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무늬만 ‘안정 국가’, 알바니아의 불안한 속내

30년 신자유주의 ‘과도기’로 몰락한 국가

2020-10-05     장아르노 데랑스 외

1997년 폭동 이후 ‘몰락한 국가’로 간주됐던 알바니아는 현재 발칸반도의 안정성을 이끄는 주축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과도기’라는 껍질을 벗겨보면 강압적인 신자유주의, 그리고 국가 원동력의 해외 유출로 황폐해진 한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 

 

아드리아해를 따라 두러스 남쪽으로 뻗은 해안도로는 알바니아의 최근 역사를 집약해 보여준다. 1945~1991년 공산주의 독재 시절, 20km가량 이어지는 고운 모래 해변에 인접한 소나무 숲에는 몇몇 국영호텔과 지도층 전용구역인 ‘블록’의 빌라들만이 있었다. 동유럽에서 가장 폐쇄적이었던 독재정권이 붕괴되자마자 신축 건물들이 숲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건축 붐은 더욱 과열돼 호텔과 건물들이 바다로 향하는 모든 길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2019년 11월 26일 지진 이후 군데군데 ‘빈 곳’이 생겼다.

룰리에타 보조 토목공학 교수는 “많은 건물이 모래나 늪지대 위에 건축됐고, 건물의 기초 역시 매우 얕게 세워졌다. 첫 진동에 건물들이 쓸려나간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고 지적했다. 이곳에도 도시계획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권력과 돈을 가진 이들은 도시계획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행히 많은 건물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자금세탁용으로 지어진 건물들이기 때문이다. 인명손실이 훨씬 더 클 수도 있었다”라고 보조 교수는 덧붙였다. 공식집계에 의하면 희생자는 51명이다. 알바니아가 지진 위험이 높은 지역에 위치하긴 하지만 이 재앙은 단순한 자연재해는 아니다. 마피아식 신자유주의의 규제완화가 피해 규모를 한층 키웠다.

 

유럽에서 가장 해외이주가 많은 나라

룰리에타 보조 교수는 공익 제보자다. 상당한 물적 피해를 야기한 2019년 9월 21일의 지진 2일 후 민영방송 클란TV에 출연한 그는 여진의 불가피성을 상기시키며 불법 건축물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고, 9월 21일 1차 지진 후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교수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당국의 유일한 대응은 “공포를 조장하는 가짜 뉴스를 퍼뜨린” 혐의로 두 명의 기자를 구류한 것이었다. 두 기자 역시 위험을 경고했었다.(1)

투마너도 두러스처럼 지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곳이다. 티라나에서 북쪽으로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은 해안평야를 굽어보고 있다. 이 해안평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들어선 엔베르 호자 정권(1941~1985)이 다른 지역 출신의 ‘유형수들’을 보내 평야 정화작업을 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오염된 상태였다. 무너진 건물들이 치워진 거대한 빈 공간에는 건물 잔해와 깨진 기와 조각들만 남아 사라진 건물들과 이웃들을 연상시킬 뿐이었다. 보조 교수가 건물들이 그토록 쉽게 무너진 이유를 설명했다. “투마너의 건물들은 1980년대 초반 건축됐다. 당시에는 모든 자금이 국가방위를 위해 쓰였다. 모든 교차로에 수십만 개의 미니 참호를 설치하느라, 민간 건축물에 필요한 시멘트를 살 돈이 없었다.”

지진으로 25명이 희생된 투마너의 이재민들은 국가가 약속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30여 년 전부터 해외로 이주한 국민 개개인들이 송금하는 돈이 알바니아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이재민들은 친척 또는 지인의 신세를 지거나 텐트 등에서 살고 있다. 피포 가족은 차고로 피신했다. 어머니가 집에서 신발을 만들어 푸셔 크루야의 한 기업에 납품하고 받는 돈이 이들의 유일한 수입원이다. 알바니아에서는 섬유, 신발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호황이다. 덕분에 몇 해 전부터 알바니아의 성장률은 4%를 넘었고, 실업률은 2014년 17.5%에서 2020년(코로나 사태 이전) 11.5%로 감소했다.(2) 대부분 이탈리아 유명 브랜드의 하청업체인 이들 기업은 노동자에게는 150~250유로의 저임금으로 때우고, 가내 수공업을 우선시하며 노동법을 교묘히 피해간다. 알바니아 사회당(PS,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가입 정당) 대표이자 2013년 9월부터 총리직을 수행하는 에디 라마는 이 ‘알바니아 경제 기적’의 열혈 홍보대사로, 특히 이탈리아를 대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된 해외이주의 흐름이 뒤집혀, 알바니아가 투자자들과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약속의 땅’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아무런 통계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1989년 이후 알바니아에서는 유럽 최대 규모의 해외이주가 일어났고, 2018년과 2019년의 순이주율(한 지역 안으로 이주하는 사람 수와 해당 지역 밖으로 이주하는 사람 수의 차이-역주)은 심각한 수준의 마이너스를 기록했다.(3) 2015년 6월, 알바니아 총리는 이탈리아 RAI 방송국에서 ‘기적’의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에는 상원도, 노조도, 급진 좌파도, 정치를 하는 코미디언들도 없다.”(4) 극좌파 정당 ‘정치 조직(OP)’ 당원들은 이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들은 고등교육 자유화에 반대하는 아주 강력한 대학생 시위의 주축이었다. 이 시위는 2018~2019학년도에 나라를 뒤흔들었다. 

