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즘과 겁쟁이들의 미래
지진이 발생(3월 11일)하고 보름이 지난 3월 하순이었다. 내가 재직하는 대학에서 교원들의 연도말(年度末) 회합을 할 때, 모임을 주최한 한 교원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상황이니까 첫 건배는 그만두겠습니다.” 건배를 생략하는 것과 지진 혹은 원전 재해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을 ‘시국’으로 환언한다면, 이 말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여러 가지 행사에서 나왔던 바로 그 구호가 아닌가. 도대체 무엇이 ‘이런 상황’이란 말인가. 관계없는 일을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 선의의 말투에서, 나는 미심쩍음을 넘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힘내자 일본”의 압박과 공허함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고베 대지진) 때는 ‘힘내자 고베’였는데 어째서 지금은 ‘힘내자 일본’이란 말인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힘내자’고 호소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에 힘쓰자는 것인가.
3월 11일부터 일본 여론은 경탄과 불안이 착종하면서 ‘큰일이다’ 혹은 ‘힘내자’라는 태도를 계속 표명할 수밖에 없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당한 구성원이라는 증거를 내세울 것을 강요하는 기제임과 동시에, 어떤 종류의 사고 정지가 만연한 상태처럼 보인다. 사고 정지 상태에서는 ‘시국’ 혹은 ‘지금은 중대한 시기니까’라는 공허한 말을 머리에 새겨넣게 되고, 그로 인해 당연히 해야 할 토론이나 문제 제기를 봉쇄해버리면서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만 전개된다.
지금 진행 중인 사태는 느닷없이 찾아온 대지진과 대재해, 그리고 복구라는 단선적인 움직임이 아니다. 원자력발전소의 사고, 그것을 둘러싼 도쿄전력이라는 거대 자본의 움직임, 국가의 대응, 지역사회 문제, 더 나아가 대학이 전유해온 지식에 대한 질문, 3월 11일 이전 사회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포함하면서 진행되는 중층적 사태다. 이 사태를 하나의 측면으로 환원해 알기 쉽게 설명할 것이 아니라, 중층적 움직임이 총체로서 어디로 향하려는지 생각하는 것이 이 시기에 중요한 문제이다.
모든 신문이 지진으로 사망한 이들을 매일 보도하던 와중에, 지난 4월 10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이시하라 신타로가 차점 후보와 압도적인 표차를 벌이며 재선됐다. 그의 승리는 예상한 바였지만, 그래도 개표 시간에 선거 속보를 보려고 텔레비전을 켰다. 그는 이미 당선돼 있었다. 이 시점에 이시하라란 말인가.
암담한 기분이다. 진작부터 이시하라는 ‘지진 재해 방지’를 모토로 내걸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재해 방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다고 하는 편이 옳다. 그가 도지사가 되자마자 착수한 대규모 재해 방지 훈련은, 미래의 지진에 대한 준비라기보다 현재의 테러 대책을 명목으로 한 치안 출동 훈련이었다. 이 훈련에서 경찰과 소방대원만이 아니라 자위대와 미군을 긴급출동이라는 형태로 일체화했다. 그것은 글로벌하게 진행되고 있는 경찰의 군사화, 혹은 미군의 경찰화를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재해공동체’라는 치안 스테이트
이시하라는 일본의 패전 직후, 재일조선인과 재일중국인을 향해 던진 ‘삼국인’(三國人)이라는 말을 이 ‘○○인’으로 표현했다. 이 발언은,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 때 일반 시민과 군, 경찰이 하나가 되어 조선인·중국인·사회주의자를 상대로 일으켰던 학살 사건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와 똑같은 폭력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예감하게 한다. 따라서 이시하라의 재해 방지 훈련은 이미 비상사태 선언이고, 그것은 지금 학교나 지역 주민을 자원봉사자로 동원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다치카와 자위대 기지에서 기지 반대 투쟁을 전개하는 이노우에 모리는 이시하라의 재해 방지 훈련을 ‘재해방지공동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1)
이 공동체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적을 설정해 그곳에 증오라는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구성되는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이다. 이런 ‘적 찾아내기’의 배후에는 개개인이 품고 있는 불안이 있다. 이들 마음속에 내재된 불안을, 공통의 적에게 증오로 묶어내는 것이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이 공동체가 ‘긴급사태’라는 이름 아래 일상에 침투하는 군사력에 의해,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는 사람들을 적발해 진압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사회 형태란 것이다.
