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로장발롱이 이해하지 못한 것

2020-10-05     샹탈 무페 | 철학자

코로나19로 인한 보건 위기가 포퓰리즘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사례에서 보듯이 포퓰리스트 정치 지도자는 과학, 분권, 복잡성, 법치주의를 무시한다.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 민주주의는 느긋하게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피에르 로장발롱이다. 저명한 정치철학자이자 포퓰리즘의 대가인 샹탈 무페가 그에 답했다. 

 

역사학자 피에르 로장발롱은 최근 출판한 그의 책 『포퓰리즘의 세기』(1)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혹은 무정부주의 등 여타의 현대 이데올로기와 달리 포퓰리즘을 다룬 책이 많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응집력과 긍정적 힘을 가졌으나 형식도 없고, 발전되지 않은 정치사상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포퓰리즘 학설을 정의하고 이를 비판하고자 했다. 

로장발롱은 대부분의 포퓰리즘 비판에서 이미 언급한 진부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각종 출처에서 나온 요소를 혼합해 포퓰리즘을 추상적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그가 내린 정의는 학설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한 말의 반복에 불과했다. 포퓰리즘은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 간의 충돌이고 민중의 “일반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정치라는 것이다.(2) 이런 시각은 몇몇 표현만 달라진 채로『포퓰리즘의 세기』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피에르 로장발롱은 다른 시각을 가진 저자들의 의견을 참조할 때도 자신이 옹호하는 학설에 맞춰서 이를 왜곡시켰다. 나를 포함해 수많은 필자의 연구도 이처럼 변질됐다. 명성 있는 역사가인 그가 나의 글을 읽기나 한 건지, 아니면 의심스러운 방법론으로 악의를 표현하려고 한 건지 묻고 싶을 정도다. 예를 들어 로장발롱은 내가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저서『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서 포퓰리즘 전략은 다원 민주주의 내에서 시행되는 것이 중요하며, 정치적 자유주의 원칙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로장발롱의 주장과 달리 나는 『민주주의의 역설』(3)에서 자유민주주의는 결국 평등과 자유라는 양립 불가한 두 논리의 결합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평등과 자유의 긴장이 양측 간 싸움이라는 형태로 ‘투쟁적으로’ 표현될 때 다원주의가 보장된다고 했다. 게다가 로장발롱은 내가 만장일치를 민주적 표현의 바로미터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분리 테마와 완벽한 합의의 불가능성은 내 논지의 핵심이다. 

 

