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의 나무 뒤에 숨겨진 진실
숲의 영혼을 노래할때
숲은 살아 있을까? 나무들은 무엇을 느낄까? 지난 10년간 환경 보호주의자들의 우려는 언론과 대중 출판물을 통해 이런 질문들에 양분을 공급해왔다.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계몽주의의 유산인 자연과 인간의 단절에 문제를 제기했다. 인간 외 생물을 인간과 대등한 ‘주체’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식의 접근법은 어디로 이어질까?
애나 칭의 저서 『세상 끝의 버섯』(1)은 현대 인류학에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이 책은 유쾌한 필치로 근래 조사된 사실들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함으로써, 인간 외 생물인 ‘송이버섯’을 분석한다. 훼손된 숲에서만 자란다는 송이버섯은 빈민들에게 채취돼 일본에서 사치품으로 팔려나간다. 애나 칭은 이 유기체를 실마리로, 미국의 퇴역군인들과 오리곤 주의 버섯 채취꾼들, 불법 이민자들처럼 불안정 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특히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책은 인간-환경의 관계를 새롭게 분석하고자 하는 지적활동을 상징한다. “지난 수십 년간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은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을 인간으로 국한하는 것이 진부한 태도이며, 구조화된 문화적 관습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책은 상당 부분을 주로 (일본, 미국 오리건 주, 핀란드 등지의) 숲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숲은 “인간 및 인간 외 주체들이 한데 얽히고설켜 활동하면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세상이다. (…)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단순히 숲에서 자라나는 생명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숲을 만드는 주체이기도 하다.”
‘숲’이라는 주제는 지난 몇 년 동안 출판, 학계, 대중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됐다. 눈여겨볼 저작들은 페터 볼레벤의 『나무 수업』(2015), 에른스트 취리허의 『나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서』(2016), 장바티스트 비달루의 『숲이 된다는 것. 분쟁 지대에서 살기』(2017), 가스파르 달랑스의 『약탈당한 우리의 숲』(2019), 장루이 에티엔의 『나무 시민. 지구 생태계와 관계 회복하기』(2019), 조엘 자스크의 『불타는 숲』(2019) 등이 있다.
또한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이 펴낸 <나무, 우리>(2019) 전시회의 ‘작품집’도 빼놓을 수 없다. 스탠퍼드대학교의 문학교수인 로버트 해리슨은1992년에 출간한 『숲, 문명의 그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종교, 법, 가족, 도시 같은 서구의 지배 제도가 숲을 개발하고 파괴함으로써 숲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건설됐다면, 서구의 문화적 상상력 안에서 숲이 맡아온 역할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도 거론해야 한다.”
숲은 불경한 공간이자 신성한 공간이며, 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며 이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고, 위험이 도사리지만 마법이 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숲은 상반된 것들이 혼재된 공간이다.
인간 외 생물들에 대한 고려있어야
생태계의 예고된 위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상황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자연, ‘숲’이 주목받는다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산림 벌채에 대한 우려는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고대부터 환경파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존재해왔다. 플라톤은 “그러나 당시에 그 지역은 아직 어떤 손길도 미치지 않은 온전한 상태였고(…) 산에는 저마다 큰 숲이 있었다(…). 그 지역에서 가장 면적이 큰 건물의 지붕을 덮을 만큼 많은 나무가 불과 얼마 전에 잘려나갔는데, 그 나무로 올린 들보들은 아직 건재하다. 숲에는 큰 과실나무들이 즐비했고, 땅은 가축들에게 먹일 풀을 한없이 내줬다(『크리티아스』, 111c)”라고 한탄했다.
