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로 보는 지정학

2020-10-05     알리오샤 발드 라조브스키 l 작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현대 문화의 매력남, 제임스 본드는 1953년 이언 플레밍이 자메이카에 있는 그의 별장 ‘골든아이’에서 창조한 인물이다. 1908년생 이언 플레밍은 로이터통신 특파원을 거쳐 상업은행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 정보국에 채용됐다. 그는 훗날 통신장교로 활동한 경험을 소재로 첩보소설을 썼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007시리즈의 첫 작품 『카지노 로열』로, 두 달 만에 써낸 소설은 런던 소재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이 소설은 1954년에 베리 넬슨이 주연하는 CBS 방송국 드라마로 각색됐다. 이후 1967년 존 휴스턴이 감독하고 데이비드 니븐과 피터 셀러스가 출연하는 패러디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2006년에는 6대 제임스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가 주연하는 007시리즈 21번째 영화로 재구성됐다. 소설판 『카지노 로열』에는 영국 정보국 MI6의 비밀요원 007이 등장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존 르카레도 MI6를 배경으로 전혀 다른 스타일의 첩보물을 선보이는데, 플레밍은 두 가지 전통 장르에서 영감을 얻어 제임스 본드라는 인물을 창조해냈다. 

그 중 하나는 양차 대전 사이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미국의 경찰 수사물로,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1930)가 대표적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립탐정(샘 스페이드)은 제임스 본드의 첫 번째 모델이 됐다. 두 번째 장르는 영국의 지정학적 이해를 다룬 모험소설로, 존 버컨의 『39계단』(1915)처럼 국가를 위협하는 비밀결사단의 음모가 플레밍의 단골소재가 됐다. 그렇게 플레밍은 장편소설 12편과 단편소설 2편에서 두려움을 모르고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소유한 슈퍼 히어로를 완성했다.

제임스 본드는 상류사회의 시각에서 영국을 완벽히 대변한다. 본드는 헨리 6세가 설립한 엘리트 학교 이튼스쿨에 다녔고, 해군 중령 신분에 세인트 마이클 앤드 세인트 조지 2등급 훈장(KCMG) 수훈자이기도 하다. <007 여왕폐하 대작전>에는 제임스 본드가 1734년 작고한 페컴 남작 토마스 본드 경의 후손이라는 설정이 등장하며, 본드 가문 휘장에는 ‘세계는 충분하지 않다(Orbis non sufficit)’라는 라틴어 문구가 적혀있다. 그의 이름은 런던의 명품점과 미술관이 즐비한 본드 가(Bond Street)와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젠틀맨 클럽이 있는 피커딜리의 세인트 제임스 가(St James’s Street)에서 각각 따왔다.

<007 살인번호> 첫 장면은 런던의 사설 카지노 앰배서더의 르 세르클(Le Cercle, Les Ambassadeurs)에서 전개된다. 제임스 본드는 흠잡을 데 없는 턱시도를 입고 세련되고, 말쑥한 자태로 각종 기계장치와 특수효과 사이를 넘나든다. 흡사 사교계 인사와 노름꾼의 전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들은 각자 걸어온 인생 여정을 투영해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했다. 예컨대 스코틀랜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선원부터 배달원, 석공까지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친 숀 코너리를 통해 007은 ‘성공과 성취’의 일면을 보여줬다. 반면 잉글랜드 출신인 로저 무어는 진지함을 비웃는 유머로 자기 자신과 관습에 조소를 보냈다. 