포퓰리즘 이해에 본질적 한계 드러낸 로장발롱

포퓰리즘 이론을 만들어 보려 했던 그의 저작이 포퓰리즘 현상 이해를 돕는 데 기여하지 못한 이유는 우선 자만심이 가득한 그의 야심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우리가 이론이나 개념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왜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많은 해석과 모순되는 정의를 야기하는지 납득할 만한 여러 가지 포퓰리즘이 있을 뿐이다. 포퓰리즘의 원칙을 정의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포퓰리즘적’이라고 할 만한 다양한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정치 논리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포퓰리즘을 살펴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포퓰리스트의 이성』(4)에서 ‘포퓰리즘’이란 위와 아래,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사이의 대립을 바탕에 두고 정치적 경계를 형성하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포퓰리즘을 채택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는 건 항상 패권주의 모델의 위기 상황에서다.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포퓰리즘은 이데올로기도, 체제도, 특별한 계획도 아니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방식과 역사적 맥락과 포퓰리즘이 펼쳐지는 사회·경제적 구조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다양한 포퓰리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장발롱이 했던 것처럼 포퓰리즘을 하나의 동일한 이데올로기로 압축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이 포퓰리즘이 부상하는 특별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로장발롱은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채로 포퓰리즘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의 본질과 한계를 드러냈다. 그에 따르면 포퓰리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이론은 ‘민주주의의 제한된 형태’로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인 자유주의 및 대의제를 비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직접 민주주의, 편향된 민주주의 계획,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대중의 견해라는 세 가지 특성을 가진 대안을 제시한다. 이런 가상의 포퓰리즘 학설에 맞서 생 시몬 재단의 전 사무총장을 역임한 로장발롱은 자신의 이전 저작물에서 발전시킨 자신의 견해를 내세운다. 철학적 차원으로 볼 때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하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지닌 주된 신조들이 더 정교화되어 만들어진 모델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영국의 앤서니 기든스와 독일의 울리히 벡과 같은 사회학자들이 만든 모델이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제2의 근대성’ 시대에 들어섰으며 이는 사회적 타자의 부재로 정치적 대립 모델이 옛 유물이 되는 시대다. 계급과 같은 집단적 정체성은 힘을 잃고 우파와 좌파 같은 범주도 의미가 없어진다. 잠재적으로 대립하는 의견의 차이는 남겠으나 이 역시 개인 요구의 다양성에 묻혀서 줄어들고 잠잠해진다. 이때부터 환경, 가족 관심사와 개인적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된 ‘생활 정치’가 ‘해방의 정치’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는 것이 바로 앤서니 기든스의 주장이다.(5) 이런 견해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채택되어 1980년대 말부터 서방 유럽을 지배한 사회 자유주의의 시초가 됐다. 프랑스에서 이 ‘중도 공화국’ 프로젝트는 피에르 로장발롱과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의 레이몽 아롱 센터 소속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6) 이 사조는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측면을 우선시하고 대중의 참여보다 헌법 수호를 강조한다. 이처럼 국민 주권보다 자유주의를 우위에 두는 것은 사회적 분열과 권력 관계, 계급의 개념 및 투쟁과 관련된 대립의 형태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할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 발전을 이루는 것과 거리가 먼 ‘포스트 정치적’ 시각은 피터 마이어(7)가 보여준 것처럼 정치 시스템에 ‘허공을 다스리는’ 업무를 더할 뿐이다. 2005년 필자는 대립하는 사회 계획 사이의 다툼이 부재하면 선거는 그 의미를 잃게 되고,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발전하기 좋은 토양을 형성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8) 우파 포퓰리즘 정당은 이를 이용해 기존체제가 빼앗은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줬다고 우길 수 있다. 15년 후 유럽 정치 상황을 보면 이 가설은 더 확실해졌다. 

로장발롱은 경계 없는 정치적 합의 모델이 포퓰리즘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포퓰리즘을 막으려면 시민 활동과 민주주의 체제를 재검토하는 ‘제2의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강력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로장발롱은 민주주의 체제를 다양화하고 확대하며 시민 활동 영역을 확장하려는 목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제안들을 내놓았다. 선거를 통해 통치 권력을 위임하는 ‘허가 민주주의’에 권력 행사를 민주주의 기준에 맞추는 ‘행사 민주주의’를 덧붙이는 것이 그 예다. 이 제안들은 포스트 정치 견해의 성격을 지녔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대립을 무시하고 신자유주의 모델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제2의 민주주의 혁명’이 대체 어떤 측면에서 포퓰리즘의 기세를 꺾는 데 기여했는지 알기 어렵다. 포퓰리즘을 정치적 경계를 세우는 전략으로서 해석하게 되면 로장발롱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포퓰리즘의 순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포퓰리스트는 전문가 정부와 정치를 기술적 차원으로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거부한다. 이들은 당파적 시야를 가지고 합의에 의한 접근에 결점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포스트 정치를 인정하지 않고 시민들이 공공 문제와 관련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실행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요구한다. 어떤 이들은 ‘우파’ 포퓰리즘 형태로 요구하는데 ‘면역’ 유형과 제노포비아를 내세우며 민주주의를 국가주의로 한정시킨다. 또 다른 이들은 ‘좌파’ 포퓰리즘 형태로 요구하는데 민주주의를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며 깊이 파고든다. 

