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해방군의 더러운 전쟁

2011-06-07     장아르노 데랑

알바니아계 주민이 대다수를 차지한 세르비아의 코소보주를 독립으로 이끈 내전이 끝나고 12년이 지난 지금, 여러 조사와 증언을 통해 코소보해방군(KLA)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세르비아계 주민은 물론 코소보 내 정치적 라이벌도 KLA의 희생자 명단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코소보평화유지군(KFOR)이 파견되고 유엔 임시 행정기구가 설치된 몇 달 뒤인 1999년 10월 27일,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억류돼 있던 라호베츠의 게토에서 50살의 전직 교사 부디미르 발로세빅이 동료 4명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롬계인 애그론은 당시 독일 화폐로 한 사람당 1200마르크(약 600유로)를 받고 그들을 몬테네그로의 로자에로 데려갈 계획이었다. 애그론이 높은 수수료를 받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석공인 그는 나토의 감독 아래 코소보해방군(KLA)의 옛 게릴라병들의 ‘사회복귀’를 지원하기 위한 코소보방위군(TMK)에 근무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미 라호베츠에서 세르비아인 4명을 탈출시킨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애그론이 건설에 참여한 TMK의 새 기지가 있는 자코비차 인근 도시에서 발로세빅을 포함한 5명의 세르비아인들이 사라졌다.

세르비아계 주민 무차별 납치·살해

애그론은 “처남도 데려가야 했기 때문에 차를 잠시 세워 집에 들어갔다. 세르비아인들은 차 안에 남아 있었다. 처남 집에서 나오는데 그들이 내게 숨으라고 소리쳤다. 낯선 사람들이 세르비아인들을 잡아갔고, 그 뒤로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애그론은 ‘안전해질 때까지’ 몇 달 동안 세르비아의 노비파자르에 숨어 지내야 했다. 발로세빅의 남동생이 실종자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헛수고였다. “KFOR의 이탈리아 군인과 유엔 경찰이 찾아왔지만 나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슬픈 일이지만 이런 실종 사건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네고반 마브릭은 라호베츠에서 몇km 떨어진 세르비아의 벨리카호차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실종자가족협회의 지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이 지역의 사망자 및 실종자 명단을 보여주었다. 1998~99년 납치된 주민들 가운데 19구의 세르비아계 주검은 발견했지만, 나머지 세르비아계 55명과 롬계 9명의 주검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세르비아계 주민이 처음으로 살해된 것은 수많은 세르비아계가 살던 라호베츠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세르비아 경찰과 KLA 간의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1998년 5월 12일이다. 마지막 납치가 있던 날은 2000년 7월 28일로, 코소보에 대한 국제 보호령이 내려진 1년 뒤 일이다. 

현재 벨리카호차를 둘러싼 포도 경작지는 포도 넝쿨로 뒤덮여 있다. 이곳은 샤르·파쉬트릭 단층지괴와 하스산맥, 그리고 북쪽의 몬테네그로 방향으로는 ‘저주받은 봉우리’라 부르는 프로클레티예까지 코소보와 알바니아의 경계선을 이루는 인상적인 봉우리로 사방이 막혀 있다. 예전에는 라호베츠에서 알바니아계 주민과 세르비아계 주민이 충돌 없이 어울려 살았다. 하지만 1999년 6월 이후, 이 지역 세르비아계 주민의 수는 벨리카호차에 700명, 라호베츠 북부 지역의 게토에 300명으로 급격히 줄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주민 수가 약 1만 명에 달하던 곳이다. 조치스트나 옵테루사, 레팀예 같은 마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도 피란 행렬에 올라야 했다. 

