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꼭대기에서 벌어진 난투극

중국-인도 국경 갈등 심화

2020-10-30     바이주 나라반 | 인도 아쇼카대학교 언론미디어영화학부 교수

9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상하이 협력기구 회의에서, 중국·인도 양국 외무부 장관은 히말라야 접경지대 긴장완화 의지를 천명하는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양국 지도부의 민족주의 경쟁이 가라앉을지는 미지수다.

 

2020년 6월 15일 밤,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의 인도-중국 접경지대 ‘그레이존(영유권이 불분명한 중간지대)’에서 양국 병사들이 중세시대 같은 양상으로 난투극을 벌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고도 4,200m 지대에서 서로 돌을 던지고 주먹을 휘두르며, 못을 박은 쇠몽둥이와 쇠파이프를 들고 육탄전을 벌였다. 이튿날 집계된 인도 측의 인명피해는 부상자 78명, 사망자 20명이었다. 차디찬 갈완 계곡에 빠진 후, 저체온증이나 익사로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부 시신은 물살에 떠내려가, 갈완 계곡 및 샤욕 강의 남쪽 교차지점에서 건져냈다. 중국 측에서는 공식성명을 내놓지 않았지만, 인도가 입수한 소식통에 의하면 중국군 역시 40명 이상의 병력 손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유혈사태 전에도, 양국은 논란이 분분한 접경지대에서 몇 주에 걸쳐 무력충돌을 빚은 바 있다. 3,488km에 이르는 접경지대는 양국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그레이존’으로, 1962년 중인 전쟁 이후 ‘실질 통제선’이라고 불렸지만 국경선이 확정된 적은 없다. 양국이 각자의 해석을 내세우는 만큼 주관적인 임의의 분계선이 엉켜있는 가운데 국경수비대 간의 빈번한 다툼이 빚어지고, 국경의 무단침범도 종종 일어난다. 이렇듯 애매한 국경선을 둘러싸고 다양한 위법사례가 있었지만,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45년 만의 일이다. 

 

1962년 중·인전쟁 이후 갈등 최고조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 양국은 접경지대에서 큰 갈등이 빚어지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으며, 분쟁이 일어나도 외교적·군사적 차원의 대화로 평화적인 해결을 시도해왔다. 1988년 양국은 국경문제를 뒤로 하고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 확대에 주력했으며, 1993년 9월 7일에는 실질 통제선에서의 평화 유지에 관한 양자협정까지 체결했다. “국경 문제를 현 상태 그대로 유보하기로 한 상호 간의 약속을 국제 조약으로서” 공식화한 것이다. 또한 “양국은 협상 이외의 방식으로 각자의 국경을 내세우거나 엄호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1) 2016년에는 유혈사태 예방을 위해 접경지대 병사들의 총기사용도 금지했다.

1993년 양자협정은 이후의 다양한 우호적인 제스처를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양국은 상호 시장개방은 물론 투자·교육·문화 부문에서의 협력을 증대했고, 신뢰구축조치(CBMs)도 시행했으며(2013년이 마지막이지만) 각종 의정서도 체결했다. 그러나 안정적이고 호의적인 관계 유지를 위한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국경분쟁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올해 6월 15일의 대치국면은 난폭하기도 했지만, 기습공격이었던 만큼 인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사실 2020년 5월 초 통상 인도군이 감시하던 인도의 관할구역에 중국 측이 잇따라 침범함으로써 빚어진 교전사태 이후 양국은 단계적인 긴장완화와 군사위기 해소를 위한 논의를 계속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불거진 이번 6.15 사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중국 측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함정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다수의 실개천 물길을 우회해둠으로써 폭우로 불어난 물이 인도군 진영으로 몰리게 유도했고, 그에 따라 인도군 병사들은 계곡 끝에서 강물에 빠졌을 공산이 크다.

인도가 이번 공격에 대해 놀란 이유는 또 있다. 중국이 그동안 한 번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중국이 “원래 우리 땅이었다”라고 주장하며(2) 갈완 계곡을 통째로 차지하려고 한 것은 처음이다. 중국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보다는 실질 통제선의 재해석을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국경을 침범하고 군사작전을 벌여 선의 경계를 흐리곤 했다. 최근에는 라다크 지역 판공 초 호수 남안지구에 끈질기게 주둔하는 전술을 펼쳤는데, 북안지구는 이미 오래 전 중국 측 레이더망 안으로 편입된 상태다. 

