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상관없는 단일연금제도를 상상하라!
노동자·고용주 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대통령은 퇴직연금제도 개혁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연금제도 ‘단일화’ 명목으로 제시된 개혁안은 연금 전액 수령 연령을 늦춰 퇴직자 대다수를 빈곤에 빠트릴 위험이 있다. 진정한 보편적 퇴직연금제도에 대한 고찰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난겨울 퇴직연금 개혁안 반대 대규모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내세운 요구사항의 대부분은 현행제도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퇴직 전 최고 또는 최종급여를 기준으로 소득대체율을 적용해 퇴직 후에도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업의 세계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퇴직 후에도 재생산하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기업의 간부가 가사도우미보다 더 많은 연금을 받는 연금격차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흔히 임금격차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생산성’, ‘고용 적격성’과는 또 다른 논거를 찾아야 한다. 간부라고 해서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새롭게 던져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연금을 은퇴 전의 소득수준, 생활 수준에 맞춰 은퇴 후 받는 임금으로 여기는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인식에 의하면 낮은 임금을 받는 빈곤층은 은퇴 후에도 낮은 연금을 받으며 빈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임금이 높으면 사회보장 분담금을 많이 냈으니 연금도 많이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건강보험료를 더 많이 낸 사람이 더 나은 치료를 받는 것이 당연한가?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사람의 자식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는 것이 당연한가? 분배를 위한 제도의 목적은 각자가 낸 만큼 돌려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회 모델이 코로나19 위기로 흔들리고 있는 지금 지속가능한 세상의 논리를 재설정하자는 여러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제 연금수령 당사자가 납입금을 분담한다는 논리를 연금납입 금액과 기간에 무관한, 새로운 보편적 권리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일정 연령이 되면 동일한 액수의 연금을 수령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원칙은 소득별로 납입한 사회보장 분담금액에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수준의 보장을 제공하는 사회보장제도와 공공 서비스의 원칙과도 일맥상통한다. 진정한 보편적 퇴직연금의 실현 가능성과 이점을 따져보려면 이런 방식의 연금제도가 던지는 당연한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연금의 적정금액은 얼마일까? 물론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다. 예를 들어 자본소득을 제외한 성인 1인당 평균 실소득 월 2,200유로보다 조금 낮은 2,000유로로 가정해보자. 현재의 연금 실수령 평균액(월 1,444유로)보다 38.5% 높은 이 금액이 현실화되면 약 1,720만 명에 달하는 퇴직자의 80% 이상이 세전 기준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다.(1)
모두에게 동일한 액수의 퇴직연금을 준다고 해서 자산, 자본소득 또는 부양 자녀 유무 등으로 발생하는 모든 불평등을 해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불평등은 양질의 공공서비스를 보장하는 수단인 세금으로 조절 해야한다. 그렇다면 적정 연금지급 개시연령은? 건강수명이 64세인 오늘날, 고통도가 높은 직종을 제외한 나머지 직종에서 퇴직 연령이 60세를 넘어가면 사람들은 은퇴 생활 초기의 황금기를 빼앗긴다. 현재 경제활동 말년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당수의 ‘노인’들은 이미 노동시장에서 배척당하고 있다. 퇴직연령이 연장되면 청년들의 노동시장 진입 또한 기계적으로 차단된다. 현재 60세 이상 노동자가 100만 개가 넘는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수치는 앞으로 더 증가 될 전망이다. 대량 실업을 해소하려면 일자리의 분배가 필요하다. 영원한 성장은 가능하지도 않고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와 같은 형태의 연금제도를 실현하려면 비용은 얼마나 들고 재원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현행 법정 퇴직연령(62세)에 도달한 모두에게 실수령금 2,000유로의 연금을 지급하려면 국내 총생산(GDP)의 3.4%에 해당하는 약 800억 유로의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 만일 연금수령 개시 연령이 60세로 앞당겨지면 이 수치는 GDP의 4.7%인 1,100억 유로로 증가한다. 이런 사회적 대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무 과세를 평균 10% 인상해야 한다. 이것은 최상위 소득층을 대상으로 사회보장 분담금을 누진 징수하고 자본소득 과세율을 높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18년에 도입된 ‘비례세(flat tax)’는 자본소득세율의 상한선을 최고 소득 구간에 적용하는 소득세율인 45%보다 훨씬 낮은 12.8%(사회보장 분담금 제외)로 정했다. 최상위소득층을 겨냥한 재원확보 노력은 창출된 부의 분배로 이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이 보건위기 이전 정부가 추진했던 것처럼 퇴직연금 지출을 GDP의 14%로 제한해 퇴직자들을 점진적인 빈곤 상태로 몰아가는 것 보다 훨씬 정당해 보인다.
‘부자’들이 은퇴 후 소득의 급격한 감소를 상쇄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는 동안 더 열심히 저축하게 만들 위험은 없을까? 착각하지 말자. 최상위 부유층은 이미 주식투자, 추가 연금제도, 부동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축금을 축적하고 있다. 경제활동 기간과 은퇴 후의 소득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연금펀드(pension fund)만 금지하면 부당하지도 않고 문제가 될 것도 없다. 연금펀드가 없어지면 사람들은 세금을 피할 수 있는 고수익 투기성 상품에 투자하는 대신, 생태학적 전환 등 공공투자에 낮은 이율로 예치할 것이다. 이런 방향전환은 공공투자와 생태학적 투자 재원조달에 예치해야 하는 저축금의 최소 비율을 정하는 등의 규제를 통해 실현 가능하다.
이런 제안이 과연 받아들여질까? 지금보다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될 미래의 퇴직자의 80%가 찬성해야 가능할 것이다. 나머지 20%에게도 공공부양 서비스와 결합 된 이런 방식의 연금제도는 그 어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재정적으로 열악한 상태에서 늙어갈 걱정 없이 자식, 부모, 친척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온전한 휴식을 누릴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이다. 그 대가로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더 많이 소비하는 능력 아닐까?
이제 많은 이들이 특히 청년들은 우리에게 닥친 심각한 사회·환경 위기를 극복하려면 나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또한 현 제도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퇴직연금은 이제 환상처럼 여겨지고 있다.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모두를 위한 단일연금은 공동운명체인 우리의 통합과 신뢰 복원에 기여할 것이다.
글·안 드브레자 Anne Debregeas
프랑스 전력공사(EDF) 연구원, 노동조합 연맹 쉬드 에네르지(SUD-Energie) 대변인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프랑스 연대보건부 연구·조사·평가국(DREES), 2019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