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사용법

포로 수용소에서 우주에까지…

2020-08-31     아가트 멜리낭 | 극작가 겸 연출가

라이프치히의 칸토르(Kantor; 성가 합창단의 지휘자 겸 선창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사망한 1750년부터 오늘날까지, 12평균율(한 옥타브를 12등분한 것으로, 오늘날 서양음악의 표준음계) 기초를 확립한 바흐의 음악적 유산은 다양한 결실로 이어지고 있다. ‘절대 음악’의 승리는 지금도 계속 찬양-해석-보완되고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 시의 기록에 의하면, 성토마스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 겸 음악감독이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750년 7월 28일 화요일,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바흐는 무료 영구차로 옮겨져 라이프치히의 한 묘지에 안장됐다. 그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었다.(1) 이후 바흐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장남 빌헬름 프리드만은 할레 시의 음악감독을 지냈고, 차남 칼 필립 에마뉘엘은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 클라비어 연주자로 일했다. 

 

두 아들이 팔아치운 바흐의 악보들

두 아들은 아버지 바흐의 악보를 나눠 가지고, 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하던 클라비어, 바이올린, 커피메이커를 처분했다. 바흐의 두 번째 아내이자 이들의 새어머니였던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10년 동안 ‘과부가 된 비통함’에 빠져 지내다가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2) 아무도 그녀를 위해 장례곡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잊혔다가 1829년 베를린에서 펠릭스 멘델스존이 ‘마태오 수난곡’을 초연한 뒤부터 대가의 반열에 오른 바흐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사실 이 공연의 성공은 당연한 결과였다. ‘라이프치히의 음악감독’ 바흐의 명성은 작센 주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유명 인사였기 때문이다. 바흐의 아들, 제자, 음악가, 수집가, 후원자들은 베를린이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1829년의 ‘빛나는 새로운 날’까지 바흐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힘썼다.(3)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 프로이센 왕국은 우아함, 경건함, 감성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단음계와 과감한 화성(harmony), 고통과 열정! 왕궁과 부르주아 계급의 살롱에서는 계몽과 산업 발전이 화제로 떠올랐다. 왕은 플루트를 연주했고, 볼테르에게 편지를 썼다. 바흐의 죽음 직후 아버지 바흐보다 더 유명했던 칼 필립 에마뉘엘은 선금을 받고 『푸가의 기법』 초판을 완성했다. 이 책은 고작 30부가 팔렸다. 당시에는 대위법이 크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칼 필립 에마뉘엘은 자신의 작품 목록을 작성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버지 바흐의 부고 기사를 냈고 이는 나중에 아버지 바흐의 연대기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바흐가 남긴 음악적 유산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요한 크리스티안은 바흐의 수사본을 베를린에 남겨두고 밀라노로 떠났다. 장남 빌헬름 프리드만은 마음이 여리고 의기소침해 빈털터리 신세였으며,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 바흐의 곡을 단 한 곡도 연주할 수 없어 수사본을 다른 이들에게 그냥 줘버리거나 팔아버렸는데, 그 중 대부분은 멘델스존 아버지의 손에 넘어갔다. 차남 칼 필립 에마뉘엘도 ‘4명을 위한 성가곡’의 1/3을 정리해 출간한 뒤 역시 아버지 바흐가 남긴 수사본을 팔아버렸다. 

이렇게 흩어진 바흐의 수사본을 모두 되찾는 데는 무려 200년이나 걸렸다. 다행히 바흐의 제자였던 요한 필립 키른베르거는 바흐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네에게 딱 한 가지만 부탁하겠네. 나의 보잘 것 없는 이 수사본들을 잘 간직했다가 부디 믿을만한 이들에게 물려주게나.” 덕분에 키른베르그의 제자들과 지인들은 바흐의 가르침을 나누고, 바흐의 곡을 연주하고, 수사본을 돌려 볼 수 있었다. 후에, 키른베르거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음악감독이 돼 대왕의 누이인 안나 아말리아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키른베르거 덕분에 바흐의 음악에 심취하게 된 안나 아말리아는 콘서트를 열고 바흐의 수사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수집한 소중한 자료들은 현재 베를린에 소장돼 있다. 안나 아말리아는 1747년 바흐가 포츠담을 방문했을 때 프리드리히 대왕이 플루트를 연주하고 바흐가 보낸 ‘음악적 헌정’을 연주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1782년 모차르트는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비엔나에서 편지를 썼다. “저는 매주 일요일 12시 경 반 슈비텐 남작의 집에 가서 헨델과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고 옵니다.”(4) 음악에 조예가 깊은 황제, 요제프 2세 시대, 음악관련 법령과 법률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은 유능한 외교관이자 음악 애호가로서 오스트리아, 브뤼셀, 파리, 바르샤바, 베를린 대사를 지냈고, 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12세에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연주한 베토벤을 후원했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귀족들의 모임인 Gesellschaft der Assoziierten을 조직해 비엔나에 거주하는 유명 음악가들을 불러 모으곤 했다. 바흐에 대한 반 슈비텐의 애착이 어찌나 깊었던지, 1802년 요한 포르켈은 그를 위해 세계 최초의 작곡가 전기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삶, 예술, 작품에 대해』를 쓰기도 했다. 이 전기의 부제는 ‘진정한 음악 예술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에게’였다.