묘한 말의 감각이 엄습하고 있다
불안이 만연한 상황에서 재해방지공동체야말로 이번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이시하라에게 보내준 것이다. 그리고 재해방지공동체는 복구 작업과 중첩되면서 공허한 ‘힘내자 일본!’의 내실이 되어 전국에 등장하고 있다.
자위대의 활약은 영웅담으로 이야기되고, 한반도에 관한 군사 행동을 상정한 일-미 방위협력 지침에 근거한 미군의 재해 방지 지원(‘도모다치(친구) 작전’)은 선의로 이해돼 아무런 사회적 논의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다. 오사카부의 하시모토 지사가 <기미가요>를 제창할 때 기립하는 것을 거부한 교원에게 벌칙을 부과하려는 움직임도 시국의 공기를 간파한 것처럼 보인다. 시국을 말하면서 혹은 편승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진척시키려는 자들이 지금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묘한 말의 감각이 엄습하고 있다. 의견을 내야 할 시기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금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지원이나 복구, 혹은 원전을 둘러싼 시비 등 지금 많은 말들이 어지럽게 퍼져나가고 있지만, 말의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사려 깊은 언어가 필요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원전 반대 투쟁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붕괴를 둘러싼 도쿄전력·국가·언론·연구자 등의 보신주의와 기만에 가득 찬 발언에 자책이 뒤섞인 분노를 느낀다.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거나 라이프스타일을 재검토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힘내자 일본!’과 마찬가지의 느낌을 갖게 된다.
그것은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의 기억이기도 하다. 눈앞에 말을 잃어버린 압도적인 폐허를 두고, 피해 상황을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언론은 도쿄에서 옴진리교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히 그쪽으로 휩쓸려갔다. 또한 현대 사상을 다루던 어떤 잡지는 도쿄에서 지진이 일어난 경우를 상정한 재해 특집을 마련했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한데 모여 다가올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지진으로 인한 재해는 이미 일어났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으며, 미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애독하는 잡지였지만, 그 뒤론 많이 읽지 않게 되었다.
원전 속임수에 자책감 섞인 분노
지금 이야기해야 할 것은 성급한 복구 작업도, 이후 재해 방지 대책도 아니다. 복구 작업이든 ‘힘내자 일본!’이든 거기에는 무엇인가를 없던 것으로 하고 앞을 향해 전진하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한다. 선의에 찬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미래지향은 현 상황에 대한 부인이기도 하다. 질문해야 할 것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뿐만 아니라 ‘어느 장소에서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3월 11일 이후를 ‘전후’(戰後)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안이한 명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지금 말이 있어야 하는 장소를 생각할 때, 전후라는 말의 설정이 보여주는 것이 아예 없지는 않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쟁 체험을 어떤 식으로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논점이 큰 사상적 과제로서 존재했다. 거기에는 마루야마 마사오를 필두로, ‘광의의 전쟁 체험의 사상화’라고 일컬을 만한 지적 작업의 연구자들이 있었다. 동시에 전후 일본 지식인의 등장은 ‘새로운 일본!’과 ‘힘내자 일본!’이라는 미래지향적 구호 아래 제국이 아시아 전역에 각인한 고통을 기억하기도 전에 없었던 것으로 하면서, ‘복구’라는 전후를 내딛으려는 부인의 구도와 연관돼 있다.
결과적으로, 폐허를 앞에 두고 요란스레 이야기되던 전후는, 전쟁 체험을 아전인수 격으로 취사선택해 땅속 깊이 매장해버렸다. 일찍이 전쟁 체험을 둘러싼 국가와 지식인의 책임을 논의한 쓰루미 슌스케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사회는 패전을 종전으로 둔갑시켰다. 그때부터 패전론은 전쟁 체험 위에 재빠르게 천을 덮어씌우며 사회 저변으로 확대돼버렸다”고 기술했다.(2)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시작되지도 않았다. 위기는 진행 중이며 이런 진행형을 ‘힘내자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발견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원전 반대 투쟁에 조금이라도 관여한 사람이라면, 원전이 얼마나 용인하기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것은 일상생활에 원전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지하 깊숙이 매장하고 지내온 것에 대한 책임, 그렇기 때문에 결코 이전 상태로 복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깊게 매장해 애써 감춰온 일, 이미 알고 있던 일이 압도적인 현실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이런 사태 앞에서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원전이라는 거대한 억압 장치다. 이 장치는 억압 자체를 비가시화한다. 방사성물질을 두려워하지 않고 활동하는 경찰이나 소방대원, 자위대, 혹은 도쿄전력 직원이 ‘결사대’라는 말로 영웅시되고 있다. 그러나 원전은 가동될 때부터 일관되게 피폭 노동자를 계속 양산해왔다. 피폭은 사고가 아니다.
