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파키스탄, 빈라덴 살해 뒤 꼬이는 관계

2011-06-07     장뤼크 라신

지난 5월 1일 밤부터 2일 새벽 사이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미군의 기습작전은 미국과 파키스탄 정보부가 몰두해온 어둠의 전쟁 장막 일부를 걷어냈다. 그렇지만 모든 비밀이 밝혀졌다고 볼 수는 없다.

2004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파키스탄은 15개국 미만으로 구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밖, 미국의 중요 동맹국’ 클럽에 합류했다. 여기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일본이 포함돼 있다. 7년 뒤, 오사마 빈라덴이 파키스탄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학교 근처에 위치한 아보타바드의 은신처에서 사살된 지금 미국과 파키스탄의 실제 관계에 의문이 생긴다. 그보다 일주일 전, 바로 이곳에서 아슈파크 파르베즈 카야니 파키스탄 육군 사령관은 신입생도들 앞에서 “테러리스트들의 허리를 끊어놓았다”(1)고 확인한 바 있다.

파키스탄 군부와 CIA, 긴장 고조

리언 패네타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직설적이었다. 그는 “공격 목표물이 사전에 알려지면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미국이 파키스탄 당국에 기습작전을 미리 통보하지 않았다(2)고 확실하게 말했다. 그런 이유로 주권국가인 파키스탄의 승인 없이 파키스탄 중심부에서 군사작전이 수행됐다. 몇 달 전부터, 미국과 파키스탄 간의 대화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군은 파키스탄 정부군이 북와지리스탄 부족지구(3)로 밀고 들어가지 못하는 ‘무능함’에 불만을 표시해왔다. 아프가니스탄의 무장 게릴라 무자헤딘의 계승자인 ‘하카니 네트워크’는 이 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주둔 중인 나토군에 게릴라전을 벌여왔다. 패네타의 발언을 비롯해 특히 5월 이후 높아진 파키스탄 군부와 CIA 사이의 긴장감은, 파키스탄 군부가 더 이상 쓸모없게 된 빈라덴 카드를 버리고 미국과 비밀리에 모종의 합의를 했다는 가설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더욱이 워싱턴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대화 개시를 위해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다는 추정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파키스탄의 공식 발표는, 아보타바드에 알카에다 지도자 빈라덴이 있었다는 사실이 결국 빈라덴을 추적해온 정보기관들의 실패를 보여주며, 이것은 파키스탄 군부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파키스탄 정보부(ISI)의 실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아마드 수자 파샤 파키스탄 정보부장이 파키스탄의 보안 시스템 전체가 실패한 사실을 애석해하며 주정부와 지방경찰을 비난한 바 있다.(4) 하지만 ISI처럼 강력한 기구가 군부대가 주둔한 마을에 들어서 있는 대형 건물의 정체를 몰랐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반드시 CIA와 ISI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관타나모 수감자에게서 얻은 정보를 통해 쿠웨이트 출신 파키스탄인 아부 아메드 알쿠와이티가 빈라덴의 연락책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양쪽의 정보가 공유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지난 5월 3일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에 만족을 표명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는 테러리즘으로 파키스탄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알카에다의 연락책을 확인하는 데 파키스탄의 초기 협력이 결국 성공을 이끌어낸 것”(5)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표현에는 변화가 있었다.

몇몇 용감한 언론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군부에 해명을 요구하거나(6)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했다. “우리가 모른다면 파키스탄은 실패한 것이고, 우리가 안다면 파키스탄은 깡패 나라다.”(7) 파키스탄 정부와 대부분의 정계 지도자 및 언론의 공개적 발언은 미국의 내정간섭을 비난하기 위해 국가주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선회했다. 파키스탄 군부와 그 특수 임무의 모호함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외국 특수부대가 헬리콥터를 동원해 파키스탄 한복판에서 작전을 벌인 뒤 인명 피해 없이 홀연히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보안기관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식의 덜 불편한 주제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이다.