최근 양국 고위급 군사회담 때만 해도, 인도는 중국 측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회담 직후인 6월 13일 사관학교 열병식에서도 인도군 총사령관 마노즈 무쿤드 나라반 장군은 “중국과의 접경지대 상황이 우리 군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다”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히말라야 산맥의 유혈사태는 그로부터 이틀 후 발생했다. 

이번 사태는 인도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1962년 중인 전쟁 이후 최대 규모다. 인도인들에게 1962년 교전은 당시 네루 총리의 개인적인 실책이 가중된 치욕스런 패배였다. 중국인들은 이를 주변국에 본보기로 삼기 위한 ‘토벌전쟁’이라고 강조했다. 『인도의 대중국전쟁』의 저자 네빌 맥스웰(3)이나 알래스테어 램을 비롯한 서구권 논객들은 당시 인도가 ‘약진 정책’을 펼쳐 중국에 명분을 줬다고 본다. 즉 인도가 확정하려는 국경선을 따라 군대를 주둔함으로써, 중국에 싸울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런 해석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저서 『중국의 대인도전쟁』에서 버틸 린트너(4)는 네루가 약진 정책을 구체화하기 2년 전에 이미 중국이 전쟁을 준비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중국이 이 전쟁에서 노린 것은 영토 정복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제3세계 국가들의 수장으로 등극하던 네루를 끌어내려 아시아의 신흥 패권주자로 나서고자 함이었다. 반면 네루는 판세를 완전히 잘못 읽어, 인도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사실 전쟁 발발 3년 전부터 이미 중국으로부터 다수의 불만 징후가 포착됐지만, 네루는 도발의 가능성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 ‘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기대한 네루는 당시 중국 공산당 총리였던 저우언라이의 평화선언에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네루는 인도가 중국의 아커사이친 점령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할 경우 동부의 맥마흔 라인을 인정하겠다던 중국의 제안도 단호히 거부했다. 네루 입장에서 1962년 중국의 침략은 전적으로 배신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약 한 달 동안 이어진 전쟁 끝에, 인도 영토 내로 꽤 깊숙이 침투한 중국은 양국이 실질 통제선으로부터 각각 20km씩 물러서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네루는 이에 즉각 반발했다. “전혀 의미 없는 제안이다. ‘실질통제선’이 대체 뭐란 말인가? (1962년) 9월 초 중국이 벌인 공격에서 비롯된 경계선이 아닌가? 무력으로 우리 영토를 40~60km 침범해놓고 똑같이 뒤로 20km씩 물러서자는 건 세상이 다 아는 기만이다.”(5)

당시의 쓰라린 패배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물론 중국과의 세력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점은 인도인들도 잘 알고 있다. 비단 정치권력 뿐 아니라 경제자원 측면에서도 중국은 인도를 앞서고, 영토 확장에 대한 욕망에 있어서도 인도보다 한 수 위다. 그렇다고 자국의 영토를 좀먹는 중국의 ‘살라미 수법’ 앞에서 좌시할 수는 없다. 이에 2020년 8월부터는 인도도 보다 강경해졌다. 인도는 국경분쟁 이후 양국이 군사외교 갈등 완화를 위해 합의한 내용을 중국군이 위반했다고 규탄했다. 특히 중국이 서쪽으로 실질경계선을 밀어내고 600㎢에 달하는 영토를 찬탈하기 위해 “군사적 도발을 감행해 일방적으로 현 질서를 무너뜨리려 했다”고 비난하며 2020년 4월 이전 상태로 ‘원상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 정부는 군사갈등 완화를 위해 약조한 내용은 지켰다고 주장한다. 침입이 있었다면 이는 “중국의 영토 주권에 심각한 위해를 가한” 인도 측 행위라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인도 측에 “지체 없이 퇴각할 것”을 촉구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 타임스>에서는 “만일 양국이 더 큰 규모의 분쟁을 벌인다면, 중국은 인도에 적대적인 파키스탄 같은 국가들을 손쉽게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6)라고 경고했다.