종전 이후에도 민간인 상대로 보복

라호베츠에서 ‘실종된’ 대부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마을이 KLA에 잠시 포위당한 1998년 7월 이후부터 납치되기 시작했다. 레팀예의 막강한 세르비아계 민간단체도 세메티스트의 인근 마을 기지로 이동했다. 여성들은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중재로 나흘 뒤 석방되었지만, 16살 소년을 포함한 남자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2005년 4월, 클리나에서 가까운 볼루야크의 공동 묘혈에서 버려진 주검 21구를 발견했지만, 그중 몇몇만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호베츠를 떠나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피란 온 올지카 보자닉은 실종자가족협회에서 활동한다. 보자닉은 형제 2명과 삼촌, 사촌을 포함해 모두 10명의 친인척을 잃었다. 그녀는 세르비아 정부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고 게릴라부대에 몇 달 동안 억류돼 있던 알바니아계의 옛 이웃들을 통해 실종된 친인척의 소식을 들었다. 라호베츠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드레노브치에 위치한 KLA의 주요 기지 근처에 감금돼 있었다. 종전 이후에는 알바니아 국경 근처 하스산맥에 위치한 데바로 이송됐을 것이다. 1999년 6월 KLA는 이 마을을 점령해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철수하면서 남겨 둔 군사기지를 수용소로 이용했다. 라호베츠의 생존자들은 알바니아의 쿠커스로 끌려갔다가 이후에는 해안가의 두러스로 이송됐다. 옛 이웃들은 보자닉에게 2001년 이곳의 KLA 감옥에서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있는 것을 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종전 이전에 납치된 세르비아계 주민 대부분은 코소보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측할 뿐, 나토군이 파견된 이후에 납치된 이들의 소식은 끊긴 상태다. 이들이 알바니아로 강제이송됐을 것이란 추측만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1999년 가을, 노비파자르 지역 내 산드야크의 헬싱키 인권위원회 - 세르비아 관련 헬싱키 인권위원회의 독립적 지방조직- 위원장인 세프코 알로메로빅은 이에 대한 조사를 오랫동안 진행했다. 그의 보고서는 현재 발견되지 않았고, 그는 2003년 사망했다. 2000년 인터뷰에서 그는 코소보에 있는 5개 수용소를 방문했다고 밝혔다. 이 수용소들은 주로 차고나 도시 외곽의 작은 건물이었으며, 그곳에는 포로 10~50명이 억류돼 있었다고 말했다. 모든 수용소는 말라라는 지휘관이 총괄했는데, 그의 진짜 이름은 알루시 아구시로 라무시 하라디나이(1)의 친척이다. 실종자 가족은 거액의 수수료를 중개인에게 주었지만, 이후에도 실종자들은 석방되지 않았다. 몇몇 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에 억류돼 있는 알바니아인과 맞교환하기 위한 목적으로 붙잡혔으며, 그 수는 2000년 말에만 800명에 달했다.

아직까지 그곳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몇 정보통에 따르면, 세르비아가 사면법을 채택함으로써 당시 KLA 당원 혐의를 받던 알바니아인들이 석방된 2001년, 많은 세르비아계 포로들이 처형됐을 것이라고 한다. 코소보 내 몇몇 수용소는 알바니아로 이송되기 전에 머무르는 ‘중간 수용소’로 쓰였다. 알로메로빅은 처음으로 장기밀매 문제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KLA의 맹신자들과 국제범죄조직 간 거래 가능성을 주장했다. 

알로메로빅의 폭로 이후에 아무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코소보에 주둔해 있던 여러 국제조직, 특히 당시 베르나르 쿠시네가 지휘하던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UNMIK)는 알로메로빅의 발표를 거부했다. 인권을 위해 투쟁했고 오랫동안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에 저항한 알로메로빅은 진정한 ‘침묵의 벽’(2)에 대해 말한 인물이다. KFOR조차 코소보 내 수용소의 존재를 부인하던 상황에서 말이다.

이웃 코소보 주민들, 알고도 침묵

전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TPIY)의 검찰총장이던 카를라 델 폰테 역시 ‘침묵의 벽’에 대해 말했다. 그는 당시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실종과 장기밀매를 조사하려 했지만 ‘침묵의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3) 

딕 마티 의원이 유럽평의회에 보고서(상자기사 참조)를 제출한 뒤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강조한 바와 같이, 내전 동안 세르비아 정권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은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실종 또는 억류된 사실을 코소보의 모든 주민은 알고 있었다. 코소보 일간지 <보타 소트>는 1999년부터 끊임없이 내전 기간과 종전 이후에 이브라힘 루고바가 이끈 코소보민주연맹(LDK) 당원들이 살해당한 사실을 고발해왔다. <보타 소트> 편집장인 바이루시 모리나는 “코소보에서 1999년부터 주민 3천 명이 살해당했지만, 발견된 주검은 600구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죽음이 가문 간의 보복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거의 모든 죽음이 정치적 이유와 관계 있다”고 했다. <보타 소트>도 피의 대가를 치렀다. 기자 2명이 살해당했고, 모리나 편집장은 오랫동안 사설 보안업체의 보호를 받았다. 또한 <보타 소트>와 LDK의 관계 때문에 신문이 공개한 정보는 끊임없이 의심을 받아왔다.

