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으로 동물을 대한다는 것

칼 크라우스와 ‘세계대전’이라는 재앙

2020-10-05     자크 부브레스 | 철학자

빈 출신의 풍자가 칼 크라우스(1874~1936)는 무기력한 언론인,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타협적 행태, 군국주의 같은 주제에 그치지 않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자행된 동물학대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고찰했다. 크라우스가 울린 경종은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오늘날 평화의 시대에 산업적 차원으로까지 발전한 동물학대 현실에 큰 울림을 준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풍자가 칼 크라우스는 자신이 발행하는 비평지 <디 파켈>(횃불)에 이렇게 썼다. 

“1914년 8월 1일(독일이 협상을 거부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날-역주), 나는 함성 소리를 들었다. ‘영광을 향해 나아가자!’ 부끄럽지만 나는 불평가였다. 이미 그 순간, 내게 곧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어’라고 불만을 표시할 날이 오리라는 걸 명확하게 직감했다. 다만 동시에 나는 낙관주의자(‘불평가’와 ‘낙관주의자’는 작가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인물.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크라우스의 대비극 『인류 최후의 날들』에는 작가의 분신과 같은 인물인 ‘불평가’와 ‘낙관주의자’가 등장해,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독백처럼 두서없이 늘어 놓는다-역주)이기도 해서 이 욕망을 표출할 시점만은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1915년 8월 1일 이미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욕망을 공식화하는 날이 1917년 8월 1일이 아닌, 1916년 8월 1일쯤일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결코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재앙의 가능성을 파악하는 묵시록적 사고에 입각해서만 따져볼 수가 있다.”(1)

이 구절에는 특히 크라우스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크라우스는 이를테면 묵시록적 사고와 같은 특수한 상상력만이 오로지 재앙을 예견하지 못한 철저한 상상력의 결핍을 보완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비록 정말로 그런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처 상상하지 못해 불행을 피해갈 수는 없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고 또 그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바로 비범한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다. 크라우스는 자연스럽게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묵시록의 언어, 더 나아가 종종 『묵시록』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취하곤 했다. 그처럼 묵시록이란 형식에 기대어 단순히 전쟁이 불러오는 차마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고통과 인명 손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에 기술의 진보가 무차별적인 금권주의나 통제 불능의 수익지상주의와 결합해 얼마나 심각하게 환경과 자연을 훼손하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지적했다. 

 

인권침해, 환경훼손, 동물멸시… 인류의 ‘자기파괴’

그는 기술이 지닌 살상능력과 왕으로 군림하는 돈의 횡포, 이 두 가지가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했듯 시장은 전쟁터로 돌변했고, 그 전쟁터는 또 다시 기업가나 군수업자들이 열심히 정복하고 개발해야 할 시장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얼핏 두 가지는 서로 무관한 문제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크라우스는 ‘피와 수익 사이에 인과관계(causal nexus)의 존재’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매번 소수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지에 내몰리는 것이라 확신했다. 

인간의 생명·존엄성·권리 침해 문제는 일반적으로는 환경, 더 구체적으로는 동물을 멸시하는 현 인류의 태도와 결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사실상 이 두 가지는 비인간화 현상, 더 나아가 인류가 돌입한 자기 파괴의 서로 다른 두 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평가’의 최후 독백(<인류 최후의 날들>, 제5막, 제54장)에서 다음의 문제를 다룬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혹자는 매우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크라우스만은 상당히 중대하다고 여긴 문제, 그것은 바로 신문 제작에 점점 더 많은 종이가 투입되면서 자행되는 심각한 산림 파괴의 문제였다. 크라우스의 눈에는 그 무엇으로도 막지 못할 언론의 비정상적인 성장과 산림 훼손 사이의 씁쓸한 상관관계는 인간의 동의, 심지어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인류에게 벌어진 현상을 예리하게 상징하는 것으로 비쳤다.