위기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원전 노동자에 대해 기술한, 지금 가장 널리 읽혀져야 하는 책 중의 하나인 <원전 집시>를 쓴 호리에 구니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원전 안에서는 작업량이 아니라 방사선을 쐬는 일이 노동 기준량이다. 이 사실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노동자를 ‘피폭자’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전제 조건인 셈이다.”(3)
이 노동은 불가피하게 신체를 회복 불가능한 형태의 죽음으로 몰아간다.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이라기보다 목숨을 계속 단축시키는 것을 암묵적 전제로 요구한다. 피폭 노동의 존재가 미래 사회를 짊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원전 존립의 전제 조건이다.
인간에게 이런 노동은 허용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노동의 영역은 겹겹의 하청업체를 중심으로 시행되고, 또 그 존재 자체가 비가시화된다. 원전 노동의 현장 감독으로 종사하며 본인도 피폭됐던 히라이 노리오는 “작업원 모두가 매일 피폭당한다. 그것을 본인이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이 바로 관리 책임자의 일이다”라고 했다.(4)
많은 사람들이 피폭당하고 죽어간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생각지 못한 재해도, 예상치 못한 사고도 아니다. 원전 자체의 일상 상태가 기민(棄民)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 노동의 영역을 전제로 한다.
사회는 기민 영역을 없었던 것으로 묵살해왔다. 그것은 기업이나 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감시하고 동시에 외면해온 사람들 모두의 문제다. 그리고 피폭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사의 각오로 돌입하는 군인적인 영웅담은 그 자체가 이 사회 전체에 은폐된 억압 구조를 추인하고 보강한다.
원전이라는 억압 장치, 가려진 기민
문제는, 에너지 정책의 전환이 아니다. 쓰나미의 높이 예상치를 재검토하는 일도 아니다. 원전이라는 억압 장치를 용인하고 피폭 노동을 내버려둔 채 지내온 이 사회 자체가 문제다. 두렵다고 느끼면서도 그것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노동을 강제하고, 안전하다고 우겨온 사회 일반의 문제다. 그것은 이번 지진의 주요 피해 지역인 동북 지역 개별의 문제가 결코 아니며, 도쿄전력이라는 거대 자본의 문제도 아니다.
열화우라늄탄이 빈틈없이 깔려 있는 상태의 소학교 교정을 안전하다고 말하고, 진행되고 있는 실제 피해를 헛소문이라고 주장하고, 동요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양 도쿄전력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공안경찰을 불러 체포하는 사태. 이렇게 점차 표면에 떠오르는 일본 사회의 모습은, 만연하는 불안을 복구라는 말로 한데 묶어 그것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바로 ‘재해방지공동체’가 아닌가. 이미 시작되고 있던 재해방지공동체는, ‘힘내자 일본!’의 창화(唱和·한 사람이 선창하고 여러 사람이 따라 부름) 안에서 더욱 비약하고 있다.
그러나 대량으로 계속 흘러내리는 방사성물질에 의해 깊이 비가시화돼 있던 기민 영역은 지금 지표 위로 그 얼굴을 드러냈다. 피폭 확대는 그 자체가 위기인 동시에 그 위기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위기의 다음이라는 시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을 계속 드러낸다.
비가시화돼온 이 영역은, 복구의 이름으로 묵살되는 모든 반동적 움직임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위기감은 이런 기민 영역에 대한 최초의 반응임이 틀림없다. 분기점은 여기에 있다.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직후부터 사고처리 작업에 파견된 어느 자위대원은 지난 3월 14일 밤, 주둔지에서 도주했다. 그 역시 두려웠던 것이다. 자위대는 곧장 그를 징계면직했고, 인터넷에서는 “적진 앞에서 도망”, “군법회의에 회부하라” 따위의 비난 여론이 등등했다. 군대에서의 규율이란, 바로 이처럼 죽음에로의 동원이자 사형 선고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원전과 관련해서 지금 일본 사회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목숨을 아낌없이 내던져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영웅으로, 도주하는 것을 적진 앞에서 도망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심성이다. 원전은 일종의 전장(戰場)이다.