군부가 의회에 출석하기로 결정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몇몇 의원들의 직접적인 비난- 예를 들어 파키스탄무슬림동맹 나와즈(PML-N) 원내대표인 니사르 알리 칸 의원(8)- 은 5월 13일 만장일치로 채택된 의회 결의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 결의안은 미국의 일방적 행동을 규탄하고 미국의 소형 무인정찰기가 부족지구에서 작전을 벌인 것을 비난했다. 여전히 만장일치로 의회는 “파키스탄 방위군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9)를 재확인했다.

파키스탄 군부는 군부대가 주둔한 도시에 빈라덴이 있었다는 사실보다 파키스탄에 대한 중상모략을 더 비난하고 있다. ISI 부장은 사의를 표명했지만 파키스탄 대통령도, 총리도, 의회도 그가 반드시 사임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하여간 정보부장 임기가 현재 특별 연장 상태인 점을 감안하면 그는 곧 교체될 것이다. 독자적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원칙은 발표됐지만, 현재까지 구성되지 않았고 그 시한도 확정되지 않았다. 위원회가 어느 정도 권한을 갖게 될지도 의심스럽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몇몇 인사들은, 1951년 칸 리아콰트 알리 총리 암살사건 수사와 2007년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 암살사건 수사가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미국 비밀작전 뒤 반미 감정 확산

어느 누구도 환상을 품지 않는다. 파키스탄 정부의 이런 태도는 무엇보다 해외에서 행해지는 성가신 문제와 비판에 대해 ‘국가의 명예’ 강화를 목표로 한다. 파키스탄 야당 PML-N(펀자브주를 장악하고 있고 2008년 총선에서 전체 259석 가운데 66석 확보) 지도자 나와즈 샤리프는 파키스탄과 미국 간 관계의 성격을 재고할 것을 호소하는 동시에 군부와 비밀정보부의 예산을 의회에서 심의하자고 주장했다. 1999년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난 샤리프는 향후 활동 일정을 잡아가고 있다. 입장이 미묘한 군부는 파키스탄을 지배하는 반미 감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속셈이다.

패네타 CIA 국장을 제외하고, 미국 지도자들은 입장 표명에 신중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구체적인 단체를 적시하지 않은 채, 빈라덴을 지원하는 ‘네트워크’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 그는 공화당 의원들뿐 아니라 민주당 의원들- 다이앤 페인스타인 상원 정보위원장도 해당한다- 까지 파키스탄에 할당된 막대한 지원금(10년 전부터 약 200억 달러를 지원해왔고 차기 예산에서도 수십억 달러가 내정돼 있다)을 중단하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국과 파키스탄의 어려운 관계는 미국 외교정책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각축장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미국 외교는 파키스탄과 관계를 끊을 수도 없고, 파키스탄을 믿을 수 있다고 확신하지도 못한다.

첫 번째 각축장은 물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다. 지난해 1월 런던 회담 이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하미드 카라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제안한 화해 제스처를 인정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결정한 미군 증원은 탈레반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와 병행해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지난 2월 반군과의 협상을 위해서는 세 가지 사항- 이것은 전제라기보다 목표에 더 가깝다- 이 중요하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들은 폭력을 단념하고 알카에다와의 연합을 포기해야 하며, 아프가니스탄의 헌법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협상에서 기대하는 결과다.”(10) 빈라덴이 제거된 직후 요점이 반복됐다. “탈레반에 보내는 우리 메시지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메시지의 반향은 특별하다. 당신들은 우리가 떠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당신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당신들은 알카에다를 포기하고 정치적 평화 일정 참여를 결정할 수 있다.”(11)

