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대통령 선거 이후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이번 미 대선에서 조 바이든 후보가 당선되길 희망한다. 트럼프 재임기간 동안 무너진 세계질서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백악관 주인의 이념적 성향과 미국의 외교정책 노선은 언제나 전 세계의 전략적 균형을 좌우해왔다.
“민주주의 세계를 선도하라.” 바이든 후보의 외교정책 방향을 압축하는 슬로건이다. 지난 3월 한 외교저널에서도 바이든은 ‘왜 미국은 다시 (세계를) 리드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하며 이런 포부를 상세히 밝혔다. “그 동안 미국이 국제무대에서 구축한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라고 개탄한 바이든 후보는 오늘날의 이런 퇴조와 대비되는 ‘과거의 영광’을 부각했다. 2차 대전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철의 장막’을 무너뜨리며 승승장구해온 미국은 때로는 양극화 구조(1947~1991)를 중심으로, 때로는 다원적 구조(1991~2008)를 중심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오바마 정부 시절 부통령을 지낸 바이든 후보는 대내적 해결 과제가 산재해있다는 점도 모르지 않는다. 교육제도의 포괄적 실패든, 의료혜택의 불평등 문제든 혹은 교정정책에서의 과실이든 모두 미국 내부의 문제들이다. 그러나 바이든은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된 원천이 바로 외교 분야라는 점, 아울러 트럼프 임기 동안 훼손된 대외관계가 “힘에 의한 모범으로, 아울러 모범에 의한 힘으로” 서둘러 회복돼야 함을 역설한다.(1)
미국의 리더십 회복을 위한 이런 구상은 외교정책에 관한 민주당 강령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일리 래트너, 대니얼 벤아임 등 ‘주류’ 언론인 다수의 노력으로 완성된 이번 정당 강령에서는 세계가 “제 발로는 움직이지 못 한다”라는 점을 전제한다. 그리고 트럼프 임기 동안 무너진 세계질서를 마땅히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질서복원의 역할은 당연히 미국이 맡는다. 미국은 민주주의 질서의 기본 설계도를 보유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자산을 한층 발전시키며 관리 감독하는 주체가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즉 “다른 나라가 미국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그리하여 미국의 가치와 이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가거나 혹은 아무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크나큰 혼돈이 초래”된다는 것이다.(2)
‘세계질서’라는 개념의 시대착오적 오류
애국주의 색채가 짙은 이런 주장의 주된 논거는 그간 트럼프 정부가 보인 과격한 행보다. 갑작스레 이란 핵 합의를 철회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에만 편향된 정책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와 분명히 선을 그으려는 일각의 노력이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나, 민주당의 ‘세계질서 복고운동’은 세 가지 관점 상의 오류가 깔려 있다.
먼저 ‘세계질서’라는 개념 자체에 어폐가 있다. ‘질서’라는 단어가 기본적으로 서열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당의 세계질서 복고운동에서는 오늘날 다원적 차원에서의 발전 가능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트럼프 정부의 모든 외교 행보를 싸잡아 비판한다. 트럼프 정부가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정책 상 실패만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는 그럴듯한 분석이나, 민주당의 이런 외교노선은 빠르게 실패할 수 있다. 왜일까?
‘세계질서’란 하나의 ‘블록’이 아니라 여러 ‘층위’가 중첩된 형태다. 그 중 (거시정책 차원의) 첫 번째 층위는 강대국 간 ‘편광효과’를 기반으로 한다. 힘의 주축이 되는 국가를 중심으로 ‘쏠림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힘을 얻지 못한 나라들은 강대국 간의 대립관계에 따라 외교 전략의 향방을 결정한다. 오늘날 중국과 유럽연합, 미국, 러시아 같은 열강 사이의 관계에 따라 다른 나라들이 흩어지고 뭉치는 데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역내 차원에서의 정책 및 전략 지형도와 연관된다. 하나의 단위 지역 내에서는 각국의 이해관계와 국가적 정체성에 따라 다양한 협력체제와 경쟁체계가 존재한다. 이런 역내 상황은 강대국들의 대립관계에 따른 영향을 약화시키는 필터로 작용한다.
