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민중의 봄, 혁명은 전염된다
한 도시에서 저항의 불꽃이 일기 시작한다. 체제 변화를 요구하는 민중은 근위대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투쟁을 시작한다. 저항은 주변 국가를 넘어 대륙 전체로 확대된다. 하지만 결국 왕정이 권력을 재장악한다. 바로 1848년 유럽의 모습이다.
‘민중의 봄’은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 시작됐다. 선거권 개혁파들은 7월 왕정하의 집회 및 결사 금지령을 피해 1847년 7월부터 ‘연회 캠페인’을 조직해오고 있었다. 시민들 앞에서는 금지된 정치연설을 연회의 건배사를 빌려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위는 2월 22일 파리에서 집회를 열기로 결정했지만 바로 전날 갑작스럽게 취소됐다. 하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시민들이 거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장한 프랑스 정부군이었다. 이날 저녁 파리 거리는 피로 뒤덮였다.
자유를 위해 피 흘린 파리시민들
그 뒤 일련의 사건들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빠르게 확산됐다. 다음날인 2월 23일, 파리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개혁’을 외치며 프랑수아 기조 총리의 해임을 요구했다. 그날 오후, 왕은 총리를 해임했다. 하지만 기조 총리의 근위대는 승리를 자축하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 거리에는 주검을 실은 수레 행렬이 이어졌다. 2월 24일, 폭도들은 파리 곳곳에서 군대를 공격하고 튈르리성을 습격했다. 포위당한 루이 필리프왕은 퇴위했다. 2월 25일 파리시청에서 시인인 일퐁스 드 라마르틴이 보통선거를 선언함으로써 시민들은 왕정을 무너뜨렸다.
프랑스혁명에 이어 공화정이 탄생하는 모습을 지켜본 유럽의 국왕들은 불안했다. 유럽 내 혁명의 움직임과 국가 간 충돌을 막기 위해 체결된 1815년 빈조약의 입지도 심각하게 위협받았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바로 전쟁 채비를 갖추고 신의 정의와 왕권의 질서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전쟁을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알퐁스 드 라마르틴은 신성동맹의 부활을 우려해 “프랑스의 공화정 선언은 다른 정치체제의 국가에 대한 공격적 행동이 아니다. 각국의 특징 및 지리적 상황과 국민의 지적·정신적·물질적 발전 수준이 다양한 만큼 각국의 정치체제는 다양성과 정당성을 띤다”는 외교정책 원칙을 서둘러 공표했다. 또한 “1792년의 혁명전쟁은 불가피한 필요에 의해 발발한 명예로운 전쟁이었지만, 본래 전쟁은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 방침이 아니다”(1)라며 이전의 혁명과 구분해 주변국들을 안심시켰다.
루이왕 퇴위… 유럽 전체로 저항 확산
3월 3일, 변호사이자 언론인인 러요시 코슈트는 헝가리 의회에서 의회제 창설을 요구하고 대표단의 수장으로서 빈으로 향했다. 3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위대는 군에 의해 진압됐고, 장례 행렬이 거리를 메웠다. 시민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3월 13일 밤, 한때 빈회의 의장으로서 유럽 질서를 좌지우지한 메테르니히가 오스트리아 권력자에서 실각했다. 3월 15일, 환희에 찬 헝가리 시민들은 코슈트가 이끄는 헝가리 대표단을 맞이했다. 헝가리는 독립을 준비하며 바티야니 백작을 최초의 총리로 선출했다.
오스트리아에 점령돼 있던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주에도 파리혁명의 소식이 전해졌지만, 막상 귀족들은 난처해했다. 독립은 원했지만 혁명은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의 폭동 소식까지 알려지고 나서야 3월 17일 밀라노에도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주둔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라데츠키는 피에몬테주까지 폭동에 합세할 것이라 예상하고 몸을 피했다. 폭동 발생 닷새 뒤, 밀라노 시민은 오스트리아 주둔군을 내쫓는 쾌거를 이뤘다.
