 ‘Y에게 투표하세요(Votez Y)’라고 제안했을 때나, 2008년에 주간지 <폴리티스>가 ‘좌파라는 대안, 그것을 준비하자’라는 주장을 펼쳤을 때 쓰인 것일 수도 있다. 비슷한 말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텍스트가 제목과 내용을 바꿔치기해도 무리가 없다. 

여기에는 두루뭉술하고 대체로 모든 것이 합의된, 동일한 대원칙들(유럽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이 지구상 모든 존재가 연대하는 것을 상상하고, 시민의 역동성을 분출하게 하는 것)이 존재한다. 또한, 첨예한 주제들을 회피하고자 하는 동일한 의지(단일 통화, 보호주의, 사회당과의 연합)도 찾아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 정치 지도자가 이런 제안에 참여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그 즉시 그가 당파적이고 당리당략을 우선시한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그리고 이것은 진보진영의 분열에 대한 끝도 없는 악의적인 해석으로 이어진다.

 

소파 위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래도 사람들이 좌파연합이라는 주제만 가지고 청원운동을 벌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상 주제에 상관없이 청원운동을 할 수 있고, 유명인사 몇 사람의 이름만 붙여주면 이 청원운동을 실어줄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 사이트는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청원운동이 무슨 아이디어를 찾아내거나 반드시 어떤 관점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 ‘무료 기사’라는 점이다. 이 무료 기사는 관계자들이 틀림없이 그에 대해 언급해줄 것이기 때문에 몇 시간은 미미하게나마 어떤 영향력을 경험할 것이다. 

따라서 올해 초 이후에 나온 이런 모든 청원운동 사례를 목록으로 만드는 데는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15쪽 분량의 문서도 모자랄 판이다.(2) 지난 2월만 해도 ‘160인’이 결집해 <르디망슈>에 ‘스크린 영상 광고를 중단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278인’은 <폴리티스>에 사회적 결집을 지원할 위원회를 창설하자고 청원을 벌였고, 140인(대개 다른 청원과 중복되는 사람들)은 <뤼마니테>에 연금개혁에 대해 국민투표를 조직하자고 탄원했다. 

시장 27명은 아질산염 없는 학교 급식을 위해 운동을 벌였고, 과학자 1,000명은 기후온난화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으며, 성폭력에 반대하는 운동선수들, 생태적 전환을 주장하는 항공사 사주들, 파리 시장 안 이달고를 지지하는 여성 배우 단체도 있다. 이동 제한령이 시행되면서 문화, 음식점, 성당의 미사, 마스크, 클로로퀸, 타이완, 타리크 라마단(최근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옥스퍼드대 교수이며 이슬람학자-역주), 의료진, 올림픽, 도서관, 환경, 연구, 난민 등에 관한 청원이 급격히 늘었다. 

이처럼 유명인사들의 후원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관련 인터넷 사이트나 Change.org에서 이니셜만 공개하고 익명으로 청원을 할 수도 있다. Change.org는 미국의 다국적 온라인 청원 사이트인데 프랑스 본토에서 매달 1,000개 이상의 청원이 올라온다. 이 플랫폼의 프랑스 지부장은 이 사이트의 인기를 설명하면서 “청원을 원하는 네티즌들은 서너 가지 질문에 답하기만 하면 된다. 인터넷으로 청원 이유를 작성하는 데는 단 2분이면 된다.”(3) 『어리석은 자를 위한 사회참여』의 저자 프랑시스 샤르옹도 “몇 초만 투자하면 인터넷으로 양식을 작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며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4)  

실제로 큰 노력 없이도 이런 활동이 가능하다. 인터넷 청원은 소파에 앉아서도 가능하고, 월급이 축나는 것도 아니다. 몽둥이로 맞거나 최루가스를 들이마실 일도 없고, 그러다가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될 위험도 전혀 없다. 그러나 무수한 유명인사들의 이름과 수백만 서명인을 동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또 인터넷에서 마우스 몇 번 클릭한다고 해서 파업이나 시위 참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페이스북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 아동을 돕자’라는 단체에 참관해온 에브게니 모로조프는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다 기부자가 되는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이 단체는 2009년 120만 명의 회원을 모집했지만,  모금액은 총 6,000달러, 회원 1명당  0.005달러에 불과했다.(5)

이들은 화상회의 앱인 줌(Zoom)에서 정치 모임을 열고, 어린이 완구인 플레이모빌로 연출한 시위 장면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거나 유튜브에 동영상을 업로드하며 SNS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기후파업을 벌인다. 이와 더불어 코로나19는 ‘소파 위에서 세상을 바꾸길 바라는 게으른 운동가’를 뜻하는 ‘슬랙티비스트(slacktivist, 게으른 사람을 뜻하는 slacker와 운동가를 뜻하는 activist의 합성어-역주)’를 양산했다. 

코로나19는 사회적 관계와 연관되는 노동부터 정치적 참여까지, 모든 것을 붕괴시키기를 꿈꾸는 실리콘밸리의 거인들 역시 망쳐놓았다. 그러나 말콤 글래드웰이 미국의 시민권 운동에 대해 설명했듯, 대의가 성공하는 것은 대개 강한 결속력을 맺어온 운동가들이 견고하게 구축된 조직 안에서 단결해 행동에 나설 때다.(6) 디지털 행동주의의 ‘느슨한 연대’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일례로, 알제리 전쟁 동안 (입대에 거부한다는) 불복종 권리를 주장하며 ‘121인 선언’을 집필한 필자들은 투옥되거나 군사비밀조직 OAS의 공격 목표가 되는 위험을 무릅썼다. “나는 낙태했다”라고 선언한 ‘343인 선언’의 서명인들도 형사 고발을 당하는 위기를 감수했다. 유명인인 카트린 드뇌브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구속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익명의 다수는 기소됐다.

반면 오늘날 투철한 정신으로 서명에 참여하는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소송장에 올리는 대신, 청원이라는 영예로운 역사 뒤로 도피하려 한다. 현재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행보를 규탄하는 이가 있다고 해도, 그가 받게 될 최악의 형벌은 ‘프랑스 퀼튀르(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에 초청받는 일이 아닐까.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Le plus grand défi de l’humanité” : l’appel de 200 personnalités pour sauver la planète(“인류의 가장 위대한 도전”: 지구를 구하기 위한 200인의 성명)’, <르몽드>, 2018년 9월 3일.
(2) 인내를 요하는 이 조사 작업에 함께해준 리자 누아얄에게 감사를 전한다. 
(3) ‘La frénésie des pétitions en ligne s’empare de la France(프랑스를 뒤덮은 온라인 청원의 열기)‘, <Le Figaro>, 2016년 2월 26일.
(4) Francis Charhon, 『L’Engagement social pour les nuls 어리석은 자를 위한 사회참여』, First, Paris, 2018. 
(5) Evgeny Morozov, ‘From slacktivism to activism’, <Foreign Policy>, 2009년 9월 5일. 
(6) Malcolm Gladwell, ‘Small change’, <The New Yorker>, 2010년 9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