일례로, 아세안 포럼에서는 중국과 미국이 각기 다른 압박을 가하더라도 (특정 사안에 대한) 회원국 각자의 자율적인 선택을 존중한다. 이에 어느 정도 힘이 있는 몇몇 국가들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좌우되기보다 주변국의 이익을 더 수호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전략적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국제질서의 마지막 세 번째 층위는 모든 지리적 구분을 뛰어 넘는 상위의 공통적인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보건, 문화, 무역, 기술, 금융, 안보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보편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제 조약이 체결되는 이유다.
이렇게 다층적 구조로 이뤄진 ‘세계질서’는 단순한 위계서열만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불안정한 세력균형이 끊임없이 조절되는 가운데 질서가 잡히는 것이며, 특히 지역차원에서의 미세한 변수에도 크게 좌우된다. 이렇듯 다변하는 국제관계에 대해 미국의 ‘현실주의’ 지정학 이론가 니컬러스 스파이크먼은 1942년에 이미 다음과 같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힘을 가진 세력이 발달하고 계속 이념과 사상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세계에서는 법과 원칙으로 정한 그 어떤 구조도 항구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다. 한 나라의 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모든 문제의 해법을 정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들 간의 일상적인 마찰을 줄이고, 사회세력 간의 균형을 맞추며 나아가 정치적 합의를 수월히 이끌어낼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자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응당 보존해야 할 것과 변화해야 할 것을 결정해야 한다. 국제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일 또한 기본적으로는 이와 동일하다.”(3)
오늘날 국제사회의 발전 양상을 보면 지정학적인 상수와 사회적인 변수를 서로 대립시키기보다 변화의 관점에서 이를 양립시켜야 한다던 스파이크먼의 분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알 수 있다. 냉전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지금, 세계 및 지역 차원에서의 세력균형 지형도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도 이제는 (장기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힘을 키워가는) 중국의 약진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고, (2017년 다보스 포럼에서 관중의 찬사를 받은 시진핑의 표현대로) 중국 발 ‘고속 개발 열차’에 탑승하려는 중국 측 동맹들도 늘어났다. 이제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에 대항할 지정학적·지리경제학적 기틀을 마련할 만큼 강대해졌으며, 미 육군이 2018년 미래 사령부(Futures Command)를 신설한 목적도 결국에는 중국을 의식한 것이었다. 클린턴 정부 시절부터 이미 감시의 대상이었던 중국은 이제 완연한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모습이다.
이제 미래 사령부의 임무는 ‘세계 대테러 전쟁’에서 사람들의 ‘의지와 마음을 얻는’ 방식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한 상대와 대기권 밖 우주 같은 예기치 못한 대치 국면에서의 무력분쟁에 대비하는 것이다. 실로 양국 간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이라 브루킹스 연구소의 마이클 오핸런 같은 전문가도 이제는 중국이 개입하는 대규모 전쟁의 위협이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한정적 차원의 국소적인 지역갈등에서 시작된 분쟁이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4) 강대국 중심의 거시적 질서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런 중국의 부상은 국제질서 수립 과정의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국제질서 상에서의 미중관계와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고전적인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미중 양국을 중심으로 블록이 형성되며 새로운 세력균형이 수립되는 것, 다른 하나는 2050년 경 강대국 서열에서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냉전시기의 양극화 세력균형 이론가 케네스 왈츠의 이론에 따른 구상이며, 두 번째 시나리오는 패권안정론 이론가 로버트 길핀, 패권주기 이론가 찰스 도런의 비관론적 해석과 맞물려있다. 이 두 번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했을 때, 세력양극화 현상은 세력일원화 현상의 전조에 지나지 않으며, 패권 이전 과정에서는 대부분 전쟁이 수반된다.
이 두 개의 시나리오에는 모두 패권자유주의 논리가 짙게 깔려 있다.(5) 바이든-해리스 콤비를 지지하는 수많은 싱크탱크 가운데 이런 패권자유주의 시각을 지닌 대표 조직은 단연 미 외교협회(CFR)다. 리처드 하스 현 외교협회 대표는 아예 작심하고 낸 것으로 보이는 최근 저서에서 현재의 이슈들에 대한 해법으로 1941년 헨리 구스의 해결책을 참고한다.