숲은 생태학의 기원을 논하는 논쟁의 중심에도 자리한다. 이제 연구자들이 생태학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1858년에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국립공원 창설을 제안하면서 일어난 북미 지역의 환경보호 운동이 아니라, 영국 및 프랑스 식민제국의 열대지역에서 실시한 특정 정책들이다.(2) 감성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나무들의 세계는 이따금 ‘미래의 모델’(3)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도대체 이 세계에 무엇이 숨어 있길래 사람들이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영적이고 소통을 중시하는 감정적 관계를 강조하게 된 과정을 분석해야 한다. 이때 인간은 자기가 속한 환경과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많은 인기작가들이 이야기하듯 인간 외 생물에 대한 고려도 뒤따라야 한다. 애나 칭에 의하면, 인간 외 생물에게도 나름대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이런 감성을 ‘미숙하고 미개한 것’과 결부시키는 진보사상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이런 인류학이 과거를 찬양하는 함정을 잘 피할 것이라고 본다.
다만 그것은 극히 모호한 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실제적인 지배관계를 은폐하는 순리를 고수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틈에 후미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려면 우리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미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바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보다 자본주의에 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4)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애나 칭이 그토록 인상적으로 묘사한 이민자들과 취약계층 노동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바깥’이 어떤지 오히려 잘 모를지도 모른다.
철학자 에밀리 아슈는 『정치 생태학』에서 ‘새로운 미학,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필요성은 인간의 지질학적 영향력을 인정하는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 개념이 자리를 잡으면서 생겨났다. 숲, 나무, 식물을 비롯해 더 넓게는 인간 외 생물을 다룬 책들의 확산세 속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인식이다. 현재 출판시장의 관련 분야에서는 학계를 대상으로 한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의 저서(5)와, 독일의 삼림감독관인 페터 볼레벤이 대중을 위해 쓴 『나무 수업』(프랑스에서 25만 부 이상 판매)(6)이 가장 두각을 나타낸다. 이 두 저서가 기본적으로 여러 존재와 맺는 신비로운 관계를 찬양하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제는 우리가 세계와의 교감능력을 상실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무 숭배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호소하며, ‘최초의 인류’가 지닌 지혜를 찬미하라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최초의 인류는 ‘다른 지식’의 전달자로, 다른 지식이란 인간 존재의 잃어버린 의미를 탐색하는 활동의 산물이다.(7)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의 말처럼 ‘이 세상을 차지한 대부분의 존재들’, 특히 나무를 표현하는 방식이 문제라면 그런 ‘존재론적인, 또한 순수하고 우아하며 근본적인 전환점’(8)이 현재 진행 중인 생태재앙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인간과 인간 외 생물, 동일한 ‘우주적 전체’의 일부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은 아마존에 관한 글과 이미지, 사진들을 담은 매우 ‘아름다운 책’을 2003년 처음 내놨다.(9) 아마존 인디오 부족 추장인 다비 코페나와와 현재 가장 주목받는 인류학자로 손꼽히며 아마존 사회에 관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브루스 앨버트가 필자로 공동 참여했다. 야노마미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다비 코페나와는 환경보호에 기여한 공로로 국제사회에서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아마존 열대우림의 광활한 지역을 야노마미 공동체가 배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기도 했다. 이 책의 이야기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외면성(exteriority)과, 서구사상의 중심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야생적 사고’를 비교하기 위해 배치된 예술작품을 따라가며 두 개의 목소리로 전개된다. 그러면서 아마존 사회가 숲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과 샤먼의 중요성 등을 언급한다.
이 책은 인간과 인간 외 생물이 동일한 ‘우주적 전체’의 일부를 이루고, 동일한 ‘변모의 경제(économie des métamorphoses)’ 속에서 연결되는 세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책의 형식, 특히 사진의 미학적 측면을 보면, 이 인디오 추장이 모든 환경 단체가 그에게 기대하는 원시주의 담론을 되풀이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숲이 갖는 지상의 물질성은 이렇게 ‘백인들’은 절대 느낄 수 없는 ‘생명의 숨결’을 지니게 된다. 이를 통해 숲의 보호는 전면적인 정치적 명분이 된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포식당할(물론 절대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지만) 위협을 받고, 자연의 진실성과 동일시되는 인디오 공동체의 명분이다.