 

좌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위협과 거리 멀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신자유주의 질서 및 금융 자본주의와 단절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볼프강 스트리크(9)가 증명했듯이 신자유주의와 금융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등과 사회적 정의의 핵심 가치를 담당할 수 있는 새로운 헤게모니를 세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획은 민주적 다원주의를 이루고 있는 제도를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새롭게 정복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및 금융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실행하기 위한 전략으로 좌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투쟁이 연합하기를 원한다. 공동 의지를 세우고 권력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를 창조하고 그람시가 언급한 ‘진지전’을 통해 새로운 사회경제적 모델을 설립하기 위해서다. 착취와 지배, 차별의 환경과 관련한 다양한 요구를 결집하는 이 ‘우리’와 신자유주의 권력과 그 지지자들로 형성되어 있는 ‘그들’ 사이의 대결은 마르크스 전통이 ‘계급 투쟁’이라 불렀던 그것이 오늘날 표출되는 형태다. 그렇기 때문에 로장발롱이 이를 혐오하는 사실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중도주의 모델에 갇혀서 모든 형태의 포퓰리즘을 민주주의를 향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새로운 사회 계약 형성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는 데 매우 적절해 보인다. 2008년 위기와 다르게 이번에는 제각기 다른 계획이 대립하는 장이 열렸다. 순수하고 단순하게 기존 방식으로 회귀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국가가 아마 결정적이고 중대한 역할을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공권력으로 경제를 재건하고 자본력을 부활시키는 ‘국영화된 자본주의’의 출현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를 이끌어 갈 정권에 따라 다소 권위주의적인 형태를 취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시나리오는 우파 포퓰리즘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고, 신자유주의 모델을 살아남게 하려는 신자유주의 지지자들의 마지막 발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녹색 뉴딜’을 둘러싼 공동 의지를 세우려는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은 이 위기 속에서 현존하는 사회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민주화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친환경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코로나 위기는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신자유주의 모델의 운이 다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 위기는 정치적 경계를 새로 만들고, 대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키며, ‘정치의 귀환’을 알리고 포퓰리스트의 순간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한다. 팬데믹을 이용하려는 사회 세력이 누군지 그리고 이 세력이 우리와 그들의 대립을 형성하는 방식이 무엇인지에 따라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 속에서 민주주의 가치의 과격화를 부추기는 권위주의적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피에르 로장발롱이 말한 것과 달리 좌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평등한 흐름 속에서 포스트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질서에 내성을 가진 더 나은 전략이 될 수 있다.  

 

 

글·샹탈 무페 Chantal Mouffe
철학자. 주요저서로 『Pour un populisme de gauche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Albin Michel, 파리, 2018)가 있다.
 
번역·이정민 minuit15@naver.com
번역위원

(1) Pierre Rosanvallon, 『Le Siècle du populisme. Histoire, théorie, critique 포퓰리즘의 세기. 역사, 이론, 비판』, Le Seuil, Paris, 2020.
(2) Cas Mudde et Cristobal Rovira Kaltwasser, 『Brève introduction au populisme 간결한 포퓰리즘 소개』, Editions de l'Aube, La Tour-d'Aigues, 2018.
(3) Chantal Mouffe, 『Le paradoxe démocratique 민주주의의 역설』, Beaux-Arts de Paris éditions, Paris, 2016.
(4) Ernesto Laclau, 『La Raison populiste 포퓰리스트 이성』, Seuil, Paris, 2008.
(5) Anthony Giddens, ‘Modernity and Self-Identity. Self and Society in the Late Modern Age’, <Polity Press>, Cambridge, 1991.
(6) François Furet, Pierre Rosanvallon, Jacques Julliard, 『La République du centre. La fin de l'exception française 중도 공화국. 프랑스 예외의 끝』, Calmann-Lévy, Paris, 1988.
(7) Peter Mair, ‘Ruling the Void. The Hollowing-out of Western Democracy’, Verso Londres, 2013.
(8) Chantal Mouffe, 『L’illusion du consensus 합의의 환상』, Albin Michel, Paris, 2016 (최초 영문판 2005).
(9) Wolfgang Streeck, 『Du temps acheté. La crise sans cesse ajournée du capitalisme démocratique 매수한 시간. 민주적 자본주의의 끊임없이 연기된 위기』. Gallimard, Paris,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