‘미국의 시대’에 할 일을 적고 있는 헨리 구스의 상징적인 논문을 바탕으로 리처드 하스는 “오늘날 각국이 파트너를 모색하고 있으며, 서로 동맹을 맺는 파트너는 같은 가치를 공유해야한다”라고 역설한다. “이는 전 세계 차원에서의 집단행동과는 다를 수도 있다. 이른바 유엔의 ‘모두가 아니면 안 된다’ 식 접근법과는 다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체적인 목표를 위해 모인 역량 있는 자발적 주체의 합의에 따른 동맹을 생각해야 한다.”(6)
‘미국이 나서야 한다’는 방식의 문제점
실패하기 쉬운 유엔식 접근법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낫다는 리처드 하스의 접근법은 실리적이고 현실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바이든의 열성지지자인 그의 주장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엄밀히 보면 유엔의 접근법은 그의 말마따나 ‘모두가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누구나가 아니면 안 된다’다. 유엔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평등의 원칙에 따라 각국을 주권국가로서 동등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합법성을 지닌 유일한 국가 간 합의체인 만큼 나토(NATO)처럼 지리적으로 한정된 공동방어 동맹과도 다르고, 뜻이 맞는 국가가 모여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리비아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든 유지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과도 거리가 있다.
오늘날 국제무대가 다원적인 동시에 다두적(多頭的)인 양상을 보이는 만큼 유엔의 이 같은 적법성은 더욱 절대적이나, 리처드 하스는 미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듯하다. 부시 행정부 시절에나 쓰던 슬로건 ‘자발적 동맹’처럼 낡고 엉성한 개념들을 차용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리처드 하스가 내세우는 ‘그들만의 리그’ 논리에는 해묵은 ‘자유주의 민주질서’의 개념이 가감 없이 반영돼 있다. 이에 마이클 윌리엄스도 그런 접근법이 지닌 문제를 지적했는데, 그에 의하면 하스는 세계질서와 관련한 국제사회 내부의 구조적 변화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7)
자유주의 민주질서의 주창자들의 고집하는 다자주의의 개념을 도입하면, 다극화 시대에 맞지 않는 이런 주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일부 회원국 때문에 모든 논의 자체가 차단되는 나토의 상황을 두고 ‘뇌사 상태’라 지적한 마크롱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심지어 마크롱은 러시아와 보다 직접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접근법까지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마크롱이 내세우는 다자주의의 성격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각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며 비배타적인 참여주의형 외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개별 국가의 예외적 특권보다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이상향을 내세우며 포괄적 관점에서의 방향을 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국의 주권을 확실히 인정하는 다자주의의 경우, 국제무대에서 상대적으로 합의가 잘 이뤄지는 편이다. 각국의 주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 거버넌스를 지향하는 다자주의에는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반기를 들고 있다. 자국의 주권이 국제질서의 세 번째 층위, 즉 상위의 공통적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측면에만 국한돼 행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국 정부는 강대국과의 관계나 역내 지형도를 고려한 뒤 자국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지정학적 전략을 (국내의 적법한 의사결정 절차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유엔은 각국이 추구하는 가치의 다양성을 반영해 국가 간 대화를 이끌어가되, 유엔 이외 다른 그 어떤 조직도 유엔의 자리를 대체하진 못한다.
바이든이 복원하려는 국제질서의 기반인 패권 자유주의 담론의 맹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이 먼저’라는 슬로건은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의 전유물처럼 보이나, 사실 바이든의 외교정책 참모진 역시 이와 비슷한 노선을 따른다. 민주당에서 쓰는 ‘미국이 먼저’라는 말은 단순한 우선순위가 아니라 지위나 입장에 있어서의 우위를 가리킨다. 즉 ‘미국이 가장 먼저’가 아니라, 트럼프의 주장처럼 ‘다른 그 무엇보다도 미국이 먼저’라는 뜻이다.
바이든이 쓴 대로 “미국이 (전 세계의) 행보를 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이든에 의하면 이는 “미국 이외 다른 그 어떤 국가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유라는) 이 사상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의 질서가 아니면 혼돈이 올 것이라는 이런 시각은 2000년 이미 스트로브 탤벗 전 국무차관이 제시한 바 있다. “특히 미국은 명시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국익을 증진하는 한편 미국적 가치를 고취시킨다는 일관된 목표를 추구해왔다.”(8) 이 말은 곧 미국이 역사적 경험에 따라 얻은 가치가 보편적 가치로서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미국의 공공연한 예외주의는 미국이 스스로에 부여하는 역할과 미국이 가진 실질적인 위력 사이의 격차를 감안하지 않는다. 이제 더는 미국의 예외주의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오늘날 역학관계가 뒤집어지는 세계무대에서는 스스로의 힘을 인정받고 전면에 나서려는 국가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런 ‘신분질서’의 변화는 몇 년 전부터 점차 확대되는 양상인데, 이제는 중국이나 인도, 러시아는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포함한 서방 자유주의 민주질서의 보루 내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확대된다.