라이벌 정당 당원들까지 살해

<보타 소트>는 코소보와 알바니아의 수용소에 세르비아에 협조한 혐의를 받은 알바니아인들이 억류된 사실을 꾸준히 보도했다. 지난 2월 28일 미트로비카 재판소에서 KLA의 옛 사령관인 사빗 게치와 리자 알리아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들은 코소보 국경 인근의 알바니아 북부 산맥에 위치한 카한 수용소에서 저지른 중범죄로 기소됐다.

작은 산악마을인 카한은 내전 기간 KLA의 물류창고와 코소보 전투의 지원병들을 위한 후방기지로 이용됐다. 이 지역 출신의 건장한 청년 베드리 카하니는 “카한 주민들이 코소보와의 담배 밀수에 참여했고, 1997년 가을부터 게릴라부대에 징집돼 밤에 전투원들이 산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고 고백했다. KLA는 1992년에 버려진 알바니아군의 병영을 게릴라 기지로 활용했는데, 지금까지 마을 입구에서 이 건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크루마 촌락에서 출발해 카한에 가려면 험한 산길을 따라 약 10km를 지나야 한다. 마티 의원은 “이 지역이 눈에 띄지 않고 옛 병영은 수용소로 활용됐다”고 했다.

Z.Z.는 카한의 ‘지옥’에서 두 달 반을 보냈다. 그는 게치와 알리아 소송의 핵심 증인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조직적인 학대와 끔찍한 고문의 기억을 떠올렸다. 일부 포로들은 서로 성관계를 갖도록 강요당했으며, 다른 이들은 모의사형을 겪었다. 그는 “아마 카한 수용소에서 내가 가장 오랫동안 억류돼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만난 포로들은 모두 알바니아계뿐이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카한에서 KLA의 최고 간부들과 현 코소보 총리인 하심 타치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Z.Z.를 포함해 1999년 봄 내전이 벌어진 몇 달 동안 카한에 감금된 포로들은 LDK의 간부들로, 주로 쿠커스와 크루마에서 붙잡혔다. 이곳은 세르비아군에 쫓겨난 코소보 피란민들이 몰려든 마을이다. 여기서 붙잡힌 포로 몇몇은, 이브라힘 루고바의 지지자들이 KLA의 경쟁 부대로 결성했지만 큰 승리는 거둔 적 없던 코소보공화국군(FARK)의 활동대원들이었다.

마티 의원은 보고서를 통해 하심 타치, 아젬 실라, 제바트 할리티, 카드리 베셀리, 파트미르 리마이, 사빗 게치, 리자 알리아 등의 이름을 거론하며 KLA 내부의 과격파인 ‘드레니차 그룹’에 통렬한 책임을 물었다. KLA의 지휘관인 이들은 모두 드레니차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 모두 코소보인민운동(LPK) 소속인데, LPK는 ‘엔베르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영감을 받은 비밀조직이다. 다시 말해 엔베르 호자 알바니아 공산당 정권에 우호적인 조직이었다.