국경분쟁이 불거진 이후 양국 군대는 자국의 실질 경계선을 따라 군 병력을 확대 배치했다. 미 민간 정보업체 ‘Strategic Forecasting’의 지난 7월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해당 지역에 5천 명 이상의 병력을 집결하고 장갑차와 중장비 다수를 배치했다. 이와 더불어 군주둔 기지 26곳, 전진 초소 기지 22곳, 헬기착륙장 2곳도 함께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도 라다크 동부에 보병 사단 3개를 배치했다. 

 

인도의 위태로운 군비 강화

인도와 중국의 국경분쟁 구간은 세계 최장으로, 그 역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다. 즉, 양국이 근대적인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기 전, 즉 자주독립국가의 위상을 가지기 훨씬 이전에 국경이 설정됐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다시금 국경갈등이 빚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기자 겸 작가 프렘 샨카르 자와 중국 저우언라이의 전 통역관 출신 국제 교류 전문가 빅터 가오는, “엄밀히 말해 중국이 싸우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도의 인터넷 매체 Thewire.in 에 기고한 글에서, 두 사람은 판공 초 호수로 내려가는 8개 산맥 지류 중 하나인 Finger4 지점의 상단을 점거한 중국군의 의도에 대해, “중국 측 장비가 호수에 설치될 때 인도가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나의 Finger 포인트를 더 차지하면 제2의 협로를 확보함으로써 라다크 지역에서 (최전방 항공 기지인) 다울랏 베그 올디 비행장으로 연결되는 인도군의 길목을 중국군 사정권 내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7) 

그러나 중국이 전쟁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두 사람의 분석과는 달리, 중국의 모든 움직임은 전쟁을 준비하는 양상이다. 물론 중국은 인도가 협정내용을 준수하도록 설득하고 있으며, “모디 총리가 협상 테이블에 나와 2014년 이후의 갑작스런 외교노선 변경으로 중국 내에 싹튼 의혹을 해소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모디 총리가 중국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중국이 날을 세울 만한 일은 꽤 많았다. 우선 2014년 봄 집권 직후 모디 총리는 미 정부와 ‘태평양·인도양 공동전략 비전’을 체결해 남중국해 내에서의 자유로운 항해권을 보장했다. 남중국해는 중국이 국경선을 지키는 데 민감한 지역 중 하나다. 게다가 미국의 주요 방어진으로 등극한 인도는 다수의 전함을 파견함으로써 남중국해 내에서 미국과 일본 작전부대에도 동참했을 뿐 아니라 벵갈 만에서도 ‘말라바’ 해상 훈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말라바 훈련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위치한 말라카 해협으로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 훈련의 주된 목적으로, 중국의 전체 수출량의 40%, 석유수입량의 90%가 이곳 해협을 통과한다. 

인도는 2019년 8월 헌법 제30조를 폐지함으로써 잠무카슈미르 지역 자치권을 박탈했으며,(8) (파키스탄이 관할하는) 길기트 지역과 (아커사이친을 포함한) 라다크 지역 전체를 인도 영토로 포함하는 지도를 발간했다. 이 모두가 중국으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2019년 8월 6일 의회 연단에 선 내무부 장관을 대표로, 인도가 현재 중국 당국 관할 하에 있는 아커사이친 지역과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및 길기트 지역을 다시 복속할 것이라는 인도 각료들의 공공연한 선언도 중국 측 심기를 건들기에 충분했다. 이에 더해 인도는 미국 및 일본과 물류지원 공급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으며, 중국과 반목관계에 있는 호주와도 양자협력을 강화했다.  

빅터 가오와 프렘 샨카르 자는 “모디 정권 출범 이후, 인도가 평화 공존에 관한 1954년 판츠실 조약의 원칙을 더 이상 고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1993년 국경 평화협정에서도 다시 한 번 채택된 이 원칙을 등졌다는 사실을 중국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정리했다.(9) 그러나, 두 사람은 인도가 강대국 대열에 끼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 역시 판츠실 조약의 원칙들을 수없이 위반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가령 인도가 핵공급그룹(NSG)에 참여하고자 했을 때 중국은 인도가 핵확산방지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각함으로써 인도의 이 같은 노력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군사력을 확대하고 국경지대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한 인도의 노력도 중국에는 빌미가 됐다. 물론, 중국의 국경 병력배치가 인도보다 약한 것도 아니다.