겁쟁이들의 반동, 탈출하기
점차 피폭의 실태가 명백해지는 상황에서 60살 이상의 기술자들이 ‘폭발 저지 행동대’를 결성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5) 그것은 이제까지 당해온 피폭의 경험과 자신의 수명을 저울질한 뒤의 판단이다. 연장자들에 비해 피폭의 영향을 크게 받을 젊은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이 기술자들의 마음과 한 사람 한 사람의 판단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들의 희생을 미화하는 사회 전체의 심성이다. 공허한 ‘힘내자 일본!’은, 과거 태평양전쟁 때의 ‘나라를 위하여’를 계승하고 있다. 이 결합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적진 앞에서 도망’으로 지탄하는 언설 주변에 반드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전장에 등장하는 사형 선고를 포함한 군사적 논리가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계속 확산되는 방사성물질을 앞에 두고 그 장에 머무르는 일이 피폭을 의미하는 이상,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군사 논리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다.
만연하는 불안, 회복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고향에서 피난을 시작하고 있다. 역시 무서운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래가 빼앗기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 피난하는 사람들에게 ‘도망치지 말라’며 비난하는 것이다.
현재 복구와 피난은 명확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은 복구 작업에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는 사람들과 함께 탈출을 생각하고 그것을 언어로 만들어가는 일이 아닐까. 불안을 억누르면서 그 불안감을 누군가를 구실 삼아 배격하고, 스스로는 결사의 각오를 표명하며 괜찮다고 우겨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탈출을 구상하는 것 말이다.
이 탈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탈출한 사람들과 남는 사람들이 ‘겁쟁이’로 만나는 것이다. 분기점은 도망치는가 머무르는가의 사이에 있지 않다. 머무르는 자도 다음 순간에는 도망치기 시작할지 모르고, 탈출하는 자도 경우에 따라서는 머무르기를 결의할지 모른다. 불안은 양자의 기저에 통하고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이 분단을 횡단하는 일이다.
“도망치는 사람은 외국인일 뿐, 도쿄는 괜찮아.” 원전 사고가 표면화될 즈음 등장한 이 발언에서, 탈출하는 사람은 외국인으로 간주된다. 탈출과 머무르는 일은 군사적 논리로 분단되고 그곳에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이 굳게 세워져 있다. 그것은 ‘삼국인’을 이야기하는 이시하라의 논리이기도 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이 말에 저항한다.
되풀이하지만, 분기점이란 도망치는가 머무르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군사 논리에 선을 긋는 것이다. 군사적 논리가 일본이라는 국가의 형식 안에서 작동한다면, 겁쟁이들은 그곳에 머무르면서 탈출하는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
삶에 대한 불안 확대가 다른 한편에서 사형 선고를 동반하는 군사적 논리로 향한다면 중요한 것은 이 논리에서 몸을 떼어내 겁쟁이끼리의 관계를 만드는 일이고,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창조해내는 일이다.
현실에 머물며 탈출하는 논리 필요
머무르면서 탈출하는 자로서 해야 할 작업은, 군사 논리에 얽힌 자신의 일상을 주의 깊게 비판하는 일이다. 삶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를 타자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겁쟁이로서 받아들이면서, 타자와의 관계로서 재구성하고 다른 일상 공간을 창출해내는 일이다. 그것은 겁쟁이를 추방하고 죽음의 각오를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겁쟁이이기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해가는, 그런 가능성에 미래를 거는 작업이다. 또한 그것은 사고에 관한 정책적 전환이나 보상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어떤 상태로 계속 존재하면서 지속적으로 감춰져온 피폭 노동자들에서부터 사회를 그려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겁쟁이들은 이 노동자들의 신체에 일상적으로 행사돼온 폭력을, 그 곁에 있으면서도 이미 타인의 일이 아닌 사태로서 감지할 것이다. 이때 기민으로 간주된 사람들의 영역과 그 곁에서 만들어지는 겁쟁이들의 불안은, 말을 획득하면서 다른 미래의 시작이 될 것이다.
글·도미야마 이치로
일본 오사카대학 교수. 일본의 다양한 사회운동 간 소통을 지향하는 매체인 <임팩션> 편집위원. 저서로는 <전장의 기억>(이산·2002), <폭력의 예감>(그린비·2009), 논문으로는 ‘평화를 만든다는 것’(<당대비평> 1999년 여름호), ‘경험이 중첩되어 있는 현장: 새로운 저항의 언어를 찾아서’(<당대비평> 특별호·2004) 등이 한글로 번역돼 있다.
번역·정유진
일본 오사카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수료. 마츠이 야요리의<여성이 만드는 아시아>를 번역했다.
<각주>
(1) 井上森, ‘防災の共同體を越えて’, <インパクション> 126호.
(2) 鶴見俊輔, <日常的發想の可能性>.
(3) ‘あとがき’, <原發ジプシ->.
(4) くまもり通信> 67호, 日本熊森協會.
(5) <아사히신문>, 2011년 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