 

“위대하고 성스러운 음악” vs. “신교도 신앙의 상징”

결과적으로, 19세기 초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오르간 연주자, 칸토르, 음악감독은 없었다.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1829년 3월 11일 언론이 ‘종교와 예술의 대축제’라고 명명했던 때를 떠올려보자. 작곡된 지 100년도 넘은 ‘마태오 수난곡’이 부활했다! 당시 징아카데미(Singakademie)의 홀에는 프로이센 국왕과 베를린의 유명 인사들이 앉아 있었다. 멘델스존은 이 곡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멘델스존의 스승은 1827년 괴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자기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내가 그 많은 칸타타 곡들을 편곡했다네. 하늘에 계신 바흐 선생님께서 나를 칭찬해 주시지 않을까?” 

베토벤이 대세로 인정받던 당시의 분위기, 소리의 극적인 과장, 낭만주의의 고통과 번민에 질린 대중은 ‘절대 음악’의 재발견에 환호했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성스러운 음악 작품!”이라는 극찬과 “프로이센을 근거로 한 신교도 신앙의 상징”이라는 찬사가 언론에서 쏟아졌다. 물론 음악적 토양은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였다. 비단 출판 및 광고 프로젝트 덕분만은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새로운 유럽이 건설되고 있었다. 1815년 빈 의회를 계기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국과 자유도시들을 통합한 독일연방이 조직됐고 이는 50년 넘게 지속됐다. 정치뿐만 아니라 예술분야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은 게오르그 뷔히너와 하인리히 하이너 등 청년독일파의 진보주의자들과 대립했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구성된 작은 독일이냐,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 국가인 큰 독일이냐의 논의가 뜨겁게 벌어졌다.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 대한 루터교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고, 통일 국가에 대한 열망이 들끓었다. ‘마태오 수난곡’보다 더 독일스러운게 있을까? 20년 간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휘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보다 더 독일 국민을 통합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기본에 충실한 완벽한 합주, 낭만적이고 애국적이고 성스러운 선율...

1834년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영국에서 헨델 협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15년 뒤에는 충격적이게도 최초의 바흐 협회가 만들어졌다. 로베르트 슈만을 비롯한 일부 독일인들은 분노했다. 엄청난 항의가 이어졌다. 바흐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바흐 협회는 바흐의 주요 작품 전체를 출판하고자 했다. 유명 수집가였던 프란츠 하우저도 힘을 보탰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음계의 기초를 완성하고 또 다양화했다. 음계에 대한 총괄적인 접근을 통해 음악 이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바흐 협회는 49년 동안 47권의 악보집을 출판한 뒤 해체됐다. 프란츠 리스트와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흐 협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한 회원이었다.

1835년 파리.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 폴란드에서 온 프레데리크 쇼팽, 독일인 페르디난드 힐러는 바흐의 ‘3대의 클라비어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했다. 헥토르 베를리오즈는 “뛰어난 피아니스트 3명이 형편 없는 곡을 연주하는 모습이 딱했다”고 평했다.(5)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낭만주의가 지배적이었고, 그로부터 20년 뒤인 제2제정 시대도 루터주의나 바흐의 평균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흐는 연주하기가 지나치게 어렵다는 평이 많았으며, 괴테가 자유롭고 야성적이라고 표현했던 베토벤이 크게 각광 받았다. 빅토르 위고는 “위대한 영국인은 셰익스피어, 위대한 독일인은 베토벤”이라는 말까지 남겼다.(6) 베토벤은 유명 콘서트 주최 업체들에게 막대한 돈을 벌어다 주던 당대의 독보적인 스타였다. 