유럽으로 돌아와서 철학자 장바티스트 비달루(10)는 (기술적이고 공학적인) 행정이 조직한 지역망(maillage du territoire)의 역사를 다루면서 우리가 자연세계와의 교감에 실패한 것을 행정적인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여기에서 ‘터전을 떠나기(déracinement)’라는 주제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애나 칭이 묘사한 생태학적 재앙이라는 관점을 북돋운다. “우리는 계속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지구가 파괴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지 알지 못한다. 다행히 아직은 인간과 인간 외 생물 양쪽에서 동맹을 찾을 수 있다. 그래도 아직은 자본주의 질서와(…) 버려진 대농장들만큼이나 널려 있는, 살풍경한 가시덤불 주변을 탐험할 수 있다. 그래도 아직은 인간과 인간 외 생물이 공존하는 잠재적 공유지(communs latents)의 내음을 맡을 수 있고, 어렴풋한 가을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장바티스트 비달루는 서로 다른 동맹들을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주관성을 택하는 대신, 재앙을 예고하는 환경정책으로 즉각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이 시대는 오로지 ‘관리’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전력망을 관리하고 통제실을 관리하고 조종실을 관리하듯, 경제를 관리하고 인구를 관리하고 몸을 관리한다. 이 시대는 자신을 위해 천국을 짓기 원하지만, 생지옥에서 살고 있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지도는 이제 황폐한 풍경으로 쇄락하고 있다. 이쪽에는 살아 있는 것을 파괴하는 거대한 작업장이 있고, 저쪽에는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생명 다양성이 존재한다. 우리가 세상의 가장 작은 부분, 즉 엔지니어가 만든 세상에 갇히게 된 그 순간만큼 ‘지구’ ‘기후’ ‘지구 환경’이라는 말을 이렇게 많이 한 적은 없을 것이다.” 엔지니어가 만든 세상이란 ‘지상의’ 세계를 말한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로 넘어오면 이런 ‘지상의’ 감정은 엘리트들이 보여주는 냉소주의에 대한 정신적인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 세계화된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추진한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상당수 지도층이 이 땅에 더 이상 자신들과 다른 거주자들을 위한 공간이 충분치 않다고 결론을 내린 것처럼 모든 일이 흘러간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가 계속해서 우리를 공동의 영역으로 인도할 것처럼 행동해 봐야 소용없다고 마음을 정했다.”(11) 2017년 미국의 파리 기후협정 탈퇴는 가장 부유한 자들이 세계화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세계라는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분리주의 움직임을 표면화한 것이다. 이 ‘새로운 기후 체제’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터전에서 살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체제에 따라 ‘탈출의 꿈들’ 중 하나를 택하든지, 북반구나 남반구에서 모두가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을 찾든지 해야 할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전통적인 사회 대립 대신 여전히 실천 방식이 정립되지 않은 ‘지리-사회적 투쟁’을 내세운다.