냉전 직후 ‘역사의 종언’이라는 개념을 유행시킨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최근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9)이란 책으로 ‘역사의 회귀’를 알렸는데, 본인이야 물론 스스로 “신흥 부족주의”라 칭한 블록화 움직임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구대륙이든 신대륙이든 각 정치 블록에서 ‘존엄함’을 요구하고 ‘존재감’을 인정받고자 하는 움직임에 대해 그는 ‘정체성’의 개념으로 이를 설명했다. 아울러 경제적으로 일원화된 세상에서 국제사회가 단위 별로 쪼개지는 역동적인 움직임도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미 대선의 두 후보는 오늘날 국제사회 내에서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이 새로운 역동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사실 공화당 쪽은 외교정책 계획 자체가 있는지 의문이다.) 이론상으로든 실무적으로든 양 후보 진영 모두 국제질서의 첫 번째 층위에만 몰두하며 서열을 다투는 패권 경쟁에만 집중한다. 사용하는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두 후보 모두 국제질서의 첫 번째 층위에서 얻은 결과를 역내 지정학적·지리경제학적 지형도라는 두 번째 층위에 중첩시키는 수준에만 그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각 진영은 이론가 풀을 쇄신해 (‘재고’가 아닌 ‘재건’으로) 동맹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엔의 손에만 맡겨지지 않을 앞으로의 세계질서에서 미국이 할 일은 어느 한쪽 진영의 리더 역할을 맡는 것뿐이다. 폼페이오 식으로 보면 이 진영은 ‘서방국가들’이 되고, 민주당 책사들 표현으로는 (냉전시기와 약간 표현이 달라진) ‘자유세계’가 된다. 그리고 이 같은 질서 복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바이든의 말마따나 ‘혼돈’이 초래될 것이다.
미국의 위력보다, 유럽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상황
‘미국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런 발상은 세계질서의 균형을 조절하는 또 다른 세력을 인정하지 않거나 저평가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 주변국인 일본과 인도 같은 제일선국가들의 우려가 급격히 커진 상황에서 현재 진행 중인 세력양극화 현상을 (단독으로든 합동으로든) 막아줄 두 주체는 러시아와 유럽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우, 트럼프가 취임 초기부터 그 유착 관계를 의심받는 탓에 유럽이나 미국 쪽 패권 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으며, 2014년 크림 반도를 강제 병합한 뒤에는 러시아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반목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제임스 베이커를 위시한 1990년대 현실주의 미 외교 참모들의 사려 깊은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2009년 오바마 정부의 친러 행보에 관해 <뉴스위크>의 한 기자가 묻자, 그는 “할 수 있을 때 러시아와 손을 잡아야한다”고 답했다. “러시아가 우리의 국익에 반한다면 응당 러시아에 맞서야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당 내부에서조차 더는 미국의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냉전 기간 우리는 국익을 수호하는 정당이라는 이유로 수차례 선거에서 승리했다. (...) 혹자는 또 다른 적을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 적은 중국일 수도 있고 러시아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들 국가와 모든 면에서 뜻이 같을 수야 없겠지만, 오늘날 이들이 더 이상 적이 아니라면 문제는 우리가 이들을 적으로 만들려는 데 있다.”(10)
베이커가 지적한 문제는 존 볼턴의 행보에서처럼 여전히 공화당 진영 내부에서 감지된다. 그러나 공화당의 지지층 성향이 엘리트 계층과 점점 멀어지면서 냉전의 불씨를 살리려는 세력도 점점 민주당 쪽으로 이전한다. 즉, 미국의 외교정책이 일종의 계급투쟁으로 결정되는 셈이다. 이는 아이젠하워의 톤을 빌려 군대와 방산업계 사이의 유착관계를 힐난한 트럼프 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군대에서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병사들이야 내 의견에 동조하겠지만 펜타곤 고위급 인사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행기와 폭탄 등을 만드는 이 어마어마한 기업들이 계속 호황을 누리게 해줄 전쟁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11)