관계 끊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데이비드 페트라우스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이 펼치는 반군 진압 전략의 핵심은 민족 프로그램을 옹호하는 반군들과 국제 테러리스트 사이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페트라우스 사령관은 이라크 주둔 미군 사령관을 지냈고 현재 아프가니스탄 주둔 나토군 사령관으로, 얼마 전 CIA 국장으로 내정됐다. 원칙적으로는, 알카에다의 상징적 지도자인 빈라덴의 사망으로 일이 쉽게 풀려가야 한다. 5월 2일 작전을 두고 미국과 파키스탄의 계속되는 갈등이 미국 전략의 제2장, 즉 파키스탄 정보부에 의지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방해가 될지 아닐지는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해 아프간 탈레반과 파키스탄의 보호세력 사이의 모호한 관계를 강조하는 한 연구서가 나왔다.(12) 둘의 관계는 긴밀하지만- ISI 대표자들이 파키스탄에서 열린 아프간 탈레반 참모회의에 참가했다- 파키스탄의 헤게모니에 지친 몇몇 탈레반 지휘관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관계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은 상대방을 조종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1월 런던 회담이 열리고 20일 뒤, ISI는 아프가니스탄과 간접 접촉을 시도한 탈레반 제2인자 물라(이슬람 국가의 종교 지도자, 율법학자에 대한 경칭)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카라치에서 체포했다.(13) 그 의미는 명백했다. 2014년(어쩌면 더 늦어질지 모르지만) 아프가니스탄 나토군 철수 이후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정상적 절차를 무시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다.

파키스탄 전략가들이 보기에 중요 목표는 차후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는, 파키스탄의 파슈툰족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이 다시 불거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파슈툰족(아프가니스탄 주민의 40%)이 다시금 주도권을 잡고, 하카니 네트워크와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에 대항해 싸운 지하드 지도자)를 거쳐 탈레반과 맺은 관계가 굳건하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미래의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의 비중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도는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과의 관계를 발전시켜가는 동시에 오래전부터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의 타지크족을 지지해 점수를 얻어왔다. 인도는 비용 부담이 크면서도 상징적인 사업들(아프가니스탄 의사당 건설)과 전략적 인프라 구축(이란으로 향하는 도로 건설, 파키스탄을 거치지 않고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방법 제공 등), 엘리트 양성(인도 대학에 유학하는 아프가니스탄 유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 등을 통해 경제·사회 발전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빈라덴이 사망하고 10일 뒤 카불을 방문한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아프가니스탄 지원 강화를 발표했다(인도는 10년 전부터 15억 달러 이상을 지원해오고 있다). 인도 정부는 이제 국가적 화해 원칙이 “간섭이나 강요 없이 (중략) 이웃 국가들과 평화를 유지하면서 안정된 독립국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게 되는”(14) 이상 이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다. 파키스탄은 거론되지 않았지만, 모두 그 의미를 이해한다. 인도는 얼마 전부터 재개된 아프가니스탄과의 대화를 계속해가려는 것이다.

‘아프팍’서 아시아로, 각축장 확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라는 각축장은 (미국이나 다른 당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신흥 아시아 각축장이라는 훨씬 더 넓은 제2의 각축장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음새에는 두 가지 중요한 논리가 교차한다. 하나는 미국을 아프간·파키스탄의 수렁에 빠뜨린 테러와의 전쟁이란 논리다. 미국 정부는 이 수렁에서 명예롭게 빠져나올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이런 목표가 파키스탄과의 관계를 끊게 해서는 안 된다. ‘아프팍’(AfPak·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합성어)(15)이란 개념은 이제 미국의 공식 담화 일부를 넘어서 적절한 것이 되었다. 이 개념은 해결책의 일부가 되는 동시에 문제의 일부가 되는 파키스탄을 포함한다. 파키스탄 내 상황이 위급하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은 근동과 중앙아시아, 중국과 인도라는 신흥 강국의 역동적인 축들 사이에 위치했고, 히말라야산맥과 바다를 낀 지정학적 이점이 있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 중요한 것으로, 경제적 역동성과 세계 무역·금융·에너지 시장 개방에 따라 아시아의 힘이 강해졌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것은 아프팍을 뒤흔드는 내부의 위기와 지정학적 긴장과는 모순되는 명제다. 백악관은 모순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그것들을 조합해야 한다. 이 각축장에서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인도라는 변수를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문제와 아프가니스탄 문제 해결 과정에서 인도를 배제하려고 한다. 미국은 이 상황을 어디까지 달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아프가니스탄 당사자들과의 협상은 인도를 제외한 상태로 시작됐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미국의 3자 회담인 아프간 평화위원회가 발족됐고, 향후 걸프만 지역에서 탈레반을 대표하는 사무국이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진전을 보더라도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국가, 즉 이란·인도·중국이 포함된 모든 인접국이 참여하는 국제회담이 이뤄지는 날이 올 것이다.