“모든 것은 건축 단과대학에서 시작됐다. 건축과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려면 세금을 내라고 한 것이다.” 대학 운동과 관련해 미디어에 가장 많이 소개된 인물이자 OP당원인 그레사 하사가 말했다. “2015년 발표된 고등교육 개혁안은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이 경쟁하도록 하면서 공공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경쟁까지 하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등록금만 인상돼 많은 이들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계획이었다. 학사과정 1년 등록금이 350유로로 평균 월 급여에 버금가는 수준이고, 박사과정 1년은 1,700유로에 달했다.” 

두 달간의 시위 후 정부는 등록금 인상 계획을 취소했고, 학생 운동은 새로운 정치의식이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OP당원인 하사는 “바로 그것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명백한 대안으로 도입된 신자유주의적 도그마로 촉발됐다”라고 설명했다. 시위는 수도 북동쪽 알바니아 중부 산맥에 위치한 외딴 마을 불키저의 크롬 광산으로까지 번졌다. 광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알브크롬이라는 기업이 개발 중이다. 이 기업은 2000년대에 이탈리아의 한 기업에 매각됐다가 2013년 알바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미르 마네가 소유한 알바니아 최고의 투자펀드 발핀이 다시 인수했다. 

이후 사고가 증가했다. 8명의 광부가 수직갱도 내에서 목숨을 잃었고, 약 40명이 부상당했으며, 급여는 2011년 이후 월 400유로로 정점을 찍었다. 광부들에게 요구되는 ‘기준’은 늘어만 갔다. 지난해 11월 설립된 새로운 광부 노조의 엘톤 데브레시 대표는 “2013년 회사의 크롬 채굴 목표량은 (연간) 4만 톤이었는데, 현재는 9만 톤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신생 노조는 ‘사측’ 노조가 이미 존재하는 가운데 생겨났다.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새로운 노조를 합법적으로 등록하자마자 우리는 불키저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5일 후 나와 3명의 동료는 해고통지서를 받았다.” 

해고된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1997년 이후 지역 세력가들이 독점한 갱도 즉, ‘사설’ 광산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는 “임금은 여전히 낮고, 노동조건과 안전은 최악이다. 여하튼 우리 조합원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상태다”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광부들의 집회에 대해 언론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침묵을 보였다. 광부들의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불키저에 ‘자리한’ OP 당원 프렌클린 엘리니는 “사미르 마네는 사회주의 권력뿐만 아니라 언론사 소유주들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일부 기자들은 이 사건을 다루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시급 3유로 이하의 저임금 노동 