스위스의 알바니아계 거주 집단에서 결성된 조직인데, 코소보에서 큰 비밀조직원망을 갖추었다. 마찬가지로 1996년에는 LPK가 주도해 코소보, 주로 드레니차 지역에서 활동하던 몇몇 유격대를 통합해 KLA를 결성했다. 이 유격대의 유명한 인물은 ‘전설의 지휘관’이라며 숭배 대상이던 아뎀 자샤리로, 그는 1999년 3월 6일 세르비아 경찰에 살해됐다. 그의 사촌인 가니 게치는 일찍이 유격대에 참여한 인물로, 2001년 테러 위협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는 LPK에 뿌리를 둔 코소보민주당(PDK)에는 절대 입당하지 않았다. 드레니차 중부 라우샤 마을의 바이라크타르 가문- 오스만 제국 시절 ‘마을의 기사’라는 뜻- 출신의 게치는 계속 LDK 진영에 남아 있다가 그 뒤 LDK의 작은 분파에서 활동했으며, 지난 총선에서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게치는 “우리는 이브라힘 루고바에 충성을 다했지만, 그가 LPK나 FARK를 거론하는 것을 들은 적 없다. 우리는 KLA라는 이름으로 모든 병사를 연합했다. LPK 인사들이 스위스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은 재력과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직 권력뿐임을 우리는 금방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종전 뒤 복원한 자기 저택의 호화로운 응접실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결코 세르비아와 싸우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나토를 지지했다. 그들은 절대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오직 다른 알바니아계와 전투를 벌였다. 결국 종전 이후 그들이 코소보를 갉아먹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2003년 나토 보고서를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보고서는 제바트 할리티를 코소보의 ‘두목’으로 묘사하며, 그가 온갖 불법 행위와 마약밀매 및 성매매를 관리한다고 주장했다. LPK의 주요 간부인 할리티는 스탈린주의를 표방하는 알바니아 첩보조직인 시구리미의 조직원으로 유명하다. 그는 마티 의원이 언급한 데로니카 그룹의 주요 간부 중 한 명으로, 실제 LPK와 현 PDK의 지도부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 PDK는 카드리 베셀리와 아젬 실라가 지휘하는 알바니아 비밀정보조직인 SHIK라는 강력한 수단을 활용했다. 하지만 2009년 말 SHIK의 옛 조직원인 나짐 블라카의 폭로로 코소보에 큰 파장이 일었다. 블라카가 세르비아 경찰에 협력한 알바니아인을 살해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것이다. 재판을 받기 위해 연금 상태에 있는 블라카는 언론에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그는 지난 1월 일간지 <코하 디토레>와의 인터뷰에서, “SHIK에 의해 국제 보호령이 실시된 몇 달 동안 600여 명이, 1년 동안 1천 명이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진실은 민족 간 보복이 아닌 정치적 학살

협력자 혐의를 받거나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알바니아인들을 상대로 자행되는 KLA의 폭력행위에 대해 코소보도 이제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실종된 세르비아인들에 대해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Z.Z.는 종전 이후 카한 수용소에서 코소보의 프리즈렌 마을로 이송됐다. “나는 나이 많은 세르비아인 7명, 롬인 1명과 며칠 동안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카한 수용소에서 온 알바니아계는 나를 포함해 2명이었는데, 간수는 우리에게 세르비아 노인들을 때리라고 강요했다. 나는 결국 KFOR의 독일군에 의해 석방됐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끌려간 뒤였다.” 그는 종전 이후에도 카한 수용소에 장기밀매를 위한 세르비아계 포로들이 억류돼 있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대신 1999년 봄 카한에 KLA ‘반대파’들을 고문하기 위한 수용소가 들어섰을 때, 미국 특수부대가 정기적으로 이 기지를 방문했다.(4)

글·장아르노 데랑 Jean-Arnault Dérens
<레쿠리에데발칸>(Les Courrier des Balkans) 편집장. http://balkans.courriers.info. 로랑 게슬랭과 함께 <고라니족 마을 여행: 발칸반도, 21세기 초>(Cartouche·파리·2010)을 썼다.

번역·배영미 youngmib0222@gmail.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코소보 서부의 KLA 전 지휘관이던 라무시 하라디나이는 2004년 12월~2005년 3월 코소보 총리를 지냈다. 코소보미래연맹(AKK)를 이끌던 하라디나이는 현재 전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TPIY)의 항소재판을 기다리며 네덜란드의 스헤베닝언에 수감 중이다. 수많은 증인이 살해되거나 법정에서 증언을 거부했기 때문에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2) 반야 메크테로빅·블라디미르 라도미로빅, ‘코소보, KLA 수용소 반도’, <레쿠리에데 발칸>, 2000년 4월 17일자, http://balkans.courriers.info.
(3) 카를라 델 폰테, <추적: 전쟁의 범죄자들과 나>, 파리, 2009.
(4) 오스트레일리아 의사인 크레이그 주리세빅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Blood on my hands: A surgeon at war>, Wild Digo Press, 멜버른, 2010.