미국, 중·인도·파키스탄과 얽힌 이해

중국은 5월 2일 작전 이후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 정부는 빈라덴 사망을 큰 사건으로 인정하고, 파키스탄이 그간 “파키스탄 특유의 상황에 입각해”(16) 테러리즘과의 전쟁에 기여해왔다고 찬양하며 확실히 파키스탄의 편을 들었다. 일부 파키스탄 전문가들에 따르면, 파키스탄이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고려해 대외정책을 수정하는 상황까지 생각해볼 수 있다고 한다. 파키스탄이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 중국 카드나 러시아 카드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5월 11일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한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은 러시아의 오랜 숙원인 ‘따뜻한 바다 진출’ 제안을 내놓았다. 일주일 뒤 유수프 라자 길라니 파키스탄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다. 파키스탄의 최대 무기 공급국이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국은 고성능 전투기 JF17기 50대를 이른 시일 안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거대한 게임은 계속된다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날인 5월 16일 밤, 길라니 총리는 이슬라마바드에서 존 케리 미 상원의원의 방문을 받았다. 두 사람의 공동선언은 미국과 최고 협력을 쇄신하려는 파키스탄의 의지를 표명하면서 양국의 국가적 이해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이 “파키스탄과 빈라덴이 공모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17)고 공포하면서, 양국은 표면상의 긴장 이면에서 한창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게이츠 장관 발언 사흘 뒤, 마크 그로스먼 미 국무부 아프팍 담당 차관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파키스탄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이슬라마바드에 왔고, 마이클 모렐 CIA 부국장은 ISI 국장과 함께 향후 공동작전 방식을 협의했다. 