티라나에서는 OP의 청년 당원들은 매일 저녁 사람들로 붐비는 노로고 센터에 모여 추상적인 강연을 듣고,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신다. 부동산 투기를 피해간 이 낡은 건물에는 신생 노조 솔리다리테티의 본부도 자리하고 있다. 이 노조는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노조를 조직하려는 중이다. “콜센터 업계에는 총 임금노동자의 7% 이상인 2만5,000명에서 3만 명의 노동자가 고용돼 있다”고 토닌 프레치 노조 대표가 설명했다. 근무시간에는 고객과 ‘프로젝트’에 따라 2.5~3유로의 임금이 지급되고, 상담원 모집도 이 프로젝트에 따라 결정된다. 각 기업은 근속연수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하는 자신들만의 매우 불투명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노동 계약서에 서명할 때는 기본급만 명시돼 있다. 보너스는 구두 약속이라서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단 하루의 병가로 근속연수가 사라지기도 한다.” 프랑스 다국적 기업 텔레페르포망스에서 일하는 프레치의 설명이다. 78개국에 진출한 이 프랑스 기업은 “시장에서 상호작용하는 가장 큰 규모의 전문가 그룹”으로 자사를 소개하지만 인력관리 문제로 끊임없이 비판을 받아왔다. 2019년 7월 18일에는 비영리 단체 셰르파(경제 범죄 피해 국민을 보호하는 프랑스 단체-역주)와 국제노조연맹 유니 글로벌 유니언이 ‘주의 의무’에 관한 법에 따라 인권을 존중할 것을 텔레페르포망스에 촉구하기도 했다.(5) 텔레페르포망스는 알바니아를 비롯해 알바니아인들이 반독점하고 있는 이탈리아 시장까지 아우르고 있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이르디 이스마일리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과 프랑스 시장의 경우 경쟁이 매우 치열한데, 대부분의 콜센터들이 이들 국가의 옛 식민지에 있다. 이탈리아 시장의 경우 우리의 유일한 경쟁자는 루마니아지만, 루마니아인은 특유의 억양이 있다는 평가다.” 상근직의 경우, 상여금을 포함해 월 급여를 500유로까지 받을 수 있다. 상담원들의 도시 간 경쟁이 치열하지만 알바니아에서는 훌륭한 급여다. 프레치는 이렇게 덧붙였다. “점점 더 많은 기업이 지방에 자리 잡으면서 시간당 임금을 티라나에서보다 20~30센트 적게 준다.”

총리의 낙관론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이 업계가 유일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사실이다. “이탈리아 바리에서 온 동료가 한 명 있다. 그 동료는 자신의 고향인 풀리아주에서는 어떤 일자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월 500유로면 티라나에서는 살만하다”라고 이스마일리는 이야기했다. 이런 불안정한 일자리의 국가 간 분산 탓에 두 노조원은 국제적 연대에 반대한다. “우리는 유니 글로벌 유니언(UNI Global Union)의 노동자연맹차원에서 접촉을 늘리고 있다. 고용주들이 하는 이야기는 항상 똑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높은 급여를 요구하면, 고객들은 더 매력적인 다른 국가로 떠날 것이라는 얘기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알바니아는 6주간의 강력한 격리 조치를 시행했지만 이들 기업은 가장 먼저 활동을 재개했다. 

티라나 도심에 늘어가는 공사현장을 보면 경제가 호황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10년 후에는 수도의 인구가 180만 명까지 증가할 것이라는 시청의 이상한 예측에 대비하고자 건설 중인 고층건물들은 수도의 도심지를 더욱 빽빽하게 만든다. 알바니아 전체 인구의 1/3에 달하는 9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티라나 주는 1991년 이후 이미 주민 수가 2배 이상 늘었다. 사회주의 정부 시절 금지됐던 이농은 지난 20년 동안 ‘무허가’ 구역들을 확산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도시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알바니아의 인구는 1991년 327만 명에서 2019년 286만 명으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6) 

이탈리아 건축가 스테파노 보에리가 구상한 ‘티라나 2030’ 프로젝트는 티라나시를 “200만 그루의 나무가 심어진 ‘그린 메트로폴리탄’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포함한다고 총리의 측근인 에리온 벨리아이 시장이 설명했다. 그러나 티라나의 상징인 스켄데르베그 광장은 최근 자동차 친화적인 정비작업을 통해 거대한 주차장과 도심을 압도하는 쇼핑몰들을 갖춘 광장으로 거듭났다. 새로운 순환도로는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1990년대에 토지 소유 허가 없이 정착한 이들이 살고 있는 위즈베리슈트 같은 무허가 구역들을 지나는 구간은 아무런 배려 없이 공사가 진행됐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그 어떤 보상도 없이 내쫓겼고, 상당수가 외국으로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안을 찾지 못했다. 

2017년, 티라나에서 발급된 건축 허가증의 수는 183% 급증했다. 자본이 풍부해진만큼 대마 재배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탈리아 금융경찰의 추산에 의하면, 2014년에는 4만6,000 포기의 대마 모종이 적발됐던 반면 2016년에는 75만3,000 포기가 적발돼 파기됐다. 그러나 이는 전체 대마 재배 면적의 10% 정도에 불과한 수치다. 한때 민주당(PDS)의 거점이었던 남부지방의 라자라트 마을에 집중됐던 대마 생산이 전국적으로 확산했다.(7) 라마 총리의 측근인 사이미르 타히리 내무부 장관 역시 2017년에 대규모 마약 거래 사건에 연루됐다. 타히리 장관의 사촌 한 명이 시칠리아로 3.5t의 대마를 밀반출한 혐의로 적발된 것이다. 

