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

분신 50주기를 맞아

2020-10-30     안치용 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0월 25일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한국 자본가를 대표하는 이 회장이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앞두고 숨진 풍경이 공교롭다. 애도와 추모가 교차하는 가운데 전해진 택배노동자의 잇단 과로사는, 두 죽음 중에서 지금보다는 50년 전의 죽음에 더 유념해야 할 절박감을 느끼게 한다. 

 

1970년 11월 13일, 한 청년이 죽었다.

그날 서울 평화시장이 자리한 수표교 인근엔 노동자 500여 명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고, 더불어 곳곳에 경찰관들이 배치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미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평화시장 의류공장의 사업주들은 “깡패 같은 놈들이 주동이 돼 나쁜 짓을 하니 점심시간에 나가지 말라”고 노동자의 바깥출입을 막았다. 평화시장 건물마다 경비원들이 출입구를 봉쇄했다. 사람은 막았지만 말은 막지 못했다. 

낮 1시 20분, 한 무리의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그곳 광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바로 경찰이 막아서는 바람에 플래카드는 망가져 버렸고, 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시위가 무위로 돌아갈 듯했다. 시위대가 주춤하는 사이로 한 청년이 근로기준법 책자를 가슴에 품고 나타났다. 준비한 일을 결행하며 그는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침은 곧 불꽃이 됐다. 휘발유를 뒤집어쓴 그의 몸이 근로기준법과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 속에서 또 다른 외침이 타올랐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

 

전신을 휘감은 불길이 3분가량 몸을 태웠고, 22년 짧은 생애를 평화시장에 남긴 채 쓰러진 그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은 한국 노동운동의 착화제가 됐다. 50년 전, 청계천에서 분신한 그는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매우 가난했다. 소년시절 가난을 견디지 못해 가출을 반복했다. 구걸, 삼발이 장사, 신문팔이 등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 동생을 배곯게 하지 않으려고 보호시설에 버려야 했다. 그렇게 엄혹한 시간을 보내며 그는 이런 질문을 품게됐다. 자신을 억압하는 부유한 자들의 세상, 강자가 지배하는 질서, 가난한 자를 가난으로 밀어내는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전태일은 그런 세상을 ‘부한 환경’이라 부르기로 했다.(1)

1964년 봄. 16세 전태일은 평화시장 의류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평화시장 의류공장의 체계는 말단부터 시다, 미싱보조, 미싱사, 재단보조, 재단사, 공장주로 올라가는 피라미드 형태를 취했다. 전태일은 시다에서 시작해 미싱보조를 거쳐 1966년에는 미싱사가 됐다.

처음 시다를 할 때 하루 14시간을 일하고 일당 50원을 받았다. 종일 일하고 차 한 잔 값을 받은 셈이니, 터무니없는 저임금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의 험한 꼴, 쓴맛을 다 본 전태일은 그나마 안정된 직장이라는 생각에 그래도 신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안정’에 안도한 것도 잠깐,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눈에 들어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은 농촌과 노동자의 수탈을 특징으로 한다. ‘농촌소외’라는 정책방향에 따라 도농격차가 확대돼 대대적인 이농이 이어졌다. 이촌향도한 많은 인구는 공장의 노동자가 되거나 노동자가 되기 위한 산업예비군이 돼 도시의 외곽 슬럼 등지에 집단 거주했다. 

박정희 정권은 수출주도 경제노선을 택했다. 미국의 원조나 외국의 차관에 기대, 기술수준은 낮고 노동이 많이 투여되는 경공업 제품을 만들어 수출했다. 기술경쟁력이 없으므로 유일한 경쟁력은 가격경쟁력이었다. 한국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수출목표를 정하고 수출보국(輸出報國)이란 명목으로 기업체를 다그치는 한편 금융과 세제 혜택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제공했다. 한국의 유일한 수출경쟁력인 상품의 가격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기업의 노동자 수탈과 탄압을 때로 방관하고 때로 협력하며, 때로 공권력을 동원해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

이런 수탈구조가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로는, 이농현상으로 인한 노동의 만성적 공급과잉과 남북분단이란 특수상황에 기인한 한국 노동운동의 침체가 거론된다. 생계비에 못 미치는 저임금이라 해도 일할 사람이 줄을 섰기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또 노동운동에 ‘빨갱이’ 낙인을 찍은 반공이데올로기가 워낙 강력하게 힘을 발휘했기에, 노동자는 불이익을 당하고도 자본가에 맞서 단합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무력한 개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권위주의 통치시스템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비대해진 국가의 폭력역량은 노동운동의 씨를 말려 버렸다. 