장기까지 꺼내 팔았다

유럽평의회의 딕 마티 스위스 의원이 제출한 ‘코소보 내 반인권적 학대와 장기 밀거래’에 대한 보고서가 지난 1월 25일 유럽의회에서 채택됐다.

보고서는 조직원들의 출신지 이름을 딴 ‘드레니차 그룹’이라는 ‘범죄조직’의 우두머리가 2008년 코소보 총리로 임명된 하심 타치라고 밝혔다. 마티 의원은 KLA의 ‘과격주의’를 거론하며, “이들은 알바니아 정부, 특히 비밀정부조직인 SHIK와 군대의 직접적 지원을 받았다. 1999년에는 알바니아에 주둔하는 서방 정보기관들의 ‘특별’ 지원도 받았다”고 했다. 

보고서는 밀수입, 무기·마약 밀매 등 조직의 다양한 범죄활동을 폭로하며, 종전 후에도 이런 범죄행위가 지속적으로 자행돼왔다고 한다. 마티 의원에 따르면, 서방 정보기관의 보고서도 타치 총리를 ‘코소보 마피아 조직의 우두머리’로 묘사한다. 상당한 정보를 입수한 마티 의원은 타치 총리가 드레니차 그룹에서 유명한 인물이지만 최고권력자는 아니며, 아젬 실라와 제바트 할리더를 핵심인물로 거명했다.

드레니차 그룹은 알바니아를 가로질러 진정한 수용소 반도를 건설해냈다. 카한, 쿠커스, 비카즈 등 코소보 국경에 근접한 몇몇 수용소에는 주로 ‘반역 및 협력자’로 추정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억류돼 심문을 받았다. 두 번째 부류의 포로들은 주로 세르비아계로서, 이들은 알바니아에서 감금 도중 살해됐다. 마지막으로 장기밀매 대상이 된 세 번째 부류가 있다. 이들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한 뒤 장기, 특히 신장을 적출당했다. 이런 일은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의 국제공항에서 멀지 않은 푸셔 크루저 수용소에서 벌어졌다. 적출된 장기는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이런 비참한 운명을 맞은 포로들은 최대 수십 명 정도일 것이다. 이 포로들은 최소한 중간 수용소와 선별 수용소를 거쳐야 했다. 보고서는 포로들 간 ‘매매’도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장기 적출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셰입 무야 박사는 KLA의 의사였는데, 현재 타치 총리의 주치의로 활동하고 있다. 의사 이름은 2008년까지 또 다른 장기밀매의 중심지던 프리슈티나에 위치한 개인병원인 메디쿠스 병원 보고서에도 거명했다. 주로 독일, 캐나다, 특히 이스라엘 ‘고객’에게 신장을 팔려는 ‘자원자’들이 이곳으로 왔다. 병원의 소유주인 루트피 더비시 비뇨기과 의사는 타치 총리의 삼촌인 실라의 처남으로 밝혀졌다.  


코소보의 어제와 오늘

알바니아계가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세르비아의 코소보주는, 1990년대에 세르비아 정부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에 대항해 이브라힘 루고바는 코소보민주동맹(LDK)을 창립해 비폭력 정치적 저항을 이끈 반면, 코소보해방군(KLA)은 1998년 이후부터 게릴라전을 확대해나갔다. 1999년 3~6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유고슬라비아(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공습을 가했다. 세르비아군에 추방당한 약 80만 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로 대피했다. 당시 사망자는 1만 명에 달했다. 6월 10일, 유엔 평화유지군인 KFOR가 파견되고 ‘유엔 코소보 임시 행정기구’(UNMIK)가 설치되자 세르비아군도 코소보에서 철수했다. 비알바니아계 주민들(세르비아계·롬계)은 쫓겨나고, KLA의 옛 게릴라병들과 LDK는 서로 대립했다. LDK는 하심 타치를 주축으로 코소보민주당(PDK)을 창당했다.

2008년 2월 17일,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세르비아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부분적으로만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