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게 바그너는 여전히 금지곡인가

2020-10-05     에드워드 W. 사이드 l 전 컬럼비아 대학교 비교문학 교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은 그의 반(反)유대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행위일까? 예술가와 작품을 분리하는 문제는 꾸준히 문화계를 뒤흔들고 있다. 2001년 7월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스라엘에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연주했다가 이스라엘 당국으로부터 보이콧을 당했다.  

그때부터 바렌보임은 비판과 비난과 격분한 훈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바그너(1813~1883)는 위대한 작곡가이긴 했으나 동시에 유명한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사후에 아돌프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바그너는 나치 체제와 연관성을 가졌고, 나치 체제 속에서 학살당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과 ‘열등한’ 민족들에게는 끔찍한 악몽으로 여겨진다. 

바그너 음악이 때때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판매 기록에서 발견될 때도 있지만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음악을 공적으로 공연하는 일은 금지돼 있다. 풍부하고 유난히 복잡하고 음악계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음악은 많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한마디로 독일 반유대주의 공포를 상징한다. 유대인이 아닌 많은 유럽인도 비슷한 이유로 바그너를 거부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치하에서 고생했던 국가 내부에서는 특히 더하다.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은 화려하고 ‘게르만적이며(남용되는 형용사다)’ 오만하다. 바그너는 생전에 역사, 신화, 전통, 게르만족의 성과에 집착하고 열등한 인종과 숭고한 (게르만) 영웅에 대해 온갖 수식어를 써가며 끈질기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 때문에 바그너는 수용하기 힘든 나아가 호감과 경탄을 보내기는 더욱 어려운 인물이 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연극과 음악 방면에서 이론의 여지 없는 위대한 천재였다.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오페라 개념을 뒤엎고 화성을 완전히 바꿨다. 10편의 걸작과 서양음악사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10편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바그너가 이스라엘 유대인을 비롯해 인류에게 남긴 과제는 이것이다. 그의 가증스러운 문장과 나치와의 연관성을 별개로 그의 음악을 감상하고 해석할 방법이 있을까?

바그너의 오페라 중 직접적으로 반유대주의적 요소를 담은 작품은 없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바그너가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담은 비방 글은 썼을지언정 그의 음악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즉, 바그너는 현실에서의 유대인과 음악에서의 유대인을 구분하고 있었다. 반유대주의에 관해 글 속에서는 장황하게 말했으나, 음악 속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히틀러가 좋아했던 작곡가 바그너  

시카고 교향악단 외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지휘자인 바렌보임은 이스라엘에서 세 번 연속적으로 콘서트를 선보였다. 그는 원래 2001년 7월 7일에 오페라 <발퀴레>의 1막을 공연하려고 계획했었다. 바렌보임과 그의 독일 오케스트라를 첫 번째로 초대했던 이는 이스라엘 국립 음악축제 주최 측이었다. 이들의 요구로 바렌보임은 <발퀴레> 대신 로베르트 슈만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작품으로 공연 곡을 바꿨다. 콘서트가 끝날 무렵, 바렌보임은 관객들에게 앙코르곡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연주하겠다고 제안했다. 청중 가운데서는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바렌보임은 앙코르곡이 듣기 싫은 사람은 나가라고 말했고, 결국 몇몇 관중이 자리를 떠났다. 바그너의 작품이 2,800명의 이스라엘 관중으로부터 박수를 받았으니 엄청나게 연주를 잘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바렌보임을 향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2001년 7월 25일, 문화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의회 위원회 측에서는 “이스라엘 문화 기구에 바렌보임이 사과하지 않는 한 그를 보이콧하라”고 지시하며 다음과 같이 이유를 설명했다.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문화행사에서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작곡가의 곡을 연주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바그너가 무명 음악가였다면 그를 둘러싼 모순을 묵인하거나 수용하는 것이 한층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발표와 초안, 음악은 유럽을 가득 메웠고 급격히 확산됐다. 다른 음악가와는 달리 언제나 대중을 휩쓸어 버리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모든 자신의 작품 속에서 바그너는 왕좌에 군림했다.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자아도취적이었던 그는 심지어 자신의 자아, 운명, 특권은 독일 영혼의 정수를 구현한 것이라고 믿었던 인물이었다. 

지금 여기서 바그너 작품을 논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바그너가 논쟁과 관심을 추구했던 것은 분명하다. 독일의 신조와 뒤섞였던 바그너의 신조는 가장 극단적이고 혁명적인 방식으로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의 음악은 새로운 음악, 새로운 예술, 새로운 미학이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전통을 구현하고 전부 합성해 전통을 초월한 새로운 집대성을 이뤘다. 예술사에서 바그너는 상당히 관심을 끈 인물이며 그만큼 많은 글과 논평을 불러일으킨 인물도 드물다.

나치가 바그너의 업적을 가로챘다 해도 다른 음악가들이 그를 영웅, 위대한 천재로 여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바그너의 성과가 서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바그너는 생전에 개인 오페라 극장을 소유했는데 그곳은 그의 은신처였다. ‘바이로이트’라는 소도시에서 자신의 작품을 상연하기 위해 그가 직접 설립한 극장이다. 매년 바이로이트에 있는 이 극장에서는 오로지 바그너 작품만 상연하는 축제가 열린다. 게다가 히틀러는 바이로이트와 바그너 가족을 몹시 아꼈다. 바그너의 손자인 볼프강 바그너(1919.8.30~2010.3.21)는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여름축제를 주최했는데 바렌보임은 이 축제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했다. 

바그너와 바렌보임 문제는 지휘자 바렌보임을 기회주의자와 중립적인 모험가 중 어느 쪽으로 보는지와 연관이 깊다. 바그너는 반유대주의 사상을 가진 끔찍한 인간이니 그의 음악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우리가 모든 작가, 음악가, 시인, 화가들의 작품을 창작자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모두 걸러낸다면 과연 남아나는 것은 몇이나 될까? 또한 예술가의 작품에서 추악함과 비열함을 어디까지 허용할지, 그 수위는 누가 결정할 것인가?

 

예술을 향한 열린 마음

한번 규제하기 시작하면 이론상으로는 끝이 없다. 필자가 보기엔 오히려 이런 사안은(비슷한 일례로 나이지리아 작가 치누아 아체베는 오늘날 아프리카인에게 있어 조셉 콘래드의 소설 『Heart of Darkness 암흑의 핵심』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관한 문제를 두고 유명한 에세이를 남겼다) 복잡한 현상을 분석하고 예술과 악을 구분하는 정신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숙한 정신은 두 가지 모순된 사실을 이해시킬 것이다. 첫째, 바그너는 위대한 예술가라는 사실이다. 둘째, 바그너가 추악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불행히도 이 두 사실은 같이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바그너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바그너와 홀로코스트의 조합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바그너 음악을 들려줄 필요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예술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비도덕적이고 악한 행위를 저질러서 비난을 받아 마땅한 예술가들을 도덕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술가의 작품은 오로지 그 작품만으로 판단 받고 잘못된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바렌보임이 2001년 7월 7일 그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언젠가는 연주했을 것이다. 복잡한 현실은 언제나 봉인을 뚫고 나오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는 바그너 현상을 이해하는 문제다. 바그너 현상을 인정하거나 바그너 존재를 인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글·에드워드 W. 사이드 Edward W. Said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비교문학 교수. 2003년 9월 사망. 주요 저서로는 『문화와 제국주의』(Fay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파리, 2005)가 있다. 

번역·이정민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