숲의 열대생명체로 확장된 생체권력
적어도 장바티스트 비달루는 숲이 분쟁의 장소이자 쟁점인 갈등을 재검토해보려 한다. 그는 ‘자연을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한다는 선전’을 이해타산의 헤게모니가 역사적으로 완수된 징표로 본다. 경제성에 집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인간과 숲이 ‘존재론적 공모’ 관계에 있다는 믿음을 흡수하며 영토를 공학적으로 계획하고 정비하는 것보다는 세상과의 교감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세상 곳곳 어디에서나 이런 교감 불능이 지배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재앙이다. 세상에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선택해야 한다. 언젠가는 삶에 대한 애착과 보편적인 슬픔을 내세우며 삶을 파괴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삶의 고통을 가치 있게 만들어줄 유일한 정책이다.” 과학이 교양 있는 반자본주의자에게 제공하려 애쓰는 영혼의 보충물을 반자본주의자는 서점의 ‘영성(spirituality)’ 코너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 정책이 해체하려는 구조 안에서 또는 서점의 영성 코너 밖에서 이 정책을 어떻게 펼치겠는가? 대중적인 저서들로 성공을 거둔 천체물리학자 오렐리앵 바로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거의 손으로 만져질 듯한 직접성(immediacy)”(12)을 이야기한다. 일간지 <르몽드>는 여름 휴가철에 읽을 만한 책으로 ‘새로운 생태학적 사고’(13)를 담은 책을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감각적 세계의 신비를 확립하기 위해 브뤼노 라투르와 필리프 데스콜라가 내세운 것과 같은 지적 정당성들은 사실 그렇게 지나치다고 볼 수 없다. 자연과 사회의 ‘대분열’을 공격하는 움직임이 국제사회의 청중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의 캠퍼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랑스 이론(French Theory)’과 마찬가지로 이 저자들이 종종 난해한 담론과 급진적 외형을 둘 다 갖추고 있는 만큼 그런 현상은 더 주목할 만하다. 에두아르도 콘이 말한 것처럼 “정신적인 것과 그 외 나머지 세계를 분리하려는 경향을 없애야”(14)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생태적 재앙이 그 이유라면 이런 식의 결론은 관념론적 편견을 피할 수 없다.
설령 ‘서구식’ 합리성이 내놓은 미숙한 결과에 대한 책임이 육체-정신, 자연-사회로 세상을 가르는 이원론에 있다고 해도 단순한 정신적 측면의 구분을 없애고 ‘인류를 넘어선 인류학’을 통해, 그 결과물을 거부한다는 것은 근거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생명론은 생명이 물리-화학적 과정이자, 물질의 조직 원리로 작용하는 힘이라고 설명하는 철학적 전통이다.(15) 이런 생명론에 정신, 태도, 경제적 합리성을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사고의 힘을 전제하는 이상주의가 더해진다.
이에 대해 에두아르도 콘은 아마 “현재 우리의 분석틀로는 생물학적 세계가 생명체들의 사고로, 또는 의도-의미로 이뤄져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창조적 진화』(1907)의 저자이자 극히 보수적인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한 세기 전 아마존을 방문했다면, 그는 숲과 숲이 간직한 조상의 지혜에서 풍기는 원시생명론의 더 열렬한 찬미자가 되지 않았을까. 데스콜라는 이렇게 덧붙인다. “콘은 베르그송에 버금가는 생명론자이며 진정한 생명애를 지닌 사람이다. 기호는 물론 사고와 자기 조직적 현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물과 과정들은 살아있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움직임으로써 유동적인 상태로 활성화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효과를 만들고 이 세상을 이뤄나가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16) 그러나 효과를 내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면 순전히 현학적인 수사법에 속하는 것과 인간 외 생물에 관한 사실적 지식의 생산에 속하는 것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식의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가치 있고, 재규어의 꿈도 과학적 발표와 동일한 타당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학의 외연을 ‘인류 너머’로 확장시켜
그렇게 추상적으로 보면 인류학적 분석의 진실성은 루소의 견해보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듯하다. 루소는 인간에게서 인위적인 것과 “현재에도 없고 과거에도 없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없을” 자연상태를 구분하고자 했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학자 다비드 뒤물랭 케르브랑이 설명한 것처럼,(17) 사회학적으로는 오히려 지난 수십 년간 ‘생체권력(biopower)을 숲의 열대 생명체로 확장’시키게 된 대학의 변화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각국 정부에 생태계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생태계는 “하나의 상상물에서 다른 상상물로 변모했다. 먼저 생태계를 ‘숲’으로 보자, 그것은 마그마처럼 이름 붙이기 힘든 혼합물에서 종(種)과 관계의 경이로운 복합체가 됐다. 생태계를 열대의 야수로 보자, 그것은 인간을 위협하는 위험에서 귀중한 자원으로 탈바꿈했다.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부재하거나 수동적인 존재에서, 이제 자기가 살아가는 지역의 적극적인 수호자가 됐다.”