당초 검찰에서는 타히리 장관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으나, 장관은 2019년 가을 법원으로부터 ‘권력 남용’에 대한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누명을 벗었다’. 그 사이 대마 자금은 다량으로 정치권에 흘러들었고, 티라나의 외관을 해치는 새로운 건축 현장들로 방출됐다. 

 

두 진영으로 나뉜 마피아식 정치

파토스 루보냐는 공사장 주위에 둘러진 철책 옆을 지나며 몹시 불평했다. 철책 때문에 보행자들이 차도 위를 지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사가 몇 년 째 계속되고 있는데, 공공장소를 침범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걱정을 하지 않는다.” 1974년, ‘자유주의’의 과오로 불명예 퇴진한 국영TV 대표의 아들인 그는 악명 높은 수용소들에 수감됐다가 1991년에 석방됐다. 엔베르 호자 독재정권 시절에는 그의 일가 모두가 가족 구성원의 ‘이념 편향’을 이유로 처벌받았다. 작가이자 분석가인 루보냐는 알바니아 좌파의 위대한 양심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스탈린 체제 붕괴 후 알바니아는 오랫동안 양당체제라 불리는 기묘한 경쟁 속에 살았다. 마피아식 정치의 이해관계는 두 진영으로 분열돼 한쪽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다른 쪽은 옛 노동당의 직통 계승자인 사회당을 지지했다.”

이 대립은 1997년 봄에 일어난 ‘내전’에 버금가는 유혈사태를 촉발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은행과 이주 1세대의 돈을 삼켜버린 ‘금융 피라미드’의 붕괴로 대립이 시작된 후 남부에 집중된 사회당 당원들과 북부에 자리했던 민주당 당원들이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그 결과 2,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7,000명의 평화유지군이 개입했는데 이후 수십만 정의 무기가 알바니아 국내와 인접국 코소보로 유입됐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알바니아는 ‘몰락한 국가’처럼 보였다.(8)

이후 15년, 폭력을 일깨우려는 ‘강력한’ 정권교체들이 있었지만 알바니아 정부는 아주 천천히 재건됐다. 2005년까지는 사회당이 집권했고, 그 다음 민주당이 다시 돌아왔다. 각 당이 탄탄한 고객과 유권자층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는 쉽게 벌어졌다. 사회주의 당원들이 민주주의 ‘독재’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인 2011년 1월에는 4명의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대학생들은 정당들 특히 야당의 침입을 거부했다. 학생들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불렀던 것이 실상은 인기주의 논리에 훼손된 타락한 다원주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사회학자 아를린드 코리는 설명했다. 그 역시 학생 운동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부정행위와 유권자를 향한 압박

