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의 봄, 더디게, 그러나 또박또박
예멘에서 유례없는 민중봉기가 이어지고 있다. 시위 참가자들의 다양한 사회적 구성과 정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평화시위는 튀니지와 이집트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독재정권 축출이라는) 과격한 구호를 앞세운 시위대의 혁명적 모습은 예멘의 폭력적이고 보수적인 모습과 뚜렷이 대비된다.
국제사회는 3개월이 넘도록 계속되는 시위로 예멘이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야권도 마찬가지다. 알랭 쥐페 프랑스 외부무 장관은 지난 3월 21일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의 퇴진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걸프협력회의(GCC)가 추진한 지역 중재가 그랬듯, 그의 발언으로 상황이 변하진 않는다. 예멘 연합국은 대통령이 퇴진하더라도 현 체제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90년 통일… 10년 뒤 반군 등장… 혼란·억압
2000년 아덴만에서 미국 이지스함 USS 콜(Cole)이 테러 공격을 받은 뒤, 예멘이 미국을 필두로 한 연합국의 비위를 끊임없이 거슬러왔다는 점에서 더욱 모순적인 상황이다. (2004년 이래 약 1만 명의 사망자를 낸 예멘 북서부 지역의 사다 내전 때처럼(1)) 살레 대통령이 알카에다에 맞선다는 명목 아래 자국민을 억압하면서 내세운 정치적·제도적 강압 체제는 예멘을 폭력 속으로 몰아넣었다.
1990년 예멘인민민주공화국(남예멘)과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이 통일돼 예멘공화국이 됐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사다를 근거지로 한 후티파 반군(2)과 ‘남부운동’이 반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2007년부터는 무장 이슬람 세력이 정권과 안보군을 직접적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살레 대통령 체제가 겪고 있는 대위기는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애초 2009년 4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가 정치적·제도적 방해공작으로 연기됐다. (옛 남예멘을 이끌던)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인 커먼포럼(Al-LiqaAl-moushtarak)과 무슬림형제단은 몇 년 전부터 체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계속하며 보이콧 전략을 펴고 있다.
예멘 정부는 정치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말 국제사회에서 적법성을 인정받았다. 이에 힘입어 장밋빛 미래를 확신한 정부는 국회에서 살레 대통령과 차기 대권을 준비 중인 그의 아들이자 직업군인인 아메드 알리 살레의 평생 임기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시작된 ‘아랍 혁명’은 반정부 운동에 힘을 실어주고 국가통제 구조 와해를 촉진했다. 정당의 영향을 받지 않은 대부분의 청년은 사나·타이즈·아덴 등 대도시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야권은 자칭 ‘샤밥 알타우라’(혁명의 아이들)를 회유해 관리하려고 하다가 후반부에야 시위에 참가했다.
청년 봉기 뒤 온갖 세력 뭉쳐 정권 퇴진 요구
지난 3월과 4월에는 시위 방법뿐 아니라 구호도 대부분 일치했다. 후티파 반군, 남부운동군, 야권과 시민사회단체 회원, 부족민, 이슬람 세력, 자유주의자 등이 사나대학 앞 ‘변혁의 광장’(3) 네거리에 주로 모여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살레 대통령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고, 지난 4월 말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들이 내놓은 중재안을 수락하는 척하다가 다시 거부하면서 명민한 전술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는지 보여줬고, 각 진영이 보유한 수단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상기시켰다. 그는 시간을 벌면서 시위 참가자는 물론 기자와 외국 옵서버 사이에서 의구심과 무기력증을 일으켰다. 거리로 나선 청년들과 야권 엘리트 사이의 확연한 괴리를 이용하려고도 했다. 커먼포럼은 페르시아만 국가들이 보장한 살레 대통령과 측근의 면책특권을 수용하기로 했지만, 샤밥은 이를 거부했다. 문제는 그들이 협상 테이블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샤밥은 하미드 알아마르(강력한 부족의 후계자)와 그의 당 알이슬라가 주도하는 연합전략을 경계하고 있지만, 그들은 시위대 내부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4)
혼란 틈타 알카에다 분파 등 활개 우려
시위대가 외치는 ‘이르할’(떠나라)이라는 구호는 어떤 계획이 아니며, 2007년 옛 남예멘 지역에서 일어난 분리운동으로 촉발된 정체성 문제를 비롯해 예멘의 모든 위기 상황을 단번에 해결해줄 수도 없다.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거나 경제문제나 천연자원 고갈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공공안전 문제도 빠뜨릴 순 없다. 정치적 공백을 틈타 활개를 치는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 등 무장단체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살레파의 퇴진 이후 반테러 협력이 다시 의문시되고 있지만, 국제사회는 미온적 태도를 보인다. 2009년 말부터 미국은 AQAP를 겨냥해 몇 차례 폭격을 퍼부었지만, AQAP에 거의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예멘 체제의 정당성만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오사마 빈라덴이 살해된 뒤 여러 인물이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다. 그중에는 예멘 출신 미국인인 안와르 알아울라키도 있다. 파키스탄에서 빈라덴이 사살된 지 일주일도 안 돼, 그는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샤브와 지역에서 무인정찰기 폭격의 표적이 됐다.
