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적 프로파간다와 민족 감정 사이의 아랍 언론

2020-08-31     아르튀르 아세라프 l 케임브리지 대학교 부교수

19세기 초에 등장한 아랍어 매체는 오랫동안 관보 역할을 했다. 이후 출범한 식민정부에 있어서 언론이란 현지 주민과의 소통 및 정치적 선전을 위한 수단이었다. 독립 언론사는 시리아계 레바논인, 마론교도들이 지닌 노하우를 빌렸다.

 

라바트에서 바그다드에 이르기까지 국적을 막론하고 아랍어권 사람들은 같은 신문을 읽을 수 있다. ‘푸샤(foussha)’라는 아랍 문어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문, 라디오, 티비 채널과 같은 아랍어권 대중매체를 접하는 대중은 특정한 국가의 국민이 아니다. 이렇듯 유럽의 영향을 받은 아랍권 언론의 발전에는 특수한 면이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와 아일랜드 역사학자 베네딕트 앤더슨 등 많은 지식인은 “출판언론은 민심의 시발점”이라 강조했다.(1) 즉 신문은 동일한 언어와 시대를 공유하는 독자집단을 모아 대중을 형성한다. 독자들은 모닝커피를 마시며 같은 시간에 같은 기사를 접한다. 신문은 이런 ‘상상의 국가 공동체’를 창조한다. 

하지만 대서양에서 페르시아만까지 걸쳐 있는 언론이 하나의 국가를 이룰 수 있을까? 정치적으로 단일한 아랍연합을 둘러싼 찬반론자들 대부분 언론이 민심 형성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언어를 근간으로 아랍권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단일 언론에 우호적이다. 

반면 푸샤로 된 매체 출판을 멈추고 국가별 고유 언어를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집트·모로코·시리아 방언 등을 쓰는 매체가 등장하면서 국가별 고유의 특성이 있는 진정한 대중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런 비평가들의 의견은 모두 동일한 가정에서 출발한다. 아랍언론의 상황이 비정상적이며 언어, 매체, 국가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랍언론의 역사를 볼 때 ‘국내’ 언론과 ‘국제’ 언론을 구분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사학자들은 대부분 ‘이집트의 사건’이라는 제목의 최초 아랍어 신문 <알 와카이 알 미스리야(Al waqai' al misriyya)>가 1828년 카이로에서 창간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 와카이 알 미스리야>는 ‘신문’보다는 ‘관보’에 가까웠다. 가끔 대중적인 뉴스가 추가되기도 했지만 이집트 공무원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몇백 부씩 발행되던 행정공보였기 때문이다. 

곧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와 유사한 신문을 만들었다. <탁비미 베카위(Takvim-i vekayi)>(사건 달력)은 오스만식 터키어로 먼저 나온 후 아랍어를 포함한 여러 판본이 출간됐다. 카이로나 이스탄불에서 그랬듯 국가를 개혁하려는 군주는 정보를 중앙으로 집중시켜야 했다.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국가의 근대화와 권력 강화를 위해 언론을 이용했다. 당연히 권력은 정보의 민주화나 여론 형성에는 관심이 없었고 일방적으로 정부의 활동과 사상을 주입하고자 했다.

아랍 외 지역에서 막 싹트는 언론은 민족주의나 범아랍주의 감정과는 무관했다. 대부분 최초의 신문은 식민지 정부가 창간한 것이다. 이집트와 오스만 제국의 사례처럼 언론은 민중을 향한 소통의 도구로 여겨졌다. 카이로의 무하마드 알리, 콘스탄티노플의 마무드 2세, 파리의 루이 필립과 같은 군주 중 실제 아랍어로 글을 쓰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의 목적은 아랍어권 대중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데 있었다. 

 

프랑스 언론, 아랍어권 독자에게 말을 걸다

1830년 7월 알제리 점령 이후 프랑스 정부는 아랍어권 독자를 향한 출판물 확산을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우선 1832년 <모니퇴르 알제리앙>이 몇 차례 발행되지만 짧은 시도로 끝났다. 그리고 1847년 9월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예언자라는 뜻을 가진 <알 무바시르(Al Mubachir)>가 창간됐다(프랑스어로는 ‘르 모바시르’). 이 격주간지는 특히 무슬림 공무원 전원에게 발송됐는데, 발행인은 이스마엘 ‘토마’ 위르뱅이라는 기아나 출신이었다. 생시몽주의적 이상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카이로에 여러 번 머문 끝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창간호에서 <알 무바시르>는 발행의 취지, 즉 루이 필립과 알제리인들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려는 의도를 밝혔다. “기독교 국가에서 왕은 정부의 결정이나 다양한 분야의 소식을 알리는 글을 통해 국민에게 말을 건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술탄이나 이집트의 파샤도 이 선례를 따랐고, 국민은 이를 환영합니다.” 사학자 샤를 로베르 아주롱은 이런 간행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곧 대중적인 내용을 담기 시작했고, 프랑스 공무원들이 작성한 글이 아랍어로 번역되는 방식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알 무바시르>는 1928년 폐간되지만 그때까지 이슬람 기자들도 이 신문사에서 활동했으며 점차 ‘알제리 무슬림 저널리즘 최초의 유파’가 됐다. 