열대우림을 학계, 문화, 정치, 경제의 영역으로 도입하는 움직임은 과학 연구소뿐 아니라 ‘다양한 네트워크’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 “열대우림이 형성하는 시장을 이용하는 이 네트워크는 각각 특수한 지식-권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나무/숲을 탄소 포획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고 (…), 숲과 생물 다양성이 생태계 서비스(생태계가 직간접적으로 인간에게 이득을 주는 기능-역주)에 활용되는 것은 물론, (…) 숲의 이용가치도 빼놓을 수 없다. 열대우림을 문화유산과 ‘관광지’로 만들어 관광명소가 생겨나면 지역 활성화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숲의 숭배는 드디어 되찾게 된 감각적 세계와 단순히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숲의 숭배는 대중이 자연을 이용하는 행위가 ‘현지의 풍습’으로 길들여진 것이 아닌 한, 대중이 자연을 이용하지 못하게 체계적으로 소외시키는 행위에 포함된다.
그러나 숲, 자연자원을 사회적으로 이용하는 전체적 양상을 고려하는 편이 낫다. 이런 자원의 관리방식은 사유재산 체제에서 집단적(늘 합법적이지는 않은) 조직의 형식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18) 자본주의를 강화시킨 서구의 인클로저 운동(자유 방목지에 울타리를 두른 것)에서 숲이 정치적 쟁점이었다는 사실을 인류학자들이 늘 기억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에드워드 톰슨은 18세기 영국의 ‘흑인법’과 라인란트 목재 절도사건을 다룬 카를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을 분석했다.(19) 흑인법과 마르크스의 저작은 대중이 자연을 사용하면 범죄자 취급하고, 사유재산을 위해 ‘공공재산’을 파괴하는 행위들을 부각시켰다. 마르크스는 특히 “범죄 의도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죽은 나무 다루듯 이들을 범죄와 치욕과 비참함의 지옥으로 몰아넣는” 법률이 대지주들을 도왔다고 설명한다. 결국 “나무라는 우상이 승리하고 희생양이 된 인간들은 쓰러진다.”
20세기 이후 지배방식의 변화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숲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사회적 진보가 가능했고, 땅이 없는 농민들의 생활여건이 개선됐다”(20)라는 사실이다. 이는 숲을, 파괴된 세상에서 자연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근대적이고 영적인 존재로 재평가하는 것이다.(21) 이런 평가는 소지주들과, 자본주의가 이들에게 남겨주고자 하는 생활양식에 대한 ‘계급 경멸’의 한 형태와 유사하다.(22) 또한 ‘남반구’ 국가들과 자본주의 시스템이 남반구 국가들에 떠넘긴 개발방식에 대한 오만한 태도도 엿볼 수 있다. 나무의 신비주의 생태학은 ‘원주민들’이 숲을 이용하는 방식이나, 볼리비아나 브라질에 속한 아마존 공동체가 발전시킨 화전문화를 공격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세상 끝의 버섯』이 나름의 방식으로 여러 문제를 재해석했고, 그에 비춰볼 때 이 책이 숲의 은밀한 삶을 다룬 다른 저서들보다 탁월한 건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애나 칭처럼 오리건 주에서 일본에 이르는 ‘세계 시스템’이 ‘혼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사죄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인류학의 외연을 ‘인류 너머로’(23) 확장해, 인간 외 생물(그리고 비지배관계)을 ‘사회적 삶의 중심에’ 놓고 싶은 애나 칭의 욕구는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 그런 나머지 세계와 탐미적 관계를 맺는 데 만족한 채 “그 하나하나가 유일한 보물들을 찾아 헤매면서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세상들에서 군림하는 무질서를 샅샅이 뒤지기 위해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로 넘쳐나는, 얽히고설킨 관계들의 덧없는 순간들”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애나 칭의 다른 책 제목을 인용하자면 ‘파괴된 지구에서 살아가는 기술’(24)은 숲이라는 감각적 세계에 매몰돼 자신이 발명한 미학적 주제의 독특성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을 때나 발휘될 것이다. 인간 외 생물을 포섭한 이런 인류학은 결국 세계와 매우 특권적이고 차별화된 관계를 만들지 않을까? 즉 미국 서쪽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생각이 전혀 없고,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살아남을’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것도 그들이다. ‘빈곤층의 생태학’(25)이 존재한다면 마찬가지로 부유층의 환경보호주의도 존재할 것이다.