점령국에선 독립 위한 봉기 잇따라
베를린에는 아직 제헌의회 창설 요구가 거세지 않은 상황에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빈에 밀사를 파견해 3월 25일 드레스덴에서 군주회의를 소집하겠다고 알렸다. 동시에 베를린을 비롯해 프로이센의 여러 도시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시민들은 해산했지만 3월 26일 다시 모였다. 3월 17일 프리드리히 4세는 빈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튿날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고 의회를 소집했다. 군중이 국왕의 침실 창문 앞에 모여들자 새파랗게 질린 왕이 발코니에 나왔다. 시민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던 국왕은 휴식이 필요하다며 자리를 피했다. 뒤이어 군대가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고, 성난 시민들은 무장한 채 베를린 거리로 나왔다. 폭동의 규모가 확대되자 프리드리히 4세는 민주주의 헌법 제정이라는 새로운 타협안을 내놓았다. 바이에른주의 뮌헨에서는 루드비히 1세가 퇴위했다. 폭동은 라이프치히, 하노버, 뷔르템베르크를 비롯해 프로이센의 대도시로 퍼져갔다. 분할된 폴란드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군주들의 반격에 비극으로 막 내려
이후 왕궁이 민중에 의해 다시 점거되고 왕들은 베를린을 떠나 포츠담으로, 빈을 떠나 인스브루크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후 군을 재소집하고 “만병통치약과 같은 계엄령”(2)을 선포했다. 라데츠키 총사령관은 롬바르디아를 탈환했다. 빈디슈 그래츠 사령관도 프라하에 이어 빈을 점령했다. 민족주의적 반감을 이용한 왕의 계략에 의해 폴란드 내의 독일인과 유대인 소수민족들이 폴란드인에 반기를 들었다. 젤라치크 대령은 크로아티아 군대를 이끌고 빈으로 향했다. 11월 7일 카를 마르크스는 “결국 자유와 질서를 강탈한 크로아티아는 방화와 강간, 약탈을 비롯해 수많은 악행들로 승리를 자축했다”(3)고 조롱했다. 나폴리 국왕은 나폴리와 메시나에 포격을 가했다. 1848년 12월 5일, 브랑겔 장군은 베를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약속을 무시했다.
1848년은 비극과 환멸로 끝났다. 행렬과 혁명가, 자유를 향한 외침, 성난 시민들의 울부짖음, 탄원, 술책, 거리와 바리케이드에서의 즉흥적인 회담 등 유럽 모든 국가에서 비슷한 모습이 연출됐다. ‘바리케이드’라는 단어는 모든 지역에 유행처럼 퍼졌고, 폭동과 동의어처럼 사용됐다.(4)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학생, 남자와 여자, 심지어 아이들까지 집결시켰다. 물론 이들이 파리 거리에서 외친 ‘조국’과 ‘자유’에서 원하는 바는 각자 달랐다. 대규모 사회적 혼합 속에서 공동체와 유대의 꿈이 실현됐다. 서로 욕하고 포옹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상황이 위험해질수록 흥분은 고조됐다. 각 장면은 기억 속에 각인됐다. 마리 드 플라비니는 파리 폭동이 일어난 다음날의 풍경에 대해 “레알 거리에서 여자들이 군인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자신의 형제들을 용서해달라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총을 겨누지 말라고 간청하며 군인들을 포옹했다. 사람들은 군인들 바로 앞에서 즐거워하며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소년이 ‘경고도 안 하고 우리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군인은 ‘안심해라. 아직 지시를 받은 게 없어’라고 답했다”(5)고 묘사했다.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상황은 끔찍하게 변했고 수많은 생명이 스러졌다.
그러나 희생자들은 영웅이 되었다
죽음 자체가 정의를 행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평화적인 민중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이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2월 23일의 파리 행진을 필두로 유럽 각지에서 즉흥적인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무방비 상태의 한 노동자가 끄는 하얀 말의 수레에는 주검 5구가 끔찍한 대칭을 이루며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중략) 수레 뒤편에 타고 있던 노동자가 팔로 주검을 끌어안아 들어올리고는 횃불을 흔들었다. 불꽃이 튀었다. 맹렬한 눈빛의 노동자는 군중을 향해 ‘복수하자! 복수를! 민중이 죽어가고 있다!’고 외쳤다.”(6) 3월 22일 베를린의 시민들이 왕궁 발코니 아래로 주검들을 끌고 왔다. 왕은 주검에 조의를 표해야 했고, 왕비는 못마땅해했다.
이 시기에 왕과 군인들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지만, 결국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시민정신의 고귀함을 지닌 인물은 어쩌면 병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희생을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민주주의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주요 저서로 <이념을 위해 죽다>(Les Belles Lettres·파리·2010) 등이 있다.
번역·배영미 youngmib0222@gmail.com
<각주>
(1) <1848년 혁명의 역사> Balland·파리·pp.289~290·1985에서 다니엘 스턴이 인용. ‘다니엘 스턴’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마리 드 플라비니는 자유롭고 지성을 겸비한 여성으로 수많은 염문을 뿌렸다. 남편과 헤어지고 프란츠 리스트와 동거하며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2) 카를 마르크스, <유럽의 혁명과 반혁명, 정치적 행위>, La Pléiade, 파리, p.55.
(3) ibid.
(4) 알랭 코르뱅·장마리 마이예르, <바리케이드>, 소르본 출판사, 파리, 1997.
(5) 다니엘 스턴, op. cit., p.106.
(6) ibidem, p.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