 

중국으로 기울어진 힘의 균형

공세적인 ‘전랑(늑대 전사)’ 외교를 펴는 시진핑 주석의 경우, 일단은 남중국해에 전략적 우선을 부여하고 있다. 타이완과 베트남 및 기타 인근 국가에 대한 입장을 강화한 것이다. 이에 비해 인도와의 국경분쟁은 일견 “전략적으로 부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자국의 주권과 관계되는 모든 문제제기를 원천봉쇄하려 하고 있다. 무력공격을 감행하되 확전의 위험은 피하면서 현 체제를 뒤흔들고, 간접적인 피해를 가함으로써 인도를 계속 불안하게 하려는 것이다.

양국이 대치국면보다는 상호협력을 택했던 1988년 당시 두 나라의 GDP 규모는 인도 2,960억 달러, 중국 3,120억 달러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국방 예산도 200억 달러로 동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후 중국의 GDP는 약 4조 6,000억 달러를 기록한 반면, 인도의 GDP는 약 1조 2,000억 달러에 그쳤다. 지금은 인도보다 5배 경제규모가 커진 중국은 국방예산으로 약  2,610억 달러(GDP의 1.9%)를 배정하는 반면, 인도는 약 710억 달러(GDP 2.4%)에 불과하다.(10) 요컨대 협정체결 당시의 양국 간 균형관계는 더 이상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협정의 내용이 ‘불평등’해진 이유다. 

10여 년 전부터 인도는 군사시설과 더불어 북부 및 동북부 지역 도로망을 확충하고자 노력해왔다. 갈완 강 주변 실질통제선과 다울랏 베그 올디 비행장 노선을 잇기 위한 연결로도 신설됐고, 판공 초 호수 부근 실질통제선에 주둔군을 확대할 수 있는 도로연결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인도는 2009년 산악지대를 담당할 2개 사단을 편성했으며, 2013년에는 9만 명의 특공대원으로 구성된 산악부대를 신설하겠다고 공표했다. 아울러 정찰빈도도 늘렸으며, 전방 항공기지의 질적 개선을 도모했다. 이제 다울랏 베그 올디 비행장은 C-130과 안토노프 등 러시아 군 수송기까지 수용 가능하다. 그럼에도, 인도군은 여전히 기동력과 전력에서 중국군에 한참 뒤진다. 자본력도 부족할뿐더러 국방부문의 성장을 오랜 기간 등한시 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3년 간 중국의 국경침입은 더욱 빈번해지고 격화되고 있다. 중국의 월등한 군사력을 감안하면 인도 측으로서는 사실 우려가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게다가 중국 내부 경기도 정체되고 코로나 위기관리 문제로 인해 국제적으로 집중포화를 맞으며 내외부적으로 수세에 몰린 중국은 보다 강경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중미관계가 날로 악화되는 가운데, 인도가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접경지대 공격을 감행한 중국은 그간의 유보적 태도에서 벗어나 인도가 역내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것을 차단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중국은 얼마든지 1962년처럼 인도에 굴욕을 안겨줄 수 있다. 중국이 막대한 자금력으로 네팔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주변 국가를 포섭해 인도를 견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인도도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듯하다. 최근 서부 국경분쟁 지역으로 군대를 이동한 것이나 전술상의 이점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에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전략이나 작전 수행 능력 차원에서, 그리고 재정적인 차원에서 인도가 중국에 한참 밀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인도의 이 무모한 행보는 확전이 이뤄질 경우 자국 병력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제 아무리 미국이나 일본, 호주 등의 우방들이 앞에서는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보이고 물류 지원까지 약속해도, 실제로 분쟁의 규모가 커질 경우 이들 국가가 지원사격을 나설 가능성은 낮다. 

