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미래에의 향수

2020-10-05     에블린 피에예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청년들이 부모세대의 음반 수집에 열을 올리는 것은 예전 문화상품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롤링스톤즈, 비틀즈, 데이비드 보위 등 ‘과거 히트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시대의 정신에 다시 몰입하는 것이며, 그 시대를 뒤흔든 유토피아와 접촉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대사조라는 것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콧노래를 통해 퍼지는 시대사조는 마음을 춤추게도 하고, 긴장하게도 한다. 21세기 초 현재 프랑스 사상의 흐름은 이중적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패트릭 브뤼엘은 옛날 노래 <몽마르트의 언덕>(원제: 언덕의 한탄의 노래)을 다시 불러와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브리지트 퐁텐은 싱어송라이터 M과 협업해 1944년 발표됐던 <내 지역에 재즈광이>를 경쾌하게 재탄생시켰다.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인기가수 조르주 브라생이나 바비 라포앵트의 노래와 공연만 기다릴 필요가 없다. 쉴라가 돌아왔고, 조니는 절대 떠나지 않으며 르노드는 몇 년간의 침묵을 깨고 ‘친근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세르주 갱스부르와 프랑수아즈 아르디는 아이콘이자 뮤즈다. 그리고 또… 아, 참 희한한 일이다!

오래전에 ‘레트로(Retro)’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회상’이라는 뜻의 영어 ‘Retrospect’의 약어로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 등을 그리워하는 성향을 말한다. 요즘 추세가 진정한 의미의 ‘레트로’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히 과거 노래를 기념하는 것 이상으로 이를 가져와 현재에 맞게 배치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오늘날의 취향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잊힌 것을 되살리기보다 새롭게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전 세대와 긴밀히 연결하고, 그 문화를 지속시키며 이어지는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더 행복했던 시대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전 시대, 다정하고 친근한 (‘아멜리에’ 신드롬을 불러왔던) ‘불변의’ 파리 시대를 꿈꾼다. ‘도시’가 없고 대신 교외는 존재했던 시대, 사랑과 우정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시대를 말이다. 

그러나 이 향수가 이처럼 풍성하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퍼져나가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불안과 상실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프랑스의 기억을 드러내려는 욕구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초, 미래는 흐릿했고 혹은 위협적이었다. 현재는 혼란스럽고, 세계화와 결합한 유럽화는 프랑스 정체성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문화 다양성을 위한 문화적 예외’ 개념의 성공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여기서 ‘재연’과 ‘귀환’이라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다. 때때로 대중정서는 노래로 구현된다. 공동의 판타지와 감정이 노래가 되고 유명해진다. 

 

부모의 젊은 시절을 닮은 미래에의 향수

‘노래’는 자신을 찾으려는 욕망이다. 전달되는 기억이 있고 과거와의 단절도, 이별도 없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역사에 남고자 하고 역사의 흐름을 따라 역사를 노래하고, 역사를 자신의 책임으로 회복하려는 필요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순? 그렇다. 반항? 맞다. 그러나 포퓰리즘과 대중주의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날로 심각해지는 실업문제 등 암울한 현실 속에서 청춘이 과거의 노래 속에서 힘을 찾는 것은 낙관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현대성이란 자신의 유산을 깨닫고, 그 유산이 감각을 되살리는 공동자산임을 아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로큰롤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노장’이 귀환했다. 세대 간에는 항상 충돌이 있었고, 결국 항상 새로운 것이 과거의 것을 쫓아냈다. 그런데 이제 가족이 함께 콘서트에 모여, 같은 노래를 듣고 박수를 보낸다. 부모 세대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그 자리에 왔을 것이다. 자녀 세대를 그 자리로 이끈 것도 ‘향수’다. 다만, 부모의 젊은 시절을 닮은 ‘미래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자신들의 부모들이 세상을 바꾸고자 세상을 거부하며 노래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로큰롤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팝 혹은 메탈로 명명됐으나 뭐라고 불리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록은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거부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란, 이의, 항의를 내포하고 상징한다. 

물론 청년 역시 그들의 음악, 그들만의 음악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음악 중에서도 그들 부모의 청년시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 제브다의 앨범 제목을 되찾기 위해 청년들은 ‘기회의 유토피아’를 찾게 될까? 이들은 단순히 이전 세대의 꿈을 회복하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부모들도 자신들과 소통이 가능하고, 여전히 매력적이며, 변화욕구가 넘치는 분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부모세대가 오래전 그들 역시 불만을 외쳤던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들에게 별로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물려준 배신자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 아마도 그들은 이상을 찾을 것이다. 2017년 프랑스 대선 1차 투표 후 그들이 보여준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향수’는 새로운 지평을 열지 않을까? 마누 차오가 <가까운 장래에 희망을>에서 노래했듯이 말이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문학과 예술 비평가. 극작가 겸 영화배우. 격주간지 <La Quinzaine littéraire>에도 비평 기사를 쓰고 있다. 영화 ‘L'inconnue de Strasbourg’(1998)를 비롯해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북아프리카 배경의 영화 ‘Ya bon les blancs’(1988, 프랑스)에는 배우로 출연했다. 저서로 『Le Grand Théâtre』(2000),  『L'almanach des contrariés』(2002), 『Une histoire du rock pour les ados』(Edgard Garcia 공저, 2013) 등이 있다.

번역·이정민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