거대한 게임은 계속되고 있다. 권력을 잃지 않고, 다시 한번 어렵사리 폭풍우를 견뎌낸 파키스탄의 군 수뇌부가 정해놓은 중요 변수들을 파키스탄 정치세력이 수정할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글·장 뤼크 라신 Jean-Luc Racine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부장. 주요 저서로 <파키스탄의 지정학>(에로도트·139호·2010) 등이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각주>
(1) ‘카야니 장군, 반군들의 배후가 와해됐다고 말하다’, <새벽>(Dawn), 카라치, 2011년 4월 23일.
(2) 마시모 칼라브레시, ‘CIA 국장, 파키스탄이 작전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타임>, 2011년 5월 3일, swampland.time.com 참조.
(3) 파키스탄의 부족지구는 7개로 나뉘어 있다.
(4) 사설 ‘ISI의 승인’, <데일리타임스>, 이슬라마바드, 2001년 5월 15일.
(5)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은 자기 역할을 다했다’, <워싱턴포스트>, 2011년 5월 3일.
(6) 샤히드 사에드, ‘권력의 고삐를 잡다’, <새벽>, 2011년 5월 5일.
(7) 시릴 알메이다, ‘황제의 옷’, <새벽>, 2011년 5월 6일.
(8) 제인 페레즈, ‘파키스탄 정보국장, 반군과의 관계 부인, 의회에서 미국 비난’, <뉴욕타임스>, 2011년 5월 14일.
(9) ‘5월 2일 미국의 일방적 군사행동에 대한 결의안: 의회결의안 44’, 2011년 5월 14일, www.na.gov.pk/resolutions.html.
(10) 힐러리 클린턴, 리처드 홀브룩 추모 연설, 아시아 소사이어티, 뉴욕, 2011년 2월 18일.
(11) 힐러리 클린턴, ‘오사마 빈라덴 사살에 관한 논평’, 국무부 공식성명, 2011년 5월 2일, www.state.gov.
(12) 맷 왈드맨, <하늘의 태양: 파키스탄 ISI와 아프가니스탄 반군들의 관계>, 국가위기리서치센터, 런던정경대학(LSE), 2010년 6월.
(13) 아메르 라시드의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와의 인터뷰, 워싱턴 DC, 2010년 2월 17일.
(14) 만모한 싱 인도 총리의 아프가니스탄 의회 연설, 카불, 2011년 5월 13일.
(15) 2008년 리처드 홀브룩에 의해 널리 알려진 ‘아프팍’이란 개념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하나의 전쟁 무대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파키스탄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뒤, 미국 정부는 이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16) 지앙유, 중국 외교부 대변인, ‘중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파키스탄을 세계가 지원하도록 설득한다’, <새벽>, 2011년 5월 5일.
(17) ‘게이츠, 파키스탄 고위층이 빈라덴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고 발언’, <뉴욕타임스>, 2011년 5월 18일.


 파키스탄 이슬람 내부의 전쟁

2007년 7월, 파키스탄 정부군이 개혁을 반대하는 이슬람교도들의 피난처인 이슬라마바드의 붉은 모스크를 공격했다. 몇 달 뒤, 파키스탄의 부족지구 안에서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이 결성됐다.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이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의 모호한 정책은 2003년부터 테러의 표적이 되었고, 정부군 내 특수부대에 투입되던 이슬람 용병 일부가 정권에서 이탈해 지하드 조직에 가입했다. 국내에서 금지된 지하드가 다른 이름들로 재편성되자, 일부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이 단체를 비난했다. 일부 사람들은 2001년부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2004년부터 인도와 협상을 벌이는 국가기관에 반발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많은 알카에다 고위 책임자들을 미국에 인도해왔다. 하지만 그 지도자들은 넘겨주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30년간 자신들이 직접 창설하거나 지원해온 무장 이슬람 세력들을 역동적인 지역정책에 전략적으로 사용해온 데 따른 대가를 점점 더 비싸게 치르고 있다. 소련에 대항해 싸운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인 히지브 울 무자헤딘 그룹의 카슈미르 폭도, 카슈미르에 숨어들어 인도 마을들에서 테러 활동을 벌여온 파키스탄 지하드 라슈카르 에 타이바,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이슬람 율법학교인 마드라사에서 교육받은 탈레반이 바로 문제의 세력들이다. 오랫동안 파키스탄의 이슬람교 내부에서 치러진 전쟁은 광신적 신도들의 분쟁이었다. 2000년대 들어 ‘라슈카르에 장비’(Lashkar-e-Jhangvi) 및 ‘파키스탄 시파에사히바’(Sipah-e-Sahaba Pakistan)의 수니 과격파들이 시아파 예배 장소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일부 사람들은 시아파가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자금을 지원받았다고 말한다. 곧이어 또 다른 단계가 진행됐다. 전략상 수니파의 과격화는 오랫동안 용인돼왔다. 성격이 모호한 과격파와 그 투사들이 파키스탄 정부의 대인도·대아프가니스탄 정책에 이용됐다. 그리고 일부 수니 과격파가 정부 통제를 벗어나게 됐다. 정부군은 2009년 부족지구와 파키스탄 북부 스와트계곡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했지만 이후 대도시에서의 자살테러로 매년 수천 명이 사망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전쟁은 수니파 내부의 전쟁과 맞물리면서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갔다. 1980년대 무함마드 지아 울하크 대통령이 장려한, 사우디아라비아 와하비즘과 유사한 데오반디 사상(1)을 과격하게 몰아가는 근본주의와 대중적인 이슬람교 및 수세기 동안 힌두교에 의해 ‘전염된’ 것으로 평가되는 이슬람교, 즉 성인을 찬양하고 성인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는 이슬람 수피교가 대립하는 것이다.