글·프랑크 푸포 Franck Poupeau
사회학자,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원
번역·조민영 sandbird@hanmail.net
번역위원
(1) Anna Lowenhaupt Tsing, 『Le Champion de la fin du monde. Sur la possibilité de vivre dans les ruines du capitalisme 세상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살아남을 가능성』, La Découverte, Paris, 2017.
(2) Richard Grove, 『Les Îles du Paradis. L’invention de l’écologie aux colonies (1660-1854) 천국의 섬. 식민지에서 생태학의 고안(1660-1854)』, La Découverte, Paris, 2013.
(3) Ernst Zürcher, 『Les Arbres, entre visible et invisible 나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서』, Actes Sud, 2016년.
(4) Anne Tsing,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 파리, 2020년 6월 14일.
(5),(8),(14),(16) Edwardo Kohn, 『Comment pensent les forêts. Vers une anthropologie au-delà de l’humain(한국어판 제목: 숲은 생각한다-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Zones sensibles, Bruxelles, 2017년.
(6) Peter Wohlleben, 『La vie secrète des arbres. Ce qu’ils ressentent. Comment ils communiquent』, Les Arénes, Paris, 2015년.
(7) Ernst Zürcher, 『Les Arbres, entre visible et invisible』, op.cit. David Abram, 『Comment la terre s’est tue. Pour une écologie des sens 숲은 어떻게 자살하는가. 의미의 생태학』, La Découverte, Paris, 2013년.
(9) Bruce Albert, 『Davi Kopenawa, Yanomami, l’esprit de la forêt 다비 코페나와, 야노마미, 숲의 영혼』, Actes Sud/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2003년.
(10) 『Etre forêts. Habiter des territoires en lutte 숲이 된다는 것. 분쟁지대에서 살기』, La Découverte, Paris, 2017년.
(11) Bruno Latour, 『Où atterrir? Comment s'orienter en politique 어디에 다다를 것인가? 어떻게 정치로 향할 것인가』, La Découverte, Paris, 2017년.
(12) ‘Aurelien Barrau sur le métier d'enseignant-chercheur en astrophysique(2/3) 오렐리앵 바로, 천체물리학 교육자-연구자라는 직업에 관해(2/3)’, 2019년 3월 9일, www.youtube.fr
(13) Nicolas Truong, ‘Le souci écologique à la source d’une révolution intellectuelle française 프랑스 지적 혁명의 기원에서 생태학적 관심’, <르몽드>. 2020년 8월 9일.
(15) Gilles Deleuze, 『Le Bergsonisme 베르그송주의』,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64년.
(17) David Dumoulin Kervran, ‘Tropicaliser la science. Politique du terrain et biologie tropicale 과학을 열대지역화하기. 지역정책과 열대생물학’, vol. 1, habilitation à diriger des recherches, sous la direction de Dominique Pestre, EHESS, 2018년.
(18) 밀렵에 관해: Sergio Dalla Barnardina(sous la dir. de.), 『L’Appel du sauvage. Refaire le monde dans les bois 야생의 외침. 숲에서 세계를 다시 만들기』,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2012년.
(19) Edward Thompson, 『La Guerre des forêts. Luttes sociales dans l’Angleterre du XVIIIe siècle 숲의 전쟁. 18세기 영국에서 사회 투쟁』, La Découverte, Paris, 2014년. / Karl Marx, 『Les débats sur la loi relative aux vols de bois 목재 절도 관련법에 관한 논쟁』, Œuvres III Philosophie, Bibliothèque de Pléiade, Gallimard, Paris, 1842년.