웨일스 출신 티머시 돌턴은 인물에 미국적 색채를 부여했다. 티머시 돌턴이 연기한 007은 1980년대의 경제 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규범을 대변했다. 가장 최근에 제임스 본드로 분한 대니얼 크레이그는 신체 기량과 전대미문의 멜랑콜릭한 분위기를 겸비한 어둡고 불안정한 주인공을 연기했다. 하지만 주연 배우가 바뀌더라도 변치 않는 제임스 본드의 특징은 그가 영국인으로서의 신념과 영국의 영광을 인격화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활약 장면마다 비치는 유니언잭

이를테면 제임스 본드가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에서는 종종 영국기인 유니언잭(Union Jack)이 보인다(<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낙하산, <007 옥터퍼시>의 열기구, <007 뷰 투 어 킬>의 잠수함 장면). 본드는 세계 어디에서든 그 시대의 지정학적 여건에 따라 영국의 색채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007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가 개봉될 무렵인 1962년 10월 5일, 크렘린궁(러시아 정부)은 카마(Kama) 작전을 개시해 미국 플로리다에 인접한 쿠바에 소련 잠수함을 보냈다. 이를 감지한 미국 선박 여콘(Yerkon)호는 국방부에 즉시 상황을 전했다. 

한편 영화에서는 악당 닥터 노(Dr. No)가 카리브해에 소유한 비밀기지 섬에서 꾸미는 핵 위협으로부터 영국 비밀정보국(MI6)이 케이프 커내버럴(Cape Canaveral)의 공군기지를 보호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반면 현실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ouchtchev) 서기장과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사이에서 일어났다. 영화와 소설의 미묘한 차이가 또 하나 있다. 소설은 영국의 외교력을 부각시켰지만, 이에 반해 영화는 국제무대에서 기울어가는 영국의 위상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본드가 활약하는 국제무대에서 영국은 제국의 종말을 맞아 힘을 잃었고 미국에 밀린 채 과거의 위신을 유지하려 분투했지만, 본드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영국의 정치적·외교적 위상을 높인다. 

첫 영화가 개봉한 해인 1962년에 영국과 미국은 바하마 제도의 나소에서 협정을 조인해 군사동맹을 맺었고, 영국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체제에 속하게 됐다. 또 다른 타격은 윈스턴 처칠 총리가 사임한 지 7년 만에 서인도 제도, 자메이카, 케이먼 제도,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영국의 해외영토였던 서인도 연방이 해체된 것이다. 딘 애치슨 전 미 국무장관이 “제국을 잃어버린 영국은 아직 본연의 역할을 찾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던 것처럼 당시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영국의 위상에 대한 의구심이 번지고 있었다. 제임스 본드가 영화에서 냉전과 식민지의 독립을 배경으로 보여준 영국에 대한 헌신은 그런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순적인 영국 신사 제임스 본드는 영향력을 상실한 영국인들에게 위로를 선사했다.

60년에 걸쳐 제작된 총 25편의 영화는 1960~2020년에 걸쳐 ‘세계의 규범을 선도하는 서구사회’라는 공상 세계를 보여주면서 진화를 거듭했다. MI6의 위장회사 역할을 하는 유니버설 무역회사(Universal Exports LDT)에 제임스 본드가 처음 들어가는 시점부터 줄곧 착용한 모자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시각각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1967년 베트남 전쟁과 히피 운동을 거치면서 다소 변화가 나타났다.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저자 로알드 달(Roald Dahl)이 각본을 담당한 <007 두 번 산다>에서 훗날 ‘이타성’으로 불릴 만한 영역까지 확장된다. 

그는 세계의 변화와 문화 다양성을 수용하고,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요소와 융합하며 자기 변천의 시학을 써 내려간다. 이 영화에서 본드는 빅벤과 템스강을 뒤로하고 일본문화에 해박한 탈식민주의 영국인으로 변신한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동양어학으로 학위를 받고 도쿄에 가는데, 동양예술에 관한 관심과 다이긴조(大吟醸) 사케, 일본 속담에 관한 지식을 뽐내는 등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면서 일본의 비밀 정보국 수장 타이커 다나카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다. 