‘불평가’의 독백에 나오는 일화 역시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영역에 속한다. 말하자면 미처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진 예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르츠 지역에서 제재소를 운영하던 사장은 숲 속의 나무 한 그루가 신문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궁금해 어느 날 상당히 흥미로운 실험을 해보기로 한다. 아침 7시 35분, 그는 근처 숲에서 나무 세 그루를 베고, 껍질을 벗긴 뒤, 펄프 공장에 보냈다(『인류 최후의 날들』, 637쪽).” 남자가 얻은 해답은 이랬다. 나무가 얼마나 신속한 공정을 거쳐 순식간에 인쇄매체로 변신하는지, 이제 고작 아침 11시인데도 신문은 벌써 거리에서 팔려나가고 있었다. “‘불평가’가 읽던 글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사실상 아침까지만 해도 나뭇가지 위에서 새들이 지저귀던 나무가 만들어낸 따끈따끈한 최신 뉴스를 받아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3시간 25분에 불과했다.”(같은 책)

풍자가 크라우스는 인간이 비인간적으로 변모하는 현상은 인간이 자연을 도구로 이용하며 훼손하는 현실과 연관이 깊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우리는 앞서 크라우스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견해가 얼마나, 놀랄 만큼 유사했는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크라우스는 어느 날 우연히 노동자 신문 <아르바이터 자이퉁>를 읽던 중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 한 편을 접했다. 1917년 브로츠와프의 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시절 그녀가 소냐 리프크네히트에게 보낸 편지로, 3년 후 책으로 출간됐다. 크라우스가 편지에서 특히 감명을 받았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한 부분은 단순히 편지에 나타난 룩셈부르크의 비범한 문학적 재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편지 속에 표현된 자연을 향한 그녀의 깊은 사랑과 고통 받는 생명, 즉 동물을 향한 절절한 연민이었다. 인간은 지구에 서식하는 생명, 구체적으로 말해, 동물을 막무가내로 이용하거나 완전히 노예처럼 부리며 의도적으로 동물들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었다.

 

“우리는 인간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크라우스도 이 편지에 묘사된 현상은 결코 전쟁으로 인한, 또는 단순히 전쟁 중에 나타난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느 날, 한눈에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운 짐을 끌다가 지친 동물에게 거칠게 매질을 하는 군인을 보고, 그 동물이 불쌍하지도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군인이 한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사내는 불쾌한 미소를 짓더니, 그는 인간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그리고는 더 세차게 매질을 했다.”(2) 우리는 여기서 피해자들이란 얼마나 쉽게 자기 보다 더 약하고, 더 저항하지 못하는 또 다른 희생자에게 분풀이를 하는 경향이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가혹한 대우를 받는 동물들(루마니아에서 들여온 물소 등)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편지에 썼다. “결국 ‘패자에게는 비애 뿐’(Vae victis)이라는 격언이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갈 텐데도, 사람들은 무참하게 동물들을 때리는 것이다(...) 이런 처지에 놓인 동물은 브로츠와프에만 수백 마리에 달한다. 대개 루마니아의 기름진 초목을 먹고 자라던 이 동물들은 너무나 형편없는 먹이로 연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동물들을 가차 없이 착취한다. 무거운 짐을 마구 끌게 하고, 결국 지쳐 죽게 만든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수많은 전쟁 패자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개 너무 쉽게 잊혀지고, 관심이나 연민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이들 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교도소 안뜰에서 본 전쟁의 민낯이기도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편지에서 언급한 동물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녀가 교도소에서 본 광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감자들은 수레 주변으로 부산스럽게 몰리더니 무거운 짐을 내려 부지런히 안으로 날랐다. 반면 군인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는 히죽히죽 웃으며 유행가 가락이나 휘파람으로 흥얼거리며 교도소 안뜰을 어슬렁거렸다. 그 순간 나는 또 다시 전쟁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크라우스가 편지에서 감명 받은 부분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의 희생자인(그녀는 반전 선언을 하고 급진적 투쟁을 벌인 죄로 감옥에 투옥됐었다) 이 여성 수감자와 고통 받는 동물로 대변되는 또 다른 희생자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일종의 연대의식도 크라우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룩셈부르크가 인간처럼 동물을 대하며 고통과 불행에 신음하는 같은 존재로 묘사한 대목은 가슴을 울리는 데가 있었다. 