알카에다와 파키스탄의 과격 탈레반은 성자들의 무덤이 있는 성지를 테러의 표적으로 삼았다. 대표적으로, 파키스탄의 성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라호르 시내 다타 아르바르 사원(2010년 7월 45명 사망), 펀자브주의 바바 파리드 무덤(10월 6명 사망), 카라치의 압둘라 샤 가지 무덤(10월 10명 사망), 페샤와르에 있는 가지 바바 무덤(12월 3명 사망), 부족지구 근처의 데라 가지 칸 무덤(2011년 4월 41명 사망) 등이 테러의 표적이 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파키스탄의 신성모독금지법과 관련 있다. 이 법은 1860년 영국 점령 인도의 민법에서 물려받았지만, 계속 처벌 강도가 세지면서 1986년과 1991년 개정을 통해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게 됐다. 이 법이 실제 적용된 경우는 거의 없지만 수없이 남용돼왔다. 지난해 구금된 기독교 신자 여성의 사례가 언론에 널리 소개되면서 이 법을 개혁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2) 그런 주장을 한 사람들 중에는 펀자브 주지사 살만 타시르와 파키스탄 장관들 중 유일한 기독교 신자인 샤바즈 바티 장관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지난 1월과 3월에 암살됐다. 타시르 주지사를 암살한 범인은 그의 경호원인데, 이후 수많은 중산층이 그를 찬양하게 됐다. 이 중산층들은 사라져버린 사회·정치 질서의 모범을 극단적이고 편협한 신앙심에서 찾으려는 듯하다. 데오반디파뿐 아니라 수피즘을 지지하는 바렐비스파도 문제다. 파키스탄 정부가 근본주의자들과 타협하면서 파키스탄 자유주의자들의 입지는 축소되고 있다.

처음에 인도반도 무슬림들의 약속된 땅으로 소개되던 파키스탄은, 무하마드 알리 진나 파키스탄 초대 대통령이 보기에는 민주적이고 너그러운 국가였다. 건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은 1949년 제헌의회 결의안은 “우주 전체에 대한 주권은 유일하게 전능하신 알라신에게서 나오며, 알라께서 그 권능을 파키스탄에 위임하셨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슬람교와 국가의 모호한 관계, 그리고 국경 양쪽에 걸쳐 있는 지하드를 부추기는 무분별함이 경솔하게 피트나(Fitna·신도 공동체를 뒤흔드는 카오스적이고 파괴적인 악습)의 씨앗을 뿌려놓은 것이다.(3) 전쟁은 이제 국가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나라를 통일시켜줄 것으로 여겨지던 이슬람교가 나라를 분열시키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서도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각주>
(1) 무함마드 지아 울하크(1924~88)는 1978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기 전 육군참모총장이었다. 1880년대 인도에서 형성된 파키스탄의 데오반디 사상은 원칙에 충실한 이슬람, 인도의 문화적 영향에서 정화된 이슬람을 강조한다. 인도보다 파키스탄에서 더 과격한 이 흐름은, 18세기 아라비아에서 탄생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과 전쟁을 벌이던 아랍권 출신 지하드주의자들에 의해 파키스탄에 전파된 와하비즘 사상과 하나가 되었다.
(2) 이 젊은 여성은 이웃 아낙네들과 싸우다 투옥됐다.
(3) 질 케펠, <피트나: 이슬람 내부의 전쟁>, 갈리마르,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