 

기모노를 걸치고 터번을 두른 본드

제임스 본드는 총 세 단계에 걸쳐 변신한다. 우선 꽃이 만개한 궁전에서 그는 신체적 변신을 보여준다. 수술대에 누워 금빛 기모노를 걸치고 신체와 머리카락, 눈썹 모양을 바꾼 그는 일본인이 된다. 다음은 기예와 정신의 변신이다. 주인공 본드는 MI6 무기 담당관 Q가 고안한 정교한 첨단무기를 버리고, 닌자학교 수예당에서 삼지창, 수리검 등 재래식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 마지막 변신은 문화와 사랑이 결부된 것이다. 본드는 엄격한 관습에 따라 사원에서 혼례식을 올린다. 기도문을 읽고 노래를 부르며, 정결의식을 치르고 마침내 키시 스즈키와 부부가 된다. 어부 복장을 한 본드는 아내와 함께 열도 중심부에 있는 작은 섬 ‘마주’에 정착한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년)에서 제임스 본드는 베두인으로 변장해 사막을 조용히 여행하며, <007 리빙 데이라이트>(1987)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 무자히딘 터번을 두른 채 말을 타며, 이름까지 바꿔버린다. 가짜 소련인 신분증을 쓸 때는 예지 본도프라는 인물이 된다.

플레밍은 유명한 첩보원들의 이미지를 가져오기도 했다. 세련된 이미지를 지닌 우크라이나 태생의 시드니 라일리, 민첩한 반공주의자 캐나다 비행사 출신 윌리엄 스티븐슨, 여색을 밝히고 사교계를 즐겨 드나든 상류층 신사 윌프레드 던더데일, 민간인을 구하려고 상부 명령에 불복한 일화로 유명하며 플레밍과 함께 활동했던 해군장교 패트릭 데즐잡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플레밍에게 진정한 영감을 선사한 인물은 영국인이 아니라 세르비아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냉전을 초월해 소련요원들과 협력한 본드

1912년 보이보디나에서 태어난 수수께끼 같은 멋쟁이 두스코 포포프는 술과 카지노, 고급 호텔과 스포츠카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플레이보이 포포프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이중첩보원으로 암호명은 ‘삼륜차(Tricycle)’였다. 전쟁 중에 그는 독일에 관한 정보를 영국에 알렸다. 포포프는 진주만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에게 경고하기도 했지만, 후버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플레밍은 1941년 포르투갈 에스토릴에서 바카라 게임을 하면서 침착하게 블러핑을 날리는 포포프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아 제임스 본드의 모델로 삼았다. 이에 대해 포포프는 자서전에서 ‘지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평가했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했듯 플레밍의 소설은 ‘뿌리 깊은 반공주의’ 경향이 짙지만,(1) 때때로 반전을 보여준다. 본드는 미국보다 소련 비밀기관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영국과 소련 사이의 지정학적 관계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본드는 냉전적 적대감을 초월해 소련 요원들과 협력한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KGB 요원 안야 아마소바나, <007 뷰 투 어 킬>(1985)의 공작원 폴라 이바노바, <007 옥터퍼시>(1983)의 고골 장군이 본드의 협력대상이다. KGB와 MI6가 협력하는 반면 영국과 태생적 동맹인 미국의 CIA는 서툴고 어리석은 펠릭스 레이터 같은 인물을 통해 조롱거리가 된다. 영화에서는 현실과 허구의 대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의 국익을 수호한다는 구실로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정부를 상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상영된 <007 뷰 투 어 킬>에서 제임스 본드는 KGB의 수장 고골 장군으로부터 레닌 훈장을 받는다. 이처럼 새로운 영국과 소련 간의 우호적 관계 덕에 주인공은 작품 속 모든 국가의 적인 국제 범죄조직 스펙터(SPECTRE)에 맞선다. 본드는 세계적인, 공동의 위험에 맞서기 위해 자기 진영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초월해 ‘자유세계’의 적과 동맹을 맺어 생산적인 방법으로 ‘소프트 파워’를 발휘한다. 결국 영화는 ‘영국의 위대함’에서 나아가 ‘인류 수호’를 지향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글·알리오샤 발드 라조브스키 Aliocha Wald Lasowski
저서 『제임스 본드에 관한 다섯 가지 비밀』, Max Milo, 파리, 2020.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Umberto Eco, ‘서사적 조합으로 이뤄진 제임스 본드 James Bond, une combinatoire narrative’ in Communications, 제8호, 파리,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