이런 신문은 처음부터 국경을 초월해 유통됐다. 최초의 신문은 튀니지에서 1860년 창간된 <알 라이드 알 툰시(Al-Ra'id al-Tunsi)>(튀니지인 개척자)다. 새로이 제정된 형법과 관습법의 올바른 적용이 주요 발행목적이었지만 신문 1면을 보면 튀니스, 카이르완, 스팍스, 수스, 비제르테 등 튀니지 주요 도시는 물론 알제, 트리폴리, 알렉산드리아, 베이루트에서도 구독이 가능하다고 언급돼 있다. 독자층은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에 이르기까지 아랍어권에 폭넓게 존재했다. 독자들은 항구에 막 도착한 배에서 내린 뒤 신문을 사서 읽었다. 1870년대부터는 알제의 바스-카스바 지구의 리르 거리의 서점에서 이집트 간행물을 살 수 있었다. 

신문의 내용도 국제적이었다. 갓 설립된 전신국과 언론사 덕분에 베이루트, 로마,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 어느 지역에서든 비슷한 정보를 공유했다. 1860년대 지중해에 최초로 해저 케이블이 개발되고 알렉산드리아와 튀니스에 아바스, 로이터 등 언론사 사무실이 생기면서 유럽의 전보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것이 기자와 편집자의 중요한 업무였다. 저작권 개념이 모호했던 당시 동일한 기사가 여기저기 무단 게재되는 일도 흔했다. 신문이 발달하면서 국경을 초월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주로 레바논 지역의 마론교도들이 기자와 편집자로 일했는데 이들은 종교 세미나에서 아랍 문어체와 유럽 언어, 인쇄기 사용법을 배웠다. 작가이자 기자인 파레스 쉬디악은 1804년 레바논 산맥 주에서 태어났다. 1830년대에 이집트 관보를 편집하던 그는 1860년 튀니지에서 유사한 형태의 간행물을 창간하기 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후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가 됐다. 쉬디악은 술탄 압둘메시드 1세의 초대를 받아 1861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회람’이라는 뜻의 <알 자와이브(al-Jawa'ib)>를 창간했다. 문화와 문학을 다루는 주간지 <알 자와이브>는 오스만 제국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당시 유럽의 유명 신문사들의 모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터전을 옮긴 레바논인과 시리아인들은 1860년대부터 아랍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몇 개의 신문을 창간했다. 인쇄소는 정치적 압박을 피해 수시로 옮겨졌다. 1875년 타클라 형제는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라는 뜻의 <알 아람(Al-Ahram)>을 창간하고, 자말 에딘이나 모하메드 압두 등 ‘나다(Nahda)’라 불리던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쓴 글을 실었다. 

이 일간지는 오늘날 아랍세계 전체에 두루 퍼져 있다. 심지어 레바논과 멀리 떨어진 모로코에서도 파라잘라 네무르와 아르튀르 네무르라는 레바논 형제가 아랍어로 쓰인 최초의 민간신문 <리산 알-마그리브(Lissan al-Maghrib)>(모로코 언어)를 1907년 탕헤르에서 창간했다. 이 신문은 모로코 군주제의 비공식적인 확성기 역할을 하다가 이후 엘리트 민족주의자들의 대변자가 됐다.(3) 미대륙으로의 이주가 일어나면서 몇몇 핵심적인 아랍어권 매체들은 상파울루와 필라델피아에도 자리를 잡았다. 1914년 브라질에는 14개의 아랍어 신문이 존재했고, 1898년부터 뉴욕에는 일간지 <카우카브 아미르카(Kawkab Amirka)>(아메리카의 별)가 있었다. 이슬람교 성지인 메카, 10세기부터 모로코 대학의 중심지였던 페스에 아랍어 언론사가 들어오던 때에 비해서도 훨씬 앞선 시점이다.

