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백서』와 『조국 흑서』는 무엇인가?
며칠 전, 우연히 들른 대형서점의 판매대에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권의 베스트셀러를 보게 됐다. 바로 『조국백서』와 『조국흑서』였다. 그냥 지나치면 서로 의견이 다른 두 집단이 자신들의 주장을 각각 책으로 묶어 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명색이 문화비평가인 내 눈에 이 ‘대립 구도’는 허투루 보고 넘길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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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나는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라는 책을 쓰면서 향후 일어날 ‘한국 지식인의 지형도’에 대한 개략적인 예상을 제시했다. 거기에 중요한 사례로 등장한 두 인물이 진중권과 이진경이었다. 사회주의자임을 공공연하게 선언했던 이들이 ‘좌파의 기호’로서 시장에서 교환되는 사정에 대한 분석을 나름대로 개진하면서, 둘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좌파성’이라는 상표를 붙인 지식상품을 파는 ‘지식 상인’이라고 나는 정의했다. 교환가치를 사용가치화하고 있는 ‘상품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의 차이는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유시민의 ‘지식 소매상’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다.
‘지식 소매상’이라는 용어법은 흥미롭게도 ‘원천 지식’에 대한 동경을 내포한다. 물론 이 말은 ‘지식 도매상’이라는 존재를 상정하지만, 그렇다고 ‘소매상’과 ‘도매상’이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차이를 통해 나눠진다고 할 수 없다. ‘소매상’이든 ‘도매상’이든 결국은 ‘원천 지식 생산자’의 지식을 ‘판매’하는 존재일 뿐이다. 말하자면 ‘지식 소매상’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원천 지식 생산자’가 되지 못하는 처지에 대한 자괴감을 깔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자기 성찰이 분명히 지식에 대한 독단주의를 경계하고 있음에도 실제로 상인의 처지를 강조함으로써 지식을 사고파는 거래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은 동일하다. 이런 관점에서 『조국 백서』와 『조국 흑서』를 보면 두 책이 나란히 판매대에 놓여 있는 현실은 결코 사소한 사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 사태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책의 등장은 1990년대 군사정권의 종식과 함께 황금기를 구가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종식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직 종식을 공식 선언하기에는 이르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조국 백서』와 『조국 흑서』의 출현은 ‘비판적 공론’으로 작동하던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념이 무력화됐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집필자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두 책은 공론이라기보다 특정 당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입장으로 수렴됐고, 오히려 공론장의 소멸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편파성을 비판하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또 다른 편파성 언론을 만들어냄으로써 ‘담론의 쟁투’를 유도하고자 했고, 그 대립구도가 만들어낸 결과는 공론장의 퇴거였다. 『조국 흑서』는 일정하게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책의 출간 이후 주요 집필자들이 보여준 행보는 ‘반대를 위한 반대’ 이상의 지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편들기를 통한 자기 세력 불리기’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런 대립구도에서 득을 보는 쪽은 『조국 백서』도 『조국 흑서』도 아닌 시장일 뿐이다. 마치 이들은 책의 판매량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객관적인 지표처럼 들이밀고 있지만, 어떤 정치적 주장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식은 결코 계량적인 수치일 수 없다. 정치적 정당성의 관철은 질적으로 다른 이념의 정립에 있는 것이지, 시장의 상품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책은 요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후 퇴행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보수주의로 포섭돼버린 한국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몰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의 공정성을 내세워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도착적인 인식체계는 이 두 권의 책 못지않은 판매량을 과시한 변희재의 『손석희의 저주』와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의 정당성을 스스로 인준해주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 독일 바이마르 시절에 히틀러에게 대중적 인지도를 안긴 계기는 바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나의 투쟁』 덕분이었다. 시장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계량화한 지표에 대한 맹목을 낳을 수밖에 없고, 이 맹목은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한다.
이 지점에서 환기해야 할 문제는 <조선일보> 반대 운동으로 표면화했고, 그 이후 진보적 자유주의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한국의 ‘지식인 문화’가 지난 ‘조국 사태’ 이후에 분열됐다는 사실이다. 이 분열은 그 문화를 구성했던 이른바 개별 지식인들의 이질성을 생각한다면 필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지식인 문화’의 의미를 되새겨본다면 이런 부침은 어제오늘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한국에 ‘지식인’이 공적인 표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한국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된 프랑스의 실존주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불문학자 김붕구를 비롯한 프랑스 유학파가 실존주의 도입의 채널이기도 했지만, 시인 김수영이 고백했듯,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아시아주의’의 자장에 있던 한국의 지식인들은 미국 문화보다는 유럽 문화에 더 높은 친화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독립노선을 표방하면서, 글로벌 냉전을 빗겨 간 표현의 자유를 특권적으로 누리고 있었다.
미국의 반공주의 선전 선동을 우습게 여기던 전후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실존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사르트르의 소련 사회주의 비판은 어떤 반공주의적 선전물보다도 강력한 울림을 제공했다. 이런 아이러니는 『조국 흑서』가 현 정부 지지자들보다도 현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더 깊은 공명을 자아내고 있는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진실의 결은 여럿이지만, 규범적 판단은 정해놓은 선택지 이외의 의미를 허락하지 않는 법이다. 이렇게 ‘반공주의’라는 표백제로 사르트르의 마르크스주의를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음에도 전후 한국의 지식인들은 실존주의에 내재한 미학적 차원을 지적인 제스처로서 전유하고자 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전후 한국의 지식인들은 비록 반공주의의 자장 아래에 있었지만 미국이 표상하던 자유민주주의의 전후 질서에 호락호락 순응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포섭 불가능하게 보였던 지식인들의 독자성을 제도 내로 끌어들인 것은 박정희 시대의 대학이었다. 이 참여 지식인들은 국가 발전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대학담론’을 수용함으로써 정치적인 존재 이유를 버리고 ‘주인 담론’에 충실한 종이호랑이로 변신했던 것이다.