인도가 중국에 비해 훨씬 발전한 것은 민주적 제도의 기반이다. 그러나 지금은 힌두 내셔널리즘을 표방하는 총리와, 점점 권위적이 돼가는 현 정부 때문에 인도의 이런 장점도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민주주의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 

 

추가 무력충돌이나 협상은 불확실 

모디 총리는 네루의 전철을 밟아 1962년의 실책을 반복할까? 모디 총리는 자신의 지도력을 확신하고 있으며, 2014년 취임 후 5번 중국을 예방했고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도 18회 가졌다. 제 아무리 민감한 사안이라 할지라도 시 주석과의 회동을 통해 해결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렇듯 표면적인 우호관계 뒤로 모디 총리는 끊임없이 모순된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시 주석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는 인도 측 입장이 크게 반영된 지도의 발간과 떠들썩한 의사 표명으로 국경 문제에 대한 의중을 과감히 드러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앙숙인 미국에 대한 우호도 과시하고 인도인민당과 함께 국민들 사이에 반중감정을 일으켰다. 중국에 대한 보복조치로 틱톡을 포함한 중국 애플리케이션 200개를 금지했으며, 철도․인프라․통신 등 주요 부문에 대한 중국 투자에도 제동을 걸었다. 물론 이런 조치가,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중국경제보다 인도경제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가볍게 혀를 놀리던 모디 총리가 6.15 사태에 대한 6월 19일 다자회의 자리에서는 갑작스레 화해 모드로 돌아서며 “인도 측도 중국 측도 심각한 국경침해 행위는 없었다”라고 확언했다. 총리의 이런 발언에 인도 내부에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군 당국과 외교계도 상당히 당혹해했다. 반면 중국 측 지도부는 즉각 이를 근거로 “6.15 사태에서 중국의 그 어떤 침략행위도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인도와 중국이 앞으로도 빈번한 무력충돌을 빚을지, 아니면 여기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전면전을 벌일지, 아니면 진지하게 대화와 협상을 벌일지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글·바이주 나라반 Vaiju Naravane
인도 아쇼카 대학교 언론 미디어 영화학부 교수, 사회 및 행동 변화 센터(Centre for Social and Behaviour Change) 소장.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


(1) Shivshankar Menon, 『Choices. Inside the Making of India’s Foreign Policy』, Brookings Institution Press - Allen Lane, Washington, DC - London, 2016년.
(2) Liu Xuanzun and Liu Xin, ‘China urges India to restrain’, <Global Times>, 베이징, 2020년 6월 16일. 
(3) Neville Maxwell, 『India’s China War』, Natraj Publishers, New Delhi, 2011년(초판 1970년).
(4) Bertil Lintner, 『China’s Indian War』 Oxford University Press India, New Delhi, 2017년.
(5) 1962년 10월 27일 네루가 주언라이에게 보낸 서신 별첨, ‘Notes, Memoranda and Letters Exchanged and Agreements Signed Between the Governments of India and China’, 인도 외무부 백서 제VIII권: 1962년 10월~1963년 1월, New Delhi.
(6),(7),(9) Victor Gao, Prem Shankar Jha, ‘LAC tensions to fester till Modi, Xi revive prospects for India-China strategic cooperation’, 《The Wire》, New Delhi, 2020년 7월 24일.
(8) Vaiju Naravane, ‘Au Cachemire, l’hindouisme sabre au clair 카슈미르에서 드러난 힌두이즘의 민낯’,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프랑스어판 2019년 10월호, 한국어판 2020년 1월호.
(10) 2018년 불변 미달러화 기준 국방예산 & 2019년 GDP 백분율 기준. 출처: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Sipri). 

 

 

인도와 중국의 해묵은 갈등

 

인도와 중국의 국경분쟁은 오래된 난제다. 양국의 접경지역은 지도에서처럼 통상 3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먼저 서부의 아커사이친(면적 3만 3,000㎢) 구역은 인도령 라다크 지역과 길게 맞닿아 있는 동시에 중국의 신장 자치구 및 티베트 지역으로 이어진다. 네팔 서쪽에 위치한 중앙 분쟁구역은 인도의 히마찰프라데시 주 및 우타르프라데시 주와 중국의 티베트를 나누는 접경지대로, 양국의 공동경비구역 하에 들어가는 이곳 2,000㎢ 지대는 국경분쟁구역 중 가장 면적이 작다. 