이는 2017년 사우디로부터 무려 4,500억 달러 상당의 무기구매를 약조 받은 ‘딜메이커’ 트럼프(12)의 모습을 지우려는 트럼프 지지층의 마음에 쏙 드는 발언이었다. 이들은 트럼프의 행보가 모순적이라 해도 민주당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은 변화라는 명목으로 조세 회피처 델라웨어 주의 상원의원 출신이자 2002년 이라크전에 찬성표를 던졌던 바이든을 기용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들에게는 세계질서보다도 미국의 중산층 붕괴가 더 중대한 관심사다. 아울러 미국의 병사들이 더 이상 비생산적인 전쟁에서 죽지 않길 원한다. 물론 “외교문제를 다시금 미국의 우선 과제로 두겠다”거나 “끝없는 전쟁을 중단 하겠다”라는 바이든의 공약도 이들이 환영할 만하다. 문제는 이런 미사여구를 작성한 장본인들이 지난 17년 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근본적인 전략 수정에 반대해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만들겠다던 트럼프의 슬로건이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는 것이라며 비난한 이들이 정작 본인들 외교정책에는 “왜 미국은 다시 (세계를) 리드해야 하는가(Why America Must Lead Again)”라는 타이틀을 단 이 상황이 쉽게 이해될 리 만무하다.
러시아에 이어 세력양극화 현상의 또 다른 걸림돌 후보는 유럽연합이다. 세력양극화를 막기에는 러시아보다 유럽연합이 더 신뢰가 가지만 일부 유럽연합 회원국은 유럽이 독자적으로 전략을 세우는 것보다 나토(NATO)에 기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사이가 좋지 않은 독일과 프랑스가 함께 구상한 유럽 독자노선의 경우, 네덜란드와 폴란드는 물론 덴마크에 이르기까지 불만을 표하는 나라들이 많다. 바이든의 당선은 이런 현 상황을 뒤집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바이든의 당선으로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다. 차라리 트럼프가 당선되면 최소한 유럽이 독자적인 외교 전략의 열쇠를 쥘 수도 있겠지만, 바이든이 당선돼 유럽이 다시금 미국과 손을 잡는다면 나토 동맹들은 지체 없이 미국의 전략적 방침을 고수할 것이다.
현재 유럽의 관심은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이 누구일지에 쏠려있다. 이로 짐작할 수 있는 유럽의 ‘뇌사 상태’는 유럽 내 민주주의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세계질서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미국의 위력보다, 효과적인 전략대안을 내지 못하는 유럽의 무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트럼프 시대를 겪고서도 유럽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글·올리비에 자젝 Olivier Zajec
장물랭리옹3대학 정치학 조교수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2) Joseph R. Biden Jr, «Why America must lead again. Rescuing US foreign policy after Trump», Foreign Affairs, vol. 99, n° 2, New York, 2020년 3~4월호.
(3) Nicholas J. Spykman, 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 : The United States and the Balance of Power, Harcourt, Brace and Co., New York, 1942.
(4) Michael E. O’Hanlon, The Senkaku Paradox : Risking Great Power War Over Small Stakes, Brookings Institution Press, Washington, DC, 2019.
(5) Stephen Walt, The Hell of Good Intentions : America’s Foreign Policy Elite and the Decline of US Primacy, Farrar, Straus and Giroux, New York, 2018.
(6) ‘James Manyika speaks with Richard Haass about businesses as global entities’, McKinsey Global Institute, Washington, DC, 16 octobre 2020.
(7) Michael C. Williams, The Realist Tradition and the Limits of International Rela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8) Strobe Talbott, ‘Self-determination in an inter-dependent world’, Foreign Policy, n° 118, Washington, DC, 2000년 봄.
(9) Francis Fukuyama, Identity : The Demand for Dignity and the Politics of Resentment, Farrar, Straus and Giroux, 2018.
(10) Adam B. Kushner, ‘James Baker on the return to realism’, Newsweek, New York, 16 janvier 2009.
(11) ‘Trump : Pentagon leaders want war to keep contractors happy’, Associated Press, 2020년 9월 7일.