김건우는 저서『대한민국의 설계자들』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대학교수가 당시 ‘문교부’의 관리와 통제를 통해 어떻게 착실한 ‘연구자’로 변모해갔는지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다. 한일협정반대 시위를 계기로 일선 대학에 하달된 정부의 지침은 ‘정치교수’를 축출한다는 명목으로 ‘교수들은 학생들을 선동하지 말고 연구와 교육에 힘쓰라’고 주문했다. 이런 관리와 통제는 연구비 지급과 같은 대학제도의 합리화와 함께 진행됐다는 점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에 충실한 대학교수들을 대학의 발전에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런 흐름은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학계 일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학문의 관제화’는 신자유주의의 본격 도입 이전부터 이미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른바 ‘연구 중심’으로 개편이 이뤄진 대학제도의 합리화는 연구재단에 등록돼 있는 학술지 이외의 매체에 실린 글이나 논문을 실적에서 배제함으로써 대학 담론과 그 외부를 단절시켰다. 라캉적 관점에서 대학 담론을 주인 담론의 반복 재생산으로 간주한다면 이런 결과는 대학 외부의 지식 생산을 무력화하고, 모든 지식을 ‘대학’이라는 하나의 채널로 통일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민주화 시기 한국의 공론장 형성에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적인 문학잡지의 급격한 쇠락은 이런 대학제도의 합리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모두 신자유주의의 ‘개혁’을 향해 질주하는 조건에서 대학만이 고담준론을 논하는 해방구로 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대세를 거스르기 위한 소수의 노력이 지지를 받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상태로 남게 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조국 사태’는 이런 맥락에서 그나마 대학의 안과 밖에 잔존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을 완전히 미궁에 빠트렸다고 할 수 있다. ‘폴리페서’라는 말로 ‘정치교수’를 질타하던 과거를 깨끗이 잊고 스스로 ‘정치교수’의 길을 선택한 조국은 차치하더라도, 한때 그와 함께 돈독한 우애를 과시했던 이진경과 진중권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 현기증 나는 이율배반의 소용돌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계의 진보를 설명하는 변증법은 이 혼돈의 상황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한때 99%의 정치를 주장했던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투자’를 정치적 정당성과 맞바꿔버렸다. 이를 비판하고 나선 비판자들 역시 현실의 교착상태를 넘어설 새로운 이념적 지표와 연대를 모색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지분을 늘리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과정에서 ‘플랫폼 노동’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팬데믹을 빙자한 구조조정과 불평등의 심화는 철저하게 사각지대로 밀려나고 있다. 노동자는 이제 하나의 ‘인종’으로 전락해 의회정치의 스크린에 아예 비치지도 않는다. 도덕적 우월성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던 소위 진보적 민족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과감하게 ‘탈도덕주의’를 선언하면서 자신들의 타락을 정당화하고 있다. 도덕적 우월성마저 집어던진 이 정치집단은 지금까지 비난해온 반대편 정치집단과 자신들을 구별해주던 유력한 지표를 자진해서 포기해버렸다. 그람시가 이탈리아의 정치구조를 진단하면서 사용한 ‘변형주의’의 한국판이 이렇게 완성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급적 불평등을 세대의 문제로 위장하는 보수언론의 논조를 그대로 받아쓰는 기성정치의 구태는 이런 상층 엘리트만의 권력교체가 사실상 지금 현 상태의 유지보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물론 나는 이 분열을 극복하고 한때 한국에서 작동했던 자유주의적 공론장을 다시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전진의 열망 이외에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공론장은 공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의지를 발현하는 주체의 정향에 다름 아니다. 비판적 지식인의 소멸과 지식집단의 분열은 이런 주체의 정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말하자면, 지식인의 종언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제기해야 할 질문은 왜 한국의 99%는 더 이상 공론을 원하지 않게 됐는가에 대한 것이다. 국가와 복지에 대한 요청은 분명 과거보다 강해졌지만, 그렇다고 이런 요청이 좌파적인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는, 강력한 공권력이 나서 상대방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합의가 횡행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억제의 명령으로 작동했던 국가 안보의 논리가 개인의 안전 논리로 바뀌었을 뿐, 근본적인 내용이 달라진 것은 없다. 이른바 87체제의 민주주의는 중간계급의 평등주의를 연료 삼아 지금까지 움직여 왔지만, 그 평등주의는 ‘내 가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의회정치가 제공하는 민주당과 국민의 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선택의 자유’를 빙자한 강요만 남은 것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끔찍한 현실이다. 『조국 백서』와 『조국 흑서』로 나뉘어서 흑백의 논리만을 고집하는 이 현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이 이분법의 폭력에 숨이 막혀서 탈주해야 한다. 각자가 안주하고 있는 평등의 고원에서 내려와서 그 고원 자체를 없앨 방법을 논의해야 할 시점임에도, 모두 자신의 고원에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열성적으로 철벽을 두르기에 바쁘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누구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시를 되뇌어볼 수밖에 없는 오늘이다.
글·이택광
경희대학교 교수, 문화평론가. 저서로 『이현세론: 영웅 신화와 소외성의 조우』(1997),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2002),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2007),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20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