루보냐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2013년 선거가 전환점이었다. 기득권층은 질서를 좋아하고, 계속된 변화에 지쳤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장기간 권력에 머무를 수 있는 티켓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사회당 대표인 에디 라마는 본질을 꿰뚫었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고 모든 것을 주었다. 결국 에디 라마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모든 권력 기구들을 통제하게 됐다. 2018년에 이어진 총선은 격식에 불과했다.” 우파 야당은 서둘러 의회 업무에서 물러났고, 국회의원들도 2019년 2월로 임기를 넘겨줬다. 야당은 6월 30일에 예정된 지방선거 참여도 거부했다. 외국 참관인들은 이 선거에 대해 적나라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9) 절반 이상의 지역에서 집권당 후보만 입후보 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부정과 유권자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의 그 어떤 국가도 선거를 문제시 하지 않았고, 야당 없는 의회를 다스리며, 행정 당국에 과도한 권한을 줘서 언론을 통제하게 한 라마 정권의 민주적 정당성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10) 서방국가들은 판사들의 청렴성을 절차를 통해 ‘확인’시켜줄 사법개혁을 촉구했다. 그 결과 사법체계는 완전히 사회당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2014년 6월부터 유럽연합 가입 후보국이었던 알바니아의 가입 협상에 코로나19가 한창 확산 중이던 올해 3월 24일에야 청신호가 켜졌다. 당초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알바니아의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하면서도, 법치국가로서 기본적인 원칙이 명백히 부재하는 알바니아의 상황은 언급하지 않았다. 프랑스나 네덜란드나 알바니아를 거부하는 이유는 본래 자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2005년, 국민이 유럽 헌법 제정조약에 반대한 이래로 양국 정부는 자국 여론이 유럽연합 확대에 유보적이라고 말하면서 여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1991년까지 나라를 다스리던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 사회주의 국가의 특권층-역주)가문 출신인 라마 총리는 1997년 이후에야 정치에 입문했는데 나노 정부의 문화부 장관을 지낸 뒤 티라나의 시장이 됐다. 라마 총리는 국제회담에서도 운동화를 신는 등 조형 예술가로서의 이미지를 활용해 ‘파괴적인’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알바니아를 테러 소탕, 그리고 더 넓게는 발칸반도의 ‘안정화’를 위해 유럽연합에 필수적인 파트너로 소개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몇 가지 역설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유럽 통합의 열정적인 지지자인 이 비종교적 인물은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는 친분을 유지하며 터키가 추적 중인 귈렌(터키 정부가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한 이슬람 학자-역주) 지지 교사들을 가차 없이 추방하고 있다.(11) 라마 총리는 또한 코소보와 세르비아 양국의 관계 정상화라는 매우 민감한 사안에도 뛰어들었다. 그리고 영토문제를 포함해 하심 타치 대통령과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의 대화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12) 이 때문에 총리는 코소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는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라마 총리는 인접국들이나 민주당 집권 시절보다 훨씬 단호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친다. 그는 공공지출을 줄이고, 국제통화기금(IMF)의 비난을 살 만큼 고등교육, 관광, 보건, 공공건설 분야에서 민관합작투자사업(PPP)을 추진한다. IMF는 알바니아 정부의 민영화 추진이 과도하다고 판단했고, 2017년 예비 보고서에서 “PPP를 통한 야심찬 공공투자 프로그램이 중대한 예산문제를 야기한다”라고 지적했다.(13) 하지만 실상 문제는 이런 제도적인 방법이 아닌, 민간기업에 입찰특혜를 주는 불투명한 조건들이다. 

문화계에서는 PPP가 보편화됐다. 2015년 10월부터 시행된 부령에 따라, 민간 관계자들이 국가 주요 문화유적지를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알바니아에서 매우 상징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티라나 국립극장까지 민간이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점령 초기인 1939년에 지어진 국립극장은 수도 티라나 건축물의 특징이기도 한 파시스트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2019년 7월 24일,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시도 이후 예술가들은 24시간 내내 극장을 지켰고,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1주일에 3번 저녁 시간에 수백 명의 관람객이 극장을 찾았다. 

로베르트 부디나 감독은 “우리의 극장을 포기할 수 없다. 바로 이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알바니아어로 상연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 17일 새벽 4시, 정부는 국가 보건위기를 틈타 삼엄한 경비 속에서 극장 철거를 명령했다. 의회는 여세를 몰아 주요 부처들이 위치한 구역 가운데에서도 알짜배기인 이 광활한 부지를 민간 투자자 슈컬킴 푸샤에게 할당하는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사회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는 이곳에 고층건물들과 쇼핑몰을 건설할 계획이며 보상차원에서 훨씬 더 협소한 공간에 새로운 극장을 짓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것은 공공재산과 공공장소를 완벽하게 강탈하는 것이다”라고 부디나 감독은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적 대안이 부재하고 모든 사회계층이 정부와, 정부에 연계된 기업들에 의해 ‘차단되는’듯한 상황에서 점점 더 많은 알바니아인이 해외 도피를 시도한다. 루보냐는 “2013년 6월 선거에서 사회당이 승리하고 1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다시 알바니아를 떠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공식 통계자료에 의하면 1991년부터 해외 이주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수많은 지표가 2014년부터 출국이 급격히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알바니아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36만7,000명이 2018년 미국의 체류증, ‘그린카드’를 얻기 위해 추첨에 참여한 것은 강력한 이주 열망의 증거다.(14)

 