마지막으로 동편 분쟁구역은 티베트와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을 나누는 접경지대로, 현재 인도의 관할 하에 있다. (아루나찰프라데시는 과거 영국 식민통치 기간 동안 북동 변경(邊境) 특별 행정지역(North-East Frontier Agency)이라 불렸다.) 동편 분쟁구역은 면적이 약 9만 ㎢에 달하며, 미얀마로까지 접경지대가 이어진다. 이 지역 국경은 이곳 구획을 확정한 영국 측량학자 맥마흔의 이름을 따서 ‘맥마흔 라인’이라 불리며, 1914년 심라 회의(Simla Conference) 당시 영국과 티베트가 함께 확정했다.(1) 

2016년 발간한 저서(2)에서 시브샨카르 메논 전 인도 외무부 장관(2006~2009) 겸 국가안보보좌관(2010~2014)은 “인도가 티베트와의 사이에 맺고 있는 국경선은 관례적으로 늘 통용돼던 것이었으며, 게다가 해당 지역 대부분은 다수의 협정을 통해 법적으로도 인정돼왔다”라고 주장했다. 이들 협정에서는 특히 동부 국경분쟁 지역인 맥마흔 라인과 티베트-시킴 주 사이의 국경을 공식인정했다. 

티베트-시킴 주 구간은 티스타 강 및 아모 추 강 측면 분지를 따라 난 이 지역으로,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자치권이 설정된 1904년 영국-티베트 협약을 재확인한 북경 조약에 따라 1906년 공식인정된 구간이다. 뿐만 아니라 티베트 정부 및 잠무카슈미르, 히마찰프라데시 당국 사이의 협정으로 17세기부터 확정된 다른 여러 국경 역시 협정을 통해 인정된 구간이다. 

당시 인도를 통치하던 영국 식민 당국은 러시아의 세력강화를 우려했고, ‘그레이트 게임’(당시 러시아와 영국이 이 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인 데서 비롯된 표현)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이를 저지해야 했다. 반면, 그 당시 두 열강의 시각에서 중국은 패권 다툼에 대한 열의도, 힘도 없는 나라였다. 이에 영국 당국은 인도의 북동 및 북서 지역 국경에만 열을 올린 채 티베트 지방은 중국 쪽에 넘겨버렸다. 이들 두 지역만 완충 지대로 삼으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2차 대전 후 티베트를 복속한 중국은 사상 최초로 인도와 국경을 마주하는 상황이 된다. 1914년 심라 회의(Simla Conference) 당시 중국 대표단은 협정문에 가조인만 해둔 상태였고, 서명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근거로 중국은 동 회의의 협정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중국은 영국과 티베트 사이에 체결된 모든 협정에 대해 엄수할 필요가 없는 ‘불평등 조약’이라 치부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도에서는 과거에 체결된 조약이나 협정, 지도 등을 근거로 아커사이친 지역이 라다크 지방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편 국경구간 역시 과거 티베트와의 문화종교 교류 및 교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지금의 맥마흔 라인이 영국령 인도 제국의 유산임을 주지시킨다. 

중국은 이런 주장을 일절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경우, 아커사이친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 대부분에 대해서도 영유권을 주장한다. 따라서 중국의 모든 공식 지도에서 이 지역 국경선은 산봉우리를 따라 그려지지 않고 산 아래 하천지류를 따라 표시된다. 이곳 분쟁구역에서 특히 걸림돌이 되는 지역은 타왕이다. 타왕은 현 달라이 라마의 출생지로, 티베트 사람들에게 있어 이곳 수도원은 라사 다음으로 신성한 성지다. 따라서 타왕은 (중국 측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차기 달라이 라마의 임명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전망이다. 

중국은 1959년 망명한 달라이 라마에게 인도가 정치적 망명지를 제공한 사실에 대해 용서하지 않았다. 일각에선 이를 1962년 중국의 공격이 있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  

 

 

글·바이주 나라반 Vaiju Naravane 
번역·배영란


(1) 중화민국과 (이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맥마흔 라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2) Shivshankar Menon, 『Choices. Inside the Making of India’s Foreign Policy』, Brookings Institution Press - Allen Lane, Washington, DC - London, 2016.