 

영국보다 50년 늦게 프랑스에서 유명해지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50년이 늦게 바흐의 진가를 발견했다. 1885년 <라 르뷔 데 드 몽드>는 “구노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1번 전주곡을 자신의 곡에 사용한 뒤부터 바흐가 프랑스에서 유명해졌다”고 썼다. 만세! 구노의 ‘아베 마리아’ 덕분에 바흐는 현학적이고 지루하다는 오명을 벗었다.. 샤를 구노 덕분인가?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이 바흐의 나단조 미사곡을 연주한 덕분인가? 낭만주의에 대한 거부감, 상징주의, 혹은 마르셀 뒤프레가 파리에서 바흐의 오르간 작품 전곡을 연주한 덕분인가? 우리는 비로소 바흐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그의 작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1889년. 현대 피아노가 개발됐고, 바흐에 미쳐있던 20세의 피아니스트 페르초 부소니는 구스타프 말러와 에드바르드 그리그와 함께 라이프치히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의 라이프치히는 멘델스존이 지휘자를 지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이 유럽 음악계의 날고 기는 음악가들을 끌어모으던 때였다. 전주곡, 토카타... 바흐가 비발디의 곡을 편곡했듯 젊은 부소니는 바흐의 곡을 재해석했다. 부소니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오르간과 성가대의 소리를 걷어내고 내면화된 피아노로만 대위법을 표현했다. 

그로부터 반세기 후 디누 리파티가 부소니가 편곡한 바흐의 곡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그 다음 글렌 굴드가 등장했다. 글렌 굴드는 부소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적 행보와 열정은 부소니와 꼭 닮았다. 굴드는 스튜디오에 처박힌 채 끙끙대며 연주에만 몰두했다. 에밀 시오랑은 신이 바흐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바흐는 굴드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셈이다. 굴드와 굴드가 창조한 새로운 바흐였다.

 

‘음악의 미켈란젤로’

“바흐는 근본적으로 건축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에 정착한 알자스로렌 출신의 알버트 슈바이처는 페달 피아노로 바흐의 전주곡을 연주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지도자, 오르간 연주자, 의사 겸 선교사였던 슈바이처는 병원의 재정 충당을 위해 순회공연을 다니며 바흐를 연주했다. 성스러운 음악으로 아프리카를 물들인 것이다. 그의 인도주의적인 행동과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재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1905년에 출간한 『음악가이자 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제목처럼 슈바이처는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음악의 미켈란젤로’가 가진 건축학적이고 상징적인 힘에 최초로 주목했다. 

바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한 번 부흥기를 맞았다. 독일이 바흐의 음악을 병영의 스피커를 통해 틀어놓거나 포로들로 이루어진 관현악단에게 연주하게 했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음악이론가였던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는 “바흐가 지겨워졌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전쟁이 끝나고 LP판이 개발되면서 바흐의 인기가 더욱더 높아졌을 텐데 말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도 잘 알고 있다. 1930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 최초로 녹음됐고, 1950년대에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바로크 음악 열풍을 일으켰다. 구스타브 레온하르트가 바흐의 음악을 하프시코드로 연주하면서 주목받았고, 무너진 베를린 장벽 앞에서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을 연주해 바흐의 음악은 정치적인 의미까지 부여받게 됐다. 우리가 잘 모르는 이야기도 있다. 아놀드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존 케이지는 12음 기법과 푸가 연주를 통해 바흐의 음악적 자산을 계승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와 같은 미니멀리즘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푸가의 각 부분을 말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지금도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와 2호는 성간 우주에서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보이저 호에는 골든 디스크가 실려 있다. 우주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외계 생명체를 위해 지구를 대표하는 소리, 언어, 음악을 담아 놓은 이 앨범에는 바흐의 파르티타 3번도 수록돼 있다. 

 

 

글·아가트 멜리낭 Agathe Mélinand
극작가 겸 연출가. 직접 집필해 연출한 작품으로는 『Le petit livre d'Anna Magdalena Bach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작은 책』(2020년)이 있다.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라이프치히 시 당국에서 소장한 자료. 바흐가 사망할 때 실제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2) Anna Magdalena Bach의 탄원서, 시 자료, Leipzig, 1750.
(3) Berliner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1829년 3월.
(4) Mozart,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모차르트의 자료, Salzbourg.
(5) Hector Berlioz, Critique musicale, Buchet-Chastel, Paris, 1996.
(6) Victor Hugo, William Shakespeare,1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