전태일이 일하던 50년 전 평화시장은 이런 시대상황이 압축된 노동현장이었다. 작업량이 비교적 많은 가을부터 봄까지 근무시간은 하루 평균 14~15시간이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해 내내 일한 뒤 낮 1시 점심시간이 돼서야 잠시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면 즉시 업무에 복귀해 밤 10시에서 11시에 퇴근했다. 중간에 화장실을 가는 것도 쉽지 않은 노동환경이었다. 일거리가 많은 시기엔 잠 안 오는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아가며 사흘 연속 야간작업을 하기도 했다. 평화시장이나 구로공단엔 잠 안 오는 약, ‘타이밍’을 비타민처럼 수북이 쌓아놓고 먹게 했다고 전한다. 명목상의 휴일이 있긴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작업장의 밀집도가 심각했다. 고용주들은 작업장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고자 ‘다락방’을 고안했다. 각종 작업설비, 비품 등이 가득한 이 다락의 위아래 층에서, 평당 약 4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다. 기지개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는 비좁은 환경이었다.

당연히 위생상태가 나빴다. 원단의 약품 냄새와 옷감에서 나오는 먼지가 노동자 건강을 위협함에도 작업장에는 환기장치가 없었다. 외부로 향하는 창문은 없거나, 있다 해도 여닫을 수 없는 구조였기에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형건물도 사정이 같았다. 창문 수가 적은 탓에 환기가 잘 안 된 것은 물론 실내 공간이 어두웠다. 노동자들은 바로 눈앞에 전등을 둔 채 작업했다. 장시간 직접 조명에 노출돼 많은 노동자가 눈병을 앓았다. 화장실은 남녀공용으로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근로기준법 발견과 바보회 창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런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전태일 일기 中)

 

전태일은 억압받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마음을 썼다. 자신과 그들 모두 ‘부한 환경’이 밀어낸 자들이었다는 동질감. 업주와 재단사의 유착관계로 여공 대부분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어서 빨리 재단사가 돼서 공임 타협을 할 때에는 약한 직공들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리라고 결심”(2) 한다. 임금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곧바로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업해 1967년 1월엔 원하던 재단사가 된다.

하지만 재단사가 됐다고 해도 노동자의 편에 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재단사가 다른 노동자에 비해 높은 직위라 하더라도 결국 고용주 밑에서 일하는 처지이기에 고용주의 횡포를 막는 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미싱사가 일하던 도중 각혈을 했다. 폐병 3기였다. 그는 그대로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산재’라는 개념조차 없던 때여서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전태일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고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작정했다. 과거 대구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마침내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렇게 좋은 법을 두고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고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하고(3) 살아왔다니. 전태일은 노동자가 단결해 고용주에게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고 재단사 노동운동 모임인 <바보회>를 결성했다. 

<바보회>는 평화시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렸다. 고용주들에게 들켜 설문지는 대부분 빼앗기거나 찢기고 말았다. 전태일은 그나마 거둬들인 설문지를 가지고 근로감독관실로 향했다. 하지만 근로감독관은 전태일이 전한 참혹한 노동현실에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태일은 이번엔 노동청을 찾아갔다. 하지만 노동청 역시 무늬뿐인 실태조사를 한 번 나왔을 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전태일은 평화시장 어느 공장에서도 일할 수 없게 됐다. <바보회> 회원들 역시 해고될 위험에 직면하자 노동운동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바보회>는 이후 사실상 해체된다. 평화시장에서 일자리를 잃은 전태일은 공사판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떠난 지 1년 후 평화시장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바보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뜻 맞는 동지들과 ‘투쟁’ 목적의 재단사 모임인 <삼동회>를 만들었다. 