“피를 흘리던 동물은 골똘히 나를 응시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마치 검고 순한 두 눈이 막 울음을 터뜨린 어린아이의 눈과도 같았다. 정말로 그것은 어떻게 해야 이 거친 폭력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 망연자실한, 혹독한 체벌을 받는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 그의 앞에 우두커니 선 나를 그가 쳐다봤다. 순간 내 두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눈물이기도 했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이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그만 몸서리를 쳤다. 그것은 형언할 길 없는 극한의 고통이었다.”

 

개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에드워드 팀스는 크라우스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에서 “크라우스와 룩셈부르크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서로 견해가 비슷한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지적했다. “두 작가는 태초의 조화론을 내세워, 기존에 주로 전쟁이나 종의 우월성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되던, ‘피 비린내 나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맹수의 자연’이라는 개념에 반기를 들었다. 크라우스는 귀족세계의 ‘메가에라’(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복수의 3여신 중 하나라, ‘질시하는 자’란 뜻을 지닌다-역주) 격인, 한 여인으로부터 룩셈부르크를 힐난하는 편지를 받은 그는 자신의 자연관에 대해 분명한 의견을 피력한다. 여인은 편지에서 룩셈부르크를 분란의 씨앗을 뿌려댄 끝에 불행한 결말에 이르는 ‘히스테릭한 여성들’ 부류에 속한다고 조롱했다.”(3)

여기서 ‘메가에라’에 비유된 문제의 여성은 헝가리 출신의 귀족이다. 그녀는 <디 파켈>의 오랜 구독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우연히 크라우스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를 인용하고 해설한 호를 읽게 됐다고 썼다. 그녀가 말한 <디 파켈>지 제462~471호에서 크라우스는 전쟁 물자난과 인간의 무관심 속에 개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그들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른바 ‘우월한 종’으로 평가받는 인간은 개를 혹독하게 부리며,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전쟁의 고통 속에 방치했다. 

“현재 주말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와 경로를 통해 개들이 인간의 식량을 ‘훔쳐간다’는 공격이 쇄도한다. 하지만 전혀 사실 무근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기자보다 개를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사실은 제쳐 두더라도,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인간은 현재 여느 개보다 훨씬 더 풍족한 먹을거리를 누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개들은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며, 현 사태는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다. 개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다. 간혹 개가 인간의 식량을 훔치는 일이 일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인간은 대개 식량을 훔친 죄를 응징하겠다며 개를 잡아먹는다. 하지만 정반대 경우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 어쩌면 독가스를 쏘며 골육상쟁을 벌이는 종(인간)의 살덩이가 그보다 더 우월한 종에게는 잡아 먹기에도 역겹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크라우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가 “매우 독보적인 그녀만의 휴머니티와 문학성을 증명한다”라고 평하며, 그 편지가 괴테나 클라우디우스의 작품과 나란히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고결한 영혼이 담긴 육신이 한낱 개머리판에 가격 당해 생명을 잃었다”(4)라며, 젊은 독자들이 그 사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교과서에 실릴 자격이 있는 것은 비단 룩셈부르크만이 아니다. 크라우스가 고약한 귀족 부인에게 썼던 편지도 같은 자격이 있다. 가령 다음 구절을 음미해보자.

“동물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인간성’은 동물을 경멸하는 야수성보다 훨씬 고귀하다. 특히 브로츠와프에서 물소가 혹독하게 채찍질을 당하며 수레를 끄는 것이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일조하는 야수성이라면 말이다. 이런 역겨운 정신 때문에 창조론을 신봉하는 수많은 신사숙녀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동물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물이 인간만큼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동물에게는 인간이 지닌 교만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인간이 쓰는 맥락 없는 언어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재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5)