해외소득 송금이라는 안전판

같은 해 프랑스에서 난민 신청을 한 알바니아인은 총 8,261명. 프랑스 난민·무국적자 보호청(Ofpra)에 의하면 이는 아프가니스탄 신청자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시민단체들은 반발하지만 프랑스 참사원이 인정했듯이 알바니아는 2013년 ‘안정적’인 국가로 분류됐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의 난민 신청이 기각됐고, 강제송환조치도 늘어났다. 2017년 알바니아는 프랑스에서 유럽연합 이외의 제3국가로 추방된 이들의 목적지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알바니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해외이주 행렬이 끊이지 않는 땅이었다. 공산주의 시절, 알바니아 영토에서 도피하는 것이 ‘배신’으로 여겨지고, 국경 수비대가 경고 없는 사격을 퍼부었을 때도 말이다. 공산주의 정권 붕괴 후에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두 곳이 이주 목적지로 급부상했다. 특히 대부분 이중 언어를 구사하고,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알바니아 남부의 주민들이 그리스로 향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에 뿌리를 내렸고 국적까지 얻었다. 그러나 2008~2010년 경제위기 이후 20만 명이 귀국했고, 새로운 이주희망자들의 발이 국내에 묶였으며, 해외이주자들의 국내 송금액도 현저히 줄어 수많은 가정이 빈곤에 빠졌다.(15) 

아직 코로나19 팬데믹의 경제적 영향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일자리를 잃은 서유럽 노동자들이 알바니아로 향하며 이주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해외이주와 이주자의 해외소득 송금이라는 안전판에만 의존한 이 국가는 더욱 불안정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글·장아르노 데랑스 Jean-Arnault Dérens
로랑 젤랭 Laurent Geslin

두 사람은 <Le Courrier des Balkans> 기자로,  『Là où se mêlent les eaux. Des Balkans au Caucase dans l’Europe des confins 바다들이 만나는 곳. 유럽의 끝, 발칸반도에서 캅카스까지』(La Découverte, Paris, 2018)를 공저했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번역위원


(1) ‘Séisme en Albanie : deux journalistes interpellés pour “fausses informations” 알바니아 지진: ‘가짜뉴스’로 체포된 두 명의 기자’, <Le courrier des Balkans>, Arcueil, 2019년 9월 24일, www.courrierdesbalkans.fr
(2) 세계은행(성장률), 국제통화기금(실업률)
(3) 알바니아 통계청(Instat), Tirana, www.instat.gov.al
(4) ‘Edi Rama : “L’Albania è meglio dell’Italia? Perché è senza sindacati”, Linkiesta, Milan, 2015년 6월 6일, www.linkiesta.it
(5) Sherpa 홈페이지 : www.asso-sherpa.org
(6) Eurostat, Instat
(7) Jean-Arnault Dérens, Laurent Geslin, Simon Rico, ‘Albanie : pouvoir, police et armée sont gangrénés par le trafic de drogue 알바니아: 정권, 경찰, 군대는 마약밀매로 부패했다’, Mediapart, Paris, 2017년 11월 17일, www.mediapart.fr
(8) Paolo Raffone, ‘L’Europe peut-elle oublier l’Albanie? 유럽은 알바니아를 잊을 수 있을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7년 9월호. 
(9) ‘Republic of Albania, local elections 30 june 2019’, 유럽 민주제도·인권사무소, 유럽 안보협력기구 (OSCE), 바르샤바, 2019년 9월 5일.
(10) Katerina Sula, ‘Médias en Albanie : le gouvernement Rama réimpose la censure 알바니아의 언론: 라마 정부가 검열을 다시 강요하다’, <Le courrier des Balkans>, Arcueil, 2019년 12월 19일.
(11) Ariane Bonzon, ‘Refuge européen pour les réseaux gülénistes 터키의 반정부단체, 귈렌 지지자들의 은신처가 된 유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10월호, 한국어판 2019년 11월호. 
(12) Jean-Arnault Dérens, Laurent Geslin, ‘Dans les Balkans, les frontières bougent, les logiques ethniques demeurent 발칸의 민족 동질성 집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8월호, 한국어판 2020년 1월호.
(13) ‘Albania: staff concluding statement of the 2017 article IV mission’, 국제통화기금, Washington, 2017년 10월 2일.
(14) Louis Seiller, ‘Exode à la loterie : le rêve américain pour s’enfuir d’Albanie 그린카드 추첨을 향한 대이동: 알바니아에서 도망치기 위한 아메리칸 드림’, <Le courrier des Balkans>, 2018년 9월 3일.
(15) Arlin Qori, ‘Albanie : avec la crise, la diaspora revient sans gloire au pays 알바니아: 경제위기 때문에 초라한 귀국을 하는 해외 이주자들’, <Le courrier des Balkans>, 2014년 10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