<삼동회>는 <바보회>에서 시행착오를 겪은 노동실태 설문조사를 성공적으로 재실시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 진정서를 여러 신문사에 보내 1970년 10월 경향신문에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근로조건 영점 … 평화시장 피복공장 소녀 등 만여 명 혹사」라는 기사를 실었다. 평화시장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주목받게 되자, 고용주와 근로감독관은 전태일을 회유했고 일주일 내로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노동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전태일은 더 적극적인 투쟁방식으로 의사표시를 하기로 한다. 진정을 통한 권리획득 방식에서 벗어나서 데모하고 투쟁해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른 것이다.(4)

하지만 적극적 투쟁이 쉬울 리가 없었다. 10월 20일 노동청 앞 시위, 24일 국민은행 앞 시위가 모두 무산됐다. 노동 당국의 압박과 회유도 계속됐다. 이제 전태일은 그들이 맞서 싸우는 대상이 고용주뿐 아니라, 노동자를 억압하는 악과 긴밀히 유착한 경찰, 노동 당국, ‘부한 세상’으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밀어내는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리고 당시에 그 거악에 맞설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것 또한 전태일은 잘 알았다. 평생을 건 긴 투쟁의 길을 시작하거나, 혹은 다른 많은 이의 투쟁의 길을 밝힐 빛을 밝히거나, 두 가지 선택을 두고 22세의 아름다운 청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번민으로 고통스러운 밤을 지새웠다. 

 

1963년 6월 사이공의 소신공양 

전태일이 분신하기 7년 전 베트남 사이공에선 역사를 뒤흔든 다른 분신 사건이 있었다. 당시 외세와 결탁한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권은 지주들을 권력기반으로 했으며 식민지배의 유산으로 이들은 가톨릭을 믿었다. 가톨릭을 비호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특정 종교를 비호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대다수 국민의 종교인 불교를 탄압했다. 남베트남 정부의 불교 탄압정책에 항의해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의 캄보디아 대사관 앞에서 베트남의 존경받는 승려인 틱꽝득(釋廣德)이 소신공양한다. 이날의 소신공양 광경은 각국에 보도됐는데, 화염 속에서도 표정의 일그러짐이나 고통의 신음 없이 정좌 자세로 조용히 죽음에 이른 고승의 모습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틱꽝득의 소신공양이 이후 베트남 역사의 방향을 바꿨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1970년 11월에 분신한 전태일은 틱꽝득과 종교가 다른 기독교인이었지만, 전태일의 분신에도 소신공양이란 의의를 부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전태일과 틱꽝득은 역사를 바꿨다. 물론 아직 전태일이 꿈꾼 세상은 오지 않았다. 당장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선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운송설비 점검 도중 사고로 숨지는 등 노동현장의 비극은 다양한 형태로 바뀌며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남기고 영면한 전태일이 남긴 정신은 한국 노동운동의 영원한 자양분이자, 침로가 되고 있다. 시대에 자신을 소신공양한 20대 초반의 젊디젊은 청년 전태일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분신 직전에 남긴 별도 유서가 있지만, 일기의 이 내용은 미리 쓴 유서처럼 느껴진다. 그가 떠나고 50년이 지나는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자본은 노동자를 강압적으로 착취하는 대신 자발적인 순응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고도화했으며, 아날로그 통제가 디지털 통제로 바뀌면서 통제가 더 교묘하고 강력해진 반면 드러난 공공연한 통제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노동의 외주화와 유연화에 이어 긱 이코노미, 플랫폼 노동 등 다양한 노동 형태가 등장해 노동계급 내의 분화와 균열이 확대되고 있다. 반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노동현장은 긍휼과 자비를 절실하게 요구한다. 그것이 분신일 이유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더 많은 전태일 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의 50주기에 더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김유라
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 4학년. 지속가능바람 편집장.


(1) 조영래 『전태일평전』 전태일재단 (2009.04.15.) : 61
(2) 임송자. "전태일 분신과 1970년대 노동 · 학생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5.- (2010): 327
(3) 조영래 『전태일평전』 전태일재단 2009.04.15. : 152
(4) 임송자. "전태일 분신과 1970년대 노동 · 학생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5.- (2010): 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