(12) Javier E. David, ‘US-Saudi Arabia seal weapons deal worth nearly $110 billion immediately, $350 billion over 10 years’, CNBC, 2017년 5월 20일.
현실주의 정치가 제임스 베이커 전기 『워싱턴을 다스린 남자(L'homme qui gouverna Washington)』
20세기 후반 미국의 정계 인사 가운데 제임스 베이커만큼 오랜 기간 영향력을 행사하고 폭넓게 권력을 거머쥔 인물은 별로 없다. 그의 전기를 쓴 수전 글래서와 피터 베이커도 “워터게이트 사건 후부터 냉전 직후까지 사반세기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의 도움 없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그의 조언 없이 대통령 직을 수행한 공화당 인사는 아무도 없다”고 적고 있다.(1) 이러한 제임스 베이커의 생애를 처음으로 기록한 두 사람은 꼼꼼한 고증 작업으로 여타의 수많은 전기와는 확연히 결이 다른 작품을 선보인다. 포드 정부에서 상무차관을 지내고 레이건 정부(1985-1989) 시절 재무장관을 역임한 제임스 베이커는 부시 행정부(1989-1993)에서 국무장관 자리까지 올라간다. 블록화 체제 말기 외교적으로 중점적인 역할을 수행한 그는 특히 1차 걸프전(1990-1991)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1991년 가을)는 물론 같은 시기 유럽에서의 독일 통일 협상 등의 사안에서 크게 활약한다. 한 개인의 인생 항로를 촘촘히 따라가는 이 전기는 고대에서 르네상스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에게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제시했던 ‘군주의 교본’ 같은 책이다. ‘현실주의자’의 얼굴을 한 제임스 베이커는 이 책에서 세련되고 절도 있는 정치가의 전형으로 그려지는데, 원칙에 따라 체계적으로 행동하는 온건한 협상가로서 미국의 국익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었던 그는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되 필요하다면 무력도 불사했다. 작품 전반에 걸쳐 절제된 우울함의 정서가 배어있는 이 책은 각 챕터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정치 참모의 초상을 완성한다. 한없이 높은 곳에서 트럼프와 바이든의 소란스러운 시대를 굽어보는 제임스 베이커는 사실 오늘날의 미 정계와 외교 노선을 판단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오늘날 워싱턴에서는 여전히 도덕보다는 이념이 우세하고 외교 정책은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첨예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양당 모두 교양 있는 응수를 하기보단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하고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 토론만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 글래서와 베이커 두 저자는 약간의 살을 보태어 그의 지나간 시간을 복기한다. 교훈적인 측면에서 ‘군주의 교본’이 되는 이 책은 1528년 출간된 카스틸리오네 저서 《궁정인》과도 비슷한 면이 많다. 실용주의자 베이커는 국무부 수장직이든 그보다 비중이 적은 직위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 그리고 자신이 원한 - 각 역할에 맞게 수완을 조절할 줄 아는 정치가였고, 책의 1부와 2부에선 이런 그의 성공이 일의 쟁점이나 성격과는 상관없이 세력 균형을 조정하는 타고난 감각 덕분이라 설명한다. 텍사스 출신 외교의 달인 제임스 베이커는 정적을 제거하여 이들을 밟고 일어서기보다 상대와의 명시적 혹은 묵시적인 약속을 발판으로 정치 원로의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베이커는 싸움보다 화해를 선호했으며, 주도권을 장악한 뒤에는 상대의 손을 잡아 쓸데없이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았다. 에드윈 미즈, 헨리 키신저, 아버지 부시, 레이건 등과 반목했던 일화에 대한 묘사는 이 책 최고의 명대목 중 하나다. 이렇듯 상대의 견해를 고려할 줄 알았던 만큼 베이커는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도 상대적으로 상호 작용을 중심으로 한 대외정책을 추진한다.
현실주의라는 건 어쩌면 하나의 학파라기보다는 당적을 초월한 감수성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폴레옹의 생애』 서문에서 스탕달이 적고 있는 바와 같이 “어떤 당이든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일수록 당에 대한 소속감은 흐려진다.” 한 사람의 이념보다는 사람됨에 더 치중한 이 전기는 그 같은 모순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글·올리비에 자젝 (1) Susan Glasser & Peter Baker(제임스 베이커와 가족 관계 아님), The Man Who Ran Washington : The Life and Times of James A. Baker III, Doubleday, New York,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