로자 룩셈부르크와 크라우스의 비판은 당대 동물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당시만 해도 인간들의 동물에 대한 시각은, 인간이 동물이 지닌 강인함이나 연민의 부재, 잔혹함 따위를 본받아야 한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우호적인 것이었다. 마치 그런 특성이 삶의 기본 법칙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런 사고는 모든 생물이 영원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열등한 자는 굴종하고, 부적응자는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훗날 히틀러가 말했듯, 동물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 달리 자연의 법칙이 미치는 영향을 거스를 만한 능력이나 수단이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금세 자연의 법칙에 좌우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서는 생명력이 없는 존재는 차례대로 도태되게 돼 있다. 생명력이 결핍된 존재를 돌보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다.”(6)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하루 빨리 우리 인간 종이 억지스럽게 약자를 보호하거나 독려하려는 저 나약하고 감상적인 인간성을 버리고, 대신 조금 더 남성적이고도, 모든 일반적인 생물 세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새로운 인간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여겼다. 가령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말하는 ‘자연의 인간성’이 그런 예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인간은 아주 잠시 동안은 영속적인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금세 복수심이 고개를 쳐들 것이다. 자고로 강자는 어떻게든 약자를 몰아내게 돼 있다.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생의 본능이란 언제나 소위 특수한 형태의 인간성이라 불리는 것에 의해 이어진 저 가소로운 관계들을 끊어내고, 결국 강자를 위해 약자를 제거하는 저 ‘자연의 인간성’에 새로운 자리를 내어 것이기 때문이다.”(7)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의 동물에 대한 관점

여기서 동물의 세계에 적용된다고 인식되는 특성들은 사실 인간의 세계에 흔한 특징 중 가장 혐오스러운 것들, 나아가 오로지 인간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특징들에 속한다. 그러니 앞서 언급된 히틀러의 논리에 의하면, 오히려 동물보다 훨씬 ‘동물적’이거나 극악무도해지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는 상당한 진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이 동물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잔혹함이나 냉혹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동물을 인간적이고도 평등하게 대하는 인간성이야말로, 동물을 그저 한낱 도구로 취급하는 인간성보다 훨씬 인류에게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크라우스는 수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끈질기게 언급했다. 가령 『개, 인간, 기자 Hunde, Menschen, Journalisten』에서 크라우스는 동물의 권리 및 인간이 동물에게 지켜야 할 의무에 관한 문제를 놓고, 다양한 작가들의 글을 소개했다. 동물권에 대해 우호적인 작가의 글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적대적이거나 철저히 반대하는 작가들의 글도 다채롭게 실었다.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는 쇼펜하우어에게로 돌아갔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간주되는 영예를 누렸다. 반면 역사의 악인 역할을 맡은 것은 스피노자다. 사실 스피노자의 견해에 대해서라면, 이미 쇼펜하우어 역시 조목조목 반박한 바 있었다.

『에티카』의 저자는 동물이 인간의 동족도 아니고, 어느 정도 친교를 맺을 만한 자격을 지닌 동무인 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오히려 동물은 인간의 필요나 이익에 의해 어느 정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을 제외하고는 자연 속에서 우리가 정신적 즐거움을 얻거나, 함께 우정을 나누며 친교를 맺을 만한 특별한 존재는 찾아볼 수 없다. 유용성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인간 외에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들은 전혀 생명을 보전할 이유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생명을 보전하거나, 파괴하거나, 인간의 필요에 따라  어떤 방법으로든 변형하는 것은 바람직하다.”(8)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결국 인간에게는 동물, 더 나아가 모든 생물의 생명을 보전하고 안위를 염려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그들의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인간에게 종속돼 있다면 말이다. 그들의 생명을 보전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쓰임새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명을 보전하려는 결정이 얼마나 인간에게 이득이 되는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스피노자의 견해가 상당히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스피노자가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 특히 창세기(“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세기, 1장 26절))와 더 나아가 유대교나 유대기독교 전통의 영향에서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다룬 문제 또한 바로 이것이었다. “스피노자는 유대인에게서 해방될 수가 없었다. ‘한 번 벤 진흙의 향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으리니(quo semel est imbuta recens servabit odorem)’(호라티우스, <서간시>, I, 2, V.69) 그의 내면에 자리한 철저히 유대인적인 면과 거기에 범신론이 더해 나타난 그보다 훨씬 더 터무니없고 끔찍한 면이 바로 동물을 향한 멸시였다. 그는 오로지 동물은 인간이 사용하는 한낱 물건에 불과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동물의 모든 권리를 거부(『에티카』 , II, 부록, c.27)했다.”(9)