국가의 분열은 위기일 수밖에 없다. 적법성을 주장하는 무리(정당, 부족, 종교, 세대 등)와 반대전선이 지난 몇 년간 급증했다. 겉으로 보기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내부의 분열은 살레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다. 체제와 야당 간 경쟁은 물론 야당 내 또는 군부 내 경쟁은 대가가 클 것이다. 수많은 군인과 부족장의 변절에도 불구하고 살레 대통령은 군부 대부분과 측근들이 지휘하는 보안조직 상당수를 움직일 수 있다. 지난 4월 알리 무흐신 장군이 이끄는 제1기갑사단과 대통령 직속군이 잠깐씩 대립한 적이 있다. 직접 교전했으면 과격해졌을 것이다.
예멘 국민은 사태가 과격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 때문에 시위 초반에 폭력과 억압에 반대하면서도 변혁을 더디게 할 수 있는 일종의 ‘공포의 균형’이 생겨났다. 4개월 전부터 정부를 지지하는 대규모 집회가 매주 금요일 사나에서 열리면서, 대통령에게 자신의 ‘헌법적 정당성’을 주장할 기회를 주고 있다. 친정권 조직 동원에 의존하는 이 집회는 전국에서 대규모로 매일 자발적으로 열리는 반대파의 시위와 견줘 무기력하기만 하다. 도시와 (규모가 작지만) 마을의 ‘변혁의 광장’과 ‘자유의 광장’에서 샤밥을 주축으로 혁명을 이끄는 이들은 정치게임 규칙을 뒤엎었다. 반정부 시위는 과거의 다양한 경험이 바탕이 되고 있지만 혁신적 요소가 도입되면서 시위 장소와 참여자, 행동 면에서 점차 조직화되고 있다.
이슬람주의자인 인권운동가 타와쿨 카르만 여사는 이렇게 새 혁명의 상징이 됐다. 지난 1월 말, 반정부 시위와 함께 형성된 신정치세력은 정치 관계와 집단행동의 논리를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다. 혁명 과정은 장기간에 걸쳐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유례없는 이번 반정부 시위를 통해 수많은 분열과 대립을 완화할 수 있는 혁명의 강력한 정치적 잠재력을 알게 될 것이다.
시위 초기에는 주로 아침이나 저녁에 단순한 행진이나 집회를 했지만 이제는 지속적인 연좌시위를 하고 있다. 지난 2월 20일 수십 명이 사나대학 앞에 텐트를 치고 밤샘시위를 벌였다. 밤샘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시위대가 늘어나면서 점차 광장, 거리, 전체 구역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시위 장소가 빠르게 만들어졌고, 여러 시위 조직이 자리잡으면서 활기를 띠게 됐다.
시위의 레퍼토리도 구호뿐 아니라 혁명가 사진전, 연극, 시 낭송, 예술 공방 전시회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축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신문 광고, 인터넷 사이트, 콘퍼런스, 시민불복종운동 교육 등이 잇따르고 있다.
부족민들도 무기를 내려놓고 수천 명씩 연좌시위에 동참하는 평화적 투쟁을 선택한 것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들의 새로운 시위 전략은 기존에 보수적·후진적·폭력적이라는 부족의 사회적 표상과 관행을 뒤엎고 변혁의 흐름 속에서 연대적 이미지를 되찾게 했다.
그럴수록 진화하는 시위… 이젠 축제처럼
이와 동시에 정치에는 눈떴지만 정파는 없고 다원적이며 자립적인 청년층이 대두됐다. 예전과 같은 당파적이거나 지역적인 상징물은 사라지고, 광장에는 예멘 국기가 걸리고 국가가 울려퍼졌다. 옵서버와 혁명 주동자들은 예멘의 단일성이 해체되기는커녕 오히려 견고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져보게 됐다.(5) 집회가 확산되고 여러 운동이 동기화해가는 것은 여러 세력이 공조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다른 지역 출신 단체가 교류하고 회담을 여는 모습은 반정부 시위가 지역적으로 균형을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예멘 반정부 시위가 앞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민중봉기로 시작된 열망의 힘과 변화의 규모는 간과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민중봉기는 이미 성공하고 있으며, 이처럼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예멘 국민이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글·로랑 본푸아 Laurent Bonnefoy (프랑스 극동연구소 연구원) & 마린 푸아리에 Marine Poirie (엑상프로방스대학 정치학연구소 연구원)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피에르 베르냉, ‘예멘, 종파전쟁에서 부족전쟁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2월호(프랑스판은 2009년 10월호) 참조.
(2) 지도자의 이름을 따왔다. 전 국회의원 후세인 알후티가 2004년 사살된 이후, 그의 동생 압둘 말리크 알후티가 지도자로 있다.
(3)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자유의 광장’)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사나의 타흐리르 광장에는 체제 지지자들이 대거 몰렸다.
(4) 피크리 카셈, <하디스 알마디나>, 출판사 불명, 2011년 2월 20일.
(5) 타와쿨 카르만, ‘우리가 일으킨 혁명은 살레가 하지 못한 일, 바로 예멘 통합을 이루었다’, <가디언>, 2011년 4월 8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