(20) Michael Williams, 『Deforesting the Earth. From Prehistory to Global Crisis』, An Abridgment,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년.
(21) ‘Vivre dans un monde abîmé 파괴된 세상에서 살기’, <Critique>, Paris, n° 860-861, 2019년.
(22) Guillaume Pitron, ‘Braderie forestière au pays de Colbert 콜베르의 나라에서 헐값에 팔리는 삼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10월호.
(23) Élise Demeulenaere, ‘L’anthropologie au-delà de l’anthropos. Un récit par les marges de la discipline 인류를 넘어선 인류학. 원칙 외적 이야기’, dans Guillaume Blanc, Élise Demeulenaere, Wolf Feueurhahn(sous la dir. de), 『Humanités environnementales. Enquêtes et contre-enquêtes 환경적 인간. 조사와 재조사』, Publications de la Sorbonne, Paris, 2017년.
(24) Anna Tsing, Heather Swanson, Elaine Gan et Nils Bubandt(sous la dir. de), 『Art of Living in a Damaged Planet. Ghots/Monster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2017년.
(25) Joan Martinez Alier, 『L’Écologie des pauvres. Une étude des conflits environnementaux dans le monde 빈곤층의 생태학. 전 세계 환경 갈등 연구』, Les Petits Matins, Paris, 2014년.
1회 20유로짜리 자작나무 껴안기 생태학에서 정치색을 없애는 기술은 서점의 ‘자기계발’ 코너나 대형 다국적 기업 홈페이지의 ‘기업의 가치’ 메뉴에서만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르 피가로> 웹사이트(Figaro.fr)의 ‘삶의 기술(Art de vivre)’ 메뉴에서 ‘정원’ 코너를 클릭해도 알 수 있다. 지난 7월 23일 게재된 ‘실보테라피(숲치료): 나는 어떻게 나무에게 말을 걸었는가’라는 기사가 그 예다.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을 되찾는 것이 건강에 필수적임을 증명했다. 소나무나 자작나무 껴안기는 실보테라피 요법으로,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해준다. 정말 효과가 있을까?” 다쏘 그룹이 소유한 일간지의 ‘대(大) 기자’, 알리예트 드브레-모뒤가 취재에 나섰다. “전(前) 프랑스산업연맹(Medef) 총수인 피에르 가타즈가 소유한 포도 재배지 샤토 드 산(château de Sannes)에 다녀와서 나는 그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이 기자는 송로버섯을 재배하는 조경사와 ‘기치료를 전공한’ 접골사를 대동하고 식물을 인터뷰했는데, 이때 보통 녹음기 대신 기의 흐름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구리막대 한 쌍을 이용했다. “나는 나무기둥에 귀를 대고 속삭인다. ‘너는 떡갈나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 순간 두 개의 막대가 갑자기 내 앞에서 서로 엇갈렸다. 긍정적인 답변이었다. ‘너 목마르니’ 나무가 다시 그렇다고 대답한다. ‘너 행복하니’ 분명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아니’라는 의사표현은 두 막대가 바깥쪽을 향하는 것이다.” 이 과감한 조사관은 “요정나무로 불리고 긍정적인 기운을 준다고 알려진” 버드나무 가지를 어루만지며 진실을 탐구한다. 기자로서의 직업적 긴장감을 포함해, 모든 긴장이 일시에 사라진다. 그리고 이 탐방 기사는 독특한 투어를 시작한다. 그녀가 설명하기를 피에르 가타즈는 “이 포도원의 방문객에게나 여기서 재배하는 포도에 긍정적이고 이로운 기운이 이곳에 넘친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두 드루이드(그는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에게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두 시간의 주말산책 프로그램을 기획해달라고 요청했다. 시대의 흐름을 포착한, 과감한 기획이다. 여름철 매주 토요일마다 실시하며 비용은 1회에 20유로다.” 마침내 자연-사회의 대화합이 상생의 길을 찾았다. 글·피에르 랭베르 Pierre Lambe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