쇼펜하우어는 동물세계나 인간이 그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기술한 『소품과 부록 Parerga und Paralipomena』에 훗날 부록을 첨가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며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동물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주요한 부분에 있어서 우리 인간과 완전히 똑같다.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차이는 단지 지성에 있을 뿐, 의지라는 본질에 있지 않다. 세계는 조악한 작품이 아닐 뿐더러, 동물도 인간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조품이 아니다. (...) 그것은 단순히 진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에 해당한다. (...) 기차의 유일한 장점은, 무거운 짐을 끄는 수백만 마리의 말들을 비참한 운명에서 해방시켜준 것이다.”(10)

마지막 문장에서 쇼펜하우어는 기계의 세상이 도래한 현상을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수많은 동물들이 겪는 비참한 현실과 연관 지어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가 이 설명을 하는 이유는 얼마 되지 않는 전자의 장점 중 하나를 지적하기 위해서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에 있어 크라우스는 쇼펜하우어와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낄지 모른다. 크라우스 역시도 인간이 기계의 숭배자 또는 노예로 전락한 현상을 지켜보며, 그것이 그동안 인간이 다른 종, 더 넓게는 생명을 경시하고, 일부 동물들에게 무자비한 횡포를 부리던 행태와 별반 차이가 없는 현상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필 1916년 여름, 이미 2년째 이어지던 제1차 세계대전이 치열한 전투와 막대한 인명손실을 낳으며 최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에 크라우스는 왜 그토록 집요하게 동물권 문제와 인간이 벌이는 전쟁으로 인해 참혹한 폭력과 고통에 시달리게 된 동물들의 처지를 끊임없이 지적했을까? 일견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류가 이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끔찍한 재앙을 초래한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재앙을 구성하는 수많은 특징과 주요한 요소들을 조목조목 빠짐없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그들의 적인 부르주아만큼이나 전혀 분개하거나 실질적으로 우려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요인들에 대해서도 과감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크라우스가 고찰한 요인들 중에는, 지금처럼 계속 지속하거나, 확대하거나, 가속화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근절해야 할 요인들도 있다. 가령 고삐 풀린 소비지상주의와 생산지상주의, 한계를 모르는 무분별한 자원개발, 인간의 활동과 권력 추구, 무한한 탐욕 등이 빚은 환경파괴의 심화와 환경무관심 현상, 동물 존중 의식 결여, 의도적이고 고집스럽게 위험 가능성을 축소하는 태도(우리는 인간 종의 삶의 조건을 더욱 개선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어버렸고, 나아가 다른 종과 생태계 전체의 존속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혁명적이라고 자처하는 정당이라면 응당 사회민주주의 세력보다는 훨씬 혁명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결코 혁명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 그들은 오히려 하루 빨리 저지하거나, 근절해야 할 문제의 요소들을 존속시키는 것이 더 이익인 유권자들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변화를 추구하기 유리한 위치에 있음에도 변화를 추구하지도 못할 뿐더러, 오히려 자신들에게 변화를 강요하는 세력과 어떻게든 결연히 맞서려는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실은 비슷하다. 

크라우스가 생각한 요인들을 따져본다면, 기후변화와 같은 긴급한 문제 앞에 현 인류가 이토록 태연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현 인류는 분명 종말이 목전에 다가왔는데도 끝까지, 한편으로는 재앙 위험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고 말하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 재난의 예방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상징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심지어 가소롭기까지 한 대책에 만족하는 이중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불한당들’의 세상이 펼쳐지는가?

사실 우리는 사회정의나 평등의 문제가 이 문제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거나, 혹은 부차적인 문제가 돼버렸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크라우스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크라우스가 사회민주주의 세력에게 부질없이 기대했던 것은, 분명 그들이 서로 무관하지 않은 두 문제에 대해 훨씬 비타협적이고, 훨씬 혁명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분명 인류를 위협하는 불공정과 불평등 심화의 문제 역시 오늘날 여전히 시의성 짙은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크라우스는 대부분의 우리 동시대인들보다 이 문제에 있어 훨씬 더 앞서 있었다.  