 

독자의 욕망을 무시한 ‘국가언론’의 한계

그러나 아랍국가 대부분에서 ‘외국’ 신문은 국가주권과 직결된 문제를 낳았다. 통제불가한 곳에서 출판되는 만큼 반체제적 사상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 국가들은 검열, 독자감시 등을 통해 외국에서 발행된 아랍어 신문을 금지시키고자 했다. 일례로 1897년 알제리를 지배하던 프랑스 정부는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세계에 만연한 서구 식민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하던 이집트 신문 <알 무아야드(Al Mu'ayyad)>(동지)를 금지했다. 하지만 신문은 다른 상품과 섞여 세관을 쉽게 통과했다. 신문 밀수가 이뤄지던 대표적인 장소는 프랑스에 합방된 알제리와 튀니지 보호령 사이 국경지대로 검열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곳이었다.

그때부터 각 정부는 국경 너머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문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9세기 말부터 이집트주재 영국 영사와 프랑스 영사는 친 프랑스 성향의 <알 아람(Al-Ahram)>과 친 영국 성향의 <알 무카탐(Al-Muqattam)>을 사이에 두고 전례 없는 다툼을 벌였다. 독립 언론사조차 지역이나 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경우가 흔했다.

정치선전용 신문들은 오로지 외국 자본을 두둔하려는 목적으로 생겨났다. 프랑스 외교부는 아랍 신문사 다수에 자금을 댔지만 동시에 다른 강대국이 지원하는 언론사가 행사하는 영향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아랍 저널리즘의 선구자 중에 1880년 이탈리아 사르데냐 지방의 칼리아리에서 탄생한 신문사가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와 사르데냐 사업가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튀니지에 식민지를 세우기 원했다. 이 때문에 알제리의 안보를 우려하던 프랑스 정부와의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됐다. 

<라베니레 디 사르데냐>(사르데냐의 미래)지의 편집자 지오반니 드 프란체스코는 아랍어 신문 <알 무스타킬(Al-Mustaqill)>(독립)을 창간하려 레바논 출신 시인 유수프 바쿠스를 고용했다. 튀니지인들과 다른 아랍 대중을 움직여 프랑스가 튀니지에 손을 뻗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선전에 기울인 노력은 결국 1881년 5월 프랑스가 튀니지에 들어오면서 수포로 돌아갔다.(4) 프랑스 언론은 친이탈리아 성향 신문이 반체제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이후 바쿠스는 파리로 떠나 <알 바시르(Al-Bassir)>(통찰)에서 일했다. 아랍 대중을 겨냥한 친프랑스파 주간지였다. <르 피가로>지는 “가증스럽게도 <알 무스타킬>에서 하던 말과 정반대의 말을 <알 바시르>에서 한다”며 바쿠스의 변절을 지적했다.(5) 

그렇다면 아랍 대중은 어땠을까? 정치 선전성이 강한 매체는 대중에게 외면당했고 독자가 적은 신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따분한 내용, 오역과 과장된 문체가 가득한 정치선전용 신문은 재미와 교양을 추구하던 세련된 아랍 대중과 맞지 않았다. 아랍 독자층은 연재소설과 삽화를 원했다. 이들을 끌어들이려면 흥미롭고 독창적인 콘텐츠가 필요했다. 지식의 격동기를 겪던 아랍세계 곳곳에서(이집트, 레바논, 튀니지) 독자들은 정부의 간행물에는 결핍된 ‘표현의 자유’가 담긴 독립언론을 원했다. 모로코 북부의 페스에서 이라크 동부의 바스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분석하고 매체를 평가하며 이면의 메시지를 짐작한다. 대중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항상 여러 경로로 정보를 수집하고자 한다. 

 

 

글·아르튀르 아세라프 Arthur Asseraf 
역사가이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부교수. 『 Electric News in Colonial Algeria 』(Oxford University Press, 2019)의 저자.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Gabriel Tarde, 『L'Opinion et la foule 여론과 군중』, 1901. Benedict Anderson, 『L'imaginaire national』, 1996.
(2)『De l’Algérie française à l’Algérie algérienne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독립한 알제리까지 』, Editions Bouchène, Alger, 2005.
(3)『Aux origines de la presse officielle avec Lissan al-Maghrib <리산 알-마그리브>로 본 공식언론의 기원』, Zamane, Casablanca, 2019년 1월 29일.
(4) ‘1881, la ‘‘gifle’’ de Tunis : retour sur un épisode qui a durablement marqué les relations franco-italiennes 1881년 튀니지의 ‘굴욕’. 프랑스-이탈리아 외교관계에 오랜기간 영향을 미친 사건의 회고’, Francetvinfo.fr, 2019년 2월 2일.
(5) Pierre Giffard, ‘Joseph Bokhos 조제프 보코스’, <Le Figaro>, 1881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