크라우스는 앞서 언급한 귀족 부인에게 보낸 답신에서, 그녀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언급하는 시각과, 그녀가 속한 부류가 전쟁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태도를 연관 지어 설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교과서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 옆에 그 귀족부인의 편지도 나란히 실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청년들이 인간 본성의 위대함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인간 본성의 저열함을 혐오하는 법도 배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사실 크라우스가 공공연히 공산주의가 장수하기를 바란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적어도 앞서 말한 부류의 족속들이 자신들이 쟁취한 이익을 여유롭게 만끽하며 두 발 뻗고 편히 잠이 들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주여, 우리를 위해 공산주의를 지켜주소서. 그리하여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은 굶주림과 애국적 영광의 전선으로 내몰고, 그들에게 물질적 부가 전부가 아니라며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저 자들의 머리 위에 끊임없는 위협이 되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위해 공산주의를 사라지지 않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이미 후안무치로 날뛰는 저 불한당들이 더욱 후안무치하게 날뛰지는 않게 해주소서. 방탕하게 향락을 즐기는 저들이, 지독한 매독을 옮겨놓고도 버젓이 사랑을 운운하는 저들이, 부디  잠자리에서만은 악몽으로 잠을 설치게 하소서.”(11)

오늘날 크라우스가 말한 ‘불한당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 승리했다고, 심지어 부전승으로 이기기까지 했다고 자부할 만하다. 어느새 크라우스가 말한 것처럼, 불한당들이 또 다시 후안무치로 날뛰며, 예전과 똑같이 희생자들을 상대로 온갖 훈계를 늘어놓기를, 그들에게 지혜롭고 차분한 태도를 가지라고 가르치기를, 그들을 불행에 빠뜨린 자들을 상대로 분노를 느끼거나 저항할 이유는 없다고 마음껏 주장하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글·자크 부브레스 Jacques Bouveresse
철학자. 분석철학, 과학철학, 언어철학을 전공했으며, 프랑스 철학계에서 독보적인 비트겐슈타인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미셸 푸코,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로 이어지는 일부 프랑스 현대철학의 경향에 대해서 비판적인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에 『풍자와 예언: 칼 크라우스의 목소리』(2007), 『부르디외, 학자와 정치』(2004) 등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1) ‘Verwandlungen’, <Die Fackel>, 빈, 제462-471호, 1917년 10월, p.171
(2) ‘Lettre de Rosa Luxembourg à Sonia Liebknecht소냐 리프크네히트에게 보낸 로자 룩셈부르크의 서한’, 『Les Guerres de Karl Kraus 칼 크라우스의 전쟁』, Pierre Deshusses 역, Agone, 제35/36호, 2006년, p.258
(3) Edward Timms, 『Karl Kraus Apocalyptic Satirist, Culture and Catastrophe in Habsburg Vienna』, Yale University Press, 뉴헤이븐, 런던, 1986년.
(4) ‘Vorlesungen(mit dem Brief Rosa Luxembourgs)강의(로자 룩셈부르크의 서한)’, <Die Fackel>, 제546-550호, 1920년 7월, 5쪽.
(5) 『Les Guerres de Karl Kraus칼 크라우스의 전쟁』, 앞의 책.
(6) Adolf Hitler, 『Monologe im Führerhauptquartier 1941~1942』 , Heinrich Heim 주해, Werner Jochmann 편집.
(7) Adolf Hitler, 『Mein Kampf 나의 투쟁』, Christian Hartmann·Thomas Vordermayer·Othmar Plöckinger·Roman Töppel 편집, 현대사연구소, 뮌헨-베를린, 2016년.
(8) 『Ethique 에티카』, 제4부, 부록, 26장, Spinoza, 『Oeuvres complètes』, 파리, Editions Gallimard, 플레이야드 총서, 1954년.
(9) Arthur Schopenhauer, 『Le Monde comme volonté et comme représentation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A. Burdeau 역, Richard Ross 가 수정한 개정판,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파리, 1966년.
(10) Arthur Schopenhauer, 『Senilam Gedanken im Alter세닐리아, 한 노인의 성찰』, Franco Volpi und Ernst Ziegler,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zweite durchgesehene Auflage, 2011년.
(11)『Les Guerres de Karl Kraus 크라우스의 전쟁』,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